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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 산사 나들이,
천안 태조산 각원사~성불사 '

▲  각원사 청동좌불상


 

겨울이 무르익어가던 12월 중엽, 친한 후배들과 충남 제일의 도시인 천안(天安)을 찾았다.
천안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청동대좌불로 유명한 각원사로 태조산(421m)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태조산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태조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전 9시 반에 방학역(1호선)을 출발, 중간중간에 후배들이 합류하여 12시가 지나서 천안
역에 도착했다. 그 장대한 거리를 후배들과 수다를 떨며 가니 체감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
다.
천안역에 이르러 태조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천안시내버스 24번(각원사↔동우아파트)을 타
고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 각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각원사(覺願寺) 입문 (203계단, 청동좌불상)

▲  각원사 밑에 자리한 연화지(蓮花池)

시내버스가 바퀴를 돌리는 각원사 종점 주변은 각원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각원사는 법등(法燈)를 켠지 겨우 4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천하
제일의 청동불상으로 1980년대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신도와 관광객, 답사객들이 구름처럼 몰
려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절 밑에 자연히 식당이 들어서고 조촐하게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주말과 휴일이면 관광버스가 족히 100대나 줄을 이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그날은 평일
이라 찾는 이도 별로 없어 식당들도 절간처럼 한산하다. 그런 식당촌을 지나면 절 밑에 형성
된 연화지란 호수가 나온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워놓은 눈과 얼음으로 호수 또한 고요하기
그지 없는데, 그런 호수를 반바퀴 돌면 경내로 인도하는 203계단이 중생의 기를 죽인다.


▲  겨울이 씌워놓은 굴레를 뒤집어쓰며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는 연화지

▲  시작부터 중생의 기를 단죄하는 203계단 <무량공덕(無量功德) 계단>

연화지에서 각원사로 가는 길은 2가지가 있는데, 203계단을 오르면 바로 청동대불(청동대좌불
)로 이어지며 잘 닦여진 2차선 길을 따라가면 각원사 경내로 통한다. 어느 길로 가든 청동대
불과 경내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가면 되지만 기왕 왔다면 203계단으로 올라가 청동대불과 경
내를 둘러보고 2차선 길로 내려오는 것을 권한다. 마치 하늘에 닿은 듯, 장대하게 펼쳐진 203
계단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3계단은 '무량공덕 계단'이라 불리며, 1977년 11월에 조성되었다. 절에서 많이 애용하는 숫
자인 108보다 95가 더 많으니. 이는 108번뇌 소멸 기원 계단, 아미타불의 48가지 소망을 기원
하는 계단, 관세음보살의 32가지 화신(化身)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32응신(應身) 계단, 속세를
살아가는데 맺어지는 12인연 계단, 불(佛)/법(法)/승(僧) 3보(三寶)에 귀의하는 3도(三道) 계
단을 모두 합쳐 203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계단을 오름으로써 이들을 모두 누리는 셈이 된
다.


▲  203계단을 오르면 청동대불로 인도하는 돌길이 나온다.

'저걸 언제 다 오르나?' 계단의 미친 압박에 주눅부터 진하게 든다. 허나 계단은 누구나 오르
기 쉽게 규칙적으로 놓여져 있어 그리 힘든 건 없다. 속세살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
르다보면 금세 계단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희열에 잠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
다.
계단 정상에 이르면 돌이 깔린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지나면 광장처럼 넓은 길이 나오면서 청
동대불이 서서히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  남북통일기원 대불봉안공덕비(南北統一祈願 大佛奉安功德碑)
청동대불이 완성되자 그 기념으로 불상 서북쪽에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공덕비를 세웠다.

▲  이보다 큰 좌불상은 없다 ~ 각원사 청동대불<靑銅大佛, 청동대좌불>

경내 북쪽에 위엄 돋게 자리한 청동대좌불(청동대불)은 각원사의 상징이자 든든한 밥줄로 천
안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각원사가 크게 유명세를 탄 것도 바로 이 청동대불 때문으로 1975년
4월 김영조(金永祚)를 비롯한 많은 중생들의 시주와 남북통일의 염원을 받아 조성하기 시작하
여 2년에 인고 끝에 1977년 5월 9일에 완성을 보았다.

불상 조각은 홍익대 교수 최기원(崔起源)씨가 담당했는데, 신라 불상의 정수로 추앙받는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모델로 삼았으며, 높이 15m, 몸무게 60톤, 귀 길이 175cm, 손톱
길이 30cm, 그가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의 원 둘레만 30m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좌불상
으로 손꼽힌다. 불상 안에는 부처의 사리와 불교 서적, 불상 조성에 돈을 낸 100만 명의 이름
이 들어 있으며, 불상 재질이 매우 우수하여 수명이 족히 1만 년은 갈 것이라고 한다.
비록 4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불상이지만 고색의 때가 조금은 피어나 겉 연령은 200년 이상은
들어보이며, 앞으로 70~80년 정도가 지나면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여 국가 중요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집을 좋아하는 편이
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제외하고는 현대 사찰에 대한 관심은 다소
야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고색의 기운이 채 피지도 못한 각원사를 찾은 것은 바로 이 청동대
불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위엄

불상의 정체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래서 서방정토가 있
다는 서쪽을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이 얼마나 큰 지 불상 주변을 돌
아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점처럼 보인다.


▲  밑에서 바라본 청동대불의 아찔한 위엄
내 키가 크다 한들 그에게는 고작 귀 크기에 불과하고 내가 아무리 손톱을
게을리 관리한다 한들, 그의 손톱 길이의 1/60도 안된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그의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

◀  청동대불의 늠름한 뒷모습

    ◀  청동대불을 지키는 설법전(說法殿)
청동대좌불 북쪽에 자리한 설법전은 1978년에
지어진 것으로 청동대불을 관리하며 대법회
등의 행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건물 내부에
는 공양 물품을 파는 가게와 의자를 갖춘 쉼
터가 있다.


 

♠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천안12경의 하나,
각원사(覺願寺) 둘러보기

▲  청동대불에서 바라본 각원사의 설경

천안의 진산인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둥지를 튼 각원사는 1975년 4월에 경해법인(鏡海法印)이
창건했다. 법인은 1931년 9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1946년 10월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25가 터지자 해인사에 머물며 절을 지켰고, 1950년 10월 경주로 탁
발을 나갔다가 석굴암에 잠시 들려 본존불에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큰 도량을 짓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후 세상이 조금 진정되자 불교와 문학 공부에 박차를 가해 마산 해인대학 문학과와 종교학
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사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거쳐 1967년 9월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에 왜열도로 넘어가 대동문화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 들어갔으며, 1972년 11월 낡은 다다미방을 구해 '해동선원'을 개원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오사까에서 사업을 하는 재일교포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김영조<金
永祚, 법명은 각연(覺然)>와 정정자<鄭貞子, 법명 자연심(自然心)> 부부로 김영조씨가 당뇨병
으로 고생을 하자 법인을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
법인의 지도 아래 100일 관음기도를 올리니 2~3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건
강을 거의 회복했다. 이에 김영조는 고마움의 뜻으로 동경(東京)에 절을 하나 마련하여 그에
게 주었고, 절 이름은 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명월사(明月寺)라 하였다. 그런데 법인이 그
절을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에 재산 등록을 해버리자 김영조는 크게 아쉬워하며
'귀국할 때 명월사를 팔고 국내에 절을 지으십시요' 충고를 했다. 이에 법인은 '명월사가 개
인 재산이 아닌 재일동포의 안식처로 남았으면 합니다'
답을 하니 김영조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기가 돈을 댈테니 고국에 큰 불상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바로 귀국하여 마땅
한 자리를 물색하다가 태조산 자락이 명당이라 그곳에 각원사를 세웠고, 곧바로 청동불상 조
성을 추진하여 1977년 5월 천하 최대의 좌불상인 청동대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청동대불로 각원사의 존재가 급격히 뜨자 예전 석굴암 본존불에게 고백했던 남북통일을 기원
하는 큰 도량의 꿈을 이루고자 현 주지승인 서대원과 함께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거대한 절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와 더불어 20세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큰 사찰이자 현대 불교의 성
지(聖地)로 격하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은 건평 200평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꼽히며, 2002년에는
각원사 불교대학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절을 크게 일군 법인은 각원사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에도 눈을 돌려 왜열도 야마구치현의 광명사(光明寺)와 미대륙 필라델피아에 관음사(觀音
寺)를 세웠으며, 각원사를 주지 서대원과 다른 승려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경 명월사에 들어
가 해외 포교에 주력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칠성전, 산신전, 천불전, 관음전, 경해원, 성종루, 개
산기념관, 영산전 등 10여 동의 굵직한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짧다보니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어나지 못했고 소장 문화유산도 없는 실정이다. 허나 산속에 제대로 묻혀 있어 산사(
山寺)의 고즈넉한 기운은 넉넉히 배여있으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천안12경의 제6경으로 손
꼽힌다. 또한 천안 시내와 가깝고 접근성도 양호하여 쉽게 안길 수 있는 점도 이곳의 큰 장점
이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도량이라 그럴까? 이곳에서 들리는 염불 소리가 통일을 애타게 부르짖은
이 땅의 소리 같다.

          ◀  각원사 칠성전(七星殿)
청동대불에서 경내로 내려가면 가장 먼저 칠성
전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1979년에 지어졌는데, 내부에는
칠성(七星)이 그려진 칠성탱(七星幀)과 나한상
(羅漢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흔한 칠성각(
七星閣) 대신 그보다 1단계 높은 칠성전을 칭
하고 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  색채가 고운 칠성탱과 그 앞에 줄지어 앉은 다양한 색채의 나한상들

▲  각원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칠성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대한 규모의 대웅보전이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각원사의
법당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건평(建坪) 360평에 달하는 팔작지붕 집으로 이 땅의 목조 건
물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건물을 짓고자 10여 년 동안 목재 100여 만 재를 구입하여 1992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34개의 주춧돌을 깐 다음 4년 동안 갈고 닦아 1996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내부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미리 조성되어 대웅보전 완공을 기
다리고 있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네모난 기단(基壇)은 높이가 거의 3m이며, 기단부터 건물, 닫집, 불상까
지 모두 청동대불 만큼이나 몸집이 대단해 대불에서 놀란 마음을 다시금 놀래케 한다.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이 고운 미소를 선보이며 중생의 하례를 받는다.
관세음보살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들은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 대성자모(大聖慈母) 관세음보살이라 불린다.

         ◀  각원사 천불전(千佛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천불전은 원래 산신의
공간인 산신전으로 1979년 9월에 지어졌다.
2000년 10월 새로운 산신전이 옆에 완성되자
천불전으로 간판을 바꾸고 천불을 봉안했다.


▲  천불전 내부
커다란 석가불을 중심으로 조그만 석가불 1,000상이 그를 둘러싸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수놓는다.

▲  각원사 산신전(山神殿)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자 함일까? 지붕 밑에 날카롭게 고드름이 달려있다.


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산신전은 2000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재 천불전이 산신전이
었다. 산신전은 우리의 토속신인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보통 각(閣)을 칭하기 마련이나 이
곳은 앞서 칠성전처럼 특별히 전(殿)으로 격을 높였다. 그만큼 산신과 칠성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는 뜻일 거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붉은 옷을 입은 산신과 동자(童子),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등장한다.

▲  반야원(般若院) 서쪽에서 바라본
경내와 태조산


▲  한 지붕 두 가족, 영산전(靈山殿, 1층)과 개산기념관(開山記念館, 2층)

반야원 옆에는 영산전과 개산기념관이 한 지붕을 이루고 있다. 돌로 이루어진 1층은 영산전으
로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나한이 봉안되어 있는데, 16나한도 아닌, 500나한도 아닌, 무
려 1,250나한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2층은 절을 개산(開山, 창건)
한 법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그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원사에서 나름 중요한 곳이지만
시간을 핑계로 그냥 통과하였다.


▲  이 땅에서 가장 큰 범종의 보금자리, 성종루(聖鐘樓)

2층 누각으로 장엄하게 이루어진 성종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담긴 공간으로 일종의 범종각이다. 그 흔한 범종각을 칭하지 않고 성종루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이곳 범종의 이름이 성종(聖鐘)이기 때문으로 1984년 5월에 조성된 20톤
짜리 종이다.
성종루는 1990년 4월에 지어진 것으로 329평 규모이며 이 땅의 범종각 계열 중 제일 크다. 그
러니까 각원사는 노천 청동대불과 목조 1층 법당, 범종각 등 무려 3가지에서 규모 부분 1등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1-3 (각원사길 245 ☎ 041-561-3545)
* 각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연화지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2차선 길

각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1시간이 뚝딱 흘렀다. 나름 열심히 살피긴 했지만 현대 사
찰이다보니 청동대불 외에는 그리 크게 관심이 가질 않았고 개산기념관 등은 그냥 빼먹고 말
았다.
그렇게 각원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태조산에 안긴 또다른 사찰, 성불사로 서둘러 길을 향했
다.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해가 많이 짧아졌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 16시)


 

♠  태조산에 안긴 오래된 절집, 성불사(成佛寺)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


▲  성불사 일주문(一柱門)

태조산에는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원사와 성불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그들은 비록 같은
태조산에 안겨있지만 서로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각원사는 역사는 매우 짧지
만 현대 불교의 성지이자 청동대좌불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불국사 이래 최대 사찰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규모도 크다. 반면 성불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지만 규모도 작고 한참 후배인 각원사의 위엄에 눌려 거의 존재감이 없어 보일 정도
이다. 하여 속인(俗人)들은 각원사를 많이 찾아오지 성불사는 별로 모른다.

각원사와 성불사는 직선거리로 불과 600m에 불과해 금방이면 도달할 듯 싶지만 안서e편한세상
1차, 2차아파트로 크게 돌아가야 된다. (산길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겠음) 그 거리는 약
2.5km, 도보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면 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 정거
장 거리인 부경파크빌,안서e편한세상 정류장에서 내려서 800m 정도 올라가면 되지만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속 편하게 걸어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성불사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30분 정도면 갈 줄 알았더만 거의 40분 이상이 걸린다.
뉘엿뉘엿 무심히 사라지는 햇님에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일주문에 이르니 땅꺼미의 농도가 90%
이상으로 진해져 더욱 긴장감을 타게 만든다. 야경 사진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불사는 경내와 멀리감치 떨어진 곳까지 일주문을 내려보내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겨울 제국
의 의해 지붕이 하얗게 변한 일주문 양쪽에는 코끼리상과 사자상이 자리하여 혹시 모를 속세의
불온한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 경내가 나올 듯 싶었는데, 아직도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 거리는 얼마 안
되도 거의 느긋한 길로 이루어진 각원사(203계단 제외)와 달리 죄다 오르막길이고, 절이 가까
워질 수록 경사가 더욱 흥분을 한다. 게다가 눈까지 두툼히 깔려있으니 걸음도 은근히 더딜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오르막 한굽이를 오르니 야외 공연장의 돌로 다진 객석 같은 석축이 장대하
게 펼쳐지고 그 위로 성불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야외 공연장 객석 같은 석축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성불사

▲  성불사 느티나무 (천안시 보호수)
경내를 코앞에 둔 경사지에 나이 800년을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겨울 제국에게 모두 털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그의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려 봄의 해방군을 애타게 염원하는 것 같다.

▲  눈 지붕을 이룬 성불사 칠성각 (오른쪽)

▲  태조산의 옥계수를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성불사 샘터

느티나무에서 1굽이를 더 오르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을 모두 갖춘 4~5층 건물
앞에 이른다. 이제 비로소 경내에 이른 것이다. 각박한 경사를 이용하여 건물을 짓다보니 다층
건물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옆을 오르면 법당인 대웅전으로 이어진다.


▲  성불사 요사/선방 옆에서 바라본 천하 (천안시내)

각원사와 더불어 태조산 북서쪽 자락에 안긴 성불사는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또는
목종(穆宗) 시절에 혜선국사(惠禪國師)나 혜조대사(惠照大師, 조선 태조 때라는 설도 있음)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다시 중건했으며,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이 창건될 당시(또는 고려 후기) 하늘에서 백학(白鶴) 1쌍이 날아와 대웅전 뒷쪽 바위에 앉
아 부리로 열심히 불상을 새겼다. 그러기를 49일째, 불상이 완연하게 모습을 갖추며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나뭇꾼의 인기척에 놀라 불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
서 이를 부처의 계시로 여기고 절을 세웠는데, 불상을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
)로 했다가 뒤에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칠성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
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내음을 느끼게 한다. 또
한 성불사 자체는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30m 고지 가파른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제법 좋으며, 여기서 남쪽 능선을 통해 태조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  성불사 산신각(왼쪽)과 대웅전(大雄殿, 오른쪽)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동석가3존불
이 봉안되어 있다. 좌우 협시불인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은 어여쁜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정작 3존불의 주인인 석가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자리에 없다.
하여 도난을 당했나 싶었으나 석가불의 빈 자리 뒷쪽에 창이 있는 것이다. 대웅전 뒷쪽에는 지
방문화재인 마애석가3존불이 있는데, 그 마애불이 바로 비어있는 자리의 주인, 즉 3존불의 중
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별도의 불상을 두지 않고 불단을 두는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


▲  가운데 자리가 빈 대웅전 석가3존불 (왼쪽 지장보살, 오른쪽 관음보살)
비어있는 본존불 자리는 창 너머로 보이는 마애3존불의 것이다.

▲  대웅전 우측 벽에 걸린 빛바랜 영산회상도와 현왕탱(現王幀)
석가3존불 뒷쪽에 창을 내는 바람에 후불탱인 영산회상도가 우측 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옆에는 붉은 색채가 중심을 이룬 현왕탱이 자리해 있는데, 이들
그림은 빛이 좀 바랜 것으로 보아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인다.

▲  성불사 마애석가삼존16나한상 및 불입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대웅전 뒷쪽에는 고된 세월을 견딘 커다란 바위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의 꺼무잡잡한 피부
에는 마애석가3존불과 16나한 등이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장대한 세월을 겪는 동안 무거운 상
처를 입으면서 간신히 형체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상황에 어둠까지 깔리니 숨은 그
림을 찾듯 더욱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된다. (겨우 몇몇 상만 시야에 들어왔음)

바위에 새겨진 불입상(佛立像)은 돋음새김으로 새겼으나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해 얼굴과 신
체의 전면이 크게 절단이 났으며, 머리 꼭대기인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과 손의 형태, 옷무
늬 등은 고려 때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밑도리가 넓은 옷 밑으로 발가락이 선명한 오른쪽
발이 나와 있으나 왼발은 사라지고 없다.
바위 우측면 하단 중심에는 연화대좌가 있고, 좌우에 공양상(供養像) 또는 금강역사(金剛力士)
로 보이는 2구가 있다. 연화대좌 위에는 작은 연화대좌가 놓여져 있고, 거기에 석가불이 앉아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했으
며, 얼굴은 눈과 입이 크게 표현된 둥글넓적한 모습이다.

석가불 좌우의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손상은 심하나 서로 마주보는 모습과 수도하는 모습 등
각자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고, 나한상 주위 바위 면을 둥글게 파서 마치 감실(龕室)이나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성불사 마애불은 바위 한 면에 석가3존불과 16나한을 덩어리로 새긴 것으로 이 땅에서 거의 유
일한 케이스이며, 도식화(圖式化)가 덜 된 것으로 보아 14~15세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성불사 석조보살좌상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386호

야외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 옆에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건물 이름을 까먹음..)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그만 석조보살좌상이 담겨져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성불사의 것이 아니었다. 1990년에 지금은 세종시로 간판을 바꾼 연기군 조치
원(鳥致院) 부근 대성천에서 준설공사를 벌이다가 발견된 것으로 신도들의 노력으로 이곳에 안
착을 해 성불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예전에는 종무소 안에 두었으나 근래에 그를 위
한 집을 지어 이렇게 집까지 가지게 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67cm, 어깨 넓이 34.5cm, 무릎 넓이 54.5cm로 등에 달린 광배(光背)의 윗부분이
깨져나가 붙여 놓았다. 오른쪽 무릎도 조금 깨진 상태이며, 무릎에서 오른쪽으로 가늘고 긴 균
열이 있어 조금씩 메워 놓은 상태로 거신광배(擧身光背)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옷주름은 굵으면서 매우 도식적이며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왼손은 배 밑에 두었다. 두
팔은 몸에 비해 길지만 가늘고 두 손은 작으며, 연꽃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관세음보
살로 여겨지지만 미륵불의 도상(圖像)으로 유행한 점도 있어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석불로 보이겠지만 보기 드문 형식의 석불로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성불사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178-8 (성불사길 144 ☎ 041-565-4567)


▲  강추위 앞에서도 향긋한 미소를 잃지 않은
풍만한 모습의 석조관세음보살좌상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와 일몰의 끝 모습
(성불사로 인도하는 고갯길과 천안시내)

햇님의 퇴근 본능에 쫓겨 서둘러 성불사에 들어와 잠깐을 방황하는 사이 시간은 18시가 되었다.
서서히 줄어드는 햇님의 흔적에 의지해 열심히 사진에 담았지만 역시나 신통치가 못했고, 머나
먼 수평선 너머로 햇님이 완전히 꽁무니를 감추면서 달님은 햇님의 나머지 흔적마저 지우며 천
하를 검게 태운다.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모두 살펴보아서 다행이지만 눈이 적지 않게 깔린 상태라 칠성각 등은
접근도 하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더 머물기도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춥고 배도 고프
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중요한 볼거리는 다 보았으나 이쯤에서 성불사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절을 내려갔다.

시간도 어느덧 저녁 시간이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저녁을 어
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두고 즐거운 고민을 벌이다가 각원사 밑에 줄지어 선 식당촌에서 해결하
고자 그곳으로 넘어갔다. 어느 집에서 먹을까 궁리하던 중, 그냥 장군도 아닌 무려 대장군(大
將軍)식당이란 위엄 돋는 이름의 식당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태조산이란 이름
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양병했다고 해서 비롯된 것이다보니 그 밑에서 군권을 총괄하는 자리인
대장군을 식당 이름으로 삼은 모양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임에도 내부는 한산하다. 우리가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는 격하게 반
기며 방 안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처음에는 그냥 비빔밥 같은 것을 먹을까 했으나 날씨도 춥고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 버섯전골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잠시 뒤 밑반찬이 정갈하게 깔리고 버섯전골이 등장한다. 전골이 뽀글뽀글 익자 국자를 이용해
전골을 퍼서 먹는데, 버섯전골이란 이름이 무색치 않게 버섯이 매우 많다. 거기에 소고기와 당
면, 두부, 갖은 채소가 버무려져 하나의 버섯전골을 이루는데 국물도 제법 얼큰하고 맛이 좋다.
전골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죄다 밥도둑의 자격이 충분하며,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
라 시장기까지 강하게 돋아있어 전골이고 반찬이고, 밥까지 거의 비워버렸다. 거기에 답사 뒷
풀이용으로 막걸리까지 겯드리니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저녁을 배불리 먹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소화도 시킬 겸 상명대 천안캠퍼스 남쪽까
지 걸어갔다가 천안시내버스 24번을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천안 태조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대장군식당에서 먹은 버섯전골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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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월 3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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