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봉길 의사 기념관
![](https://t1.daumcdn.net/cfile/blog/20316D4B4F92A34D0B)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 (왼쪽에 보이는 집은 보부상유품 전시관) |
충의사 남쪽(저한당 북쪽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73년부터 1977년까 지 진행된 윤봉길 유적 성역화 사업 때 관리사무소와 함께 세워졌다. 이후 2001년 기념관 옆 에 윤봉길의 어록(語錄)을 담은 윤봉길어록탑을 만들었으며, 2002년에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그해 12월에 속세에 문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봉길의 손때가 자욱한 유품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윤봉길 일가에서 쓰던 그릇과 서적, 벼루를 비롯하여 그의 찰나(刹那)와 같은 인생을 다룬 영상관과 매직비전 11대, 다오라마 등이 그의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그의 유품(遺品) 중에 회중시계와 지갑, 중국화폐, 도장, 손수건, 안경집, 일기, 월진회창립취지서, 농민독본, 형틀 대, 편지 등은 '윤봉길의사 유품'이란 이름으로 '보물 568-2호, 568-3호'로 지정되었다.
* 윤봉길의사 기념관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5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3) * 윤봉길의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그릇, 수저, 놋대야 사진을 클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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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길 일가가 사용했던 그릇과 수저, 놋대야 - 보물 568-3호 |
▲ 윤봉길이 읽은 명심보감과 그가 사용한 벼루와 등잔대 - 보물 56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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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길의 글씨 (해석은 각자 알아서) - 보물 568-3호 |
▲ 윤봉길이 쓴 온갖 서적들 보물 568-3호 |
![](https://t1.daumcdn.net/cfile/blog/190EB6474F92A36C0F) ▲ 윤봉길이 직접 그린 월진회 깃발 - 보물 568-3호 팔방미인이던 윤봉길은 지식 소양도 대단할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깃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무궁화는 마치 뭉개구름 속에서 방긋 피어나는 태양처럼 찬란해 보인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6780474F92A37938) ▲ 부흥원 대들보 - 보물 568-3호 옛 부흥원의 유물로 1928년 2월 25일 부흥원 상량식 때 윤봉길이 대들보에 기념 메세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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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길이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 가족들 에게 남겼다는 7글자의 시 - 보물 568-3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 을 나가서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다)' 물이 흐르듯 유연한 곡선의 서체에 그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55DDA474F92A38143) ▲ 월진회 창립취지서(보물 568-2호)와 통장(보물 5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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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월진회를 만든 윤봉길은 창립 취지서(趣旨書)를 남겨 그 뜻을 천 하에 밝혔다. 월진회 통장은 저축운동을 위해 그가 회원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그가 직접 만들 었다고 하며,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지금 21살이면 완전 애기인데...) |
![](https://t1.daumcdn.net/cfile/blog/170BD2474F92A38516) ▲ 윤봉길이 1929년에 쓴 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 - 보물 568-2호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5824E4F92A38A11) ▲ 농민독본(農民讀本) - 보물 5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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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농민들을 대상으로 야학당을 운영했을 때 그가 직접 편저한 책으로 모두 3권으로 이루 어져 있다. 지금은 2권과 3권 일부만 남아있으며, 왼쪽 책은 세월의 녹이 검게 그을려져 있다. 책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가 무척 인상적인데, 부산과 왜열도 사이를 조선해협이라 표시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3137B474F92A37D0D) ▲ 위친계취지서(爲親契趣旨書) - 보물 568-3호 윤봉길이 부모의 상사(喪事) 등을 위해 친척을 중심으로 조직한 위친계의 취지서이다. 나라의 독립과 경제 부흥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그의 높은 의식을 보여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206C4E4F92A38D27) ▲ 우리의 옛 땅 동북아를 누빈 윤봉길의 위엄 지도에 나온 동북아 일대는 우리의 옛 땅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히 차지해야 될 땅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https://t1.daumcdn.net/cfile/blog/1525924E4F92A39322) ▲ 윤봉길이 중원대륙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https://t1.daumcdn.net/cfile/blog/1441424E4F92A39805) ▲ 윤봉길이 1932월 1월 30일 상해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복제품) 그해 1월에 벌어진 왜군의 상해 침략에 대한 내용이 소상히 나와있다. 왜군이 상해를 공격하자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군이 1달 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상해를 빼앗기고 많은 중원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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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가족에게 장엄한 각오가 서린 7자의 시를 남기고 만주로 홀로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간이 쫄깃해진 왜경은 몰래 미행을 붙이면서 평안북도 선천(宣 川)에서 붙잡고 만다. 하여 45일 동안 옥고(獄苦)를 치르고 바로 만주로 넘어가 그곳에서 그 와 뜻이 같은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을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허나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라 1930년 12월 홀로 산동반도 청도(靑道, 칭 따오)로 넘어가 1931년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으며, 여기서 번 돈 대부분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청도도 적당한 곳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는 상해로 가야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1931년 8월 상해로 갔다. 상해에 있는 프랑스 조계(租界)인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머물며 박 진(朴震)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영어를 익혔다. 그렇게 주경야독( 晝耕夜讀)을 하다가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을 했고, 그해 겨울 드디어 백범 김구 (白凡 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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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1.bp.blogspot.com/-TCKawYJC_XY/XlanXjXbD4I/AAAAAAAAOCs/MJ8m_90tfigNH9UVKf4g468tTvDIntT9wCNcBGAsYHQ/s640/1.jpg) ▲ 윤봉길이 홍구공원 의거 2일 전에 김구에게 보낸 자신의 이력서들 이력서 옆에는 사진에는 빠져있지만 상해에서 사용한 중국제 수첩이 있다.
![](https://1.bp.blogspot.com/-AUOQNdLQaNE/XlanXp0w4zI/AAAAAAAAOCo/c53y_ANNoJY8_-Yx-5rhSmFn0v5tlxT3gCNcBGAsYHQ/s640/2.jpg) ▲ 윤봉길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찍은 증명사진 (오른쪽은 자필로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https://1.bp.blogspot.com/-DJJQlkMASIk/XlanXgfD00I/AAAAAAAAOCw/i-vI3oX7ONkBQlEYkaaNVVxXh0JqKIgWACNcBGAsYHQ/s640/3.jpg) ▲ 조금은 어설프게 재현된 홍구공원 의거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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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이 되자 왜국은 왜인 승려 처단 사건을 구실로 상해 사변을 일으켰다. 장개석이 1달 동 안 저항을 했으나 결국 상해를 내주고 말았으며, 상해를 점령한 왜군이 승리에 도취해 왜왕( 倭王) 생일인 4월 29일에 왜왕 생일 축하 및 전쟁 승리 축하 기념식을 상해 시내에 있는 홍구 공원(虹口公園)에서 갖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와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 始榮), 조소앙(趙素昻)에게 자신의 거사 계획을 밝히고 거사를 구상했다. 성공적인 거사를 위 해 채소장사로 가장해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분을 세탁했으며, 김홍일(金弘一)이 만든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고 폭탄 던지는 법을 배워 실수가 없게끔 자신을 채찍질했 다. 드디어 4월 29일 아침, 그는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폭탄 1개를 가지고 기념 식장으로 들어갔다. 공원을 지키던 왜군이 검문을 했으나 왜인이라고 속이니 그냥 들여보내주 었다. 왜인들만의 즐거운 잔치였던 그 행사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 1만 명의 군중 사이에 묻혀있던 그는 기념식 단상 앞을 지키던 기마헌병 앞까지 들어와 물통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통이 단상에 떨어지는 순간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식장에서 오만을 띈 미소로 행사를 치 르던 왜인 고위층 7명이 모두 꼬꾸라졌다.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행사를 구경 하던 관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을 붙잡고 도망치느라 바뻤다. 왜군 또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니 충분히 빠져나와 다음 거사를 준비할 틈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윤봉길은 피신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왜군은 그를 체포했다.
윤봉길이 준 크나큰 선물에 감동하여 기절한 7명의 왜인 고위층 중에, 상해 왜인 거류민(居留 民) 두목인 가와바다 사다쯔구(河端貞次)는 사경을 헤매다가 다음날 바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운 왜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5월 에 폐기되었다. 또한 제3함대 두목인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은 중상을 입고 눈병신이 되었으며, 주중일본공사 시케미쓰(重光癸)는 우측 다리가 절단되어 다리 병신이 되었다. 기타 2명도 막심한 중상을 입었다. 즉 2명이 폐기되고 5명이 병신이 된 것이다. 그 5명은 왜국 백 성들이 바친 세금이나 갉아먹으며 식충이처럼 살다가 골로 갔다. |
![](https://1.bp.blogspot.com/-p-Wz0kQX3xM/XlanYrjPEsI/AAAAAAAAOC0/gK_Uiwkf1KwgZJIrpK_4XdfRMV7XreJMACNcBGAsYHQ/s640/4.jpg) ▲ 의거 이후 연행되는 윤봉길 사진 기념식장을 흔쾌히 아수라장으로 만든 물통 폭탄과 폭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업혀가는 왜군 장수 사진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44EB93E4F92B2BC05) ▲ 상해 의거 관련 왜국 조일신문 보도 왜국은 상해 폭탄변사(爆彈變事)라고 표현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변사겠지~~ 윗사진은 폭탄에 아작이 난 기념식장, 아랫 사진은 왜군에게 잡혀 호송되는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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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왜국 군법회의로 넘겨져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형을 선고받 았다. 그를 심문하던 왜군은 그가 상해사변에 앙심을 품은 대륙 사람인줄 알았으나 조선 사람 이란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상해 왜군 헌병대에 갇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그는 그해 11월 18일 왜열도로 호송되었으 며, 20일 오사카(大阪)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다시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져 거기서 12 월 19일 총살형을 받으니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한편 상해 사변에서 개망신을 당해 절치부심에 빠진 중화민국(中華民國) 지도자 장개석(장제 스)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특히 상해사변을 일으킨 원흉들이 대거 폐기되었다는 소식은 겁 많은 중원대륙 지도층을 비롯한 대륙 민중들까지 모두 환호하게 만들어 한국에 아 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개석은 '쓸데없이 머릿수만 많은 4억 대륙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두고두고 격찬했으며, 1933년 5월 그의 제의로 남경 (南京)에서 김구와 회담을 했다. 여기서 장개석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서로 돕고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고, 임시정 부와 중원대륙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광복군은 장개석의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독립활동을 전 개했다. 그리고 왜국이 패망할 때까지 서로 상부상조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잠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크게 고취되었고, 우리의 독립활동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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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1231F3E4F92B2CA34) ▲ 윤봉길의 최후 장면과 그가 갇혀있던 가나자와 형무소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11FCE3E4F92B2CE35) ▲ 장개석이 윤봉길의 동생 윤남의에게 보낸 친필서한과 기념사진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72C2A3E4F92B2C828) ▲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 전기문을 낸 곽상훈에게 보낸 축하 친필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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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봉길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에 13년 동안 매장 되었다. 왜국이 패망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던 박동조, 서성민으로 이 루어진 발굴단이 1946년 3월 4일 발굴을 시작해 6일에 시신을 발견했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의 유해와 함께 그해 5월 부산에 도착해 공설운 동장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7월 7일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최초로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되었다. 또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 국장이 추서되어 그의 의거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
![](https://1.bp.blogspot.com/-bDiUsTQIq-w/XlanY1QmLdI/AAAAAAAAOC4/JEUKs028HJgSImjTV3_pMbP6p65t4m9OQCNcBGAsYHQ/s640/5.jpg) ▲ 윤봉길이 날린 그 유명한 도시락/물통 폭탄 (모형) 공원을 지키던 왜군을 감쪽같이 속이고 임무를 완수한 도시락/물통 폭탄의 위엄 겉은 그저 흔한 도시락과 물통이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폭탄이 들어있다.
![](https://1.bp.blogspot.com/-37qHBbzrwio/XlanZPjMJKI/AAAAAAAAOC8/RYDWBpUrJkolE2RN_RCz92o85BrHuqytACNcBGAsYHQ/s640/6.jpg) ▲ 윤봉길 의사의 유품 (안경집부터 대륙 화폐까지) - 보물 568-2호 윤봉길을 사형시킨 왜국은 그의 몸에서 나온 유품을 덕산에 있는 유가족에게 보내주며 은근히 악어의 눈물을 보였다.
![](https://1.bp.blogspot.com/-Zy1cmVfNe80/XlanZkNHOiI/AAAAAAAAODA/AC3RrFjCV9I1RieWv6QOO1R2QS7o2KGqwCNcBGAsYHQ/s640/7.jpg) ▲ 윤봉길이 상해 의거 때 지녔던 지갑과 대륙 화폐 - 보물 568-2호
![](https://1.bp.blogspot.com/-SymRFznrtBs/XlanZ9Hwl0I/AAAAAAAAODE/oEebgHfZSCMqZU6GbCykJhk90dGq9JhwwCNcBGAsYHQ/s640/8.jpg) ▲ 윤봉길이 죽기 전까지 사용했던 손수건 손수건에 점처럼 찍힌 빨간 것은 그의 거룩한 피이다.
![](https://1.bp.blogspot.com/-MqC8DY9poG4/XlanaDup0OI/AAAAAAAAODI/lAO5EMC8qIsUfjFnuGv-eQslO-zQqRLpgCNcBGAsYHQ/s640/9.jpg) ▲ 회중시계(懷中時計)와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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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 유품 중에 회중시계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계는 원래 김구 주석이 쓰 던 것으로 상해 의거를 벌이던 4월 29일 아침, 김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면서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녹슬었군요. 제 시계는 이제 쓸 일이 없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안을 하여 서로의 시계를 바꾼 것이다. 그의 시계를 받은 김구의 마음은 참 착잡했을 것이 다. 솟구쳐 나오려는 사나이의 눈물을 서로가 억지로 참아가며 시계를 서로의 정표로 바꿔야 했던 그 참담한 현실을..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540843E4F92B2C415) ▲ 1962년 우리나라 정부가 윤봉길에게 바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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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짊어진 형틀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 몸을 묶었던 형틀 대이다. 가로목과 세로목이 있는데, 세로목은 두 팔을 묶었고, 가로목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묶었다. 이 형틀대는 그가 묻힌 노다산 공동묘지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세로목만 나왔으며 이후 이 땅에 들어와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안 착하여 보물 568-2호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보물급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 참하고 쓰라린 존재가 아닐까 싶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64DF43F4F92B2D708) ▲ 윤봉길 의사의 흉상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132203F4F92B2D922)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옆에 자리한 윤봉길어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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