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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중남미문화원 봄나들이 '
중남미문화원 산책로
▲  목련의 향기가 진동하는 중남미문화원 산책로


봄이 한참 전성기를 일구던 4월 하순 주말에 후배 여인네들과 고양시에 있는 중남미문화원을
찾았다. 불광동에서 서울시내버스 703번(파주,향양리↔서울역)을 타고 구파발. 삼송동, 대자
동을 지나 가축수송에 험난한 고난을 감내하며 고양동(고양시장)에 두 발을 내린다.

고양동(高陽洞)은 지금은 비록 고양시(高陽市)의 외곽 동네로 고양 지역의 동북방 끝쪽에 자
리해 있지만 구한말까지만 해도 엄연한 고양 고을의 중심지였다. 고양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허나 원당(元堂)과 일산에 중심지 기능을 넘겨주고 벽제읍(碧蹄邑)의 중
심지로 떨어졌다가 지금은 고양시 덕양구(德陽區)의 일부가 되었다.


고양시장에서 벽제관터를 지나 주택가로 나날이 변하고 있는 고양동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양
고을의 교육을 담당하던 고양향교(高陽鄕校)가 나온다. 그 동쪽에 우리나라 유일의 중남미문
화시설인 중남미문화원이 둥지를 틀었다.


♠  지구 정반대편에 자리한 중남미의 문화와 예술, 민속, 역사가
담긴 중남미문화원(中南美文化院)


▲  중남미문화원 미술관

중남미문화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중남미 테마 문화공간이자 개인박물관이다. 이곳은 30여 년간
중남미에서 외교관을 지낸 이복형 전(前) 대사와 그의 부인 홍갑표(중남미문화원 이사장)가 중
남미 곳곳에서 수집한 중남미의 문화유산과 미술품, 공예품, 민속자료를 간직한 문화공간이다.
이곳은 1992년 문화원으로 문을 열었으며, 1994년 박물관을 지어 중남미 문화유산을 천하에 선
보였다. 그리고 1997년에 미술관을, 2001년에는 조각공원을 만들어 지금에 이른다.

박물관에는 오랜 세월 중남미를 풍미했던 마야(Maya)문명과 아즈텍(Aztecan)문명, 잉카(Incan)
문명의 찬란했던 고대(古代) 문화유산이 전시되어 있어 전설처럼 강제로 사라진 그들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다. 이들 유물 가운데 돈 꽤나 얹혀주고 구입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6세기 이후 중남미에 침투해 신식 무기와 온갖 간계(奸計)로 그곳의 여러 나라와 문명
(文明)을 죄다 아작내고 순박하게 살아가던 원주민들을 학살해 중남미를 강제로 접수한 유럽인
들의 식민시절 문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과 미술품이 있다.

미술관에는 근/현대 중남미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품이 있어 중남미 문화의 정취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아름답게 꾸며진 조각공원에는 중남미 12개 나라의 조각가들의 작품들이 공원을 멋드
러지게 수식한다. 조각공원에서 북쪽으로 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의자와 탁자가 놓인 넓다
란 휴식공간이 있으며, 박물관 북쪽에는 중남미 음악이 잔잔히 분위기를 띄우는 까페(따꼬하우
스)가 있는데, 그곳에선 중남미 음식인 따꼬(Tacos 멕시코 전통 대중음식), 빠에야(Paeya, 스페
인에서 전래된 중남미 음식)를 비롯하여 차와 마실 거리를 판매한다.

문화원 뜨락과 조각공원에는 목련과 철쭉 등의 꽃과 나무가 가득하여 마치 수목원에 들어선 기
분이며, 기품이 서린 조각품과 벤치가 곳곳에 뿌리를 내려 동화 속의 풍경을 자아낸다. 봄에는
목련과 철쭉이 시기를 약간씩 달리하며 순서대로 문화원을 수식하는데, 목련이 단연 백미(白眉)
이다. 순백의 목련이 곱게 허공을 메우는 4월 말에는 조촐하게 목련축제가 열리며, 낙엽이 잔잔
히 대지를 덮는 늦가을 풍경도 상당히 아름답다.

우리에게 미국과 캐나다가 있는 북미(北美)는 매우 친숙하지만 멕시코와 파라과이, 브라질, 칠
레 등이 있는 중남미는 아직까지는 낯설다. 낯선 그곳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는 우리
나라의 유일한 공간으로 그 가치는 상당하다. 문화원 곳곳을 사진에 열심히 담았지만 중남미 문
화에 대한 이해와 정보가 턱없이 낮아 설명을 가급적 줄이고 사진 중심으로 마음 편하게 전개하
고자 한다. 마음과 지식이 풍요로운 문화상류층이 되고자 오래 전부터 많은 문화공간을 다니고
있지만 내공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곳을 둘러본 시간은 2시간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1시간 정도에 관람을 마무리 짓는다. 허
나 2시간을 봐도 뭔지 모르는데 1시간을 본다고 제대로 눈과 머리에 들어와 박힐까? 완전한 이
해까지는 무리지만 시간을 넉넉히 할애하여 구경하는 것이 진정한 관람이 아닐까 싶다. 입장료
가 다소 얄미운 수준으로 무려 5,500원이나 받아먹지만 대신 볼거리가 풍부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아 가족, 친구, 연인 단위 봄/가을 나들이장소로 손색이 없다.


▲  중남미문화원 박물관

※ 중남미문화원 찾아가기 (2012년 5월 기준)
* 구파발역(3호선/1번 출구와 2번 출구 사이)에서 330, 333번 시내버스 / 구파발 중앙차로 정류
  장(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도보 5분)에서 703번 시내버스를 타고 고양시장 하차
* 연신내역(3,6호선/3,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30, 703번 시내버스 이용
* 서울역(1,4호선/9-1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6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6번출구)에서 703번
  시내버스 이용
* 삼송역(3호선/8번 출구)에서 330, 333, 703번 이용
* 김포공항이나 송정역(5호선/1번 출구)에서 85, 85-1번 시내버스를 타고 고양시장 하차
* 의정부터미널이나 인천터미널에서 3700번 직행버스를 타고 고양동(고양시장) 하차
* 고양시장에서 길 건너편 훼밀리마트 골목으로 도보 10분 (중간에 벽제관터 있음)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문화원 앞에 조그만 주차장 있음)
① 서울 → 구파발 → 대자3거리 지나서 필리핀참전비에서 우회전 → 고양유스호스텔 → 중남미
   문화원
② 서울 → 구파발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39번 국도) 우회전 → 고양1교에서 좌회전 →
   고양현대아파트 → 화성그린빌아파트에서 좌회전 → 중남미문화원

★ 중남미문화원 관람정보 (2012년 5월 기준)
* 입장료 : 성인 5,500원 / 군인,학생 4,500원 / 12세 이하 3,500원 (20인 이상 단체 20% 할인)
* 관람시간 : 10시 ~ 18시 <겨울(11월~3월)에는 17시까지, 폐장시간 1시간 전까지 입장>
* 쉬는 날 없음
* 매년 4월 말에 문화원 목련축제가 열린다. 2주 동안 토/일요일에만 열리며, 축제라고 해서 볼
  거리 많고 요란한 그런 축제가 아닌 꽃을 보고 즐기는 그냥 조용한 축제이다.
* 따꼬하우스에서는 중남미 음식인 따꼬와 빠에야를 먹을 수 있다. 따꼬(Taco)는 토요일과 휴일
  (11~17시)에만 판매하며, Alambre(소고기, 채소)는 8,000원, Quesadilla(치즈)는 7,000원이다.
  빠에야(Paeya)는 풀코스 요리로 월요일부터 토요일 점심시간(12시~14시 30분)에 먹을 수 있다.
  필히 하루 전까지 예약을 해야 되며 예약은 중남미문화원 홈페이지나 전화로 하면 된다. 가격
  은 성인 28,000원(5~10세 20,000원)이다. (입장료 별도)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2-1 (☎ 031-962-7171)
*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춤을 추는 아리따운 중남미 여인상
마치 실제로 움직이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이다.


♠  중남미문화원 미술관 둘러보기

▲  창을 들고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모습

▲  미술관 앞에 심어진 스페인 양식의 분수대

▲  긴 두건 같은 것을 뒤집어 쓰며 앉아있는 중남미 노인

◀  털을 휘날리며 달리는 야생마


▲  빨간 꽃이 담겨진 수레와 붉은 항아리

▲  박물관 좌측에 운치가 깃들여진 푸른색 벤치들


♠  중남미문화원 박물관 둘러보기

▲  칼을 든 기마병

▲  중남미 일대에서 가져온 가지각색의 탈과 문양들 (16세기 이후) ▼


▲  꽂게 몸통에 얼굴 표정이 그려진 재미난 장식물

▲  만화에서 많이 본듯한 중남미 인형

▲  박물관 중앙홀에서 열린 중남미 음악공연 (목련축제 공연)
공연시간은 1시간 내외로 저들의 음악은 대체로 흥겹고 신이 나게 한다.
음악 외에도 춤 공연도 있다. (목련축제 기간 외에는 부정기적으로 열림)

▲  고대 멕시코 사람들의 가면
멕시코 원주민들은 새로운 영혼과의 교류 및 현실 탈피의 표현으로 가면을 만들었다.
처용무(處容舞)의 큼직한 가면처럼 얼굴에 뒤집어 쓰는 가면으로 다소 무거워 보인다.

▲  개성이 넘치는 중남미 가면들

▲  돌로 만든 고대 중남미 장식품
가장 아래에 있는 것들은 메따떼(Metate)라 불리는 석기로
과나까스때 지방에서 곡물을 빻는데 사용했다.

▲  꽤짤꼬아뜰(Quetzalcoatl)
꽤짤꼬아뜰은 바람과 생명의 신으로 깃털이 달린 뱀의 모습이다.
10~13세기 경 작품

▲  아즈텍의 옛 수도 떼노치뜰란(현 멕시코시티)의 유물
13세기 후반 아즈텍족이 떼노치뜰란에 도읍을 세웠는데, 이는 선인장 위의 뱀을
쪼는 독수리가 있는 곳을 택하라는 옛 전설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  기원전 1세기 경에 조성된 다산(多産)의 여신상

◀  투키아상 (2세기 경 작품)


▲  멕시코 꼴리마에서 발견된 사각다리 항아리 (기원전 3세기~기원 4세기 사이)
항아리 4면에 그려진 표정이 인상적이다.

▲  올멕(Olmec) 문화의 흔적들
올멕은 중앙아메키라의 고대 문화로 멕시코만에 위치한 베라크루스 남부와
타바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문화로 기원전 1150년 경에 형성되었다.
그 이후 산살바도르까지 확장되었으나 기원전 800년경에 망했다.

▲  중남미 원주민에게 잔인한 비극을 던진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bal Colon 1451~1506)는 인도로 가고자 동쪽 대신 서쪽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동인도제도에 상륙했다. 그가 서쪽을 택한 것은 지구가 둥글다고 철석처럼
믿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도 그렇고 당시 유럽인들은 동인도제도(東印度諸島)가 인도의 일부로 여겼으나 알고보
니 유럽인들이 전혀 몰랐던 신대륙이었다. 이 사건으로 유럽인의 좁아터진 천하관은 대폭 넓어
지고 외람되게도 유럽이 천하의 중심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외부 세계에 노출되
지 않으며 오순도순 살던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안겨주었다.

유럽의 제국(諸國)들은 앞다투어 중남미로 진출해 철제무기와 화약무기, 말로 무장된 군사력과
야비한 간계로 잉카와 마야 등 토착 세력을 죄다 밀어버렸다. 당시 중남미 사람들은 고작 돌로

만든 무기가 고작이었는데, 유럽의 신식무기 앞에서는 전혀 게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럽 세력은 고작 수백 명의 군사로 그 큰 대륙을 접수했던 것이다.
또한 원주민을 대량 학살하여 그 씨를 거의 말렸으며, 그 잘난 기독교 교리를 내세워 중남미의
찬란했던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시켜 마야와 잉카의 수수께끼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우를 범했다.

         ◀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
중남미를 비인간적으로 정복한 유럽인들이 뿌리
를 내린 식민시절 문화의 흔적이다. 예수의 모
습이 마치 16세기 이후 유럽이 중남미에 저지른
죄악을 대신 짋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린 듯 하다.
허나 그들의 죄악은 십자가 1번이 아니라 100만
번을 매달려도 모자를 정도로 클 것이다.


▲  레따브로(Retablo) 성당 제단


♠  중남미문화원 조각공원 둘러보기 (목련의 향연)

▲  조각공원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중남미문화원의 백미(白眉)는 무엇일까? 나는 자연이 어우러진 조각공원을 들고 싶다. 문화원의
봄을 화사하게 빚어놓은 목련이 공원과 뜨락에 소중한 그늘을 드리우며 눈송이 같은 목련꽃잎으
로 대지를 하얗게 적신다.

조각공원은 붉은 문을 중심으로 조촐하게 이루어진 공간으로 중남미 작가들이 선사한 다양한 미
술품이 공원을 장식한다. 공원 북쪽 야트막한 고개 너머에는 탁자와 의자가 갖추어진 넓다란 휴
식공간이 있어 간단한 다과를 즐기기에 적당하며, 공원 서쪽에는 중남미 음식과 차를 파는 따꼬
하우스란 까페가 있다.


▲  인디오여인상 - 주변에 떨어진 목련잎이 가득 널렸다.

▲  태양을 숭배했던 옛 중남미 사람들의 사고가 담긴 둥그런 돌조각

▲  중남미 곳곳에서 가져온 항아리들의 공간 (항아리 벽)
중남미문화원을 소개하는 자료에 단골로 등장한다.

▲  조각공원 핵심으로 인도하는 붉은색 문
조각공원에는 연소자 관람불가(?)급 조각품이 여럿 있어 시선을 조금 어지럽게 한다.
어디까지나 조각품들이니 괜히 쑥쓰러워하지 말고 잘 살펴보도록 하자 ~~

▲  비둘기상 - 꼬리를 날카롭게 쳐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

▼  아래 사진들은 조각공원을 장식하는 미술품들이다.
(설명 생략, 크게 보고 싶다면 해당 사진을 클릭바람)


▲  구루삐(2000년 작)라 불리는 요상한 조각품
인디오를 모델로 만든 것 같은데, 가운데 물건(?)이 다리만큼이나 크다.
미남형으로 만들었으면 여인들의 인기가 지금보다 더 상당했을 것이다.

▲  조각공원 서쪽 목련 숲길

▲  조각공원 북쪽 너머의 휴식공간
의자와 탁자가 넉넉하여 간식을 겯드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문화원은 음식 반입이 통제되어 있으나 머리만 잘쓴다면 반입도 가능하다.

▲  조각공원에서 북쪽 휴식공간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갯길
고개라고는 하지만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그다지 급하지도 높지도 않은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는 여유로운 수준이다.


▲  조각공원에서 휴식공간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인디오 여인상

▲  가슴이 쳐진 요염한 모습의
인디오 여인상

▲  나이가 상당히 들어보이는
인디오 여인상


▲  기품과 자애가 깃들여진 예수상

▲  하얗게 무르익은 목련 - 마치 눈송이를 뒤집어 쓴 듯 하다.

▲  연못에 무지개처럼 걸린 조그만 돌다리
수면 위로 목련잎이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긴다.

▲  따꼬하우스 앞 휴식공간에 놓인 동그란 화단

▲  중남미 음식과 차를 판매하는 따꼬하우스(Tacos House)

▲  따꼬하우스 옆에 심어진 십자가 (중남미 근대 양식)
붉은 벽돌에 기대어 선 십자가, 마치 성지(聖地)의 십자가처럼 엄숙함이
진하게 풍기면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중남미문화원 박물관의 숨겨진 뒷뜰 (따꼬하우스에서 보임)

▲  한자가 쓰여진 네모난 화단

기단에 제생정(濟生井)이란 문구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부근에 있던
제생정이란 오래된 우물의 석재를 가져와 화단으로 만든 듯 싶다.

▲  마치 눈이 내리는 듯한 목련나무 숲길

▲  양손에 바리바리 무엇인가를 든
수도원 신부(神父)상


▲  따꼬하우스에서 마신 멕시코허브차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남)

중남미문화원을 한참 둘러보다가 우연히 아는 선배 일행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멕시코허브차를
얻어 마셨는데, 맛과 향기는 녹차와 자스민차를 섞어놓은 듯 향기롭다. 아쉽게도 차 이름은 잊
어먹었다. 허브차는 1회용 종이컵에 티백이 담겨져 나오는데, 수입산 차라 그런지 가격이 무려
2,500~3,000원이다. 비록 아는 이가 사준 것이긴 하지만 나도 일행이 있기 때문에 허브차를 들
고 일행들에게 한 입씩 돌리며 목련이 내려앉은 탁자에 잠시 내려놓아 사진에 담았다.

입장료가 다소 미운 수준이긴 하지만 약 2시간에 걸친 중남미문화원 관람은 거의 어느 하나 빠
진 것이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고액의 입장료가 별로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명,청을 오가던 사신들의 숙소, 벽제관(碧蹄館)터 - 사적 144호

양시장에서 중남미문화원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벽제관터란 건물 유적이 있다. 문화원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문화원에 눈이 어두워 눈 뜬 봉사마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소중한 문화유적인 만
큼 잠깐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벽제관터는 눈에 보이는 건물터 2개가 전부
라 안내문을 읽는 시간을 포함해도 5분 정도면 충분하다.
벽제관터 북쪽에는 조그만 공원이 둥지를 트고 있으며, 건물터 주변은 문화재 보호 철책이 둘러
져 있으나 키가 작아서 어린이도 넘어갈 수 있다. 우리가 갔던 그때는 마침 어린이들이 철책 안
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엄연한 문화재 보호법 위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건물터 주춧돌의 건
강까지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는 아니니 그정도는 귀엽게 봐줄 만 하겠다.

주춧돌과 기단만 아련히 남아있는 벽제관은 조선과 명/청나라를 오가는 사신들과 관서지방으로
출장가는 관리의 역관(驛館)으로 1476년(성종 7년) 11월에 지어졌다. 지금은 서울에서 관서(關
西, 평안도) 지방으로 갈 때는 1번 국도를 따라 '서울 → 삼송동 → 벽제 → 봉일천 → 월롱 →
문산 → 개성 → ~~ ' 코스로 간다. 허나 조선시대에는 '서울 → 삼송동 → 고양동 → 혜음령(
惠陰嶺) → 광탄 → 파주읍 → 문산 → ~~' 루트로 갔다. 그러다보니 고양동은 서울과 관서, 대
륙을 잇는 요충지가 되었으며, 자연히 고양 고을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명,청 사신들은 벽제관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서울까지는 하루에 다 가지 못하고 보통 홍제원(洪濟院, 지금의 홍제동)이나 모화관(慕華館, 지
금의 독립문)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다음 날 왕세자와 문무관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남대문(南
大門)을 거쳐 서울에 들어가 조선 군주를 알현(謁見)하였다. 벽제관의 품격은 모화관에 버금 갈
정도였으며, 명,청으로 가는 조선 사신과 관서로 출장가는 관원도 벽제관에서 쉬었다. 서울에서
관서로 가는 첫 역관이기도 하다.


▲  벽제관 왕년의 모습

▲  주춧돌만 앙상하게 드러낸 객관문터 - 정말 세월무상이로다~~

벽제역 부근에 있던 벽제관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을 한 것은 1625년(인조 2년)이다. 고양 고을
의 관아를 고양향교 부근으로 옮길 때 새로 만든 것으로 그 이후 보수 기록은 확실치가 않다.

이후 별탈없이 지내오던 벽제관은 1930년경 일부가 철거되었으며, 6.25전쟁 때 객관문을 제외
한 모든 건물이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어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간신히 고개를 들
고 있던 객관문도 1960년경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삭 무너져 지금은 건물터와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근래에 벽제관터 주변을 정비하고 공원을 꾸몄으며, 푸른 잔디를
곱게 깔아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벽제관 북쪽 혜음령(벽제3거리에서 광탄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이여송(李如松)의 명나라군과 왜군이 치열하게 격전을 벌인 적이 있다. 민폐 덩어리
명나라군은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거의 전멸에 이르다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
權慄)의 구원으로 간신히 전멸을 면했다.

※ 벽제관터 찾아가기 (2012년 5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중남미문화원 참조
* 고양시장에서 길 건너편 훼밀리마트 골목으로 도보 3분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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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5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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