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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산사(山寺) 나들이 ~ 하남시(河南市) 선법사 '


늦가을이 한참 절정으로 치닫던 10월 중순, 절친한 친구와 옛 광주(廣州) 고을의 중심지인 하
남시 춘궁동(春宮洞)을 찾았다.
고려 초기의 늘씬한 석탑 2기를 간직한 춘궁동동사지(桐寺址)와 광주향교(廣州鄕校)를 둘러보
고(☞ 관련 글 보러가기) 객산 자락에 안긴 선법사를 찾아 나섰다.

고골4거리에서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9분 정도 걸으면 오른쪽으로 선법사로 인도하는 작은 길
이 나온다. 평온한 교외 분위기가 내려앉은 길을 걸으니 서울에서 제법 멀리 나온 것 같은 즐
거운 기분이 엄습한다. 고작 서울 경계에서 6km 정도 밖에 안나왔는데도 말이다.

농가와 밭이 끝나고 어느덧 객산의 품으로 접어든다.산에 뿌리를 내린 울창한 숲은 절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산바람에 속세의 번뇌를 잠시 내맡기며 이미 낯이 익은 선법
사로 두근두근 다가선다. 그 길의 끝에는 선법사가 웅크리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객산(客山) 서쪽에 안긴 조그만 산사, 고려 초기 마애불과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마셨다는 샘터를 간직한 선법사(善法寺)

▲  선법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경내 좌측에 자리한 마애약사여래좌상과 객산폭포, 약수터(어용샘)

객산 서쪽 자락에 아늑하게 안긴 선법사는 풍경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 객산폭포의 물 떨어지
는 소리만이 맴도는 조용하고 그윽한 곳이다. 절을 구성하는 건물이라고 해봐야 고작 법당(法堂
)인 극락보전과 삼성각, 요사가 전부인 말그대로 손바닥만한 절로 산 사이 비좁은 계곡에 자리
해 있어 깊숙한 산골에 들어온 기분이 물씬 솟아난다.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전해오는 것은 없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세월에 묻히고 장
대했을 역사는 산산히 흩어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경내에는 선법사 제
일의 보물인 마애약사여래좌상과 객산폭포,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마셨다는 어용샘이란
약수터가 절의 오랜 내력을 아련히 증명해줄 따름이다.

마애약사여래좌상에는 태평 2년(977년)에 불상을 손질했다는 명문이 있어 그 이전부터 절이 있
었음을 보여주며, 절 뒤쪽 언덕에는 주춧돌과 6각형 기단석(基壇石) 등이 흩어져 있는데, 여기
서 백제(百濟)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또한 옛 광주(
廣州)의 중심지인 춘궁동과도 가까워 고려 초기 광주 지역 세력가이자 고려 황실의 외척으로 막
강한 권력을 누렸던 왕규(王規) 세력의 지원을 입었을 것이다.
그 이후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마애불과 빈터만 남아 오던 것을 1934년 승려 혜각(慧覺)이 절
을 짓고 신광사(新光寺)라 하였으며, 1970년 범산(梵山)이 선법사로 이름을 갈았다.

절로 들어서면 경내를 가리고 들어앉은 2층 규모의 요사(寮舍)가 나온다. 경내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 모습으로 단단히 또아리를 튼 요사는 속세에 대한 절의 폐쇄적인 인상을 풍긴다.
요사 옆구리로 가면 경내로 들어서는 계단이 펼쳐진다. 그 계단을 오르면 선법사의 법당인 극락
보전이 절을 찾은 중생을 바라본다. 계단과 극락전과의 거리가 좁은 탓에 계단을 하나씩 올라설
때마다 아침 해가 떠오르듯 커져 만가는 극락전의 위용에 크게 놀라 주눅이 들 정도다.

남향을 한 극락보전은 1990년에 증축된 것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
을 모셨다. 세로로 쓰인 현판(懸板)이 눈에 띄는 건물의 지붕 용마루 양 사이드에는 수려한 치
미(雉尾)가 뿔처럼 달려 건물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극락전 앞뜰 좌우로는 가을 옷을 걸친 붉은 단풍나무가 뜰을 장식한다. 가을도 마애약사불이 좋
은지 이곳에 머물러 좀처럼 떠날 줄을 모른다. 그냥 머물기는 심심했을까? 아름다운 작품을 빚
어 그에 대한 마음을 표한다. 한참 절정에 다다른 단풍나무, 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  극락보전 우측에 모셔진 지장보살(地藏菩薩)

▲  선법사 삼성각(三聖閣)

극락보전 우측에는 우리나라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이 된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
을 모신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증축을 해서 그런지 건
물을 이루는 목재가 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화(七星幀畵)


♠  고려 초에 조성된 조그만 마애불, 고려가 황제국(皇帝國)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귀중한 보물 ~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校山洞 磨崖藥師如來坐像)
보물 981호

극락보전 좌측에는 세모 모양의 묘한 바위가 나그네의 눈길을 잡아 끈다. 잘 다듬어진 그 바위
남쪽 면 꼭대기에는 마치 부처가 현생(現生)한 것일까? 생생한 모습의 마애석불이 잔잔한 미소
를 머금고 있으니, 바로 선법사의 명물이자 중요한 밥줄인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예전 이름
은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이다. 불상 앞에는 돌로 쌓여진 높이 1m 정도의 약간은 넓다란 기
도처가 있는데 바닥을 이루는 돌이 울퉁불퉁하여 예불을 올리려면 약간의 고충이 뒤따른다.

화려한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이 불상은 고려 초기(10세기 초~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왕규로 대표되는 광주 왕씨 세력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듯 싶다. 얕음
새김과 선각(線刻)이 서로 조화를 이룬 마애불로 높이는 겨우 93cm에 불과하여 무지막지하게 큰
마애불과 석불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고려시대 석불치고는 너무나 작은 덩치이다.
허나 불상이 작다고 실망하고 돌아설 필요는 없다. 덩치가 크다고 꼭 좋은 불상도 아니기 때문
이다. 오히려 덩치는 크나 작품성이 반비례인 불상이 꽤나 많다. 그에 반해 이 석불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불상이며, 특히 좌측에 새겨진 명문은 그의 가치를 몇만 배나
상승시켰다. 특히 명문의 내용은 역사학계에서도 꽤 주목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소발(素髮)로 그 위로 육계가 좌
측으로 비스듬히 솟아있다. 단정하고 부드러운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평안함을 안겨
준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반쯤
감겨있는 것 같다. 코는 짧지만 오목해 보이며
입에는 아련하게 미소가 떠 있다. 두 귀는 길쭉
하여 어깨에 닿을 정도이며 뒷통수에 떠 있는
동그란 두광(頭光)은 3중으로 진하게 표현되어
마치 빛이 강하게 발한 듯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쳐를 취했으며, 다리 위로 내린 왼손바닥에
는 약합(藥盒)이 놓여져 있어 그가 동방정토(東
方淨土)의 주인인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리고 오른
쪽 어깨를 훤히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옷주름은 형식화되었다. 몸통 뒤로는 긴 타원형
의 신광(身光)이 그의 몸을 3중으로 밝혀준다.
1번째와 2번째 신광은 간격이 좁고 뚜렷해 보이
지만 3번째 신광은 선이 희미하다.

불상이 앉은 연화대좌는 복련(伏蓮, 잎이 아래를 향한 연꽃)을 제일 밑바닥에 깔고 그 위로 2중
의 대석(臺石)을 두었으며, 4개의 굵직한 기둥이 앙련(仰蓮, 잎이 하늘로 향한 연꽃)이 곱게 치
장된 대좌의 윗부분을 받쳐든다. 돌에 피어난 앙련의 맵시가 얼마나 곱던지 진짜 연꽃 뺨칠 정
도여서 연꽃 구경을 제대로 못한 그해 여름의 한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것 같다. 세상에 저보
다 수려한 의자가 있을까? 호화로운 연화대좌가 정말 탐이 난다. 불상이 잠시 마실 간 사이 살
짝 앉아보거나 집으로 들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한다.

불상의 좌측에는 29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銘文)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존
재로 내용은 '太平二年 丁丑七月二十九日 古石佛在如賜以重修 爲今上皇帝萬歲願'이다. 해석을
해보면 '태평2년 정축년 7월 29일 오래된 석불이 있어 중수를 하면서 금상 황제의 만세를 기원
한다'
는 내용이다. 여기서 태평2년은 977년으로 고려 경종(景宗) 2년에 해당된다. 태평은 송(宋
)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확한 명칭은 태평흥국(太平興國)이다.

'古石佛在如賜以重修' 부분에 나오는 고석불과
중수란 단어는 이 불상의 조성시기가 그 이전임
을 알려주며, 불상의 조각수법 등으로 대략 10
세기 초반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爲今上皇帝萬
歲願'으로 금상황제의 만세를 기원한다는 내용
이다. 여기서 금상(今上)은 지금 나라를 다스리
는 군주를 뜻한다. 그렇다면 황제는 누굴까? 송
나라 태종일까? 거란 황제일까? 고려가 송나라
와 가깝게 지내긴 했으나 그건 송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수입하고 교류하기 위해서 그리고 함께
거란을 견제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국교를 맺은
것이지, 쓸데없이 송나라 황제의 건강을 기원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거란 황제일까? 그 당시
거란은 동북아의 강국이었다. 허나 고려는 거란
을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오만무도한 나라로
멸시했다. 오죽하면 그들의 사신을 섬에 가두고
선물로 바친 낙타까지 만부교(萬夫橋)에 보내
굶겨 죽였겠는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이다. 여기서 황제는 바로 다름아닌 고려의 군주인 경종이다. 경종은 절대왕
권을 휘두르며 지방세력을 그야말로 초토화시킨 광종(光宗, 949~975)의 아들이다.

고려는 겉으로는 왕이지만 실질적으로 황제를 칭한 엄연한 황제국이다. 비록 태조와 광종 시절
을 제외하고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은 문제점이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국익을 위해 주변
나라와 어울리기 위해 그런 것이다.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의 왕궁을 둘러싼 성을 황성(皇城)이라 불렀고 황성에서 궁궐의 정전(
正殿)인 회경전(會慶殿)까지는 문 5개를 거쳐야 했다. 황제의 궁궐은 문을 5개 지나야 궁궐 정
전에 이른다. 반면 조선은 명과 청의 지극한 제후국(諸侯國)이라 3개를 거치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고려시대의 여러 문서와 문인들이 쓴 시에도 군주를 황제라 표현했으며, 금(金)나라 황제
와 주변 나라에서 고려에 국서를 보낼 때 반드시 황제라 존칭했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는 충렬
왕(忠烈王)때까지 이어지다가, 원나라의 요구로 제후국으로 격하되고 만다.

이처럼 고려가 황제국이었음을 속시원히 증명해주는 중요한 보물의 하나로 그 가치는 상당하며,
그와 관련된 연구와 역사 관련 수업, 프로그램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불상이다. 다행히 명문이
불상처럼 선명하게 남아있어 지금도 글씨를 확인하는데 지장이 없다.

1,100년에 가까운 무수한 연세를 먹었음에도 건강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그동안 세월과 자연의
짓궂은 장난이 상당했음에도 말이다. 불상의 선 하나 하나가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약사불이 우
리 앞에 현생한 것 같은 생생한 모습이다. 비록 작지만 아름다움이 배어난 석불로 서울 인근에
서 이런 불상을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축복이 아닐까 싶다.


▲  선법사의 또다른 명물인 객산폭포와 어용(御用)

마애약사여래좌상 좌측에는 바위를 타고 미끄럼을 타는 조그만 물줄기가 있다. 바로 객산폭포(
客山瀑布)이다. 폭포란 단어가 어색할 정도로 그 규모가 왜소하지만 엄연히 물이 위에서 아래로
바위를 타고 떨어지고 있으므로 폭포의 조건은 충족하고 있다. 높이는 5m정도로 상류에서 발원
한 물은 폭포 아래 조그만 소(沼)에서 잠깐 숨을 돌리다가 한강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물줄기
가 너무 가늘어 폭포 분위기는 기대할 수 없지만 비가 많이 올 때는 상류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려 제법 폭포티가 난다고 한다.

폭포 옆에는 절을 찾은 중생의 목을 축여주는 고마운 샘터가 있다. 움푹 패인 조그만 웅덩이에
서 뿜어져 나오는 이 샘물은 백제를 세운 온조왕(溫祚王)이 즐겨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와 어용
샘이라 불린다. 물론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물맛은 글쎄~ 아무리 제왕이 마셨다고
한들 다를 것이 뭐 있겠는가? 그냥 물맛일 뿐이지..

어느덧 선법사의 뜰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온다. 3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선법사에 거의 30분 이
상을 머문 것 같다. 이곳에 서린 보물이 우리의 발길을 그렇게 오래 붙잡아 둔 것이다. 절을 등
지며 우리가 있어야 될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니 이리하여 하남시 춘궁동 나들이는 대
단원의 막을 고한다.

※ 선법사 찾아가기 (2011년 11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둔촌역(3번 출구)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고 서부농협 하차
* 지하철 2,8호선 잠실역(7번 출구), 5호선 올림픽공원역(2번 출구)에서 30-5번 시내버스를 타
  고 서부농협 하차
* 서부농협 정류장에서 고골4거리를 건너 정면(동쪽)으로 9분 정도 가면 선법사로 가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이정표가 있어 찾기는 쉬우며, 조그만 길을 10분 정도 들어가면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절까지 접근 가능하며 주차장 있음, 큰 차량은 진입이 어려움)
① 서울 잠실역 → 올림픽대교 남단5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직진 → 서부입구4거리(서하남나들목)
   에서 직진 → 고골4거리에서 직진 → 선법사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샛길로 진입 → 선법사
② 서울 천호동 → 길동4거리 지나서 보훈병원으로 우회전하여 직진 → 서부입구4거리에서 좌회
   전 → 고골4거리에서 직진 → 선법사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샛길로 진입 → 선법사
③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서하남나들목을 나와서 하남방면으로 우회전 → 고골4거리에서 직진
   → 선법사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샛길로 진입 → 선법사


*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55-3 (☎ 031-792-2654)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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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1년 11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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