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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양시 흥국사(興國寺) '

▲  흥국사 5층석탑과 약사전

                      朝來有心喜   아침이 다가오니 기쁜 마음이 있고
                      尺雪驗豊微   수북하게 쌓인 눈에 올해도 풍년이 드는 것을 알겠구나
 
                     * 1770년 겨울, 흥국사에서 하루를 머문 영조(英祖) 임금이 다음날 아침
                       절 뜨락에 수북히 쌓인 하얀 눈을 바라보며 지은 시


늦가을이 아름답게 하늘 아래 세상을 수놓던 11월 초, 고양시 노고산(老姑山)에 안긴 흥국
사를 찾았다. 이곳은 2005년 4월 초파일에 다녀간 적이 있던 곳으로 절 입구까지는 서울도
심에서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이 10분 내외 간격으로 강물 흐르듯 다니
고 있어 교통은 착한 편이다.

절 입구에 내려서면 제일 먼저 흥국사를 알리는 하얀 돌의 거대한 표석이 중생을 맞이한다.
표석을 지나면 속세와 절을 이어주는 다리 사곡교가 창릉천 위에 반듯이 놓여있다. 창릉천
(昌陵川)은 북한산과 노고산
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한데 모여 이루어진 하천으로 서울과 경
기도 고양시(高陽市)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흥국사가 있는 다리 북쪽은 경기도 고양
시, 버스정류장이 있는 다리 남쪽은 서울 은평구(恩平區) 땅으로 조그만 다리 하나를 사이
에 두고 행정구역이 싹 바뀌는 것이다.
또한 흥국사는 고양시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오로지 이곳 사곡교가 유일
하다. 그래서 고양시내에서 갈 경우에도 반드시 서울 땅을 거쳐야 된다.

창릉천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낙엽에 번뇌를 부탁하며, 다리를 건너면 절골마을<사곡(寺谷)
마을>이 나온다. 흥국사 밑에 자리한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으로 길가에 마을의 이름을 알
리는 조그만 표석이 물끄러미 서 있다.

마을에서 절까지는 시커먼 신작로가 놓여져 있다. 늦가을이 살며시 내려앉은 그 길에는 울
긋불긋 타오른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중생을 반긴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
들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물론 돌아서면 그 깨달음도 잊게 된다.
바람의 무심한 빗자루질에 흩날리는 낙엽들은 길을 걷는 이들을 우울쟁이로 돌변시킨다.

절골마을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부처의 세계를 알리는 일주문(一柱門)이 나온다. 남양주
수락산(水落山) 흥국사와 닮은꼴로 특이하게 평방(平枋) 앞에 절의 이름을 담은 현판을 달
았다. 현판도 '~~ 山 ~~ 寺'라고 쓰인 대신 아주 간단하게 '興國寺' 3자로 마무리 한 것도
이색적이다. (수락산 흥국사 답사기 ☞ 보러가기)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은 없으며 중생과 답사객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평등
하게 맞이하여 중생들에 대한 부처의 아낌없는 마음을 표현한다. 신(神)과 동물 사이로 어
중간하게 들어앉은 인간들이 저 문의 절반이라도 닮았더라면  이 세상은 정말로 살만한 세
상이 되었을텐데, 역시나 그런 세상은 꿈속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다.


일주문 주변에는 수레가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으며 한쪽 구석에는 약수터가 있다.
문을 들어서면 길 오른쪽에 절의 내력이 빼곡히 담긴 사적비가 나오며, 그 길의 끝에는 흥
국사가 자리해 있다.

◀  흥국사를 알리는 거대한 표석
오늘도 흥국사를 찾아오는 중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그렇게 서 있다.


▲  다가올 겨울의 제국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인 창릉천

▲  절골마을 마을회관 노송(老松)
흥국사 약사불의 불력(佛力)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그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절(흥국사)을 향해 45도 허리를 구부렸다.

▲  늦가을에 잠긴 흥국사 가는 길
저 길의 끝에는 약사도량 흥국사가 있다.

▲  낙엽을 수북히 뒤집어 쓴 흥국사 일주문(一柱門)
나무에서 버림받은 낙엽들의 마지막 안식처인가 보다.

◀  흥국사 사적비(事蹟碑)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절의 오랜 내력
(來歷)이 담긴 높이 3m의 사적비가 있다.


♠  노고산(한미산)에 안긴 아늑한 산사, 약사도량과 템플스테이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 노고산 흥국사(興國寺)


▲  흥국사 약사전(藥師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57호

흥국사는 말 그대로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절이다. 비록 불교와 관련된 이름은 아니지만 나라
의 흥성함을 뜻하는 좋은 이름이다 보니 흥국사란 이름을 지닌 절이 여럿 많으며 서울 주변에만
2곳이 성행중이다.
서울 주변의 흥국사―고양시 흥국사, 수락산 흥국사―는 모두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절
로 왕실과 지배층의 후원이 상당했다. 절에선 그들의 후원에 부응하려는 차원에서 기존의 이름
을 과감히 내던지고 흥국사로 이름을 바꿨는데, 신라나 고려처럼 호국(護國) 사찰의 성격보다는
왕실과 집안의 안녕과 조상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願刹)의 성격이 강했다.


북한산의 서쪽 줄기인 노고산<老姑山, 한미산(漢美山)> 동쪽 자락에 안긴 흥국사는 조계종 소속
으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러고 보
니 남양주 수락산의 흥국사도 우연인지 똑같이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다.

1. 믿을 수 없는 흥국사의 창건 시기와 그 이유
'미타전 아미타불 복장 연기문(彌陀殿 阿彌陀佛 腹臟 年紀文)'에 의하면 신라가 한참 백제의 잔
여 세력을 때려잡던 661년 어느 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북한산 원효봉에서
불도를 닦다가 느
닷없이 서북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그 기운을 쫓아 이곳에 이르니 서기
(瑞氣)를 발하고 있던 석조약사여래불이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으로 앞으로 많은 성인(聖人)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면서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 흥성암이 바로 흥국사의 전신
(前身)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이 곧대로 믿으면 정말 곤란하다. 흥국사가 정말 원효대사가 세웠는지 검
증도 되지 않았고, 그 시절 신라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도 한가롭게 절을 세울만한 상황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던 신라도 그 시절까지만 해도 왕경(王京)인 경주(慶
州) 지역에만 거의 절이 세워지던 상황이었다. 또한 흥국사가 있는 북한산성(北漢山城) 주변은
고구려와 가까운 신라의 북서쪽 전방으로 자주 전쟁이 터졌으며, 절이 창건되었다는 661년에도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원효대사는 그 당시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
며 불교 대중화에 힘쓰고 있었다.

2. 661년 원효대사의 행적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먹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그는 태종무열왕(太宗
武烈王)과의 친분으로 과부로 홀로 지내던 그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왕의 국정(國政)을 돕는 한편,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民心)을 달래고자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
면서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로 밀어내고 점차 신라 불교의 일인자로 커지게 된다.
       
그러던 중 661년, 당나라 황제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
겠지'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한다. 이번 고구려 정벌에는 당나라의 이
름있는 맹장(猛將)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10만이 넘는 대군을 파견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에 버금가는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죄다 데리고 가면서 고구려 정벌에 대한 자
신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얼어붙은 요하(遼河)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용케도 평양 부근 사수(蛇水, 지금의 합장강으로
대동강의 지류)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에 10만 대군은 완전
히 전멸하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은 모두 목 없는 귀신이 되어버린다.

한편 평양 서쪽으로 기어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군대가 보기좋게 궤멸(潰滅)을 당하
자 꼼짝없이 고립을 당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날씨도 춥지, 식량까지 부족하지, 고구
려군이 언제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취해갈지 모르는 그야말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였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목을 붙잡으며 간이 제대로 쫄깃해진 소정방은 신라로 서둘러 전령을 보
내 식량과 원군을 요청했다.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며 비위를 맞추느라 바쁘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청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허나 날씨도 매우 춥고, 고구려 땅 깊숙한 곳이라 원군을 보내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 고민하다
가 김유신(金庾信)에게 군사와 군량을 수송케 하였는데 이때 분황사에 머물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는 그들을 때려잡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하며 기다렸다. 이를 소정방이 알아채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
는데, 그 암호문을 원효가 해독하여 숨어있던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 수송의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의 원효대사의 행적들이다.

3. 1천 년의 공백을 깨고 17세기 이후 다시 등장한 흥국사
흥국사가 창건된 이후 이상하게도 17세기 후반까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를 않다. 도중에 절
이 파괴되거나 곱지 않게 문을 닫으면서 오랜 세월 방치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리 그
래도 1,000년 동안 이렇다 할 내력과 유물(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 300여 년 묵은 상수리나
무와 18세기에 만든 약사전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임..)
이 전혀 없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에 고려 때 창건되었을 가능성 조차 적어 보인다. 혹여 조선 중기(16~17세기)에 창건
된 것을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끌어올린 것은 아닐까? 그들이 주장하는 창건시기부터 17세
기까지 이해가 어려운 오랜 공백이 존재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그저 난감할 뿐이다.

어쨌든 17세기 이후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면, 1686년(숙종 12년)에 절을 중창했다고 하며, 이
때가 진정한 창건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고 1758년(영조 34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
타전(彌陀殿)에 아미타불을 새로 만들어 모셨다.
1770년(영조 46년) 겨울, 영조(英祖)가 그의 생모(生母)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무덤인 소녕원
(昭寧園,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을 참배하고 환궁하다가 갑작스런 폭설을 만나 흥국사에서 하룻
밤을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왕은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시(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걸 편액(扁額)으로 만들어 절에 하사하고, 돈과 쌀을 지원하여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이렇게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흥국사는 왕실의 또 다른 원찰(願刹)이 되어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
원했다.

1785년(정조 9년)에는 승려 관선, 법헌 등이 절을 중창하였고, 1792년 후불(後佛)탱화를 제작하
여 봉안했으며, 1854년(철종 5년) 400근짜리 종과 칠성목탱 등을 시주받았다. 1867년 곽명이 약
사전을 중건했으며 1876년에는 칠성각(七星閣)을 중건했다. 1878년에는 왕실에서 내린 돈으로
거대한 괘불을 조성하고 1886년 팔상탱화와 신중탱화를 만들어 봉안하였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도 총과 폭탄이 알아서들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그 이후 설법전,
요사 등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른다.

4. 현재의 흥국사
조촐한 흥국사 경내는 법당(法堂)인 약사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설법전 등 7~8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극락구품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약사전,
괘불(掛佛) 등 지방문화재 4점과 향토유적 1점, 보호수로 지정된 상수리나무 3그루가 있어 절의
적지 않은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가람배치는 하나의 법당과 탑으로 이루어진 1금당 1탑 형식으
로 약사전 앞에 5층석탑이 서 있다.

흥국사는 매월 1,3째 토요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여 중생들에게 산사 체험과 예
불(禮佛), 다도(茶道)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하루종일 예불과 참선 등으로 몸이 좀 고달프긴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
할 수 있는 기회로 몇 번 쯤은 해볼만한 체험이다. 나도 아직 경험은 없지만 조만간 도전해볼
생각이다. (몇 년째 말로만...)

이곳은 숲이 무성한 아늑한 산중으로 속세를 등지고 한동안 묻혀 지냈으면 하는 충동을 일으키
며, 마음을 수양하고 참선하기에 딱 그만인 곳이다.

▲  흥국사 범종각(梵鍾閣)

▲  흥국사 연못

※ 흥국사 찾아가기 (2011년 12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을지로입구(2호선 3번 출구), 광화문(5호선 7번 출구), 서대문(
  5호선 4번 출구), 녹번역(3호선 1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4
  번을 타고 흥국사입구 하차
*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구파발역(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34,
  704번 시내버스 이용
* 주말과 휴일에는 구파발역(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북한산성입구를 오가는 8772번 주
  말임시노선이 10~15분 간격으로 추가 운행된다. (흥국사입구 경유)
* 흥국사입구 정류장에서 절까지 도보 10분 거리
* 연신내 메트로타워(연신내역 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흥국사 셔틀차량이 매일 오전 9
  시 40분에 출발하며 구파발역 1번 출구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한다.
* 승용차 (일주문 앞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시내 → 연신내에서 우회전하여 직진 → 입곡3거리에서 우회전 → 흥국사입구에서 좌회
   전 → 절골마을 → 흥국사
② 서울외곽고속도로 → 송추나들목에서 구파발 방면 → 북한산성입구 → 흥국사입구에서 우회
   전 → 절골마을 → 흥국사

♠ 흥국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흥국사 괘불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89호)은 사월초파일과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등 주요 행사 때만 제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흥국사 템플스테이 관련 정보와 온라인 신청은
☞ 여기를 클릭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 (☎ 02-381-7970~1)
* 흥국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하기 바란다.


▲  흥국사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위용

▲  가을하늘의 조그만 거울, 흥국사 연못


▲  수령(樹齡) 300년의 상수리나무

일주문을 지나면 흥국사의 불전(佛殿)이 서서히
히 솟아나듯 보이기 시작한다. 설법전 아래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조그만 연못이
놓여져 있는데 개구리가 꾸벅 졸고 있는 연못의
잔잔한 수면에는 낙엽이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들의 심정은 아마도 복잡들 하
겠지. 주변 나무들은 연못을 거울로 삼으며 그
들의 가을의 옷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연못 곁에는 고양시 보호수로 지정된 상수리나
무가 있다. 가을에 걸맞게 치장된 이 나무는 17
세기 후반, 흥국사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
낸 시절에 심어져 절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한
오랜 벗이다.

하늘로 곧게 솟아나지 못하고 약간 구부러져 있
으며 세월의 무게를 버티기 어려운지 철로 만든
기둥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니 역시 세월 앞에
장사는 없는 모양이다. 경내에는 이 나무 외에
도 수령 200~300년 먹은 오랜 나무가 2~3그루
더 있다.


▲  연못 북쪽 돌방(石室) 안에 자리한 불상, 동자 식구들

연못 북쪽에는 조그만 존재들의 보금자리인 돌방이 있다. 인자한 표정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
을 하며 앉아있는 금동불. 그의 목에는 커다란 염주가 걸려 있다. 2005년에도 있더니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우측에는 하얀 색의 커다란 조개 껍데기가 놓여져 있는데 그 안에
는 귀여운 모습의 동자상이 앉아있다. 다들 근심이 없는 편안한 모습들, 그런 그들에 잔뜩 시샘
이 간다.


♠  흥국사 경내 둘러보기

▲  흥국사 설법전(說法殿)

흥국사의 강당(講堂)인 설법전은 'ㄱ'자 형태의 커다란 건물로 경내가 외부에 온전히 보이지 않
도록 가리고 있다. 설법전 앞에는 괘불을 거는 높다란 깃대가 솟아 있으며 불단에는 흥국사가
자랑하는 보물 2점이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04호

극락구품도를 뒷배경으로 삼아 유리상자 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이 불상은 나
무를 깎아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불상의 머리는 꼽슬머리(螺髮)로 머리 정상에는
육계(= 무견정상)가 약간 튀어나왔고, 이마에는
둥그런 백호가 떠 있으며, 눈썹은 홍예다리처럼
구부러져 있다. 좌우로 긴 두 눈은 아래를 바라
보며 지그시 떠 있고 코는 오목하다. 붉은 입술
에는 미소가 살짝 담겨져 있고, 귀는 길쭉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법의(法衣)
는 양쪽 어깨를 덮으며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
내렸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1758년에 불상을 손질했다는
기록을 통해 대략 18세기로 여겨지며 불상의 높
이가 겨우 2자 남짓에 무게도 가벼워 도난의 위
험이 도사리므로 지금은 유리상자 안에 봉안했
다. 새장처럼 상자 안에 갇힌 아미타불, 아무리
보호 때문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갑갑할까..
불상의 사진은 문화재청 사진을 참조했다.


▲  극락세계를 담은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아미타여래좌상의 후불탱화 대신 걸려 있는 극락구품도는 전체를 9등분하여 극락세계를 묘사한
그림으로 가로 2m, 세로 1.4m의 불화(佛畵)이다.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아미타회상(會相) 장면
4면과 왕생(往生) 장면 5면으로 구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희귀한 그림으로 상품(
上品)의 극락정토와 중삼품(中上品), 중중품(中中品)의 왕생정토를 묘사했다고 한다.
그림에 나오는 극락세계의 궁궐은 우리나라 궁궐 건축물과 흡사하여 친근감을 주며 황토색과 녹
색을 중심으로 채색되었다. 각 그림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담겨져 있으나 내용이 어렵고 복잡
하여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 수락산 흥국사에서 활약한 화승(畵僧) 금곡당 영난(金谷堂 永煖)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

설법전의 옆구리로 경내로 들어서면 5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경내가 펼쳐진다. 석탑 정면에는 흥
국사의 법당(法堂) 약사전이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휘날리며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나한전과 명
부전이 자리를 지킨다.

약사전(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57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인데,
이는 약사불이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이라 그런 배치를 취했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70년(영조 46년) 절을 중건할 때 기존 약사전을 크게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한 18
세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던 듯 싶다. 지금의 건물은 1867년(고종 4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평방
(平枋) 위로 공포들로 가득한 다포(多包) 양식을 하고 있다.
그리 화려하지도 그리 크지도 않은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불전 양식
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약사전을 받들고 있는 석축에는 고색의 때로 만연하여 흥국사의 굵
직한 내력을 보여준다.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전의 주인장 약사여래불이 동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이 불상은 18세기
후반, 약사전을 크게 확장하면서 만든 것으로 얼굴의 볼 부분에 살이 많아 뚱뚱하면서 약간 둔
한 인상을 주나 나름대로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케 해준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훤하게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그의 왼손에는 다른 약사불과 마찬
가지로 약합 1병이 들려져 있으며 그의 뒤에는 1792년(정조 16년)에 그려진 약사후불탱화가 든
든히 자리해 있다.

◀  악귀(惡鬼)를 쫓으려는 의도로 약사전 계단
에 배치된 돌사자 1쌍

사자의 모습이 너무 고양이처럼 귀엽고 사랑스
러워 사자의 용맹함은 도저히 보이질 않는다.
악귀들도 그의 귀여움에 넋이 나간 나머지 그만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돌아가는 것은 아닐
까?


▲  흥국사 나한전(羅漢殿) - 고양시 향토유적 34호

약사전 우측에는 맞배지붕에 '卍'마크가 새겨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나한전이 있다. 이 건물
의 건립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여겨지며 원래는 나한전이 아닌 칠성각(七星閣)으로 1876년에 중
건되었다. 1996년까지 칠성각으로 쓰이다가 칠성신을 모신 삼성각(三聖閣)을 따로 세우면서 삼
성각에 통합되었다. 그래서 이 전각을 무슨 용도로 쓸까 머리를 굴리다가 1902년에 나한전을 세
웠다는 기록이 있어 가람배치에 맞게 나한전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와 후불탱화, 16아라한(阿羅漢)을 모셨으며 1878년에 그려진 괘불(掛佛)은
주로 이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  나한전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화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며 조용히 명상에 잠긴
부처의 모습, 그 주변으로 16명의 아라한(阿羅
漢)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있고, 불상 뒤
에는 1832년에 그려진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  흥국사 5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약사전 좌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명부전이 나한전을 마주 본다. 지붕에 卍
마크가 있으며, 거의 나한전과 쌍둥이꼴이다. 이 건물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망자(亡者)를
심판하는 염라대왕(閻羅大王) 등의 10왕, 판관(判官) 등 명부(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모셔져 있
다.

약사전 앞뜰에는 근래에 만든 5층석탑이 있다. 하얀 피부의 때깔이 고은 탑 안에는 부처의 사리
1과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  흥국사 삼성각(三聖閣)

경내 서쪽 구석에는 1996년에 지은 삼성각이 드넓은 공터를 지킨다. 이곳에는 칠성(七星, 치성
광여래)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삼성(三聖)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치성광여래(칠성신) 금동목각탱화

산신과 독성을 협시불로 대동하며 가운데에 자
리한 치성광여래불, 산신과 독성과 달리 여래(
如來)의 반열까지 오른 칠성신은 그런 이유 때
문인지 특별하게도 금동탱화로 만들었다. 탱화
가 얼마나 화려한지 약간은 어두운 삼성각 내부
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쳐준다.
탱화 앞에는 치성광여래 3존불이 돌로 만든 연
화대(蓮花臺)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중생을 넌
지시 맞이한다.

◀  수령 250년의 상수리나무
삼성각 앞쪽에는 수령 250년이 넘었다는
상수리나무 1그루가 또아리를 틀었다.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 3.3m 
지정번호 : 경기-고양-31호


▲  자연과 부처의 마음이 담긴 흥국사 약수터
뿔이 둘 달린 용의 입에서 옥계수(玉溪水)가 졸졸 흘러나와 중생들의 마른 목을 축여준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은 늘 쉬지 않고 졸졸졸 나온다고 한다.

▲  약사전 뒤에 또 다른 상수리나무

약사전 뒤에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나무의 높이는 12m에 불과
하나 약사전보다 약간 높은 곳에 둥지를 트고 있어 상당히 커 보인다.
흥국사에는 특이하게도 200~300년 먹은 상수리나무가 경내 곳곳에 뿌리를 내렸는데 풍수지리(風
水地理) 때문일까? 아니면 절의 주지승이 그 나무를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참으로 궁금할 따
름이다. 나무의 둘레 - 3.3m, 지정번호 : 경기-고양-30호

어쩔 수 없는 속세인(俗世人)으로써 몸뚱이는 다시 속세로 나와야되지만 속세에 의지할 데 없는
마음만은 절에 고스란히 남겨두며 늦가을 흥국사 나들이는 이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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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1년 12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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