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는 말 그대로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절이다. 비록 불교와 관련된 이름은 아니지만 나라
의 흥성함을 뜻하는 좋은 이름이다 보니 흥국사란 이름을 지닌 절이 여럿 많으며 서울 주변에만
2곳이 성행중이다.
서울 주변의 흥국사―고양시 흥국사, 수락산 흥국사―는 모두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절
로 왕실과 지배층의 후원이 상당했다. 절에선 그들의 후원에 부응하려는 차원에서 기존의 이름
을 과감히 내던지고 흥국사로 이름을 바꿨는데, 신라나 고려처럼 호국(護國) 사찰의 성격보다는
왕실과 집안의 안녕과 조상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願刹)의 성격이 강했다.
북한산의 서쪽 줄기인 노고산<老姑山, 한미산(漢美山)> 동쪽 자락에 안긴 흥국사는 조계종 소속
으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러고 보
니 남양주 수락산의 흥국사도 우연인지 똑같이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다.
1. 믿을 수 없는 흥국사의 창건 시기와 그 이유
'미타전 아미타불 복장 연기문(彌陀殿 阿彌陀佛 腹臟 年紀文)'에 의하면 신라가 한참 백제의 잔
여 세력을 때려잡던 661년 어느 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북한산 원효봉에서 불도를 닦다가 느
닷없이 서북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그 기운을 쫓아 이곳에 이르니 서기
(瑞氣)를 발하고 있던 석조약사여래불이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으로 앞으로 많은 성인(聖人)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면서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 흥성암이 바로 흥국사의 전신
(前身)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이 곧대로 믿으면 정말 곤란하다. 흥국사가 정말 원효대사가 세웠는지 검
증도 되지 않았고, 그 시절 신라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도 한가롭게 절을 세울만한 상황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던 신라도 그 시절까지만 해도 왕경(王京)인 경주(慶
州) 지역에만 거의 절이 세워지던 상황이었다. 또한 흥국사가 있는 북한산성(北漢山城) 주변은
고구려와 가까운 신라의 북서쪽 전방으로 자주 전쟁이 터졌으며, 절이 창건되었다는 661년에도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원효대사는 그 당시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
며 불교 대중화에 힘쓰고 있었다.
2. 661년 원효대사의 행적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먹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그는 태종무열왕(太宗
武烈王)과의 친분으로 과부로 홀로 지내던 그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왕의 국정(國政)을 돕는 한편,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民心)을 달래고자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
면서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로 밀어내고 점차 신라 불교의 일인자로 커지게 된다.
그러던 중 661년, 당나라 황제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
겠지'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한다. 이번 고구려 정벌에는 당나라의 이
름있는 맹장(猛將)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10만이 넘는 대군을 파견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에 버금가는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죄다 데리고 가면서 고구려 정벌에 대한 자
신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얼어붙은 요하(遼河)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용케도 평양 부근 사수(蛇水, 지금의 합장강으로
대동강의 지류)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에 10만 대군은 완전
히 전멸하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은 모두 목 없는 귀신이 되어버린다.
한편 평양 서쪽으로 기어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군대가 보기좋게 궤멸(潰滅)을 당하
자 꼼짝없이 고립을 당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날씨도 춥지, 식량까지 부족하지, 고구
려군이 언제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취해갈지 모르는 그야말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였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목을 붙잡으며 간이 제대로 쫄깃해진 소정방은 신라로 서둘러 전령을 보
내 식량과 원군을 요청했다.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며 비위를 맞추느라 바쁘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청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허나 날씨도 매우 춥고, 고구려 땅 깊숙한 곳이라 원군을 보내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 고민하다
가 김유신(金庾信)에게 군사와 군량을 수송케 하였는데 이때 분황사에 머물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는 그들을 때려잡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하며 기다렸다. 이를 소정방이 알아채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
는데, 그 암호문을 원효가 해독하여 숨어있던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 수송의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의 원효대사의 행적들이다.
3. 1천 년의 공백을 깨고 17세기 이후 다시 등장한 흥국사
흥국사가 창건된 이후 이상하게도 17세기 후반까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를 않다. 도중에 절
이 파괴되거나 곱지 않게 문을 닫으면서 오랜 세월 방치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리 그
래도 1,000년 동안 이렇다 할 내력과 유물(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 300여 년 묵은 상수리나
무와 18세기에 만든 약사전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임..)이 전혀 없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에 고려 때 창건되었을 가능성 조차 적어 보인다. 혹여 조선 중기(16~17세기)에 창건
된 것을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끌어올린 것은 아닐까? 그들이 주장하는 창건시기부터 17세
기까지 이해가 어려운 오랜 공백이 존재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그저 난감할 뿐이다.
어쨌든 17세기 이후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면, 1686년(숙종 12년)에 절을 중창했다고 하며, 이
때가 진정한 창건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고 1758년(영조 34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
타전(彌陀殿)에 아미타불을 새로 만들어 모셨다.
1770년(영조 46년) 겨울, 영조(英祖)가 그의 생모(生母)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무덤인 소녕원
(昭寧園,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을 참배하고 환궁하다가 갑작스런 폭설을 만나 흥국사에서 하룻
밤을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왕은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시(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걸 편액(扁額)으로 만들어 절에 하사하고, 돈과 쌀을 지원하여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이렇게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흥국사는 왕실의 또 다른 원찰(願刹)이 되어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
원했다.
1785년(정조 9년)에는 승려 관선, 법헌 등이 절을 중창하였고, 1792년 후불(後佛)탱화를 제작하
여 봉안했으며, 1854년(철종 5년) 400근짜리 종과 칠성목탱 등을 시주받았다. 1867년 곽명이 약
사전을 중건했으며 1876년에는 칠성각(七星閣)을 중건했다. 1878년에는 왕실에서 내린 돈으로
거대한 괘불을 조성하고 1886년 팔상탱화와 신중탱화를 만들어 봉안하였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도 총과 폭탄이 알아서들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그 이후 설법전,
요사 등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른다.
4. 현재의 흥국사
조촐한 흥국사 경내는 법당(法堂)인 약사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설법전 등 7~8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극락구품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약사전,
괘불(掛佛) 등 지방문화재 4점과 향토유적 1점, 보호수로 지정된 상수리나무 3그루가 있어 절의
적지 않은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가람배치는 하나의 법당과 탑으로 이루어진 1금당 1탑 형식으
로 약사전 앞에 5층석탑이 서 있다.
흥국사는 매월 1,3째 토요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여 중생들에게 산사 체험과 예
불(禮佛), 다도(茶道)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하루종일 예불과 참선 등으로 몸이 좀 고달프긴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
할 수 있는 기회로 몇 번 쯤은 해볼만한 체험이다. 나도 아직 경험은 없지만 조만간 도전해볼
생각이다. (몇 년째 말로만...)
이곳은 숲이 무성한 아늑한 산중으로 속세를 등지고 한동안 묻혀 지냈으면 하는 충동을 일으키
며, 마음을 수양하고 참선하기에 딱 그만인 곳이다. |
※ 흥국사 찾아가기 (2011년 12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을지로입구(2호선 3번 출구), 광화문(5호선 7번 출구), 서대문(
5호선 4번 출구), 녹번역(3호선 1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4
번을 타고 흥국사입구 하차
*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구파발역(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34,
704번 시내버스 이용
* 주말과 휴일에는 구파발역(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북한산성입구를 오가는 8772번 주
말임시노선이 10~15분 간격으로 추가 운행된다. (흥국사입구 경유)
* 흥국사입구 정류장에서 절까지 도보 10분 거리
* 연신내 메트로타워(연신내역 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흥국사 셔틀차량이 매일 오전 9
시 40분에 출발하며 구파발역 1번 출구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한다.
* 승용차 (일주문 앞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시내 → 연신내에서 우회전하여 직진 → 입곡3거리에서 우회전 → 흥국사입구에서 좌회
전 → 절골마을 → 흥국사
② 서울외곽고속도로 → 송추나들목에서 구파발 방면 → 북한산성입구 → 흥국사입구에서 우회
전 → 절골마을 → 흥국사
♠ 흥국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흥국사 괘불(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89호)은 사월초파일과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등 주요 행사 때만 제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흥국사 템플스테이 관련 정보와 온라인 신청은 ☞ 여기를 클릭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 (☎ 02-381-7970~1)
* 흥국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하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