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대전 무수동(무수천하마을)


' 대전 무수동 봄맞이 나들이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산수유나무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산수유나무와 사당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오랜 겨울에 지친 천하만물을 따스히 어루만지던 3월
의 끝 무렵, 천하 제일의 첨단과학 대도시, 대전(大田)을 찾았다.
우선 대전과 금산(錦山) 경계에 자리한 만인산(萬仞山, 538m)과 그 품에 펼쳐진 만인산
자연휴양림(☞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다음 메뉴인 무수동(無愁洞)으로 길을 잡았다.

대전 도심의 대표 지붕인 보문산(寶文山, 457m)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자리한 무수동은
300년 역사를 지닌 시골 마을로 오래된 기와집과 문화유산을 풍부히 간직하고 있다. 대
전 도심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대도시 대전에 이런 곳이 있었나?' 구미가 크게 땡겨 만
인산 후속 메뉴로 삼았는데, 그곳이 비록 대전 속이긴 하지만 산골에 묻힌 벽지라 교통
편은 그리 착하지는 못하다.
다행히 만인산에서 대전 시내로 나오는 길목에 자리한 산내동(山內洞)에서 무수동 입구
인 침산동(砧山洞)까지 대전시내버스 30번(낭월차고지↔대전역동광장, 100~110분 간격)
이 가뭄에 콩 나듯 다니고 있어 그것을 타면 조금은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만인산공원에서 대전시내버스 501번(비래동↔마전)을 타고 산내동 산내초교에서 내리니
30번 버스가 약 30분 뒤에 도착 예정이다. (미리 시간표를 확인했음) 그래서 그 시간을
억지로 죽여가며 기다리니 버스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산내동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죄다 도심 쪽으로 직진하나 이 버스는 보문산 남쪽 산골
마을의 교통을 책임지는 외곽 노선이라 52번 버스와 함께 대별교에서 좌회전한다.
대별교부터 무수동입구까지는 농촌과 산골, 구불구불 고갯길이 도돌이표처럼 이어져 대
도시 대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데, 흔히 서울과 부산, 인천, 대전 같은 대도시하
면 무조건 번잡한 시가지만 생각한다. 대전 30번은 대도시에 대한 그런 뿌리 깊은 고정
관념에 경종을 주려는 듯, 대별동, 소호동, 금동, 정생동, 목달동 등 보문산 남쪽에 안
긴 산골마을을 고루고루 구경을 시켜주며 침산동 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동쪽
시골길(운남로)로 들어서면 무수동, 구완동으로 이어진다. (운남로는 무수동과 바깥 세
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신작로임)


▲  무수동입구(침산2교)로 마중 나온 장승들



 

♠  무수동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宗家)' 주변

▲  오늘도 평화로운 무수동의 전원 풍경

장승의 환영을 받으며 무수동으로 인도하는 운남로로 들어섰다. 무수동은 이 땅에 아주 흔한
농촌마을이지만 겉모습과 다르게 300년 이상 숙성된 대전에 흔치 않은 오래된 집성촌(集姓村)
이다. 유회당과 기궁재 등의 오래된 한옥이 여럿 남아있으며 부추와 자운영쌀을 비롯한 친환
경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어 계절별 농촌체험이 가능하다. 게다가 고추장과 된장 등 전통장류
와 떡과 한과 등 전통음식 체험까지 누릴 수 있는 대도시에서 흔치 않은 시골 전통마을로 대
전 지역에서 제법 이름을 얻고 있다. (2006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었고, 농어촌관광공
사에서 트래킹하기 좋은 농촌관광코스로 선정하기도 하였음)

보문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무수동은 북쪽과 동쪽은 보문산으로 막혀있고, 남쪽은 구완
천이 흐르며, 서쪽은 유등천이 흐르는 다소 구석진 곳이다. 예로부터 철이 많이 나서 무쇠골,
놋골, 물쇠골, 수철리 등으로 불렸는데, 이는 우리 동네인 도봉산(道峯山) 자락 무수골과 비
슷하다. (☞ 도봉산 무수골 보러가기)

조선 숙종(肅宗) 시절, 안동권씨인 권유(權惟)가 이곳에 터를 잡고 머물렀는데, 이곳 경치에
홀딱 반한 나머지 무쇠골과 이름을 비슷하게 하여 '무수옹(無愁翁)'을 아호(雅號)로 삼았다.
즉 근심이 없는 노인네란 뜻이다. 그리고 이곳 지명 또한 걱정이 없는 마을인 '무수리'로 싹
갈아버렸으니 그만큼 이곳이 그의 근심을 제대로 털어갔던 모양이다.

권유는 자신의 마음을 앗아간 무수동 뒷산에 고이 묻혔으며, 그의 아들 권이진(權以鎭, 1668~
1734)이 부모가 묻힌 이곳으로 삶터를 옮겨 완전히 정착했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마을 뒷
산에 제당(祭堂)을 손수 지어 매년 산신제를 지냈으며, 많은 돈을 쏟아부어 유회당과 기궁재,
삼근정사 등의 집을 주렁주렁 지어 그만의 작은 세상을 연출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무수
동을 지키면서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유서 깊은 무수동에는 유회당 종가와 유회당, 기궁재, 여경암, 거업재, 산신당 등의 오
래된 건물과 유회당판각, 유회당 권이진가(家) 유물 일괄(대전 지방문화재자료 17호), 무수동
산신제 동계첩(洞契帖, 대전 지방민속문화재 3호)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또한 무수동 산신제
(山神祭, 대전 지방무형문화재 19호)는 300년 묵은 마을의 공동 행사로 정초(正初)에 적당한
날을 잡아 산제당(山祭堂)이 있던 자리에서 제를 지낸다.
어수선했던 19세기 중반과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6.25전쟁, 1960~70년대 산업화를 거치
면서 산신제는 여러 번 중단되거나 존폐의 위기를 맞았고 한때는 절에 행사를 맡기는 무책임
함까지 보였다. 그러다가 2008년 제49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한 인연으로 마을에서 '무
수동산신제 보존회'를 결성하여 애지중지 키우면서 대전 제일의 전통민속행사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으며, '무수동 산신제 및 토제마짐대놀이'란 이름으로 매년 음력 1월 14일에 열고 있
다.
이들 문화유산 외에도 마을 뒤쪽 국사봉(國師峰) 정상에는 오래된 제사 유적이 남아있다. ('
국사봉 유적'이란 이름으로 대전 지방문화재자료 38호로 지정되었음) 이들은 안동권씨가 터를
잡기 이전의 유적으로 흙으로 만든 말과 분청사기, 청자 등의 자기 조각, 기와 조각이 나왔는
데, 흙으로 빚은 말이 나온 인연으로 정월대보름 전날(음력 1월 14일)에 여는 행사 이름에 '
토제마짐대놀이'란 이름을 붙였다.

무수동은 '무수천하마을'을 칭하고 있다. 이는 근래 칭한 것으로 '하늘 아래 근심 걱정이 없
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래서일까? 마을이 정말 평화로워 보인다. 게다가 애미도 몰라본다는
개발의 칼질도 이곳만큼은 제대로 마수를 뻗지 못해 시골 모습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다만 마
을 바로 남쪽으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차량들의 소음이 적지 않게 옥의 티가
되고 있다.


▲  유회당 종가 앞에 솟은 은행나무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채 애타게 봄의 손길을 원하는 그는
무수동에서 가장 늙은 나무로 300년 정도 묵었다.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有懷堂 宗家) 일원 -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29호

무수동입구(침산2교)에서 운남로를 따라 8분 정도 들어가면 커다란 은행나무와 함께 광영정,
연못, 사랑채와 안채를 지닌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권이진이 무수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은 것으로 이후 화재로 몽땅 소실된 것을 후손
들이 1788년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은 것이다. 보문산 남쪽을 뒷배경으로 하고 구완천을 앞에
둔 배산임수(背山臨水) 자리로 이는 산과 내를 벗삼아 생활하며 청결하고 참된 선비의 경지를
추구하겠다는 생활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종가는 사랑채와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들 크기가 작다. 대신 건물과 건물 사이
의 공간을 여유롭게 배치해 뜨락만큼은 매우 넓으며, 그러다보니 집도 다소 넓게 보인다. 낮
은 잡석 기단(基壇) 위에 사랑채, 안채를 짓고, 집 앞에는 조촐하게 광영정과 연못(배회담)으
로 이루어진 정원을 두었다.
무수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현장으로 권이진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나 옆에 새 집으로 자
리를 옮기고 기존 집은 산뜻하게 손질해 민속촌의 한옥처럼 속세에 개방했다. (건물 내부는
공개 안함)

▲  유회당 종가 사랑채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  유회당 종가 안채
'ㄱ' 모습의 7칸짜리 건물로 퇴락된 것을
근래 정비했다.


▲  노랗게 익어가는 산수유나무와 사당, 그리고 낮은 석축과 계단

사람이 떠난 종가 일대는 적막함이 가득하다. 석축 위에는 푸른 싹이 자라나 봄을 격하게 환
영하고 사당 담장 옆에는 산수유가 황금빛 피부를 드러내며 징그러웠던 겨울 제국의 종말을
알린다. 안채와 사랑채 주변에만 기와 돌담이 조금 둘러져 있을 뿐, 나머지는 뻥 뚫려있어 집
이 아닌 마을의 공공 장소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굳이 담장을 꽁꽁 두를 필요가 없을 정
도로 마을이 평화로웠다는 뜻일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제삿날 외에는 문을 굳게 봉하고 있다. 그 주
변은 건물도, 돌담도 없이 너른 벌판처럼 펼쳐져 있어 다소 허전해 보인다.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산수유나무

▲  굳게 닫힌 사당<가묘, 家廟>


▲  유회당 종가의 연못인 배회담(徘徊潭)

종가 앞쪽에는 돌로 테두리를 다진 네모난 연못, 배회담이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마을 위쪽에
서 내려온 물을 가두어 못으로 삼았는데,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경계하고자 남쪽에 작
게 수로를 팠다. 그 수로는 광영정의 아랫도리를 거쳐 구완천에 작게나마 물을 보탠다.
수로에는 큰 돌을 얹혀 조촐히 돌다리로 삼았으며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져 어색함이 별로 없
다. 지금은 비록 봄의 시작이라 못이 썰렁하지만 6월부터 9월까지 연꽃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
지며, 광영정에서 바라보는 그 풍경의 맛은 그윽하기 그지 없다.


▲  연못 남쪽에 자리한 광영정(光影亭)

연못 남쪽에는 초가 지붕을 지닌 소박한 모습의 광영정이 연못을 바라보며 한참 매뭇새를 다
듬고 있다.
이 초가 정자는 1710년에 권이진의 장남인 권형징(權泂徵)이 사당 앞에 지은 것으로 굵은 자
연석을 네 모서리에 깔아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갖춘 마루를 얹힌 다음, 초가
지붕을 얹혔다. 신발을 벗는 섬돌과 마루의 높이가 다소 높아서 어린이나 키 작은 사람들은
정자 진입에 다소 고통스러울 수 있다.

광영정이란 이름 외에도 바람을 부른다는 뜻의 '인풍루(引風樓)'와 '수월란(受月欄)', '관가
헌(觀稼軒)' 등 등 무려 4개의 풍류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정자 내부 동쪽에는 관가헌,
서쪽에는 수월란, 남쪽에는 광영정, 북쪽에는 인풍루 현판이 걸려있으며, 여기서 광영정과 연
못 이름인 배회담은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란 시구절에서 따왔다.

집안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의 조촐한 풍류 및 모임 장소로 산바람과 연못에서 불어오는 잔잔
한 바람으로 시원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으며, 바로 밑에 물이 흐르고 있고, 커다란 은행나
무도 있어 그의 그늘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피서의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 안동권씨 유회당종가 일원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299-4 (운남로 65)

▲  광영정 북쪽에 걸린 '인풍루' 현판

▲  광영정 남쪽에 걸린 '광영정' 현판

▲  동쪽에서 바라본 연못(배회담)

▲  광영정 정면 - 마루의 높이가 다소 높다.


▲  남쪽에서 바라본 광영정과 지그재그로 이어진 석축 수로



 

♠  무수동 유회당, 기궁재 주변

▲  담장에 둘러싸인 유회당

유회당 종가에서 무수동 안쪽으로 2분 정도 들어가면 무수동 버스정류장과 무수동 다목적회관
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북쪽) 길(운남로85번길)로 조금 들어서면 오른쪽 산자락에 담장을 두
룬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리는데, 그 집이 무수동의 대표 고택(古宅)인 유회당(有懷堂)이다.

유회당 앞까지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으며, 주차장과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이곳에 대한 대전시의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다. 주차장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유회당의 정문인 솟을삼문(충효문)이 왼쪽 문을 열어 정처 없는 나그네를 맞이한다. 보통은
왼쪽 문만 열어두며 행사나 제사 때는 오른쪽 문도 개봉한다. (가운데 문은 제사 때만 가끔
열림)
내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거의 일몰 직전 때라 관람이 어려울 것이라 여겼는데, 다행히도 문
은 열려있었다. 3월이라 보통 18시까지(겨울은 17시) 문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만약 1달 전이
었다면 문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  솟을3문으로 이루어진 유회당의 정문
충효문(忠孝門)

▲  활수담(活水潭)과 돌다리

충효문을 들어서니 그 흔한 뜨락 대신 연못이 바로 펼쳐져 있었다. 즉 충효문과 유회당 사이
에 네모난 연못을 둔 것이다. '아니 이런 구조의 양반가도 있었나?' 심히 어리둥절하며 연못
의 정체를 파악하니 그의 이름은 활수담이다. 즉 물이 사는 못이란 뜻이다. 연못에 물이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런 단순한 진리를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보다 종종
단순한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일까?

연못 중앙에는 유회당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를 두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고색의 때가 별
로 없다. 그래도 양반가 고택 내부에서 돌다리는 흔치 않은 존재라 흥미로운 장소이다. 또한
대전의 유일한 늙은 돌다리로 그 가치는 연못에 모인 물만큼이나 차고 넘친다.
물로 가득한 연못에는 잉어를 비롯한 많은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며 유유자적하고 있다. 그
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의 상태였다.


▲  연못 물고기들이 정모 현장
저들의 정모 주제는 무엇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  유회당의 상징이자 구수한 양념, 활수담의 위엄
뜨락 대신 연못과 돌다리를 두어 유회당 주변 풍경을 한껏 폼나게 꾸몄다.
역시나 돈이 많은 양반사대부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했지. 일반
백성이라면 어림도 없는 꿈 같은 현장이다.

▲  유회당 판각에서 바라본 활수담과 솟을대문
연못 주변 화초들이 그를 거울로 삼으며 봄으로 들뜬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계단 위에 높이 자리한 유회당

활수담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이곳의 중심 건물인 유회당이 나온다. 높게 잘 다져진 석축 위
에 자리하여 연못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자못 위엄이 넘쳐 보이는데, 정확히 유회당 종가가
있는 서남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이 건물은 권이진이 지어 머물던 곳으로 그의 호인 유회당을 집 이름으로 삼았다. 여기서 유
회(有懷)는 명나라 말기 학자인 전목재(錢牧齊)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
란 시구(詩句)에서 따온 것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간직하고자 그런 이름을
지었다. 또한 그의 부모인 권유 묘역 밑에 거처인 유회당과 제사를 지내는 기궁재, 시묘 건물
인 삼근정사까지 주렁주렁 지어 부모 곁에 계속 있고자 했다.

유회당은 정면 4칸, 정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정면과 양쪽에 평난간을 갖춘 툇마루가 있고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넓게 깔아 그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다. 그리고 건물 밑에는 운치 있게
연못과 돌다리를 두어 여흥과 풍류도 고려했다. (건물 내부는 관람이 어려움)

▲  '활수담' 3자가 적힌 표석

▲  유회당 현판의 위엄

▲  유회당의 옆모습

▲  유회당의 뒷모습


▲  유회당 판각(板刻)을 머금은 장판각(藏板閣)

유회당까지 돌다리의 신세를 지기 싫다면 연못 옆구리로 돌아가는 길도 있다. 그 길로 가면
유회당의 판각을 머금은 맞배지붕의 장판각이 굳게 닫힌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유회당 판각(대전 지방유형문화재 20호)은 권이진의 체취가 깃든 글을 모아놓은 판목(246판)
으로 그의 증손자인 좌옹 권상서(左翁 權尙書, 1767~1835)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 시
절에 정리했다.
그 판각에는 그가 정리한 성리학 관련 문서를 비롯해 왜열도 관련 외교 문서, 청나라에 사신
으로 갔다와서 작성한 연행일기<燕行日記, 여기서 '연'은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燕京)> 등이
담겨져 있으며, 판목이 많은 관계로 유회당 옆과 삼근정사 옆에 판각을 두어 보관했다. 허나
그들은 모두 비공개로 관람은 거의 어렵다.


▲  유회당(부) 기궁재(奇窮齋) - 대전 지방유형문화재 6호

유회당과 아랫 판각 뒷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기궁재가 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유회당
<부(附)>기궁재'임, 즉 유회당에 딸린 기궁재란 뜻>
유회당의 부속 재실(齋室)로 'ㄱ'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 건
너방, 부엌이 있으며, 별도로 돌담을 두르고 있어 집안의 특별한 공간임을 내비치고 있다. 현
재 후손들이 살고 있어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으나 돌담 밖에서도 기궁재를 확인하는데 별 어
려움이 없으므로 애써 문을 부시거나 월담하지는 말자.

현재 건물은 1920년에 중건된 것으로 바로 뒷쪽 산자락에 권유와 후손들의 묘역이 있다. 허나
지금의 무수동을 일구고 유회당과 기궁재를 닦은 권이진은 이상하게도 이곳에 묻혀있지 않다.
그의 묘는 이곳에서 7~8km 떨어진 어남동 산자락에 따로 있는 것이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
르겠으나 어남동 자리가 명당(明堂) 자리라 하여 후손들을 위해 별도로 그곳에 묘역을 일구었
던 모양이다.

▲  기궁재의 솟을대문인 상지문(尙志門)

▲  돌담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본 기궁재

▲  후손들이 머물고 있는 기궁재

▲  장판각과 삼근정사를 가리고 있는
소나무의 위엄


▲  유회당 뒤쪽에 자리한 소나무와 윗 장판각, 삼근정사

유회당 뒤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진 언덕이 있다. 그 언덕에 소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이 있고
그 계단의 끝에 권이진의 판각을 머금은 윗 장판각과 운치가 깃든 소나무, 그리고 삼근정사가
자리해 있다.

권이진의 문집(文集)이 많다보니 2개의 장판각을 지어 보관했는데, 그 앞에는 기품이 돋보이
는 소나무가 여러 갈래로 솟아나 풍경을 잔뜩 돋군다. 대략 200년 정도 묵은 듯 싶은데, 권이
진의 후손들이 이곳을 정비하거나 제사를 지낸 기념으로 심은 듯 싶다. 그리고 소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에 삼근정사가 있다.


▲  삼근정사(三近精舍)

유회당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근정사란 조그만 'ㄱ'자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권이진이 1715년에 부모 무덤을 지키는 시묘(侍墓)살이를 위해 지은 일종의 시묘소(侍墓所)로
대전에 유일하게 남은 시묘소의 흔적이다. 이곳에 시묘소를 지은 것은 바로 북쪽 담장 너머에
부모의 묘역이 있기 때문이다. 집을 묘역 밑에 짓다 보니 시묘살이는 은근 편했을 것이며, 권
력층이라 그런지 시묘살이도 참 좋은 집에서 했다.

건물의 이름인 삼근은 '부모의 묘와 담 옆을 흘러가는 시냇물, 시냇물 옆에 우거진 철쭉숲과
가까이 한다'는 뜻으로 부모의 무덤 및 자연과 가까이 지내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인다. 현
재는 유회당처럼 내부가 비어있으며, 이곳은 유회당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풀이 많아
서 매년 6월과 12월, 잡풀 제거작업을 벌여 주변을 산뜻히 손질한다.

▲  삼근정사 내부 
방 1개, 툇마루로 이루어진 아주 조촐한
모습이다. 하긴 시묘소 공간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  밑에서 바라본 삼근정사와 돌담
삼근정사 옆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이 문은 뒤쪽에 자리한 권유를 비롯한
집안 사람들 묘역으로 이어진다.


삼근정사를 끝으로 유회당 경내 관람은 마무리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동쪽 산속에 숨겨진 여
경암(餘慶庵)과 거업재(居業齋), 산신당(山神堂)까지 싹 가고 싶었으나 시간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이미 18시가 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은 여기서 2리를 더 올라가야 된다.
그들을 봐야 무수동에 깃든 문화유산을 다 보는 것인데, (산신제와 권이진가 유물, 산신제 동
제첩 등은 제외) 햇님도 벌써 칼퇴근 준비에 부산하니 땅꺼미가 내려앉는 것을 무릅쓰고 올라
가기도 좀 그렇다. 설상 올라갔다고 해도 야경 사진은 더욱 자신이 없다. 하여 나머지는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싹 넘기고 무수동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며 석양(夕陽) 따라 나의 제
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대전 무수동 봄맞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유회당, 기궁재 소재지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94 (운남로85번길 32-20)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1월 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