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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최규하대통령가옥, 망원정


' 마포구 늦가을 나들이 '
(최규하대통령가옥, 망원정)

서교동 최규하대통령가옥

▲  서교동 최규하대통령가옥

최규하 전대통령이 타고 다닌 뉴그랜저 승용차 망원정

▲  최규하가 이용했던 오래된 차
(1995년식 뉴그랜저)

▲  망원정

 


서울에서 태어나 40년을 넘게 서식하면서 남들의 몇 배 이상으로 서울을 구석구석 둘러보
았고, 심지어 10번 이상씩 인연을 지은 문화유산과 명소도 즐비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서울 도처에서 미답처(未踏處)들이 고개를 들고 있어 내 심기를 적지 않게 긁는다.
그 미답처도 별로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미답지 사냥을
나서도 그 미답지의 감소율이 별로라는 것이다. 미답처를 지우면 어디선가 다른 미답처들
이 나타나 그 자리를 채워넣는다.

늦가을이 절정에 이르던 11월의 한복판, 겨울 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방을 빼려고 하는 늦
가을 누님의 발목이라도 붙잡을 겸, 미답지를 1개라도 지우고자 친한 후배와 마포구 서교
동(西橋洞)과 망원동(望遠洞) 지역을 찾았다. 서교동에서는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던
최규하가옥을 찾았고, 망원동에서는 인연 횟수가 적은 망원정을 그 후식거리로 찾았다.


♠  최규하 전대통령이 인생의 ⅓을 보냈던 1970년대 2층 양옥
서교동 최규하가옥(崔圭夏 家屋) - 국가 등록문화유산 413호

▲  최규하가옥 대문 (굳게 닫힌 왼쪽 문은 차량 통행문)

서교동 주택가에 자리한 최규하가옥은 1972년에 지어진 2층 양옥이다. 지상으로 노출된 지하
1층과 나무가 있는 뜨락이 딸린 그림 같은 집으로 건축면적 142.68㎡, 연면적 330.05㎡ 규모
이다.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조적(組積)의 혼합 구조로 시멘트 기와 지붕을 얹혔으며, 이 땅에
서 매우 흔한 1970년대 2층 복열형 주택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다.
최규하가 직접 집을 짓고 1973년부터 머물렀으며 국무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던 1976~1980년을
제외하고 2006년 사망 때까지 무려 29년을 살았다. 그의 인생의 거의 ⅓이 이곳에 녹아든 것
이다.


▲  하얀 피부를 지닌 최규하가옥

지하층에는 방과 주방, 차고가 있으며, 1층과 2층은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 응
접실, 서재가 있다. 1982년에 응접실 일부를 증축했으며, 최규하가 와병중일 때 그의 편의를
위해 2층 안방 옆에 화장실을 만들었다.
뜨락(마당)에는 잔디가 입혀져 있고 여러 나무와 키 작은 식물이 자라고 있어 집안 풍경을 크
게 돕는다. 또한 박석(薄石)이 대문에서 현관까지 입혀져 있어 한때 잘나갔던 이곳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남산(南山) 그늘에 살던 어린 시절, 뜨락이 딸린 이런 양옥에서 살아보는 것이 정말 소원이었
는데, 20대 이후에 이곳 만큼은 아니어도 그 절반 정도 되는 집(1980년대에 지어진 준 3층 양
옥)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현재는 그 집을 매각하고 빌라에서 조용히 살고 있음) 하지만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졸부와 부잣집의 흔한 모습인 이런 집을 장만해 꼭 살아보고 싶다. (성
냥갑 아파트나 빌라보다는 이런 정원 딸린 주택이 더 좋음)


▲  늦가을이 깃든 최규하가옥 뜨락
파라솔과 의자는 관람객 쉼터용으로 갖다놓은 것이다.


최규하가 사망한 이후, 그의 가족들이 머물다가 2009년 7월 서울시가 인수했으며, 내부 손질
을 거쳐 2013년 10월 5일 속세에 개방되었다.

1층과 2층을 손질하여 유족들이 흔쾌히 기증한 유품과 생활유물, 사진 등 500여 점을 전시하
고 있는데, 최규하는 검소했던 성품이라 고위 공무원을 오래 지냈음에도 옷과 생활용품이 대
부분 옛날에 쓰던 것을 계속 사용했다. 30년이 넘은 라디오와 50년이 넘은 선풍기, 재활용해
서 사용한 이쑤시개 등에서 그의 검소함과 수수함이 묻어나 있다.
게다가 좋은 집에 살고 있음에도 연탄을 고집했는데, 이는 석유파동(오일쇼크, 1973~1974) 시
절, 탄광 시찰을 다녀오고 이 땅의 탄광 산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평생 연탄보일러만
사용했다는 일화는 꽤 알려져 있다. 고위 공직자라면 적어도 이렇게 청렴해야 되는데, 오늘날
이 땅에는 그런 고위직이 거의 없어 실로 안타깝다.

마포구(麻浦區)의 새로운 꿀단지를 꿈꾸는 이곳은 천하에 개방된 몇 되지 않는 대통령집(생가
제외)으로 서울에는 이곳과 신당동(新堂洞) 박정희가옥이 100% 개방되어 있다. 그 외에 어쩌
다 빗장을 여는 이화장(梨花莊, 이승만이 살던 집)과 아직도 비공개에 머물러 있는 안국동 윤
보선(尹潽善)가옥이 있다. 이제 50여 년 묵은 이 집이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바로 대
통령이 살았던 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최규하가옥과 현관문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실내화로 갈아신고 내부를 둘러보면 된다. (신발은
실내화가 있는 신발장에 넣으면 됨) 해설사나 가옥 관리인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보면 되며, 안방 등의 방과 응접실은 통제구역이니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최규하(1919~2006)는 자는 서옥(瑞玉), 호는 현석(玄石)이다.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집안에서
할아버지에게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928년 원주보통학교에 들어갔다. 1932년 상경하여 경성
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1935년 부모의 제안으로 무려 3살 연상인 홍기(洪基)와 혼
인했다.
왜열도로 유학을 떠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에 졸업하여 만주로
넘어가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 정치행정반에 입학했다. 그리고 1943년 대동학원을 수료
하고 길림성(吉林省) 통양현에서 행정과장으로 일했다. 이를 두고 친일행적이 있다고 말하기
도 하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의 행적을 매의 눈으로 살핀 결과, 영 좋지 않은 행적이 없어
서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것들만 등록되어 있다는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1945년 이후 서울로 들어와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농림부 양정과장, 농지관리국
장 서리 등을 지내다가 변영태(卞榮泰)에게 발탁되어 외무부로 자리를 옮겨 통상국장이 되었
으며, 1951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1952년 동경 주일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했으며, 1959년에는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했다. 그리
고 그해 9월 귀국하여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12월부터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했다.

1960년 4.19혁명이 터지자 외무부차관에서 사임하였고, 공민권(公民權) 제한 대상자로 선정되
기도 했으며, 1961년 이후, 김종필이 주도하는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3
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의 외교 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5년부터 말레이시아 대
사로 나가 있다가 1967년 귀국하여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이 되었고, 1972년에는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평양
(平壤)을 방문했다.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1979년에
그 유명한 10.26사건이 터져 박정희가 시해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
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非常戒嚴令)을 선포했다. 그리고 10월 28일 중앙정보
부장 김재규를 해임하고,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1979년 11월 6일 유신헌법(維新憲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에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
출되어 우리나라 제10대 대통령이 되었다.
허나 대통령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무지하게 우왕좌왕했고, 그 사이에 전두환이 중심
이 된 신군부 패거리들에게 영혼까지 털리면서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하여
우리나라 대통령 중 가장 재임기간이 짧은 불명예를 간직하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이 되려면
꼭 정당(政黨)을 끼기 마련인데, 그는 정당 활동을 한 것이 전혀 없으며, 말단 공무원부터 과
장, 국장, 차관, 장관,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된 이 땅 유일의 직업공무원 출신 대통령이
다.

1981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고, 1991년에서 1993년까지 '민족사
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낸 것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손을 땠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2006년 10월 22일, 87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졌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매장되었다. 박
정희 정권에서 1등수교훈장(1970년), 수교훈장 광화대장(1971년), 무궁화대훈장(1979년) 등을
받았으며,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80년)을 받았다.

그는 무지 짧았던 대통령 재임 시절 딱히 업적도 없고 전두환의 신군부에게 탈탈 털려 국정을
어지럽힌 큰 과오가 있다. 하여 죽기 전에 신군부 반란의 숨겨진 이야기나 만행 등을 회고록
이나 인터뷰 등으로 남기지 않을까 기대도 했으나 결국 아무런 이야기도 풀지 않은 채, 가버
려 실로 아쉬움이 크다.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지하게 많을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
비밀을 고이 안고 무덤으로 들어간 것이다.


▲  최규하가 탔던 차

반지하 모습의 차고(車庫)에는 최규하와 그 가족이 탔던 검은 피부의 차량이 낮잠을 자고 있
다. 그는 1995년에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한 뉴그랜저로 한때 고급차의 대명사로 명성을 날리기
도 했는데, 1995년 6월 5일에 구입하여 2006년 10월까지 이용했다.


▲  최규하 가족이 맛있게 식사를 했던 부엌(1층)
식탁과 의자, 찬장 등은 최규하 가족이 사용했던 것이다.

▲  1층 응접실

이곳은 최규하가 손님을 맞이하던 곳으로 평소에는 라디오나 TV, 신문을 보거나 가족들과 이
야기를 나누었다. 의자 주위로 외국과 온갖 단체에서 받은 선물과 기념품, 그의 손때가 깃든
여러 물건들이 놓여져 있다.


▲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최규하의 빛바랜 사진들
최규하를 엿먹였던 전두환도 1988년 이곳을 찾았다. 전두환에게 참으로 할말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들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  응접실에 있는 여러 그릇과 도자기들
저들은 외국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  최규하가 사용했던 담배함과 재떨이

▲  유근유공(惟勤有功)과 난이 그려진 하얀 그릇들

'유근유공'은 명심보감(明心寶鑑) 정기편에 나오는 말로 앞부분인 범희무익(凡戱無益)이 빠져
있는데, 그 뜻은 놀기만 하면 아무런 이득이 없고 오직 부지런해야 공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
이다. 최규하가 매우 좋아했던 말로 자녀 교육의 지침으로 삼기도 했다.


▲  최규하 부인이 쓰던 방

침대와 여러 가구, 옷장으로 이루어진 방으로 원래는 딸의 생활공간이다. 딸이 시집을 가면서
부인이 사용했으며, 부인이 쓰던 재봉틀과 바느질 도구 등이 남아있다. 국무총리 부인에 영부
인까지 지낸 몸이나 남편처럼 소박하고 서민적인 스타일로 직접 살림을 꾸렸다.

▲  최규하 부인이 사용했던 늙은
재봉틀의 위엄

▲  최규하가 입었던 양복과 구두,
양복 관련 물건들


▲  최규하가 사용했던 소지품과 허리띠
(손수건, 집열쇠, 성냥, 수첩 등)

▲  최규하가 쓰던 한산도 담뱃갑과 담배, 염주, 썬글라스 등

▲  최규하 부인이 쓰던 안경과 책, 손가방, 신분증 등

▲  최규하의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 그에게 보낸 편지와 가족 사진
최규하는 부인과 자녀, 손자(손녀) 사랑이 대단했던 따뜻한 남자였다고 전한다.

▲  최규하를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장관급)에 위촉한다는 위촉장(1971)과
국무총리 임명장(1976년)

▲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權限代行) 프로필 문서

▲  최규하가 받았던 1980년대 어느 10월의 연금 명세서
연금으로 매달 1,159,000원을 받았다. 현재로 따지면 거의
1,000만원이 넘는 고액이다.

▲  최규하를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외무부장관에 보한다는 임명장(1967년)

▲  최규하의 2층 서재
최규하가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책장, 전화기, 50년 이상 썼다는 선풍기,
잠을 자는 공간, 메모지 등이 서재를 구석구석 채우고 있다.

▲  무뚝뚝해보이는 최규하 영정과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부인 홍기의 영정

▲  타워호텔 시계와 볼펜

1969년 1월 23일, 미국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Pueblo)가 북한에게 털려 납치된 그 유명한 사
건이 발생하자 뚜껑이 폭발한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인 밴스를 특사로 우리나라에 파견했다.
그때 외무부장관이던 최규하는 그와 타워호텔(현재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에서 철야회담을
벌였는데, 그때 호텔에서 쓰던 볼펜과 타워호텔 글씨가 쓰인 시계를 기념품으로 가져왔다.
시계는 약효과가 떨어져 오래전 10시 17분에서 뚝 멈춰선 상태이며, 이름이 복잡하게 바뀐 타
워호텔의 옛 유물로도 가치가 있다.

◀  최규하 내외가 생활했던 2층 안방
최규하가 와병중일 때 그의 생리 편의를
위해 안방 옆에 화장실을 만들었다.


▲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 평범한 시계

이 시계는 소아마비 아동들에게 시계 수리 기술을 가르치는 사랑의집에서 선물한 것이다. 사
랑의집이 1980년 5월 최규하 부인의 도움을 받아 작업실을 갖춘 교육장을 마련했는데, 그 은
혜를 기리고자 조촐하게 시계를 만들어 선물했다.
시계는 40년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시계가 힘이 빠지거나 졸도하
면 건전지만 갈면 되니까)

* 최규하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467-5 (동교로15길10, ☎ 02-3144-2038)


♠  선유봉을 바라보던 한강의 경승지, 망원정(望遠亭, 망원정터)
- 서울 지방기념물 9호

▲  북쪽에서 바라본 망원정과 북쪽 기와문

서교동 최규하 가옥을 둘러보고 망원정을 보고자 한강이 있는 남쪽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중
간에 음료수도 사먹으며 20분 정도 걸으니 나무가 약간 있는 언덕 윗쪽에 2층 누각이 기와문
을 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망원정이다.

망원정은 예전에 합정역에서 강변북로로 접근해야 했으나 길이 좋지 않고 차량의 눈치가 너무
심했다. 하여 2014년 망원초록길 조성 사업으로 주택가와 맞닿은 망원정 북쪽에 접근로와 문
을 내면서 접근성이 아주 좋아졌다. 하여 북쪽 문이 사실상 망원정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망원정 서쪽에 길을 내어 한강시민공원과 연결시켰으며, 망원정 북쪽 밑에 관리사무소와
화장실을 만들었다.
 

▲  망원정의 정문인 북쪽 기와문

▲  망원정에 걸린 희우정 현판의 위엄

망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樓閣)식 정자로 한강과 바위산에서 섬으로 강
제 성형된 선유도(仙遊島)를 바라보고 있다.

망원정의 시작은 1424년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별장용으로 지은 정자에서
비롯된다. 처음에는 이름이 없었으며, 1425년 세종이 가뭄으로 신음하고 있는 농촌의 형편을
살피고자 친히 서울 서쪽(마포구, 서대문구 지역) 경작지를 둘러보고 둘째 형도 보고자 이곳
까지 발걸음을 했다.
세종은 형에게 술과 음식, 말, 말안장을 선물로 주며 같이 술을 하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려
주변 들판을 촉촉히 적셔주었다. 이에 왕이 무지하게 기뻐 정자 이름을 '기쁜 비를 만난 정자
'란 의미로 '희우정(喜雨亭)'이란 이름을 내렸다. 그 이름이 망원정의 첫 이름이 된다. 효령
대군은 부학(副學) 신장을 시켜 희우정 3자를 쓰게 해 현판으로 걸고 변계량(卞季良)에게 기
문(記文)을 짓게 하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희우정의 제도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다. 북악산(北岳山)이 뒤에서 굽어 보고 한
강이 앞에서 흐르는데, 서남쪽 여러 산들이 막막하고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연기가 물 밖으
로 저 멀리 보일듯 말듯 하다.
굽어보면 물이 맑아 물고기, 새우도 역력히 셀 수 잇다. 바람 실은 배들과 모래 위의 새들이
바로 정자 아래까지 오고, 1,000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해 술상 위를 어른거린다. 여
기에 풍악 소리가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부니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
르는 것만 같다. 마음이 자유스러워져 바람 타고 신선 세계에서 노는 것만 같다. 눈이 아찔하
고 머리털까지 곤두서는 듯하다'

세종은 이곳에 자주 행차하여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수군 훈련도 참관했다. 이때 화포를 발사
하며 실전처럼 훈련을 했고, 왕은 세자와 신하를 거느리고 희우정에 올라 이를 관람했다.

세종과 효령대군이 모두 사라진 이후, 이곳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소유가 되
었다. 그는 여기서 팔자 좋게 풍류를 즐겼는데, 1484년 2층 규모로 늘리고 아름다운 산과 강
을 잇는 경치를 멀리 바라본다는 뜻에서 망원정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 망원정으로 인해 이곳
지명이 망원동이 된 것이다.
성종은 매년 봄과 가을, 이곳을 찾아 백성들의 농사 형편을 살폈으며, 수군 훈련을 참관했다.
또한 제왕이 이곳에 올 때마다 신하들에게 좋은 시를 지어 올리도록 했고, 그중 우수한 시를
지은 이에게 활1장을 하사했다.

연산군(燕山君)도 이곳에 군침을 흘려 1506년에 수려정(秀麗亭)으로 이름을 갈고 무려 1,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로 중수했다. 허나 그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이 터지면서 공사는
중단되었으며, 월산대군 시절 규모로 재건되었다.


▲  북쪽 밑에서 바라본 망원정

망원동과 합정동(合井洞) 강변에는 청운정(淸雲亭)과 수일루(水一樓), 평초정(平楚亭), 낙수
정(樂水亭), 호인정(好仁亭), 탁영정(濯瓔亭), 안류정(岸柳亭), 팔관정(八觀亭) 등의 정자와
누각이 즐비했는데 그중에서도 망원정을 으뜸으로 쳤다. 왕족과 사대부(士大夫)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망원정을 겯드린 양화나루 뱃놀이는 아주 유명했다.
그 뱃놀이란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성지가 있는 강변 언덕) 꼭대기에 올라 소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펴 술판을 벌이고 강으로 내려와 강바람에 시름을 놓으며 뱃놀이를 즐기다가 망원정으
로 가서 노는 것이다.
또한 명/청나라 사신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도 쓰여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뱃놀이를 시켜주
었다. 여기서 신나게 놀았던 명나라 사신의 시문이 여럿 남아 있으며, 술과 시문을 주고 받으
며 놀았다.

이곳이 이렇게 도성 근교 경승지로 이름을 날린 것은 바로 앞에 한강과 선유봉(仙遊峰)이 펼
쳐져 있고, 왕족이 세운 별장용 정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변에 쟁쟁한 경승지를 싹 누르
고 망원동 지역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내려가
고 만다. 이후 망원동과 한강 개발로 복원은커녕 제자리를 지키기도 힘들어 60년 이상 방치되
어 오다가 1986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이 이곳을 조사했다. 이때 약간의 괴석(塊石)과 주춧돌로
쓰인 돌이 나왔으나 건물터 흔적은 밝히지 못했다.
1987년 복원이 결정되었고, 4억4,300만원의 돈을 들여 1988년 6월 공사를 시작해 1989년 10월
20일에 완료되었다.

복원은 되었으나 문화재 지정 명칭은 '망원정'이 아닌 '망원정터(망원정지)'이다. 원래 모습
이 아닌 복원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
개발의 칼질로 늦게 복원이 되었고, 주변이 싹 달라져 운치는 많이 녹아내렸으나 바로 앞으로
한강과 선유도가 바라보여 경치와 조망은 그런데로 여전하다. 또한 2014년 정자 북쪽에 접근
로를 내고 한강시민공원을 이어주는 길이 닦이면서 외로운 신세는 조금 면하게 되었다.

* 망원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457-1 (동교로8안길 23)


▲  망원정 내부

망원정 내부는 숨쉬는 소리, 신발 벗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썰렁하다. 정자 바로 남쪽에는
강변북로가 넓게 닦여져 차량들의 소음으로 두 귀가 멍멍할 정도인데, 그 강변북로를 지나야
한강공원이고, 그것을 지나야 비로소 한강이다.

망원정과 마주보던 한강의 명물인 선유봉은 그 도도하던 바위 산이 왜정(倭政) 때 박살이 나
면서 모두 깎여 사라지고 사방이 한강수에 갇힌 섬이 되면서 선유도로 성격과 이름이 완전히
갈렸다. 어느 것이든 그냥 두는 것을 싫어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이 망원정과 선유봉의
팔자를 180도 이상 바꿔놓은 것이다.


▲  망원정에서 바라본 강변북로와 한강, 그 너머에 자리한 선유도
강변북로는 차량들의 왕래가 빈번해 그들이 쏟아내는 소음으로 정신이 없다.

▲  망원정에서 바라본 강변북로와 한강, 성산대교

▲  동쪽 밑에서 바라본 망원정

         ◀  망원정 동쪽 삼문(三門)
강변북로 쪽에 세워진 문으로 망원정의 정문이
다. 합정역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접근해야 되
서 수많은 차량의 눈치를 보며 이곳까지 가야
했으나 북쪽 기와문이 생기면서 이제는 무늬만
정문이 되었다.


▲  북쪽에서 바라본 망원정

▲  서쪽에서 바라본 망원정과 한강시민공원으로 인도하는 길

▲  망원정과 한강시민공원을 이어주는 길

▲  망원동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4-16호

망원정에서 서쪽 산책로를 3~4분 가면 동교로와 한강시민공원 방면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이
른다. 여기서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유난히 큰 나무가 하나 아른거릴 것인데, 그가 보호
수로 지정된 늙은 은행나무이다.
나무가 우거진 언덕 밑에 기대고 선 그는 추정 나이 150년(2005년 7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34년)으로 높이 23.6m, 나무둘레는 3.3m에 이른다. 망원동은 여러 번 와봤으나
이 나무는 첫 인연으로 좀 일찍 왔더라면 황금색 옷을 걸친 그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인데, 내
가 한 발 늦었다. 이미 황금색 은행잎은 죄다 땅바닥으로 떨어져 낙엽이란 이름으로 귀를 접
고 누워있고 나무는 가지만 앙상하다. 우울한 그를 보니 올해도 이제 그 끝에 이르렀음을 실
감하며 나도 덩달아 우울해진다.

망원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마포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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