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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검정 주변을 흐르는 홍제천

홍제천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에서 발원하여 북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 백련산이 베푼 수분을 차곡차곡 머금으며 한강으로 흘러간다. 평창동과 신영동, 홍지동, 부암

동, 홍은동, 홍제동, 연희동, 남가좌동을 거쳐가며, 한강 직전에서 은평구에서 내려온 불광천과 만나

한강으로 나간다.

20세기 중반까지는 서울의 주요 피서지로 홍제천 주변에는 온갖 과일들이 자라나 능금과 자두 등 과

일 생산지로도로 유명했다. 허나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는 과정에서 홍제천 상류까지 도시가 밀려왔

고, 그로 인해 홍제천 수질은 악화되어 악취가 심했다. 하여 서울 도심 밖 피서지의 명성은 사라졌고,

홍제천 물을 먹고 자라던 과일과 농산물은 거진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행히 21세기 이후 꾸준히 하천을 손질하면서 수질이 많이 개선되었다. 게다가 하천 곳곳에 있는 바

위와 암반들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이 살려났다. 하지만 냄새는 조금씩 나고 있으며, 예전처럼

물에 흔쾌히 풍덩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회복된 것이 어디랴.

 

2. 세검정과 차일암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말들이 많다. 연산군이 1506년

에 탕춘대를 만들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숙종(肅宗) 시절에 북한산성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

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세검정의 전신이 아닐까 싶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

은 서인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해군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또는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 함)

그들은 역촌동(驛村洞)에 별서를 짓고 살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창의문(彰義門)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립한 이

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하고 칼을 씻었

던(또는 갈았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다고 전한다.

1748년 정자를 일부 수리했으며, 1941년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복원

하여 지금에 이른다.

 

세검정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꾀하며 지어진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등의 잘생긴 바위

들 그리고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림 같은 현장이다. 그러다 보니 도성 밖 경

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이 자자했는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도 이곳을

찾아 세검정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서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뜯어와 조성했다.

 

대한제국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들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았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을 소풍지로 삼았다. 특히 1899년 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들이 여기로 소풍

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보'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

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라..'

 

왜정(倭政) 이후, 서울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동네에 진동했다. 지금으로서는 거

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대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첩첩

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과 신영동 지역에 들이닥친 것이다.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

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

으로 전락하였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

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3. 홍제천 건너에서 바라본 세검정

세검정은 문화유산 보호로 정자 내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세검정 앞으로 홍제천으로 인도하는 숲

길이 있으며, 세검정을 받쳐들고 있는 크고 견고한 바위 밑에는 근래 닦여진 홍제천 징검다리가 있다.

이 징검다리는 세검1교 밑도리를 통해 홍지문, 옥천암, 홍은동으로 이어진다.

 

4. 세검1교에서 바라본 세검정과 차일암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직한 반석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 때 사초를 깨끗히 세초(洗草)

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사초(史草)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으로 그것을 마치

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벌였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바로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차일암은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로 근래에 여기서 세검1교 밑도리로 징검다리가 놓

였다.

 

5. 차일암에서 바라본 홍제천 상류 방향과 하천 곳곳에 걸린 잘생긴 바위, 반석들

홍제천 상류와 중류 부분은 바위와 반석들이 많이 널려있다. 비록 홍제천이란 도시 하천이지만 이 물

줄기 역시 주변 산(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등)들이 빚은 계곡이다. 만약 홍제천 상/중류에 주택들과

도시가 들어서지 않았으면 계곡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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