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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산부수 이계붕묘

여산부수 이계붕은 오산군의 증손자이자 엄천수 이거의 아들이다. (그의 생애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

음)

 

2. 풍기군부인 창녕성씨묘

창녕성씨는 오산군의 첫 부인이다. 그를 통해 딸 2명을 두었으며, 그가 사망하자 연안김씨를 새 부인

으로 맞이했다. 무덤 석물 중 키 작은 묘표와 문인석만 옛날 것이며, 나머지는 근래 장만하여 달아놓

았다.

 

3. 근래 세워진 풍기군부인 창녕성씨의 지붕돌 묘표

 

4. 졸암(졸암공) 이충작묘

이충작(1521~1578)은 오산군 이주의 3세손이자 덕안도정 이진의 손자, 그리고 당은군 이휘의 아들

다. 어머니는 현령을 지낸 오황의 딸로 충청도 직산(천안 북부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1546년 사마

에 합격했으며, 1559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 저작에 발탁되었다.

학문이 해박하고 효성이 지극하다는 이유로 형조좌랑에 특진되었으며, 어머니가 죽자 3년상을 치르

서 매일 죽을 먹으며 피눈물을 흘리다가 실명을 했다고 한다.

 

이후 사헌부 지평과 장령, 사간원 헌납, 병조정랑 등을 역임했으며,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승려 보

우를 탄핵하다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명종 사후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571년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고, 이후 전주부윤과 여주목사를 지냈다.

선조가 이충작을 승지로 발탁했을 때, 대간들이 실명한 자를 제왕 가까이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

대를 하자 선조가 교서를 내려

'오늘날 조정에 충작의 눈을 가진 자가 또 있는가. 나는 그의 눈을 취했으니 그대들은 또 헐뜯지 마라'

하여 이충작의 효행을 높이 평가하면서 대간들의 반대를 잠재웠다.

 

성품이 청렴하고 준엄하며 정직하다고 평가되어 선조는 인사 추천이 있을 때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

러나 그는 편당(偏黨)에 들지 않았고, 동인(東人)의 중심 인물인 이발(李潑. 1544~1589)을 비판하기

도 했으며, 항상 서울에서 먼 지역으로 임명되면서 크게 쓰이지 못했다.

이후 충청도관찰사까지 올랐으며, 문사(文詞)에 능했다고 한다. 57세에 사망하자 그의 부친과 조부,

증조부가 묻힌 이곳에 무덤을 썼으며, 그로 인해 오산군묘역은 무덤이 하나 더 늘었다.

 

5. 이충작 묘의 뒷모습

 

6. 새로 조성된 이충작묘의 지붕돌 묘표

 

7. 두 동강이 난 이충작의 예전 묘표

이충작묘의 옛 묘표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비신이 두 동강이 났다. 그래서 비좌와 조각이 난

비신을 무덤 구석으로 옮겨 눕혔다. (비신에 깃든 글씨는 잘 남아있음)

 

8. 통덕랑 이신과 남원윤씨 묘

이신(李伸)은 오산군 묘역의 일원으로 있지만 누구의 아들이고, 언제 살았는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근래 장만한 지붕돌 묘표에는 ‘통덕랑 전주이공휘신지묘(通德郞 全州李公諱伸之墓)'라 쓰여있어 벼

슬이 통덕랑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산군 묘역에 들어있기 때문에 오산군의 후손

은 분명해 보인다. 오산군과 전혀 관련도 없는 사람이 오산군 가족 묘역에 묻힐리는 없기 때문이다.

 

9. 근래 세워진 통덕랑 이신의 지붕돌 묘표

묘표에 쓰인 내용이 통덕랑 이신의 전부이다. 언제 태어나 언제 죽고, 무슨 과정을 거쳤으며, 누구의

아들이자 부친인지는 도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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