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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박힌 로마네스크 양식의 근대 건축물, 성공회서울성당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도봉산고양이 2025. 12. 7. 01:30
1. 성공회서울성당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덕수궁(경운궁) 북쪽에는 로마 바티칸이나 중세 유럽 분위기를 징하게 풍기는 고풍스러운 모습의 성
공회서울성당(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있다. 이곳은 이 땅의 유일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건
축물로 20세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성공회(聖公會)는 카톨릭의 일원으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890년이다. 1889년 11월 영국의 켄터베
리 대주교 벤슨은 이 땅에 성공회를 집어넣고자 영국 해군의 군목(軍牧)으로 있던 코프(C.J. Corfe)
를 주한(駐韓) 주교(主敎)로 임명했는데, 코프는 2명의 영국 의사와 트롤로프, 워너 두 신부를 이끌고
1890년 9월 인천에 도착했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영업을 벌이며 영국대사관 옆 미국인 선교사 집을 빌려 교회와 시약소(施藥
所)를 열었으며, 1890년 12월 21일 드디어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열었다. 그때는 오로지 서양 애들만
참석했으며 조선인 하인은 바깥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4일 뒤인 25일 크리스마스 미
사 때는 조선인 3명이 '이잡것들 뭐하는건가?' 기웃거리며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돌아갔다.
1891년 부활절에 충무로1가(현 대연각빌딩)에 교회를 임시로 마련하여 '부활의 집'이라 불렀다. 이듬
해 겨울에는 30여 평의 한옥을 새로 짓고 '강림성당'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양이(洋夷)와 왜인(倭人)
중심으로 미사를 했을 뿐, 조선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9년 12월, 18명의 조선인이 세
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한국어 미사가 열렸다.
1904년 초대 주교인 코프(조선 이름은 고요한)가 귀국하면서 터너(A.B. Turner)가 2대 주교가 되었
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고아원을 자립시키고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세워 실업교육
을 실시하는 한편, 교회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열중했다. 또한 YMCA 창립
준비 작업에 참여하여 1903년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1906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 회장이 되었으
며, 이 땅에 축구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왜인에 의해 부활의 집이 폐쇄되어 임시로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자
수가 많아지자 한국어, 영어, 왜어 등 3개 언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미사를 봤다.
1909년 터너는 영국의 'Morning Calm'이란 선교 잡지에 '서울대성당 기금' 모금을 호소했다. 하여
1910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교구협의회에서 성당 건립기금 모금을 결의했으나 그해 10월 병사했다.
1911년 그의 뒤를 이어 트롤로프(M.N. Trollope)가 3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3개 국어로 각각 별도
의 장소에서 진행되던 미사를 한곳으로 통합하고자 성공회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영국 왕
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딕슨에게 설계를 의뢰했는데, 그는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끝에 성채 분위
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선택했다. 허나 조선에서 건축비 조달이 어려워 영국에 도움을 청했으나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14년 왜정은 경성부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통 거리를 확장시키자 성공회는 그 도로변에 성당을 짓
기로 계획했다. 하여 1920년 영국에서 지원금을 받아 덕수궁(경운궁) 수학원(修學院, 양이재)을 매
입했고, 1922년 9월 24일 성당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5월 2일 173평이 완공되자 '성모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완공은 아니었다. 총 공사비 3만원 중 절반
도 안되는 14,000원만 모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원래 설계의 절반 정도만 지었다.
트롤로프는 절반의 건축을 우선 마무리하며 '예비 대성당'이라 불렀다. 그는 나머지 부분도 속히 닦
고자 왜열도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병사하면서 성공회성당은 절반이
모자른 모습으로 한참의 세월을 흘려보내야 했다.


2. 성공회서울성당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1993년 나머지 부분을 닦고자 신자들을 독촉해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문화재위원회로부터 김빠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증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성당 측은
'미완성 건물을 완성하려는 것이오!' 설득했으나, 문화재위원회는 미완성인 형태로 문화재로 지정되
었기 때문에 변형은 절대로 안되오. 사실을 증명할 원 설계도가 없는 한 증축은 어림도 없소' 답을 했
다. (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이 맞는 말임)
다행히도 1993년 7월 이곳에 놀러온 영국 관광객이 영국 도서관에 이 성당의 건축/설계도면이 있다
는 낭보를 전했다. 하여 성당 대표들은 서둘러 영국으로 넘어가 런던 부근 렉싱통도서관에 처박혀있
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복사하여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니 문화재위원들은 쿨하게 증축 허가에 도
장을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66억의 거금을 쏟아부어 1994년 5월 27일부터 공사를 시작, 1996년 5월 2일 완공을 보았
다. 이로써 트롤로프 주교의 못 다 이룬 꿈이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3. 서북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서울성당의 위엄
성당은 '十' 모양의 건물로 성채처럼 웅장하고 견고하다. 기초부와 뒷면 일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나
머지 벽체는 붉은 벽돌로 건물을 치장했으며, 성당 전체에 공간상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일종의 율
동감을 선사한다. 종탑이 있는 종탑부에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연결되어 있으며,
성당 지하에는 트롤로프가 묻힌 지하묘지가 있다.
이곳 성당은 1979년 9월, 10월 유신에 대항하여 '선교 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것을 시작으로
1987년까지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 기도회와 시위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하여 명동
성당과 더불어 민주성지로 꼽히며 성당 주교관에는 '6월 민주항쟁 진원지'를 알리는 표석이 자랑스
럽게 자리해 있다.


4. 남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서울성당


5. 성공회성당 머릿돌
1996년 5월, 성당이 최종 완성되면서 이를 기리고자 성당 귀퉁이에 머릿돌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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