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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나긴 세월 폭군(暴君)으로 낙인 찍혀 철저히 뭉개진
불운의 군주, 연산군묘(燕山君墓) - 국가
사적

▲ 연산군묘 뒷쪽에서 바라본 연산군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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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사직 영혼이 나의 지성을 생각하지 않아
어찌 이다지도 나의 마음 상하는지
해마다 네 아들이 꿈같이 떠나가니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 적시네
< 연산군이 1503년 1월 27일에 지은 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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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에서 우이동(牛耳洞)으로 넘어가는 길목 산자락에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의 묘가 있
다.
이곳은 도봉구 10대 명소의 하나로 연산군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해 아무리 국사와
높은
담을 쌓은 사람이라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달리 그의 묘는 아는 이
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인간말종이다. 고구려의 모본왕(慕本王, 재
위
48~53)과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300), 고려 충혜왕(忠惠王, 1315~1344)과 더불어 폭군
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며, 주색잡기, 신하와 선비들 때려잡기, 2차례의 사화(士禍), 장녹수,
할머니(소혜왕후)를 죽인 패륜아 등 안좋은 인식만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
허나 연산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으며, 학문도 뛰어나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다. 그런 그가 폭군의 대명사가 된 것은 지나친 왕권강화와 그에 따른 실정
(失政)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중종반정으로 역사의 영원한 패자(敗者)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근래에 그를 새롭게 조명하는 인식들이 늘어나면서 폭군의 이미지는 조금씩 걷히고
있
는 상태이며, 연산군묘 안내문도 그런 의견을 반영하여 좋지 않은 내용은 삭제되었다. 그렇다
면 역사의 패자가 어찌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연산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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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묘 정문 (마감시간 직전)
2006년에 연산군묘를 속세에 개방하면서 관리사무소와 정문을 만들었다.
입장료는 공짜이니 관람시간 내에 마음껏 들어가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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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후인 윤씨의 죽음과 연산군의 세자 시절
연산군은 1476년 11월 6일 성종(成宗)과 폐비윤씨(廢妃尹氏)로 유명한 후궁 윤씨 사이에서 태
어났다. 이름은 융(隆)으로 성종의 맏아들이며, 그때 성종은 왕후가 없었는데, 윤씨가 아들을
낳아버리자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크게 기뻐하여 그 공로로 왕비에 책봉되기
에
이른다.
허나
왕비가 된 이후 투기가 생기면서 시어미인 소혜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머니의 눈
치를 진하게 받던 성종도 그 영향으로 윤씨와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다 보니 부부간
의 말싸움도 종종 일어났던 모양인데, 그 과정에서 성종의 이마에 상처까지 내는 큰 죄를 짓
게 된다. 전제왕권 시절에는 제왕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죄였다.
결국 성종과 소혜왕후는 1479년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조정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
구하고 윤씨를 폐비시켜 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다가 1482년 좌승지(左承旨) 이세좌(李世左
)를 통해 따끈한 사약을 보냈고, 윤씨는 그것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세좌가 윤씨를 처리하고 집에 돌아오자. 그의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자손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어머니(윤씨)가 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연산군)이
훗날 보복하지 않을까요. 조정에서 장차 원자(元子, 연산군)를 어떻게 하려고 이런 거소(擧訴
)를 하였습니까?'
연산군은 태어나자마자 얼굴에 창병(瘡病)이란 병을 앓았다. 그래서 서대문 부근 강희맹(姜希
孟) 집으로 피접(避接)을 나가 강희맹 부인의 지극한 간호를 받으며 여러 해 머물렀는데, 그
러는
사이 윤씨는 폐비되어 저승으로 보내졌다. 허나 그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만 들었을
뿐,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100년 동안 윤씨의 일을 절대 말하지 말라
고 강하게 입단속을 시켰기 때문이다.
성종은
그를 세자(世子)로 삼지 않으려고 했으나, 윤씨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동정과 조정
신료들의 여론, 그리고 그를 대체할 세자감이 없어 별 수 없이 1483년 세자로 세웠다. 세자가
된
연산군은 10년 이상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유교와 역사를 배웠는데, 창병
때문에 경연(經筵)에 빠지는 일이 잦자 홍문관(弘文館)에서 이를 따지고 들었다. 결국 그가
왕이 되자 홍문관은
강제로 문을 닫게 된다.
1494년 부왕인 성종이 중병으로 눕자, 밤을 새며 부왕을 간호했으며, 자신의 생일 하례를
취
소했다. 또한 당시 서연(書筵)을 담당하던 성현(成俔)에게 서연을 잠시 중단해 줄 것을 요청
하여
부왕의 약시중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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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연산군 묘역
제일 앞에서부터 휘순공주 내외, 의정궁주 조씨, 연산군 내외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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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위에 오른 연산군의 치적
1494년 성종이 3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崩御)하자 연산군이 18세의 나이로
조선 10대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삼사(三司)의 강렬한 반대를 뿌리치고 수륙재(水陸齋)
부터 지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치적을 남겼다.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여
국방에 신경을 썼고, 조선의 동북쪽 구석인 길림(吉林) 지역과 연해주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
진족을 토벌했으며, 투항한 자에게는 토지와 상급을 내렸다. 또한 변방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
의 이주를 독려했다.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사창과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키며 굶주리는 백성을 구
제했고,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해 백성의 불편을 덜었다. 그리고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
地圖)','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다양한 서적을 비롯해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제왕시
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을 편찬해 제왕 수업에 귀감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 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성대(太平聖代)로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치향락
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자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했으며, 전
국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풀어 지방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 발달에 크게 신경을 썼다.
그는 시문과 음악에 능해 수시로 시문을 지었으며 그 시문을 모아 시집(詩集)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1506년 이후 반정파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시문
125편이 남아 있다. 또한 거문고 등 다양한 악기도 잘 다루었으며. 춤과 술에 일가견이
있었
다.
3. 왕권 강화를 위한 몸부림
연산군은 제왕임에도 신하의 눈치를 받아야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를 추구하면
서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다. 우선 일종의 그린벨트인 금표(禁標)의 범위를 경기도 곳곳으로
확장시켰다. 그 와중에 많은 백성이 집을 잃고 쫓겨났지만 그 호수(戶數)는 500호
남짓이었다
고
하며 그들에게 따로 거처와 보상금을 내렸다. 금표는 제왕의 사냥 외에도
군사훈련과 자연
보호, 산짐승의 개체수를 정리하는 등의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삼사(三司)라 불리던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홍문관을 때려잡았다.
흔히
언론탄압이라 그러는데, 삼사는 신권(臣權)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조선은 제왕이
무엇을
하려
고 할 때, 그것이 삼사와 신하들의 이해관계와 엇갈리는 경우 쌍수 들고 강렬히 반대를 일삼
았다. 오죽하면 연산군은 그들을 도필지리(刀筆之吏)라 맹비난을 했을까? 그러다가 사간원과
홍문관이 서로 아옹다옹거리는 틈을 이용해 삼사를
압박했으며,
소혜왕후 건강기원 불사(佛寺
)에
사간원이 태클을 걸자 연산군은 그들에 대해 철퇴를 내리면서
사헌부를 제외한 나머지 2
개를 없애버렸다.
또한 성균관(成均館)을 와해시켰는데, 불교를 믿던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청으로 절을 세우려
고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래서 연산군은 왕권에 대든다 하여 그들의
대과(大科) 자격을 박탈하는 정거(停擧)조치를 내렸다. 또한 유생들이 대과만 바라보고 사치
향락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여 그들의 학업을 고무시키기 위해
분경금지령(奔競禁止令)
, 흥학절목(興學節目) 등의 조치를 마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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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묘에서 바라본 의정궁주와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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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이름도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무오사화는 조선 최초의 사화로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났다 하여 사화라고 부른다. 이들 사
화는 전제왕권을
지향했던 연산군과 오만하게 설치던 사림파를 미워했던 훈구세력, 그리고 왕
과
훈구세력을 비난했던 사림파(士林派) 등 3자의 갈등이 곪아서 터진 사건이다.
무오사화 당시 사림파의 우두머리인 김종직(金宗直)은 세조(世祖)에게 발탁되었다. 세조가 천
문, 지리, 의학
등 7가지의 실용 학문을 관료와 선비들에게 배울 것을 권하자 그는 선비가 왜
그딴 것을
배워야 되냐며 대들다가 쫓겨났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중에 세조의 왕위찬
탈을
비난하고 단종(端宗)을 위로하고자 실록(實錄) 사초 작업을 하면서 조의제문(弔義帝文)
을 실었다.
즉 세조의 정통성을 깎고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다. 세조를 깎는 것은 넓게
보면 그의 자손인 성종과 연산군까지 부정하는 꼴이 된다. 사림파는 성종의 적극 지원을 받아
조정의
큰 축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498년 훈구파의 일원인 이극돈(李克墩)은 김일손(金馹孫)이 쓴 성종실록에 자신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여 있다는 것과 세조를 비방하는 조의제문이 실려있다는 것을 듣고 유자
광(柳子光)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에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보고하니 연산군은
뚜껑이 완전
폭발했다. 그렇게 연산군과 훈구세력은 조의제문을 내세워 사림파를 대거 때려잡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무오사화이다.
이때 김종직의 묘을 파헤쳐 목을 썰고,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은
세조를 비난했
다는 이유로 모조리 처단되거나 노비로 격하시켰으며, 정여창(鄭汝昌)과 홍한(洪旱)
등은
장
형(杖刑,
곤장 50~100대)으로 다스려 변방으로 추방하고, 김굉필(金宏弼), 임희재(任熙載) 등
은
태형(笞刑, 곤장 50대 이하)과 장형으로
골고루 다스린 다음 부역(負役)을 시켰다.
그 외
에도 사림 계열 관료 대부분이 파면되거나 좌천되는 등, 사림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8년 뒤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는 폐비윤씨의 보복극 겸 훈구파를 때려잡은 사건
이다.
연산군은 생모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왕위에 오르자 외조모(外
祖母)를 비롯한 외가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고, 청량리 북쪽 천장산(天藏山)에 방치되어 있던
생모의 묘를 화려하게 꾸몄다. 또한 성종의 유명(遺命)을 어기고
제헌왕후(齋獻王后)란 시호
를 올림과 동시의 윤씨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수시로 제를
올리고 생모를 위한 시를 지
음으로써 어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표출했다.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박살이 나자 훈구파가 그 자리를 대신해 상당한 세력을 누렸다.
상황이
이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왕권과 충돌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몇몇 훈구
대신들
은
연산군의 화를 돋구기 시작했다.
윤씨에게 사약을 배달했던 이세좌(李世左)는 연산군이
베푼 양로연(養老宴)에서
술을 마시다
가
그만
취기가 돌아 왕의
곤룡포(袞龍袍)에 술을 쏟았다. 이에 왕은 뚜껑이 폭발해 그를 유
배형에 처했으나 지나친 것을 알았는지
3달 만에 복직시켰다. 허나 나중에 폐비사건으로
귀양
을 보내
사사(賜死)시키고 그의 시신은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리
는운
형벌-을 시켰다.
그리고 세자비(世子妃)를 맞이하기 위해 간택령(揀擇令)을 내렸는데 그 대상 중에
홍귀달(洪
貴達)의 손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홍귀달은 손녀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간택에
보내지
않으니 이는 연산군의 뚜껑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그래서 홍귀달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보내 죽였으며
이때 폐비윤씨 이야기가
흘러 나오면서 폐비사건에 관련된 훈구 대신들까
지 싹
때려잡으니 이것이 갑자사화다.
이때 폐비사건에 관여된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등은 처형되었고, 옛날에 죽은 한명
회, 정창손(鄭昌孫)은 묘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또한 윤씨를 모함한 성
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 그 소생 아들을 죽여 야산에 버렸으며, 폐비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
이 있는 수십 명이 숙청되거나 처단되었다.
소혜왕후가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에 대해 꾸짖자 뚜껑이 아예 뒤집힌 연산군은 어미를 왜 죽
였냐며 따졌다. 이때
서로간의 언쟁이 오갔고, 그 충격으로 소혜왕후는 쓰러져 얼마 뒤 67세
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기록에는 연산군이 머리로 소혜왕후를 들이박았다고 한다. (무슨
야인시대에 나오는 구마적이나 시라소니도 아니고..)
이렇게 무참하다 싶이 훈구세력과 폐비사건 관련자를 때려잡으며, 왕권 강화의 걸림돌을 제거
했으나 이후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은 없으리라 믿고 자신의 치세를 너무 과신하며 자만에 빠
지게
된다. 옛말에도 자만은 금물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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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묘 곡장 뒷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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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그의 천하는 물거품이 되다.
갑자사화 이후 정국(政局)은 어수선했다. 금표를 확장하고 자신의 여흥을 위해 탕춘대(蕩春臺
)를 만들었으며, 도성 안에 있던 원각사(圓覺寺)와 흥천사(興天寺)를 훼손하여 기생들의
공간
이나 마굿간으로 만들었다.
1504년 어느 날, 왕을 비난하는 한글로 쓰인 익명서(匿名書)가 발견되었다. 이에 흥분한 연산
군은 도성의 성문을 모두 봉쇄하고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한글을 쓸 줄 아는 백성을
의금부(義禁府)로 집합시켜 필적을 조회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결국 익명서에 한글이 쓰였다는 이유로 애궂은 한글 사용을 금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연산군의 패도정치(覇道政治)가 심해지자 왕을 갈아야 된다는 무리들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
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연산군의 충복이던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이었다. 성희안
은
일전에 금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왕에게 혼쭐이 났고, 박원종은 확실치는 않
지만 연산군이 그의 윗누이를 건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은 앙심을 품고 홍경주(
洪景舟)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한다.
그러다가 1506년 왕이 종묘(宗廟)에 제를 지낸 다음 날인 9월 2일 박원종 일당은 군사를 이끌
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왕은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반란군의 침입에 왕
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못했다고 하며, 결국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반란군에게 옥새
를 내주고
말았다.
반란군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의 허락을 구해 왕을 동궁(東宮)에 가두고 그녀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데려와 익선관(翼善冠)을 쓴 상태로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중
종(中宗)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연산군이 쫓겨나자 그의 측근인 신수근(愼守勤)과
임사홍(任士洪) 등은 반란군에게 죽었으며,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거창군부인(居昌郡婦人)으로 강등되어 사가(私家)로 떨려났다.
6. 역사의 처절한 패배자 연산군의 최후와 그 이후
동궁에 유폐된 연산군은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을 통해 궁 밖으로 추방되어 강화도 서쪽에 자
리한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달 뒤인 11월 역질(疫疾)에 걸리자 중종은 약
을 보내주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불과 며칠 만에 갑자기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살
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병으로 죽었다고 나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으며, 이상한 것은
한겨울에 역질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이 보냈다는 약도 상당히 의심쩍다.
그래서 병사가 아닌 독살되었다는 설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매장되었으며, 1512년 12월 부인 신씨가 남편의 무덤을
자신의
외조부 땅(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이 이를 허락해 1513년 2월
왕자의 예로 이장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
지막으로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으나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부인 신씨를 비롯해 장녹수 등 후궁 5~6명을 두었다. 자녀는 신씨 소생의 2남 1녀(
어떤 자료에는 5남 2녀), 나머지 후궁에게서 2남 1녀(어떤 자료에는 2남 3녀)로 총 6명(12명)
이다. 허나 대부분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폐세자 이황(李晃)은 유배지에서 살해되어 대가 완
전히
끊겼다. 그래서 연산군에 대한 제사는 처가집인 거창신씨 집안에서 지냈다. 또한 후궁의
딸은
사가로 추방되어 궁인(宮人)에게 양육되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그 흔한 묘호(廟號)도 받지 못했으며, 시호(諡號)도 없다. 그냥 왕자
시절
의
칭호인 연산군을 그대로 썼다. 김정국(金正國)과 유숭조(柳崇祖) 등은 그에게 시호를 올려
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제사를 받들 것을 건의했으나 중종과 반정파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를 두고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정국 등을
높이 평가하며, 연산군의 제사가 끊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 기록했다.
죽어서도 왕의 예우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종묘(宗廟)에 배향되지도 못
했다. 또한 무덤도 능(陵)이 아닌 묘(墓)로 사대부의 무덤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초는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로 격하되었다.
중종과 반정파에게 철저히 매장되고 왜곡되었으며, 명종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연산군 3
글자는 부정적인 의미이자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림파는 연산군 때 죽은 사림파 사람들,
즉 자신의 선배들을 의로운
인물로 추앙했고, 연산군과 그 측근은 죄다 쓰레기로 기록하여 그
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이는 패배자에게
인정을 두지 않는 역사의 매정한 현실이
다.
승리자는 항상 영광스럽게 포장이
되지만 패배자는 아무리 공적이 뛰어나도
승리자의 구미에
따라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된다. 연산군은 바로 역사 패배자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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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앞줄에 자리한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徽順公主) 부부의 묘역
(왼쪽이 사위 구문경의 묘, 오른쪽이 공주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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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06년부터 속세에 개방된 연산군 묘역
연산군묘는 오랫동안 발길이 금지된 곳이었다. 묘역 주변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
식마냥 철책이 휴전선처럼 둘러져 있었으며, 문은 굳게 입을 봉하며 좀처럼 열릴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2006년 7월 속세에 개방되면서 비로소 관람이 가능해졌다. 또한 오랫동안 비지정문
화재로의 서러움을 겪다가 1991년에 비로소 국가 사적 362호로 지정되었다.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묘역으로 안내하는 문은 은행나무 바로 옆인 묘역 남쪽에 있다. 그
곳에 가건물식 관리사무소를 지어 묘역을 관리하고 답사객을 안내한다.
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연산군 묘역이 나타난다. 묘역은 전형적인 사대부의 묘역으로
조촐
한 규모이다. 조선 초기 무덤 양식과 석물(石物)이 잘 남아있는 이곳에는 모두 5기의 무덤이
누워있는데, 제일 앞쪽에 연산군의 첫째 딸인 휘순공주(1495~?)와 사위 능양위(綾陽尉)
구문
경(具文景)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휘순공주는 반정 이후 시아비인 구수영(具壽永)의
요구로 이혼을 당해 친정에서 살다가 1508년 유순(柳洵)의 의견으로 다시 그와 재혼했다.
구문경은 구수영의 아들로 1501년 휘순공주에게 장가들어 부마(駙馬)가 되었으며, 1502년 1월
연산군에게 숙마(熟馬)를 하사받았다. 반정이 터지자 직첩(職牒)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서인(
庶人)이 되었고, 부친에 의해 공주와 이혼을 했지만 다시 재혼했다.
휘순공주 부부 묘역은 1524년에 조성되었는데,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망주석(望柱石) 1쌍과
눈썹이 코쪽으로 구부러진 문인석(文人石) 1쌍, 근래에 새로 손질된 장명등(長明燈) 1쌍, 묘
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무덤 주변을
수식하고 있으며, 봉분은
호석(護石)이
없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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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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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순공주 부부 묘를
지나면 연산군묘 바로 앞에 홀로 자리한 네모난 무덤이 있다. 자세한
사
연을 모르는 이들은 연산군묘 바로 밑에 있으니 그의 후궁 무덤이겠지 생각하겠지만 엉뚱하게
도 조선
3대 군주인 태종(太宗)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이다. 어째서 연산군묘가 할머니뻘
인 조씨의
묘
위쪽에 둥지를 튼 것일까? 사연은 이렇다.
의정궁주 조씨는 한양조씨 집안으로 조뢰(趙賚, 1374~1449)의 딸이다. 1422년 태종의 마지막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바로 그해 태종이 붕어하자 후궁으로 책봉되지도 못하고 궁주(宮主)의
작호를 받는 선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소생도 얻지 못하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조씨가 죽자 세종은 4번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그의 제사를 맡겼다. 당시 이곳은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자신의 땅에 1454년 조씨의 무덤을 조성하고 제를 지냈다. 그리고 연
산군의 부인 신씨는 바로 임영대군의 외손녀로 외가에서 물려받은 그 땅에 남편의 묘를 이장
한 것이다. 비록 폐위되긴 했지만 그래도 제왕이었으므로 궁주의 묘 윗쪽에 자리를 닦았다.
궁주의 묘는 봉분(封墳) 밑도리에 네모난 호석을 두르고 봉분을 쌓았는데, 이는 고려부터 조
선
초까지 많이 나타나는 무덤 양식이다. 묘 앞에는 비석과 야트막한 상석을 두고 문인석 1쌍
을 세워 묘를 지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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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내외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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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궁주묘 뒤쪽에는 이
묘역의 주인인 연산군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있다. 휘순공주의 묘처럼
호석이 없는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앞에 각각 묘표(비석)와 상석, 장명등을 세우고, 문인석 2
쌍과
망주석
1쌍을 좌우에 벌렸으며, 무덤 뒤쪽에는 곡장을 두룬 전형적인 왕족의 묘제(墓制)
이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愼承善)의 딸로 1488년 세자빈이 되었
으며, 남편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허나 중종반정으로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고 정청궁
(貞淸宮)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537년 남편 곁에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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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묘표(墓表) |
▲ 거창신씨 묘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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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5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의 때가 넉넉히 입혀진 연산군과 신씨 부인의 묘표,
비석 윗부분에 회오리 모양의 꽃무늬가 참 인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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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묘 우측 문인석 |
▲ 연산군묘 좌측 문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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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는 군(君)에서 끝났기 때문에 무인석(武人石)이 없고 문인석만
2쌍을 두었다. 홀(忽)
을
굳게 쥐어들고 묘역을 지켜선 그들의 표정이 조금 침울해 보인다. 지나치게 길쭉한 두 눈
에도
힘이 없고, 당장이라도 눈물을 글썽일 것 같은 모습이다. 묘역 주인의 슬픈 사연이 깃들
여진 곳이다 보니 저들도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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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
동 산77
(☎ 02-3494-0370)
* 매년 4월 2일(양력)에 연산군묘 제향이 열린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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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 앞에 선 육중한 장명등(長明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