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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방학동 늦가을 나들이 (연산군묘, 방학동 은행나무, 정의공주묘역, 목서흠묘역)


' 도봉구 방학동 늦가을 나들이 '
(연산군묘, 방학동 은행나무, 안맹담 정의공주묘역, 목서흠 묘역)

  연산군묘  
연산군묘 재실

▲  연산군묘
◀  연산군묘 재실
▶  방학동 은행나무
▼  목서흠묘

방학동 은행나무
  충정공 목서흠묘  


 


늦가을이 맛있게 익어가는 10월 말~11월 초가 되면 집에서 가까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
무 생각이 무척 간절해진다. 집에서 겨우 도보 20여 분 거리라 종종 복습하러 가는데, 주
변에 있는 늙은 명소들도 간만에 복습할 겸, 그곳을 찾았다.

도시와 전원(田園), 도봉산 숲이 사이좋게 하늘을 이고 있는 방학동 서부에는 은행나무와
연산군묘를 비롯해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충정공 목서흠 묘역, 간송 전형필 가옥과 그
의 묘역, 원당천 등 늙은 명소가 가득하다. 이들 가운데 연산군묘와 방학동 은행나무, 원
당천은 한곳에 몰려 있어서 1석3조의 답사를 누릴 수 있으며, 정의공주묘역과 목서흠묘도
가까이에 있다.


♠  기나긴 세월 폭군(暴君)으로 낙인 찍혀 철저히 뭉개진
불운의 군주, 연산군묘(燕山君墓) - 국가 사적

▲  연산군묘 뒷쪽에서 바라본 연산군묘역


                        종묘 사직 영혼이 나의 지성을 생각하지 않아
                        어찌 이다지도 나의 마음 상하는지
                        해마다 네 아들이 꿈같이 떠나가니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 적시네

                        
< 연산군이 1503년 1월 27일에 지은 시 >


방학동에서 우이동(牛耳洞)으로 넘어가는 길목 산자락에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의 묘가 있
다. 이곳은 도봉구 10대 명소의 하나로 연산군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해 아무리 국사와 높은
담을 쌓은 사람이라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달리 그의 묘는 아는 이
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인간말종이다. 고구려의 모본왕(慕本王, 재
위 48~53)과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300), 고려 충혜왕(忠惠王, 1315~1344)과 더불어 폭군
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며, 주색잡기, 신하와 선비들 때려잡기, 2차례의 사화(士禍), 장녹수,
할머니(소혜왕후)를 죽인 패륜아 등 안좋은 인식만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
허나 연산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으며, 학문도 뛰어나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다. 그런 그가 폭군의 대명사가 된 것은 지나친 왕권강화와 그에 따른 실정
(失政)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중종반정으로 역사의 영원한 패자(敗者)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근래에 그를 새롭게 조명하는 인식들이 늘어나면서 폭군의 이미지는 조금씩 걷히고 있
는 상태이며, 연산군묘 안내문도 그런 의견을 반영하여 좋지 않은 내용은 삭제되었다. 그렇다
면 역사의 패자가 어찌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연산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연산군묘 정문 (마감시간 직전)
2006년에 연산군묘를 속세에 개방하면서 관리사무소와 정문을 만들었다.
입장료는 공짜이니 관람시간 내에 마음껏 들어가면 된다.


1. 모후인 윤씨의 죽음과 연산군의 세자 시절

연산군은 1476년 11월 6일 성종(成宗)과 폐비윤씨(廢妃尹氏)로 유명한 후궁 윤씨 사이에서 태
어났다. 이름은 융(隆)으로 성종의 맏아들이며, 그때 성종은 왕후가 없었는데, 윤씨가 아들을
낳아버리자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크게 기뻐하여 그 공로로 왕비에 책봉되기
에 이른다.
허나 왕비가 된 이후 투기가 생기면서 시어미인 소혜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머니의 눈
치를 진하게 받던 성종도 그 영향으로 윤씨와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다 보니 부부간
의 말싸움도 종종 일어났던 모양인데, 그 과정에서 성종의 이마에 상처까지 내는 큰 죄를 짓
게 된다. 전제왕권 시절에는 제왕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죄였다.
결국 성종과 소혜왕후는 1479년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조정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
구하고 윤씨를 폐비시켜 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다가 1482년 좌승지(左承旨) 이세좌(李世左
)를 통해 따끈한 사약을 보냈고, 윤씨는 그것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세좌가 윤씨를 처리하고 집에 돌아오자. 그의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자손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어머니(윤씨)가 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연산군)이
훗날 보복하지 않을까요. 조정에서 장차 원자(元子, 연산군)를 어떻게 하려고 이런 거소(擧訴
)를 하였습니까?'

연산군은 태어나자마자 얼굴에 창병(瘡病)이란 병을 앓았다. 그래서 서대문 부근 강희맹(姜希
孟) 집으로 피접(避接)을 나가 강희맹 부인의 지극한 간호를 받으며 여러 해 머물렀는데, 그
러는 사이 윤씨는 폐비되어 저승으로 보내졌다. 허나 그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만 들었을
뿐,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100년 동안 윤씨의 일을 절대 말하지 말라
고 강하게 입단속을 시켰기 때문이다.

성종은 그를 세자(世子)로 삼지 않으려고 했으나, 윤씨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동정과 조정
신료들의 여론, 그리고 그를 대체할 세자감이 없어 별 수 없이 1483년 세자로 세웠다. 세자가
된 연산군은 10년 이상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유교와 역사를 배웠는데, 창병
때문에 경연(經筵)에 빠지는 일이 잦자 홍문관(弘文館)에서 이를 따지고 들었다. 결국 그가
왕이 되자 홍문관은 강제로 문을 닫게 된다.

1494년 부왕인 성종이 중병으로 눕자, 밤을 새며 부왕을 간호했으며, 자신의 생일 하례를 취
소했다. 또한 당시 서연(書筵)을 담당하던 성현(成俔)에게 서연을 잠시 중단해 줄 것을 요청
하여 부왕의 약시중을 들었다.


▲  5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연산군 묘역
제일 앞에서부터 휘순공주 내외, 의정궁주 조씨, 연산군 내외 무덤


2. 재위에 오른 연산군의 치적
1494년 성종이 3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崩御)하자 연산군이 18세의 나이로 조선 10대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삼사(三司)의 강렬한 반대를 뿌리치고 수륙재(水陸齋)
부터 지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치적을 남겼다.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여
국방에 신경을 썼고, 조선의 동북쪽 구석인 길림(吉林) 지역과 연해주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
진족을 토벌했으며, 투항한 자에게는 토지와 상급을 내렸다. 또한 변방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
의 이주를 독려했다.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사창과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키며 굶주리는 백성을 구
제했고,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해 백성의 불편을 덜었다. 그리고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
地圖)','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다양한 서적을 비롯해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제왕시
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을 편찬해 제왕 수업에 귀감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 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성대(太平聖代)로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치향락
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자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했으며, 전
국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풀어 지방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 발달에 크게 신경을 썼다.

그는 시문과 음악에 능해 수시로 시문을 지었으며 그 시문을 모아 시집(詩集)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1506년 이후 반정파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시문
125편이 남아 있다. 또한 거문고 등 다양한 악기도 잘 다루었으며. 춤과 술에 일가견이 있었
다.

3. 왕권 강화를 위한 몸부림
연산군은 제왕임에도 신하의 눈치를 받아야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를 추구하면
서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다. 우선 일종의 그린벨트인 금표(禁標)의 범위를 경기도 곳곳으로
확장시켰다. 그 와중에 많은 백성이 집을 잃고 쫓겨났지만 그 호수(戶數)는 500호 남짓이었다
고 하며 그들에게 따로 거처와 보상금을 내렸다. 금표는 제왕의 사냥 외에도 군사훈련과 자연
보호, 산짐승의 개체수를 정리하는 등의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삼사(三司)라 불리던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홍문관을 때려잡았다. 흔히
언론탄압이라 그러는데, 삼사는 신권(臣權)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조선은 제왕이 무엇을 하려
고 할 때, 그것이 삼사와 신하들의 이해관계와 엇갈리는 경우 쌍수 들고 강렬히 반대를 일삼
았다. 오죽하면 연산군은 그들을 도필지리(刀筆之吏)라 맹비난을 했을까? 그러다가 사간원과
홍문관이 서로 아옹다옹거리는 틈을 이용해 삼사를 압박했으며, 소혜왕후 건강기원 불사(佛寺
)에 사간원이 태클을 걸자 연산군은 그들에 대해 철퇴를 내리면서 사헌부를 제외한 나머지 2
개를 없애버렸다.

또한 성균관(成均館)을 와해시켰는데, 불교를 믿던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청으로 절을 세우려
고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래서 연산군은 왕권에 대든다 하여 그들의
대과(大科) 자격을 박탈하는 정거(停擧)조치를 내렸다. 또한 유생들이 대과만 바라보고 사치
향락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여 그들의 학업을 고무시키기 위해 분경금지령(奔競禁止令)
, 흥학절목(興學節目) 등의 조치를 마련했다.


▲  연산군 묘에서 바라본 의정궁주와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무덤

4. 그 이름도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무오사화는 조선 최초의 사화로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났다 하여 사화라고 부른다. 이들 사
화는 전제왕권을 지향했던 연산군과 오만하게 설치던 사림파를 미워했던 훈구세력, 그리고 왕
과 훈구세력을 비난했던 사림파(士林派) 등 3자의 갈등이 곪아서 터진 사건이다.

무오사화 당시 사림파의 우두머리인 김종직(金宗直)은 세조(世祖)에게 발탁되었다. 세조가 천
문, 지리, 의학 등 7가지의 실용 학문을 관료와 선비들에게 배울 것을 권하자 그는 선비가 왜
그딴 것을 배워야 되냐며 대들다가 쫓겨났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중에 세조의 왕위찬
탈을 비난하고 단종(端宗)을 위로하고자 실록(實錄) 사초 작업을 하면서 조의제문(弔義帝文)
을 실었다. 즉 세조의 정통성을 깎고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다. 세조를 깎는 것은 넓게
보면 그의 자손인 성종과 연산군까지 부정하는 꼴이 된다. 사림파는 성종의 적극 지원을 받아
조정의 큰 축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498년 훈구파의 일원인 이극돈(李克墩)은 김일손(金馹孫)이 쓴 성종실록에 자신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여 있다는 것과 세조를 비방하는 조의제문이 실려있다는 것을 듣고 유자
광(柳子光)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에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보고하니 연산군은 뚜껑이 완전
폭발했다. 그렇게 연산군과 훈구세력은 조의제문을 내세워 사림파를 대거 때려잡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무오사화이다.
이때 김종직의 묘을 파헤쳐 목을 썰고,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은 세조를 비난했
다는 이유로 모조리 처단되거나 노비로 격하시켰으며, 정여창(鄭汝昌)과 홍한(洪旱) 등은 장
형(杖刑, 곤장 50~100대)으로 다스려 변방으로 추방하고, 김굉필(金宏弼), 임희재(任熙載) 등
은 태형(笞刑, 곤장 50대 이하)과 장형으로 골고루 다스린 다음 부역(負役)을 시켰다. 그 외
에도 사림 계열 관료 대부분이 파면되거나 좌천되는 등, 사림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8년 뒤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는 폐비윤씨의 보복극 겸 훈구파를 때려잡은 사건
이다.
연산군은 생모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왕위에 오르자 외조모(外
祖母)를 비롯한 외가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고, 청량리 북쪽 천장산(天藏山)에 방치되어 있던
생모의 묘를 화려하게 꾸몄다. 또한 성종의 유명(遺命)을 어기고 제헌왕후(齋獻王后)란 시호
를 올림과 동시의 윤씨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수시로 제를 올리고 생모를 위한 시를 지
음으로써 어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표출했다.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박살이 나자 훈구파가 그 자리를 대신해 상당한 세력을 누렸다. 상황이
이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왕권과 충돌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몇몇 훈구 대신들
은 연산군의 화를 돋구기 시작했다.
윤씨에게 사약을 배달했던 이세좌(李世左)는 연산군이 베푼 양로연(養老宴)에서 술을 마시다
가 그만 취기가 돌아 왕의 곤룡포(袞龍袍)에 술을 쏟았다. 이에 왕은 뚜껑이 폭발해 그를 유
배형에 처했으나 지나친 것을 알았는지 3달 만에 복직시켰다. 허나 나중에 폐비사건으로 귀양
을 보내 사사(賜死)시키고 그의 시신은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리
는운 형벌-
을 시켰다.
그리고 세자비(世子妃)를 맞이하기 위해 간택령(揀擇令)을 내렸는데 그 대상 중에 홍귀달(洪
貴達)의 손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홍귀달은 손녀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간택에 보내지
않으니 이는 연산군의 뚜껑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그래서 홍귀달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보내 죽였으며 이때 폐비윤씨 이야기가 흘러 나오면서 폐비사건에 관련된 훈구 대신들까
지 싹 때려잡으니 이것이 갑자사화다.
이때 폐비사건에 관여된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등은 처형되었고, 옛날에 죽은 한명
회, 정창손(鄭昌孫)은 묘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또한 윤씨를 모함한 성
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 그 소생 아들을 죽여 야산에 버렸으며, 폐비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
이 있는 수십 명이 숙청되거나 처단되었다.
소혜왕후가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에 대해 꾸짖자 뚜껑이 아예 뒤집힌 연산군은 어미를 왜 죽
였냐며 따졌다. 이때 서로간의 언쟁이 오갔고, 그 충격으로 소혜왕후는 쓰러져 얼마 뒤 67세
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기록에는 연산군이 머리로 소혜왕후를 들이박았다고 한다. (무슨
야인시대에 나오는 구마적이나 시라소니도 아니고..)

이렇게 무참하다 싶이 훈구세력과 폐비사건 관련자를 때려잡으며, 왕권 강화의 걸림돌을 제거
했으나 이후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은 없으리라 믿고 자신의 치세를 너무 과신하며 자만에 빠
지게 된다. 옛말에도 자만은 금물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  연산군묘 곡장 뒷쪽

5.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그의 천하는 물거품이 되다.
갑자사화 이후 정국(政局)은 어수선했다. 금표를 확장하고 자신의 여흥을 위해 탕춘대(蕩春臺
)를 만들었으며, 도성 안에 있던 원각사(圓覺寺)와 흥천사(興天寺)를 훼손하여 기생들의 공간
이나 마굿간으로 만들었다.

1504년 어느 날, 왕을 비난하는 한글로 쓰인 익명서(匿名書)가 발견되었다. 이에 흥분한 연산
군은 도성의 성문을 모두 봉쇄하고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한글을 쓸 줄 아는 백성을
의금부(義禁府)로 집합시켜 필적을 조회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결국 익명서에 한글이 쓰였다는 이유로 애궂은 한글 사용을 금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연산군의 패도정치(覇道政治)가 심해지자 왕을 갈아야 된다는 무리들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
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연산군의 충복이던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이었다. 성희안
은 일전에 금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왕에게 혼쭐이 났고, 박원종은 확실치는 않
지만 연산군이 그의 윗누이를 건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은 앙심을 품고 홍경주(
洪景舟)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한다.

그러다가 1506년 왕이 종묘(宗廟)에 제를 지낸 다음 날인 9월 2일 박원종 일당은 군사를 이끌
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왕은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반란군의 침입에 왕
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못했다고 하며, 결국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반란군에게 옥새
를 내주고 말았다.

반란군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의 허락을 구해 왕을 동궁(東宮)에 가두고 그녀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데려와 익선관(翼善冠)을 쓴 상태로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중
종(中宗)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연산군이 쫓겨나자 그의 측근인 신수근(愼守勤)과 임사홍(任士洪) 등은 반란군에게 죽었으며,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거창군부인(居昌郡婦人)으로 강등되어 사가(私家)로 떨려났다.

6. 역사의 처절한 패배자 연산군의 최후와 그 이후
동궁에 유폐된 연산군은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을 통해 궁 밖으로 추방되어 강화도 서쪽에 자
리한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달 뒤인 11월 역질(疫疾)에 걸리자 중종은 약
을 보내주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불과 며칠 만에 갑자기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살
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병으로 죽었다고 나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으며, 이상한 것은
한겨울에 역질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이 보냈다는 약도 상당히 의심쩍다.
그래서 병사가 아닌 독살되었다는 설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매장되었으며, 1512년 12월 부인 신씨가 남편의 무덤을
자신의 외조부 땅(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이 이를 허락해 1513년 2월
왕자의 예로 이장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
지막으로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으나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부인 신씨를 비롯해 장녹수 등 후궁 5~6명을 두었다. 자녀는 신씨 소생의 2남 1녀(
어떤 자료에는 5남 2녀), 나머지 후궁에게서 2남 1녀(어떤 자료에는 2남 3녀)로 총 6명(12명)
이다. 허나 대부분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폐세자 이황(李晃)은 유배지에서 살해되어 대가 완
전히 끊겼다. 그래서 연산군에 대한 제사는 처가집인 거창신씨 집안에서 지냈다. 또한 후궁의
딸은 사가로 추방되어 궁인(宮人)에게 양육되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그 흔한 묘호(廟號)도 받지 못했으며, 시호(諡號)도 없다. 그냥 왕자 시절
의 칭호인 연산군을 그대로 썼다. 김정국(金正國)과 유숭조(柳崇祖) 등은 그에게 시호를 올려
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제사를 받들 것을 건의했으나 중종과 반정파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를 두고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정국 등을
높이 평가하며, 연산군의 제사가 끊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 기록했다.
죽어서도 왕의 예우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종묘(宗廟)에 배향되지도 못
했다. 또한 무덤도 능(陵)이 아닌 묘(墓)로 사대부의 무덤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초는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로 격하되었다.

중종과 반정파에게 철저히 매장되고 왜곡되었으며, 명종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연산군 3
글자는 부정적인 의미이자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림파는 연산군 때 죽은 사림파 사람들,
즉 자신의 선배들을 의로운 인물로 추앙했고, 연산군과 그 측근은 죄다 쓰레기로 기록하여 그
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이는 패배자에게 인정을 두지 않는 역사의 매정한 현실이
다.
승리자는 항상 영광스럽게 포장이 되지만 패배자는 아무리 공적이 뛰어나도 승리자의 구미에
따라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된다. 연산군은 바로 역사 패배자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 제일 앞줄에 자리한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徽順公主) 부부의 묘역
(왼쪽이 사위 구문경의 묘, 오른쪽이 공주의 묘)


7. 2006년부터 속세에 개방된 연산군 묘역

연산군묘는 오랫동안 발길이 금지된 곳이었다. 묘역 주변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
식마냥 철책이 휴전선처럼 둘러져 있었으며, 문은 굳게 입을 봉하며 좀처럼 열릴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2006년 7월 속세에 개방되면서 비로소 관람이 가능해졌다. 또한 오랫동안 비지정문
화재로의 서러움을 겪다가 1991년에 비로소 국가 사적 362호로 지정되었다.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묘역으로 안내하는 문은 은행나무 바로 옆인 묘역 남쪽에 있다. 그
곳에 가건물식 관리사무소를 지어 묘역을 관리하고 답사객을 안내한다.
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연산군 묘역이 나타난다. 묘역은 전형적인 사대부의 묘역으로 조촐
한 규모이다. 조선 초기 무덤 양식과 석물(石物)이 잘 남아있는 이곳에는 모두 5기의 무덤이
누워있는데, 제일 앞쪽에 연산군의 첫째 딸인 휘순공주(1495~?)와 사위 능양위(綾陽尉) 구문
경(具文景)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휘순공주는 반정 이후 시아비인 구수영(具壽永)의
요구로 이혼을 당해 친정에서 살다가 1508년 유순(柳洵)의 의견으로 다시 그와 재혼했다.
구문경은 구수영의 아들로 1501년 휘순공주에게 장가들어 부마(駙馬)가 되었으며, 1502년 1월
연산군에게 숙마(熟馬)를 하사받았다. 반정이 터지자 직첩(職牒)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서인(
庶人)이 되었고, 부친에 의해 공주와 이혼을 했지만 다시 재혼했다.

휘순공주 부부 묘역은 1524년에 조성되었는데,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망주석(望柱石) 1쌍과
눈썹이 코쪽으로 구부러진 문인석(文人石) 1쌍, 근래에 새로 손질된 장명등(長明燈) 1쌍, 묘
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무덤 주변을 수식하고 있으며, 봉분은 호석(護石)이
없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다.


▲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묘

휘순공주 부부 묘를 지나면 연산군묘 바로 앞에 홀로 자리한 네모난 무덤이 있다. 자세한 사
연을 모르는 이들은 연산군묘 바로 밑에 있으니 그의 후궁 무덤이겠지 생각하겠지만 엉뚱하게
도 조선 3대 군주인 태종(太宗)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이다. 어째서 연산군묘가 할머니뻘
인 조씨의 묘 위쪽에 둥지를 튼 것일까? 사연은 이렇다.

의정궁주 조씨는 한양조씨 집안으로 조뢰(趙賚, 1374~1449)의 딸이다. 1422년 태종의 마지막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바로 그해 태종이 붕어하자 후궁으로 책봉되지도 못하고 궁주(宮主)의
작호를 받는 선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소생도 얻지 못하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조씨가 죽자 세종은 4번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그의 제사를 맡겼다. 당시 이곳은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자신의 땅에 1454년 조씨의 무덤을 조성하고 제를 지냈다. 그리고 연
산군의 부인 신씨는 바로 임영대군의 외손녀로 외가에서 물려받은 그 땅에 남편의 묘를 이장
한 것이다. 비록 폐위되긴 했지만 그래도 제왕이었으므로 궁주의 묘 윗쪽에 자리를 닦았다.

궁주의 묘는 봉분(封墳) 밑도리에 네모난 호석을 두르고 봉분을 쌓았는데, 이는 고려부터 조
선 초까지 많이 나타나는 무덤 양식이다. 묘 앞에는 비석과 야트막한 상석을 두고 문인석 1쌍
을 세워 묘를 지킨다.


▲  연산군 내외의 묘

의정궁주묘 뒤쪽에는 이 묘역의 주인인 연산군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있다. 휘순공주의 묘처럼
호석이 없는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앞에 각각 묘표(비석)와 상석, 장명등을 세우고, 문인석 2
쌍과 망주석 1쌍을 좌우에 벌렸으며, 무덤 뒤쪽에는 곡장을 두룬 전형적인 왕족의 묘제(墓制)
이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愼承善)의 딸로 1488년 세자빈이 되었
으며, 남편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허나 중종반정으로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고 정청궁
(貞淸宮)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537년 남편 곁에 묻혔다.

▲  연산군 묘표(墓表)

▲  거창신씨 묘표

무려 5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의 때가 넉넉히 입혀진 연산군과 신씨 부인의 묘표,
비석 윗부분에 회오리 모양의 꽃무늬가 참 인상적이다.

▲  연산군묘 우측 문인석

▲  연산군묘 좌측 문인석

연산군묘는 군(君)에서 끝났기 때문에 무인석(武人石)이 없고 문인석만 2쌍을 두었다. 홀(忽)
을 굳게 쥐어들고 묘역을 지켜선 그들의 표정이 조금 침울해 보인다. 지나치게 길쭉한 두 눈
에도 힘이 없고, 당장이라도 눈물을 글썽일 것 같은 모습이다. 묘역 주인의 슬픈 사연이 깃들
여진 곳이다 보니 저들도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 연산군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
동 산77 (☎ 02-3494-0370)

* 매년 4월 2일(양력)에 연산군묘 제향이 열린
다.

▲  무덤 앞에 선 육중한 장명등(長明燈)


♠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아름다운 은행나무, 방학동 은행나무
- 서울 자연유산

연산군묘 바로 앞에는 도봉구 10대 명소의 일원이자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방학동 은행
나무가 장대한 기골을 자랑하며 넓게 그늘을 드리운다. 한참 늦가을의 향연을 연주하며 황금
빛으로 물든 그의 모습은 보기만해도 속세에서 오염된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정화되기에 충분
하다.
지나가던 봄과 가을도 그에게 반해 오랫동안 머물다 가며, 아무리 잘난 화가라 한들 완전히
흉내내지 못할 대자연의 대작품이다. 사계절을 두고 다르게 손질을 가하니 특히 신록이 깃든
봄과 누렇게 뜬 늦가을이 대장관이다.

이 나무는 1968년 서울시 보호수 10-1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홀로 하늘을 이고 있지만 예전
에는 동남쪽 200m 지점에 늙은 은행나무가 1그루 더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부부 은
행나무'라 불렀으며, 윗 사진의 나무를 숫나무, 없어진 나무를 암나무로 여겼다. 허나 그 암
나무는 천박한 개발의 칼질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신동아아파트를 만들면서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졸지에 홀아비가 되었다.

예전에는 나이가 830년(또는 880년)으로 추정되어 서울에서 가장 늙은 나무란 타이틀을 거머
쥐기도 했다. 1990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안내문에 800년이라 나와있었는데, 2004년에 와
보니 그새 30년이 더해져 830년이라 나왔다. 불과 14년이 흘렀을 뿐인데, 나무의 나이는 그
곱으로 더해진 것이다.
서울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로 마땅히 천연기념물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의 훈장을
달아줘도 모자를 판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계속 보호수 등급에 처박아두다가 2013년 3월 28일
에 늦게나마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2024년 7월 '서울 자연유산'으로 등급이 변
경됨) 그때 다시 나이를 측정했는데, 그 결과 550~600년 정도로 나왔다. 그동안 본 나무의 뜻
과 무관하게 사람들에 의해 200~300년의 적지 않은 거품이 끼어있던 셈이다. 그래서 서울 최
고(最古)의 나무는 시흥동(始興洞)에 있는 은행나무(추정 나이 900년 이상)가 차지하게 되었
다.

나무의 높이는 25m, 둘레 10.7m에 이르는 거대한 몸집으로 은행나무는 사람들이 심은 것이 대
부분이다. 누가 심었는지는 은행나무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린 실정이나 600여 년 전에 원당마
을이 나무 곁에 들어섰던 점으로 보아 그 마을에서 심었을 가능성도 있고, 이곳 토지를 소유
한 임영대군이 심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임영대군 외손인 거창신씨 집안과 원당마을에서
부족함이 없이 그를 돌보면서 어엿한 노거수로 성장했고, 연산군 가족의 장례도 말없이 지켜
보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묘역에 그늘을 드리우며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예로부터 지역 사람들이 특별히 아끼고 신성시하던 나무로 나무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다고 한다. 실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암살되기 1년 전인 1978년에 큰 불이
나서 소방차를 동원해 간신히 진화했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 주변은 밭두렁이 널린 시골이었으나 2000년 이후 나무 동쪽에 단독
주택들이, 남쪽에는 나무를 압도하는 키다리 아파트(신동아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나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동네 주민들의 민원으로 나무의 생육에 지장이 없도록 아파트 구조가 변경되었고, 주
변을 정비하여 은행잎이 마음 놓고 내려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나무 주변에는
경관을 배려하지 않는 개발의 산물이 가득하고, 북쪽에는 연산군묘가 있는 언덕이 있어 그야
말로 사방(四方)이 막힌 답답한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 아쉽다. (그나마 서쪽이 좀 트였음) 그
래도 나무의 생명력은 매우 강인하여 2013년 초, 나이 측정을 위해 채취한 목편 상태 분석 결
과 생장상태는 이상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역 주민들과 나그네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그는 정자나무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도 마다하지 않으니 정말로 아낌없이 베푸는 소중한 나무이다. 내
가 제일 흠모하는 나무로 집 근처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게다가
북한산둘레길20구간(왕실묘역길)이 나무 앞을 지나면서 그를 보는 사람들도 예전보다 훨씬 많
아졌다.

나무의 모습은 계절의 변화를 빼고는 그리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변 풍경과 나
무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 정도, 천하 은행나무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는 양평 용문사
(龍門寺) 은행나무(☞ 관련글 보기)도 시샘할 정도인 방학동 은행나무의 아리따운 자태는 나
그네의 마음을 충분히 빼앗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우쭐거려도 그 나무
앞에서는 일개 초라한 두발 동물에 불과하다.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장수를 누리며 살아온 것은 자연에 순응하며 조용히 제 할일을 하며 살
았기 때문이다. 인간들도 이제 은행나무의 그런 철학을 배워야 되지 않을까?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빛 은행잎들은 외마디 괴로운 소리를 지르며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쓸쓸히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런 낙엽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지만, 귀를 접은 은행잎
은 내년 봄을 기약하며 서서히 땅속으로 흡수된다. 그렇게 겨울제국의 시련을 준비하는 은행
나무의 모습은 이제 곧 나이 1살을 먹는다는 우울감까지 던져주기도 한다.

은행나무 서쪽에는 원당샘이란 샘터가 있으며, 그 주변으로 연못을 갖춘 원당샘공원이 조성되
어 연산군묘와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의 관광/역사 가치를 조금이나마 북돋아준다.

* 방학동 은행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546


♠  방학동 산골에 깃든 늙은 무덤들

▲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과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 -
서울 유형문화유산

연산군묘로 들어가는 연산군, 정의공주묘 버스정류장 북쪽에는 품위가 깃든 잘 정비된 묘역이
있다. 바로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부부의 묘역이다. 묘역 주변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철책을 둘렀는데, 묘역 전체가 밖에서도 훤히 바라보이므로 굳이 울타리를 넘을 필요는 없다.

이곳에 누운 안맹담(1415~1462)은 죽산안씨(竹山安氏)로 호는 덕수(德壽)이며, 1415년 가선대
부(嘉善大夫) 안망지(安望之)의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 세종의 딸이자 동갑내기인 정의공주
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1432년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1450년 연창
위(延昌尉)가 되었다.
1457년 수록대부(綏祿大夫)가 되고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그해 8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으며 1462년 47세의 나이로 병사하니 세조(世祖)는 매형인 그에게 양효공(良孝公)이
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는 활을 잘 쏘았다고 하며, 음악과 서예에도 매우 능했다고 한다.

안맹담의 부인인 정의공주(1415~1477)는 세종의 2째 딸로 세조의 누님이다. 소헌왕후(昭憲王
后)의 소생으로 훈민정음 프로젝트 때 큰 공을 세웠는데, 다음의 일화가 있다. 세종이 훈민정
음을 만들 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끝내지 못하여 왕자들에게 보내 풀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풀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정의공주에게 풀라고 하니 공주가 바로 풀어서 보냈
다는 것이다. 이에 부왕은 크게 칭찬하고 노비 수백 명을 내렸다.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했으며, 1477년 62세의 나이로 남편
을 따랐다.

안맹담 부부의 묘역은 쌍분(雙墳)으로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을 각각 두었고,
문인석(文人石) 2쌍을 무덤 앞에 벌려 세웠으며, 그 바로 밑에는 후손인 안종해(安宗海)의 묘
와 안맹담의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안종해(1681~1754)는 자는 조경으로 안윤적의 아들이다. 윤하교(尹夏敎)의 딸과 혼인해 1710
년 아들 안표를 얻었으며, 1715년 식년시에 응시해 진사3등 46위로 붙었다.
영조 때 옥천군수가 되었으나 예전 진청(賑廳)의 낭관(郎官)을 지냈을 때 감찰을 나온 내시에
게 문후(問候)를 올렸던 것과 군수로서 청렴하지 못한 점이 문제로 지적을 받아 1734년 파직
되었다. 이후 면천군수를 거쳐 청주목사로 부임했는데, 1741년 사간 권현(權賢)으로부터 과거
의 행적을 보았을 때 사람됨이 거칠고 비루하여 직임을 맡기기에 적합치 않다는 탄핵을 받았
다. 그래서 다시 관직에서 쫓겨났다.
1754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무덤은 11대조 안맹담 묘 밑에 마련했다. 그의 묘는 근래
마련된 비석과 상석, 망주석이 전부인 단촐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적
은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그리고 안맹담 묘역 뒷산에는 안맹담의 아들과 손자들 묘역이
주렁주렁 들어있는데, 나는 최근까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해서 아직까지 인연을 짓지
못했다.

      ◀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神道碑)
신도비는 보통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그
것은 묘의 동남쪽이 신도(神道)를 상징하기 때
문이다. 게다가 신도비란 존재는 왕족과 고위
관리의 무덤에만 쓸 수 있었던 정말로 특권층
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1466년에 세운 것으로 비신(碑身)에
새겨진 비문(碑文)의 내용은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글씨는 안맹담의 4번째 아들인 안빈세(安
貧世)가 썼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약 5m, 귀부(龜趺)의 높이
약 1.6m, 길이 약 1.7m로 비석을 등에 맨 거대
한 거북이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서쪽의 북
한산(삼각산)을 바라보고 있다.

귀부는 시원스레 뻥 뚫린 콧구멍이 인상적이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눈은 약간 동그랗
게 뜨고 있다. 머리 아랫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선이 새겨져 있고 땅바닥과 마주하는 양쪽
모퉁이에는 거북의 발이 새겨져 있으나 축 늘어진 듯, 발과 다리가 몸에 너무 붙어버려 발가
락의 일부만 확인이 가능하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육중한 그의 등껍데기에는 비신이 세워져 있다. 비신 위에는 2마리의 이
무기가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새겨진 이수(螭首)가 있는데, 이수의 이무기는
여의주를 우러르며 이렇게 외치는 듯 하다.
'저건 내꺼야, 너는 건드리지 마라, 오직 나만이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
그들의 표정은 그런 희망으로 가득 부풀어 올랐다. 허나 저들은 죽었다 깨도 여의주를 차지하
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노려보며 신경전만 벌이다가 인생을 종치기 때문이다. 결국 여의주는
허공에 떠 있는 허구일 뿐이다.
보주를 둘러싼 이무기들의 그런 다투는 모습을 보니 오늘날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서로
아옹다옹거리는 오늘날 인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성공의 자리에 오르고 경쟁
에서 이기는 것, 이들 모두 허공에 뜬 저 여의주와 같거늘 그저 티끌의 욕심도 없이 동글동글
하게 살다 갔으면 좋겠다.

*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467 (방학로252-19)


▲  충정공 목서흠(忠貞公 睦叙欽)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정의공주 부부 묘역에서 북한산둘레길로 인도하는 동쪽 흙길로 들어서면 커다란 기와집이 나
온다. 그 집이 사천목씨(泗川睦氏) 재실(齋室)로 그 우측에 넓은 공터로 쭉 들어서면 재실 뒤
쪽에 목서흠 신도비가 있다. 그 신도비에서 왼쪽, 그러니까 북쪽에 누렇게 뜬 무덤들이 주렁
주렁 들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목서흠 일가의 묘역으로 묘역 제일 위쪽에 목서흠 묘가 자리
해 묘역을 굽어보고 있다. 별로 낯이 익지 않은 목서흠은 누구일까?

목서흠(睦叙欽, 1571~1652)은 사천목씨로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충정(忠
貞)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목첨(睦詹)의 아들로 1603년 음보(蔭補)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며, 1610년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623년에 함경도선유어사(咸鏡道宣諭御史)가 되어 인조반정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살폈으며,
광주목사(廣州牧使)와 좌승지(左承旨)로 승진,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인조를 호종
했다. 그 이후 참찬관(參贊官), 우승지(右承旨), 한성부 좌우윤(左右尹)을 지내고 1642년 개
성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병자호란 뒷수습에 나섰다. 또한 상소를 올려 붕당(朋黨) 정치
의 폐해를 지적했다.
165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70세 이상의 관원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의 당상
관이 되었다. 그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청렴하기 그지 없던 인물로 1652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목서흠묘는 그의 부인 연일정씨와 같이 묻힌 합장분(合葬墳)으로 봉분의 크기는 조촐하다. 봉
분 앞에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로 작은 동자상(童子像) 1
쌍이 두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서 있는데, 그 모습이 귀엽다. 무덤 좌우로 망주석이 1쌍 있을
뿐, 그 흔한 문인석도 없어 간소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조선 중기 무덤 양식이 잘 반영된 점
이 인정되어 2009년 6월 신도비와 함께 지방문화재로 지위를 얻었다.


▲  목서흠 신도비와 근래에 장만한 비석
두 비석의 세대 차이가 은연히 묻어나온다.

▲  400년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하는 목서흠 신도비

묘역 아래 재실 뒤쪽에는 목서흠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그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문장가
조경(趙絅)과 이정영(李正英), 조위명(趙威明)이 쓴 것으로 그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소
중한 비문이다.
앞에 나온 안맹담 신도비와 달리 귀부가 없고, 그냥 비석을 세우는 비좌(碑座)만 있다. 지붕
도 현란한 조각의 이수 대신 지붕돌로 조촐하게 마무리를 지어 청렴했던 그의 생전을 가늠케
해주며, 비신 밑부분이 좀 검게 그을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상태도 양호하다.


▲  목서흠의 선조인 목진공(睦進恭)의 묘

목서흠묘 바로 밑에는 그의 조상인 목진공 묘가 있다. 그는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태
종 때 우부대언(右副代言)과 참판(參判)울 지냈다. 1417년 부평부사(富平府使, 인천 부평)를
지낼 때 우희열(禹希烈)과 함께 들판을 개간하여 농업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 당시 부평(富平
) 지역의 논이 450결에서 1,000결로 크게 늘어났다.
목진공 묘는 목서흠 묘와 비슷하나 동자석 대신에 조그만 문인석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600
년 세월의 때가 입혀진 문인석과 비석에서 고색의 멋이 풍긴다.

목서흠 묘역에는 그의 아들인 목림일(睦林一)을 비롯해 그의 일가 무덤이 10여 기 이상 산재
해 있으며, 목진공 묘 서쪽에는 사천목씨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시조단소(始祖壇所)까지 있
어 거의 사천목씨의 성지(聖地) 같은 곳이다. 단소는 근래에 조성되었고, 길쭉한 상석과 문인
석 1쌍과 망주석 1쌍, 장명등을 세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목서흠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 (방학로 2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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