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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꿀단지, 남산 (염불사지, 칠불암 마애불상군)

    
' 서라벌 경주의 꿀단지, 남산 초여름 나들이 '


▲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남산(금오산) 산줄기

 


여름 제국이 봄의 하늘을 가로채며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6월의 첫 무렵, 신라(新羅)
의 향기가 지독하게 배여있는 경주 땅을 찾았다.

경주(慶州)는 거의 50번 이상 인연을 지은 곳으로 오랜 세월 구석구석 누비다 보니 이제
는 인지도가 거의 없거나 벽지에 박힌 명소들을 주로 찾고 있다. 허나 미답처(未踏處)들
이 여전히 적지 않아서 내 마음을 애태우게 하는데, 이번에는 칠불암과 신선암 등 남산(
南山)의 여러 미답처를 지우기로 했다.

경주시외터미널에서 경주좌석버스 11번(경주시외터미널~불국사~용강동)을 잡아타고 통일
전(統一殿)에서 두 발을 내렸는데, 여기서 칠불암, 신선암으로 가려면 남쪽 시골길(칠불
암길)로 들어서 남산동(南山洞)의 여러 마을(안마을, 탑마을, 안말)을 지나 1시간 10~20
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너른 배반평야를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둔 남산동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오늘도 평화
롭기 그지 없는데, 안마을에는 그 유명한 서출지(書出池)가, 탑마을에는 남산동삼층석탑
이 간만에 나좀 보고 가라며 손짓을 한다. 허나 그들은 이미 20대 시작점에 인연을 지은
터라 오로지 목표한 먹잇감을 향해 뛰어가는 맹수처럼 그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  옛 신라의 곡창지대, 배반평야 논두렁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양피제(讓避堤, 양기못)

양피제(양피저수지)는 배반평야에 수분을 제공하는 저수지로 연(蓮)들이 푸른 기운을 드
러내며, 곧 다가올 여름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양피제란 이름은 남산동삼층석탑 일대
로 여겨지는 양피사(讓避寺)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절이 있던 마을에 서출지가 있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이 있어 이 못을 서출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  남산 입문 (염불사지)

▲  전(傳) 염불사(念佛寺)터

양피제에서 남쪽으로 7분 정도 가면 안말(안마을) 한복판에 누워있는 염불사터를 만나게 된다.
잘생긴 3층석탑 2기가 잔디가 입혀진 절터를 지키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새로운 염불사가 둥
지를 틀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사라진 염불사의 후예를 자처한다.

염불사는 신라 중기(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절로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언제 어떻게
망했는지 전해오는 것이 전혀 없다. 남산 산신(山神)조차도 '염불사? 양피사? 그게 뭐임? 먹
는 거임?'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비밀에 감싸인 절로 남산동3층석탑 주변을 염불사터로
보는 설도 있어 현 자리도 100%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책임을 피하고자 염불사 이름 앞
에 막연히 전한다는 뜻의 전(傳)을 붙여 '전 염불사터'라 부른다.
다만 염불사 옆에 양피사가 있었다고 하므로 만약 남산동3층석탑이 염불사라 하면 이곳은 자
연히 양피사가 될 것이다.

염불사의 원래 이름은 피리사(避里寺)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피
이촌, 피리사촌)이 있는데, 그 마을에 '피리사'란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이상한 승려가 머
물고 있어 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우니 그 소리가 마을을 넘어 서라벌 일대에 쫘악 울려
퍼져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소리가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그지 없어, 서라벌 사람들
은 그를 공경해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자 그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봉안했으며, 그가 머물던 피리사를 염
불사로 이름을 갈았다. 그랬던 염불사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의지처를 잃은 탑들의 삶도 그리 순탄치 못해 결국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서로를 보듬으며 절터를 지켰지만 1973년 동탑이 강제로 불국동 구정광장으로 옮겨지
면서 서탑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다가 2008년 동탑이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고, 이때 탑 2기를 복원하고 절터를 손질하여 2009년 1월 15일 완료되었다.


▲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2,193호)의 동탑

염불사터 동탑은 1973년 구정동 불국광장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그때 박정희 전대통령이 경주
를 살피러 온다는 소식에 경주 지역 관리들이 그에게 아부를 떨고자 무너진 동탑의 탑재와 인
근 도지동 이거사터(移車寺)에서 급히 소환한 3층석탑 1층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덧붙여
콩 볶듯이 복원하여 대통령의 순시 코스에 두었다. 그러다 보니 1층 옥개석이 2,3층 옥개석과
다소 어색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제자리로 옮겨야 된다는 여론이 퍼지면서 경주시는 2006년부터 이전 복원을 추진하여 염
불사터 사유지를 매입해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2008년 1월 탑을 해체하여 제자리에 다시 세웠
다.

이 탑은 커다란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한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세월과 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들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정정함은 잃지 않고 있다. 서탑과 함께 8세기에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탑 높이는 5.85m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탑

▲  북쪽에서 바라본 동탑


▲  염불사터 서탑

일찌감치 복원된 동탑과 달리 서탑은 옥개석을 중심으로 무거운 상처들이 적지 않다. 동탑보
다 좀 초라해 보이는 서탑, 허나 그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공을 무려 2개씩이나 품었
던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 대부분의 탑은 사리공이 1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 탑의 심
장이라 할 수 있는 사리공을 2개나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혹시 염불사 설화에 나오는 그 승려 때문은 아닐까?

▲  북쪽에서 바라본 서탑

▲  절터에서 수습된 주춧돌과 늙은 석재들

동탑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한참 잡초를 토벌하고 있었다. 염불사터가 간만에 이발을 하는 날
인 모양이다.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석탑 형제, 한때 45년 동안 떨어져 사는 아픔이
있었으나 다시 만나 서로의 정을 속삭인다.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 자신들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이다.

절터 남쪽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건물 주춧돌과 석탑 부재(部材) 등 여러 석재가 놓여져 초여
름 햇살을 즐기고 있다. 그들은 한때 절 건물을 받쳐 들거나 석탑, 석등을 이루던 것들로 그
들이 입을 열면 이곳의 정체가 흔쾌히 드러날 것인데 자신들을 이 꼬락서니로 만든 인간과 세
상을 원망하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염불사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  남산 봉화골로 인도하는 숲길

염불사지에서 숲과 밭두렁이 적당히 섞인 시골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봉화골 산길이 나온
다. 통일전 정류장에서 이곳까지는 도보 약 25분 거리로 여기서부터 온갖 불교문화유산으로
도배가 된 남산<금오산(金鰲山)>의 아늑한 품이 시작된다.

봉화골은 동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깊은 골짜기로 봉화대(烽火臺)가 있어서 봉화골이란 이름
을 지니게 되었다. 계곡이 깊고 소나무가 가득해 그림 같은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등 남산의 굴지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가 잦다. 현재
이 골짜기에는 절터 2곳, 불상 8기(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귀부
) 1기, 봉화대터가 전하고 있다.

산길 경사는 대체로 완만하나 일부 구간에서 흥분된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며 자존심을 곱게 접어 묵묵히 산길에 임하면 칠불암 마애불이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와 마중을 할 것이다.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봉화골 산길 ②

봉화골 계곡은 조그만 개울로 아기자기한 모습을 지녔다. 하지만 하늘이 비를 너무 짜게 내려
물이 거의 말라버린 맨바닥 상태였다. 처음에는 길인 줄 알고 다가섰더니 글쎄 가뭄에 녹초가
되버린 계곡이 아니던가.

산길을 한참 오르니 삼삼하게 우거진 대나무숲이 펼쳐진다. 이렇게 대나무숲이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푹 숙인 대나무가 운치 있게 터널을 이룬 돌계단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칠불암이 자리해 있다.


▲  이보다 멋진 터널이 있을까? 대나무 숲길의 위엄

▲  대나무 숲길 한복판에 서다. (칠불암 직전)


♠  경주 남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불교 유적, 7개의 석불로 이루어진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마애불상군 - 국보 312호

경주 남산에는 옛 신라 사람들이 심어놓은 불교 유적이 지나치게 많이 서려있다. 절터만 무려
100곳이 넘으며 불상도 80개가 넘는다고 하니 천하에 이만한 불교 유적의 성지(聖地)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었겠는가.

남산에 깃든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해발 360m 고지에 자리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그는 부처골(불곡)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보리사(菩提寺, 미륵골)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더불어 남산의 간판격 존재로 존재
감도 그 덩치만큼이나 커서 답사객과 산꾼의 왕래가 빈번하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2개의 바위에 7기의 마애불(磨崖佛)을 나눠서 새긴 독특한 모습으로 동쪽
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 3존불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 바위를 '병풍바위'
라고 부른다. 불상이 깃든 동쪽 면이 90도로 다듬어져 있고, 그 앞에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
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다진 다음, 4면불을 새긴 바위를 봉안했다. 보통은 바위 하나를
이용해 불상을 새기지만 이곳은 이렇게 바위 2개를 건드려 마애불상군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약 1.74m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

마애불 주변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 밑에서 그들을 바라봐
야 된다. 그러다 보니 3존불은 정면에서 온전히 마주 보기가 어려우며, (앞에 4방불이 시야를
좀 가림) 4방불 같은 경우 3존불을 바라보고 있는 서쪽 불상은 만나기가 어렵다. 허나 어찌하
랴? 국보(國寶)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체 높은 존재들이고 그들의 건강도 신경을 써야
되니 말이다. 그래도 보일 것은 거의 보이며, 그들을 세세히 보고 싶다면 칠불암에 협조를 구
해보기 바란다.

병풍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진하게 깃들여진 3존불은 양감이 매우 풍부해 바위에서 방금 튀어나
온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본존불(本尊佛)은 높이 2.7m로 하늘을 향해 꽃잎을 세운 연꽃<앙련
(仰蓮)>과 밑으로 꽃잎을 내린 복련<(伏蓮)>이 새겨진 연화대좌에 위엄 있게 앉아있다.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과도 비슷한 모습으로 그 뒤쪽에는 광배(光背)가 본존불을 반짝 빛내주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거의 네모진 모습으로 볼살이 많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
내고 있다. 목에는 그 흔한 삼도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가는 허리와 함께 위엄 돋
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 끝이 땅을 향하게 하
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은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본존불 오른쪽에 자리하여 본존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협시보살(夾侍菩薩)은 연꽃이 새
겨진 연화대(蓮花臺) 위에 다소곳이 서 있다. 덩치는 본존불의 1/3 크기로 키는 약 2.1m인데,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는 감로병(甘露柄)이 들어 있어 아마도 관세음보살인 모양이다.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있으며,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으로 구슬목걸이를 두르고 있다.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는데,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슷한 덩치로 코가 좀 할켜나간 것을 빼면 완전한
모습이다. 그는 아마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동쪽과 북쪽 상)

3존불 앞에 놓인 바위에는 4방불이 깃들여져 있다. 3존불이 주연이라면 4방불은 그들을 수식
하는 조연으로 큰 것은 높이 1.2m, 작은 것은 0.7~0.8m 정도로 3존불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
각 솜씨도 다소 떨어진다.
 
4방불 모두 보주형 두광(頭光)을 갖추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데, 동쪽 상은 3존불
본존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통견의(通絹衣)를 걸치고 있으며 신체 윤곽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에 약합을 쥐어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남쪽 상은 동
쪽 상과 거의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이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 옷주름과 짧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옷주름이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서쪽 불상은 동/남쪽 불상과 비슷하며 북쪽 불상은 앞서 불상과 달리 얼굴이 작다. 그들의 정
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동쪽은 약사여래, 서쪽은 아미타여래로 파악되고 있다.


▲  4방불의 동쪽 상 (약사여래상으로 여겨짐)

▲  4방불의 남쪽 상 (정체가 무엇일까?)

풍만한 얼굴과 양감이 풍부한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남산 삼릉골 석불좌상
과 석굴암 본존불, 굴불사(掘佛寺)터 석불과 비슷하여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참 올라가야 되는 깊숙한 산골에 이렇게 큰 마애불을 짓기가 참 어려웠을 것인데, 불교 앓
이와 남산 앓이가 유독 심했던 신라 서라벌 사람들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신라
의 아름다운 마애불을 편하게 느껴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이 깃든 병풍바위의 모습도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석불이 깃들기 이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  칠불암 뜨락에 수습된 주춧돌들 (석등 대좌도 보임)

칠불암 뜨락에는 주춧돌과 석등 대좌(臺座), 석탑 석재들,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 등
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마애불 남쪽에는 엉성하게 복원된 석탑과 옥개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이 박혀있어 이를 통해 마애불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애불의 자리를 먼저 다진 다음 건물을 씌워 그들을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건물이 법
당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다
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7세기 중/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8세기에 마애불을 구축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는 '봉화곡 제1사지(寺址)'란 임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봉화골에 있는 1번째 절터
란 뜻) 비록 절집과 돌로 지어진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과 대자연에 의해 분해되고 그 일부만
아련히 남은 상태지만 마애불만은 거의 온전히 살아남아 그들이 가고 없는 빈 자리를 지킨다.


▲  장대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칠불암 석탑

마애불과 칠불암 법당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여겨지는 주름진 커다란 돌덩어리가 화석
처럼 박혀있다. 그 위에는 키 작은 석탑이 성치 못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신라 후기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이 사라진 이후, 세월의 거친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진 것을 발견된 부재(部
材)를 되는대로 엮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여 다소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큰 돌덩어리를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3층 탑신을 적당히 맞춰 올려 그런데로 3층석탑의 폼은
갖추었다.


▲  칠불암 인법당(因法堂)

마애불 곁에 자리한 칠불암은 1930년대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이다. 칠불암이란 이름은 3존불
과 4방불 등 7기의 석불을 간직하고 있어 칠불암이라 한 것인데, 옛 봉화곡 제1사지의 빈 자
리를 덮어주며 마애불상군을 지키고 있다.

칠불암은 법당(法堂)인 인법당과 1칸짜리 삼성각, 해우소가 전부로 인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리가 협소하여 법당이 요사(寮舍)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하고 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는 서양에서 건너온 20대 비구니 양녀(洋女
)와 그를 도와주는 50대 보살(菩薩) 아줌마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마애불을 둘러보고 법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보살 아줌마가 구경 잘했냐며 매실차 1잔을 권
한다. 그런 것을 마다할 내가 아니라서 흔쾌히 1잔을 청했는데, 마침 날씨도 덥고 목구멍에서
도 갈증으로 불이 날 지경이라 달콤한 매실차로 더위와 갈증을 싹 진화했다. 거기에 산바람도
솔솔 불어와 더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니 이런 것이 진정 극락(極樂)이 아닐까 싶다.
그 보살은 보통 오전에 올라와 양녀 비구니를 도우며 절을 지키거나 여러 먹거리를 만들어 준
다. 내가 갔던 날은 식혜를 만들어 절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절 볼일이 끝나면 오후에
속세로 내려간다. 그 외에 많은 시간은 양녀 비구니 혼자서 절을 지킨다.

그 양녀는 미국 아메리카 출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이제 1~2개월 밖에 안된 초보 승려이다.
하필이면 첩첩한 산골인 이곳에 먼저 배치되어 시작부터 고적한 산사(山寺)의 삶을 익히느라
고생을 한다. 게다가 우리 말도 꽤 서툴러 꼬부랑 영어를 섞어주어야 겨우 알아듣는다. 왜 그
를 칠불암에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산에 양이(洋夷)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지라 그들을
상대하고자 고독한 산사살이도 미리 익히게 할 겸, 배치한 모양이다.
절에 머무는 승려는 그 혼자 뿐이라 그가 이 절의 임시 주지나 다름이 없었다. 절과 마애불을
지키고 청소하고, 기도하고, 수행하고, 우리 말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고, 빨래하고, (음식은
보살 아줌마가 거의 해줌) 양이 관광객들에게 마애불 설명도 해주고, 하는 일이 많은데, 아직
은 부족한 것이 많아 보살 아줌마와 스승 승려의 지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 스승은 매일
전화를 하여 영어로 이리저리 코치를 해주었다. 하지만 언어 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말을 익히게 한 다음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절과 마애불을 찾은 사람들에게 꼭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 인사성도 밝은데, 마침 미국에
서온 것으로 여겨지는 양이 2명이 그에게 칠불암 마애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애불에 대해 크게
찬양을 벌인 모양이다.
그는 6개월 정도 이곳에서 정진을 하다가 다른 절로 옮긴다고 하며, 아무쪼록 열심히 수행하
여 큰 비구니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에 봉안된 독성탱, 칠성탱,
산신탱


▲  칠불암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과
배반평야, 토함산(吐含山)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남산동과 배반평야, 낭산(狼山)


칠불암에서 보살 아줌마, 양녀 비구니와 이야기꽃 좀 피우다가 잠시 잊었던 신선암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곳은 칠불암 바로 뒤쪽 절벽으로 아무리 지척간이라고 해도 홍길동이 아닌 이상
은 각박한 산길을 7~8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그렇게 해발 400m대인 봉화골 정상부에 이르면
남산 정상과 고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펼쳐지고, 조망의 질 또한 크게 상승되어 경주 동
남부와 배반평야, 토함산 등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능선길로 접어들면 신선암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하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가파
른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신선암 마애불이 나타난다.

이후 내용(신선암, 고위봉, 열반골)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
서 흔쾌히 마무리 짓는다.

* 칠불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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