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괴산 각연사(覺淵寺) '

괴산 각연사


♠  각연사를 들어서며

▲  각연사 일주문(一柱門)

겨울의 제국이 가을을 쫓아내고 천하를 접수하던 11월 하순 주말에 멀리 남쪽 바닷가에서 온 손
님들과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괴산 각연사를 찾았다. 우선 연풍(延豊) 북쪽의 원풍리마애석불상
(院豊里磨崖石佛像)을 둘러보고 연풍과 괴산(槐山) 중간에 자리한 태성리로 이동했다. 태성리에
서 각연사까지는 4.7km 거리인데, 간신히 수레 1대가 다닐 정도로 길이 좁아 우리를 태운 관광
버스는 그야말로 온갖 진땀을 다 빼며 조심스럽게 바퀴를 움직여야 했다. 길 옆에는 각연사계곡
이 졸졸졸 흐르고 있는데 괴산 지역의 식수원이라 계곡에서의 물놀이가 통제되어 있어 청정함을
자랑한다. 비록 거리는 길지만 계곡이 여기저기 절경을 빚어놓아 걷는 길도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버스는 간신히 길을 비집고 들어가 일주문 부근에 마련된 주차장에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수레는 경내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여기서 절까진 1리도 채 되지 않는 거리라 걸어가기로 했다.

일주문은 불계(佛界)와 속세(俗世)를 구분짓는
문으로 경내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세운다. 문을
들어섬으로써 비로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는 절로 들어서는 것이 된다. 비록 문이긴 해도 여닫
는 문짝은 없으며, 중생을 향한 부처의 마음이 담긴 듯,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맞
이한다. 일주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며 살리라 다짐을 하지만 지나서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절대 신이 될 수 없는 모양이다.

일주문 주차장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나온다. 다리에서 속세의 번뇌를
낙엽에 살짝 띄워 흘려 보내며 다시 1분 정도를 가면 고요한 산사(山寺)의 진수를 보여주는 각
연사가 진하게 모습을 비춘다.


▲  각연사 가는 길
일주문에서 절까지는 겨울의 제국이 준비한 새하얀 카페트가 깔렸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는 하얀 눈, 금년도 이제 그 끝에 이르렀음을 실감케 한다.

▲  눈이 곱게 깔린 저 산길의 끝에는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각연사가 산문을 활짝 열며 중생을 기다린다.


▲  겨울 제국의 위세에 졸졸졸 소리도 멈추며 숨을 죽인 각연사 계곡
누런 낙엽을 속세로 흘려 보내며 소쩍새가 울 그날을 기다린다.


♠  깊은 골짜기에 묻힌 고적한 산사, 장대한 역사에 걸맞게
문화유산도 풍성하게 간직한 ~ 보개산 각연사(寶蓋山 覺淵寺)

각연사는 속리산국립공원 북쪽 끝에 자리한 오랜 절집으로 보개산(보배산, 750m)과 칠보산(七寶
山, 778m), 덕가산(德加山, 850m)에 둘러싸여 있다. 사방이 높은 뫼들이라 새들도 넘어오기 힘
들며, 겨우 북서쪽 계곡을 따라 속세로 이어지는 길이 가늘게 놓여져 있을 뿐이다. 아직은 인지
도가 낮아 찾는 이도 별로 없어 한가하며, 절 밑에 형성되는 사하촌(寺下村)이나 답사객이나 등
산객을 상대로 하는 주막도 10리 밖에 있다. 속세와 철저하게 거리를 둔 깊은 산골에 둥지를 튼
그야말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산사로 산사의 진수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시절에 유일대사(有一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허
나 이를 입증할 자료나 유물은 없으며, 1768년에 작성된 대웅전 상량문(上樑文)에는 고려 초기
(918~970년 사이)에 통일대사(通一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는
958년(광종 9년)에 통일의 제자인 석총훈(
釋聰訓)이 세웠다고 나온다.(958년이면 통일대사탑비
를 세운 시기로 탑비를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잘못 표기했을지도 모름) 그런데 비로전에
서 발견된 묵서(墨書)에는 광종 이전인 혜종(惠宗, 재위 943~945) 때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상량문과 조선금석고의 내용을 무색하게 만든다. 과연 어느 기록이 진실인지 알 길은 없으나 후
삼국시대(10세기 초반)에서 늦어도 고려 혜종 ~ 광종 시절에 창건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창건과 관련해서 재미난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다음과 같다.

유일대사는 원래 이곳이 아닌 부근 쌍곡계곡 절골에 절을 지으려고 했다. 목수를 모아 목재를
다듬으니 한떼의 까마귀가 몰려와 나무 조각과 대팻밥을 입에 물고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유일이 그들의 뒤를 따라가니 지금의 비로전 앞 연못에 나무조각과 대팻밥
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연못을 수상히 여기며 안을 살피니 그 안에 석불이 하나 고개를 들고
있었고, 바로 그 석불에서 한 줄기의 서광이 진하게 비추었다. 그래서 황급히 돌아와 인부들을
데리고 석불을 꺼내 연못을 메우니, 그 석불이 바로 비로전에 있는 석조비로사나불좌상이라는
것이다. 석불을 그렇게 꺼내고 주변 산에 올라 지형을 살피니 연못이 있던 자리가 딱 명당이었
다. 그래서 그 자리에 법당을 짓고 연못이 자신을 깨우쳤다는 뜻으로 각연사라 했다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대웅전 상량문에 나온 것처럼 고려 초에 통일대사가 창건했다면 절의 창건자인 유일대사는 바로
통일대사가 된다. 비록 앞의 한글자가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심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므로
<유일(有一, 하나가 있다)이나 통일(通一, 하나로 통한다)>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며, 창건설
화를 통해 쌍곡에 절을 지으려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자리를 발견하여 지었음을 보여준다.

▲  대웅전 주변

▲  주름선이 강하게 그어진 커다란 옛 맷돌

창건 이후 고려 왕실의 지원으로 상당한 규모의 절로 번창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조선 초에 간
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에 대한 기록이 있어 조선 초까지 그런데로 법등
(法燈)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절은 원래 여기서 동남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억새밭에 있었다. 그러다가 15~16세기경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절이 파괴되어 방치되었던 것을 지금에 자리로 옮겨 중창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상량문에는
융경(隆慶, 명나라 목종의 연호 1567~1572), 순치(順治, 1644~1661), 강희(
康熙, 1662~~1722) 시절에 대웅전을 중수했음을 알려주며, 1648년에 비로전을 만들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1768년에 지은 것이다. 근래에 들어 1992년 선원과 요사를 짓고, 1996년에 삼성각과
종각을 만들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비로전, 삼성각, 요사 등 6동의 건물이 있으며, 요사와 대
웅전의 뜨락이 넓은 탓인지 경내가 다소 넓게 다가온다. 대웅전과 비로전 뒤로 덕가산이 듬직하
게 폼을 잡고 있어 어미새의 품에 꼭 안긴 알처럼 포근하며, 조선 후기 건물인 대웅전과 비로전
에서는 고색의 내음이 진하게 풍긴다.

절에서 소장하는 문화유산으로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대웅전
과 비로전이 있으며, 옛 절터에는 상처투성이의 귀부가 있다. 그리고 절에서 조금 떨어진 보개
산 자락에 통일대사의 탑비와 탑이 숨어있으며, 그외에 일부만 남은 부도와 커다란 맷돌, 옛 석
조물의 부재(部材) 등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통일대사탑비

▲  각연사 옛터를 지키는 석조귀부

각연사는 사방이 산으로 막힌 깊은 산중에 묻혀 있어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거나
속세의 짐에서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을 때 찾아와 안기고 싶은 그런 절이다. 아무리 속세의 번
뇌와 짐들이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혀도 이런 깊은 산골까지는 찾아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우두커
니 기다릴 것이다.

각연사 일대는 현재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해있긴 하지만 속리산(俗離山)과 전혀 이어져 있지 않
으며, 통일대사탑비와 부도로 가는 길을 제외하고 공식적인 등산로는 없다. 또한 각연사와 국립
공원관리사무소간의 마찰로 통일대사탑비로 가는 길에 철책을 둘렀으나 탑비와 부도, 옛 절터를
답사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진입이 가능하다.


▲  절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는 돌계단

 각연사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① 수안보, 연풍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 대구(북부), 구미에서 수안보, 연풍행 직행버스가 다니나 운행횟수가 매우 적다. 일단
  점촌까지 와서 수안보행 버스로 갈아타길 권한다.
* 동서울터미널과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충주행 고속버스가 15~30분 간격으로 있
  으며, 청주와 대전(동부), 원주에서 충주행 직행버스가 자주 다닌다.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
  연풍행 직행버스를 타고 수안보나 연풍에서 하차하거나 또는 충주터미널 밖 시내버스 정류장
  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를 타고 수안보 하차
* 수안보에서 괴산행 군내버스(1일 8회)를 타거나 연풍에서 괴산행 군내버스(1일 10회)를 타고
  태성리에서 하차하여 도보 50분
② 괴산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청주, 증평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자주 다닌다.
* 괴산터미널 부근 군내버스(아성관광) 종점에서 장연, 수옥정, 수안보행 군내버스를 타고 태성
  리 하차 (1일 18회 정도 운행)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일주문 주변 공터나 경내 앞 주차장을 이용하면 됨)
* 중부내륙고속도로 → 연풍나들목을 좌회전하여 괴산방면 구 34번 국도로 진입 → 태성3거리에
  서 각연사로 좌회전하여 직진 → 각연사주차장

★ 각연사 관람정보
* 관람료와 주차비는 없음
* 절을 둘러보고 남쪽 보개산 자락에 안긴 통일대사탑비와 부도를 꼭 둘러보자, 탑은 경내에서
  2km 떨어져 있으며, 약간의 등산을 감내해야 된다.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9 (☎ 043-832-6148)


▲  통일대사부도로 오르는 산길에서 바라본 각연사


♠  각연사 요사, 대웅전

▲  겨우 윗도리만 남은 이름 모를 승려의 부도탑

각연사 주차장에서 넓직한 돌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윗도리만 남은 오래된 부도(浮屠)가 있다.
옛 절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근래에 수습한 것으로 부도탑의 상륜부와 탑신(塔身)의 일부만 간
신히 남아있어 자세한 신상정보는 알 수 없다. 억겁의 세월과 자연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 모든
것을 잃고 불구가 되버린 가련한 이 부도탑은 각연사가 법등을 이어오던 중간에 엄청난 시련을
겪었음을 애써 알려주는 것 같다. 탑 옆에는 옛 각연사 시절의 석탑과 석등의 일부를 이루던 돌
덩어리들이 어지럽게 놓여져 부도와 함께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 부질없는 옛 시절을 꿈꾼다.


부도탑 좌측에는 기와집의 해우소(解憂所)가 있는데, 절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래식 화장실
이다. 그런데 이곳은 밑이 훤히 바라보이고 냄새도 매우 구수(?)하여 재래식에 익숙치 않은 사
람은 다소 고통의 장소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쥐가 돌아댕기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어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럴 때는 정말 남자로 태어난 것이
다행인 것 같다.


▲  각연사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

부도탑을 지나면 흙이 곱게 깔린 넓은 뜨락이 나온다. 뜨락 우측에는 각연사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가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1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2층이다. 1층은 공양간과 생활공간으
로 2층은 종무소(宗務所)와 강당으로 쓰인다. 요사 좌측에는 네모난 석조(石槽)가 놓여 절을 찾
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  요사에서 바라본 덕가산

▲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길

요사에서 계단을 하나 더 오르면 절의 법당인 대웅전 앞이다. 그런데 계단을 자세히 보면 자연
석이 아니다. 또한 대웅전 자리를 닦으면서 쌓은 석축(石築)도 어디선가 사용했던 돌임을 짐작
케 하는데, 바로 옛 절터에서 가져온 석탑의 석재와 주춧돌이다. 특히 계단은 거의 석탑의 석재
로 이루어져 있다. 각연사 석탑에 대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실체를 알 수 없으나 높이
약 4m의 돌계단을 만들 정도면 탑의 규모가 적어도 5층 이상은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세상
의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구한 세월과 자연의 시련으로 쓰러진 석탑은 조선 중기 이후
절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법당으로 인도하는 계단으로 재활용되었다.


▲  각연사 대웅전(大雄殿)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26호

네모난 돌로 정연하게 다듬어진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대웅전은 각연사의 법당으로 남쪽을 바
라보고 있다. 대웅전 상량문에는 16세기 중반과 17세기 중반에 3차례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지
금의 건물은 1768년에 건립되어 1979년에 중수했다. 1771년 불단에 모신 삼세불(三世佛)과 관음
보살을 개금(改金)한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그와 관련이 없는 삼존불(三尊佛)이 자리를 지킨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규모는 조촐하여 두 눈에 넣고 구경하기에 별
부담이 없다. 평방(平枋)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자 공포(空包) 덩어리가 촘촘히 박힌 다
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夾侍)
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불상 위에는 보궁형(寶宮刑)의 닫집을 달아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대웅전 주변에는 1998년에 지은 삼성각과 범종각이 있으며, 늘 옥계수로 가득한 감로수(甘露水)
샘터가 있다.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달던지 마음 속에 응어리진 온갖 잡념들이 싹 씻겨 내려가
는 것 같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자비로운 모습으로 멀리서 온 우리를 맞이하는 3존불, 그들의 다리는
다른 불상과 달리 유난히 두껍다. 그들 뒤로 삼불회도(三佛會圖)가
든든하게 후불탱화의 역할을 자처한다.

▲  표정이 밝은 대웅전 승려상

대웅전 불단 좌측에는 승려상 하나가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처럼 길다란 지팡이를 두
손에 쥐어든 승려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정확한 것이 없다. 절에서는 절을 세운 유일대사의 상으
로 여기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상으로 여김) 조성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보인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범종각(梵鍾閣)
1998년에 지은 것으로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1998년에 세운 것으로 산신(山神)과 독성
(獨聖), 칠성신(七星神)의 보금자리이다.


♠  각연사 비로전(毘盧殿)

▲  각연사 비로전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요사가 바라보는 정면 언덕에 각연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거처이자 각
연사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인 비로전이 터를 닦았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넓은 뜨락을 가지고
있는데, 그 뜨락에는 오래된 보리수 1그루가 서 있어 절의 기나긴 역사를 대변해 준다.

비로전은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비로전 상량문(上樑文)
에는 1655년, 1899년, 1927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로 대웅전과 더
불어 고색의 내음이 절의 고풍스런 품격을 돋보이게 한다. 불단에는 각연사의 자랑인 석조비로
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 벽에는 신중탱화와 여러 불화가 건물 내부를 수려하게 수
식한다.


▲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433호

비로전에는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인 나말여초(羅末麗初, 9세기 후반~10세기 초반) 때
조성된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어떤 자료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함) 그의 수인(手
印)은 왼손의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모습의 지권인(智拳印)으로 절대적인 지혜를 상
징한다고 한다. 이 불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완전히 갖춘 몇 안되는 불상으로 가치가
높다. 무려 1,100년이 넘는 오래된 나이에도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돌의 색깔이 약간 하얀색을
띄고 있어, 흐릿한 백불(白佛)로도 보인다.

검은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머리는 꼬불꼬불한 나발(螺髮)이며, 가운데에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가늘고 지그시
떠서 중생을 바라본다. 코는 작으며, 입술은 빨간색으로 다소 진하다. 입술 주변에는 검은 수염
이 표현되어 있다. 귀는 중생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안테나처럼 크다. 그의
얼굴은 미소와 위엄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어정쩡한 표정이나 그렇다고 호감이 떨어지는 얼굴도
아니다.

▲  정면과 측면에서 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옷은 왼쪽 어깨를 덮으며 옷주름선이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으며, 왼쪽 발은 발바닥이 보이도록 위로 향
했다. 예전에 부처의 발바닥을 보면 극락에 간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리를 들었는데, 극락행 표
를 미리 마련할 겸 살펴보는 것도 괜찮다. 부처의 발바닥은 어지간해서는 보기가 힘들다.

그가 앉아있는 대좌는 팔각형의 평면을 기본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대석(下臺石)은 연꽃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中臺石) 역시 팔각형의 평면으로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입혀져 있다. 상대석(上臺
石)은 원형의 평면이며,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잎을 펼친 앙련(仰蓮)이 새겨졌다. 불상 뒤쪽에
달린 광배는 무척 화려한 편이다. 총 7개의 여래가 좌우에 새겨져 있으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강렬한 화염무늬가 광배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  각연사의 옛터와 웅장한 귀부

▲  통일대사부도에 사용된 돌을 채석(採石)한 곳으로 여겨지는 암반

대웅전과 비로전이 있는 경내를 둘러보고 보개산 산자락에 묻힌 각연사의 다른 보물 3개를 찾아
나섰다. 그 보물은 옛 절터에 있는 석조귀부와 절에서 12분 거리에 있는 통일대사탑비, 그리고
거기서 다시 15분을 올라야 되는 통일대사부도이다. 보통은 경내만 살펴보고 가기 일쑤인데, 그
것은 각연사의 절반 밖에 못보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다소 발품을 팔아야 되는 산자락에 있
는데, 경내에서 마땅히 그것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하지만 반드시 그
3개의 보물은 봐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절에서 그곳으로 가려면 계곡을 따라 동남쪽으로 가야된다. 그런데 절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목
에 철책(鐵柵)을 둘렀는데, 이는 속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와의 마찰 때문에 세운 것이다. 허
나 답사객은 언제든지 통행할 수 있다.
속세의 부질없는 분쟁의 산물인 철책문을 지나면 각연사 계곡 상류의 속살이 나타난다. 절 북쪽
의 계곡 중,하류보다 더욱 청정한 기운이 서려 마치 신선이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선 기분이다.
계곡을 3분 정도 오르면 약간 색이 바랜 계곡 암반이 나타나는데, 통일대사부도에 쓸 석재를 채
석한 암반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채석을 한 흔적이 보인다. 여기서 돌을 떼서 산능선을 20분
을 타야 나오는 통일대사부도를 조성했다는 것이며, 탑의 석재와 이곳 암반의 돌이 비슷하다고
한다.


▲  억새가 가득한 옛 각연사터

채석 암반을 지나 계곡을 건너 2~3분 정도 가면 길 왼쪽의 거대한 억새밭이 보일 것이다. 지금
은 누렇게 시들어버렸지만 억새의 즐거운 향연이 펼쳐지는 가을에는 정말 장관을 이룰 것이다.
그 넓다란 억새밭 가운데로 푸른 잡초가 낀 길이 놓여져 있는데, 그냥 보면 단순히 억새밭으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그 억새의 터전이 바로 각연사의 옛 터이다. 아무런 안내문이
없으니 속인들은 그곳이 절터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억새밭 곳에 절터를 홀로 지키는 거대한 귀부가 있으니 꼭 만나보기 바란다.



▲  각연사 석조귀부(石造龜趺)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억새로 가득한 옛 절터 안쪽에는 커다란 귀부가 처절한 모습으로 홀로 절터를 지키고 있다. 누
구도 거스르지 못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 모든 것을 다 잃
고 겨우 목이 달아난 귀부와 비석이 있던 비좌(碑座)만이 남아 각연사의 옛 영화를 아련하게 전
해줄 따름이다. 옛 절터가 풍비박산이 나면서 귀부의 머리와 비좌가 휩쓸려 사라진 것으로 짐작
되며, 그 이후로 저렇게 방치되어 지금에 이른다. 귀부가 저정도면 행방이 묘연한 비신(碑身)이
나 이수(螭首)도 그에 걸맞게 장엄했을 것이다.

비석의 조성시기는 조선시대로 보이며, 비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절의 내력을 기록
한 사적비(事蹟碑)로 보기도 하고, 절에 큰 공헌을 한 승려의 비석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걸 입
증할 비신(碑身)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밝혀낼 재간이 없다. 비록 잃은 것이 많고 상처가 가득
하지만 등껍데기에는 선명하게 귀갑문(龜甲文) 무늬가 새겨져 있고, 두툼한 4개의 발은 거북이
의 진짜 발처럼 지금이라도 엄금엄금 발을 부릴 것 같다. 목이 없는 빈 자리에는 얼마 전에 내
린 눈이 녹아내린 약간의 물이 마지막 안식을 취하고 있다.

각연사의 과거를 숨죽여 간직하고 있을 절터는 아직까지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연
히 절터의 가람배치 또한 밝혀진 것이 없다. 하루속히 발굴과 학술조사가 이루어져 베일에 가려
진 각연사의 과거를 풀었으면 좋겠다.


▲  억새에 둘러싸인 석조귀부
절터에 허전함을 달래고자
함일까 억새가 수북히 자라나 그 빈자리를 가득 메운다.
절터를 뒤덮은 대지가 속세를 향해 가슴을 여는 순간 각연사의 옛 모습은
우리 곁에 모습을 보일 것이다.


▲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2기

석조귀부를 둘러보고 다시 나와서 통일대사탑비로 2분 정도 오르면 고색의 떼가 가득한 부도 2
기를 만난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정확한 조성시기는 모른다, 등산로를 사이에
두고 위 아래로 자리해 있는데, 네모난 기단(基壇)을 만들어 그 위에 머리장식을 갖춘 탑을 올
렸다. 길 왼쪽 부도에 '선적당탑(善跡堂塔)'란 명문(銘文)이 있어 선적당이란 승려의 부도탑임
을 알 수 있다. 허나 그의 대한 신상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것만 안다면 구체적인 부도의
조성시기를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오른쪽에 자리한 부도는 높이가 106cm로 아무런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는 모른
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  각연사 통일대사탑비(通一大師塔碑) - 보물 1295호

부도에서 5분 정도 오르면 통일대사부도와 탑비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탑비로 통
하는 왼쪽으로 1분 정도 가면 소나무가 멋드러지게 우거진 숲 속에 장엄하게 솟아난 통일대사탑
비가 모습을 비춘다. 각연사에서 이곳까지는 거의 800~900m 거리이다.

통일대사탑비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산능선에 자리한 통일대사부도와 더불어 각연사에서 자랑
하는 보물로 고려 초기에 대표적인 탑비(塔碑)로 꼽힌다.
탑비의 주인공인 통일대사(通一大師)는 고려 초에 활약했던 승려로 그의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
진 것이 없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고 하며, 귀국하여 태조 왕건의 초청을 받아 불교 교
리를 강의했다.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한다. 그가 입
적(入寂)하자 광종은 통일대사란 시호를 내리고 당대의 문장가인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쓰
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언제 입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탑비가 광종(光宗) 9년(958년)에 조성
되었으므로 적어도 957년에 눈을 감았을 것이다.

돌로 높다랗게 구축된 기단 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세워진 원래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몇
안되는 비석으로 탑비의 기본 요소인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거북이의 머리
대신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나말여초에 나타나는 귀부 양식이라고 한다.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머리를 약간 위쪽으로 들치고 시선을 약 20도 아래를 향하며 웅크리고 있다. 눈이 내
려앉은 등에는 아까전 석조귀부와 마찬가지로 귀갑문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모퉁이에 있는 4
발은 완전히 멈춰서 웅크린 듯 땅에 정지되어 있다.


▲  통일대사탑비 뒷부분

▲  귀부의 귀여운 뒷태 ~ 꼬랑지가 왼쪽으로 약간 말려져 있다.

비신에 깨알같이 입혀진 글씨는 해서체(楷書體)로 대략 3,500자가 새겨져 있다. 허나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비문 곳곳이 깨지고 닳고 문드러지면서 지금은 260자 정도만 간신히
확인이 가능하며, 나머지 3,200자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비석의 꼭대기인 이수(螭首)에는 4마리
의 용을 새겼는데, 용들이 꼭대기 중앙에 자리한 보주(寶珠)를 바라보며 대치해 있다.


▲  조각솜씨가 우수한 비석의 이수


♠  어지간한 발품이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보물
각연사 통일대사부도(通一大師浮屠) -
보물 1370호

통일대사탑비를 둘러보고 다시 갈림길로 나와서 통일대사부도로 길을 향한다. 지금까지는 약간
의 발품으로 경내부터 탑비까지 편하게 둘러봤지만 부도는 사정이 다르다. 부도는 가파른 산길
을 1km 올라야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의 제국이 깔아놓은 하얀 눈이 산자락에 가득하여
가는 길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일행 30명 가운데 10여 명 정도만 부도를 보러 산길을 올
랐다.

소나무숲을 헤치고 가파른 산자락을 10분 정도 오르니 보개산의 능선이 나타난다. 산을 오르면
서 뒤를 돌아보니 각연사의 모습이 저 아래에 엄지손톱만하게 보인다. 그만큼 각연사에서 멀리
온 것이다. 절을 포근히 안은 보개산(보배산)과 덕가산, 칠보산이 나의 비슷한 위치에서 나를
바라본다. 능선을 5분 정도 오르니 그 길의 끝에 잘생긴 통일대사부도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 부도는 오랫동안 각연사에서도 잊혀진 존재였다. 산사태로 사라진 부도가 다시금 세상에 속
살을 드러낸 것은 1967년이다. 우연히 발견된 그는 이리저리 파손되어 쓰러져 있었는데, 1982년
에 복원을 하였다. 탑에 아무런 글씨가 없어서 누구의 부도인지 명확하진 않으나 부도의 양식을
보니 대략 고려 초기 양식이다. 또한 국가에서 인정을 받은 고승(高僧)의 탑비와 부도는 쌍으로
같이 있기 마련이다. 허나 통일대사는 탑비만 있고 탑이 없다. 마침 산 아래에 탑비가 있으므로
이것을 그의 부도탑이라 여긴 것이다. 이처럼 확실이 아닌 짐작과 추정은 이름 앞에 전(傳)을
붙여 '전 통일대사부도'라고 해야 옳은데 요즘에는 통일대사부도로 완전히 굳혀진 모양이다. 절
에서도 많이 떨어진 이런 깊은 산중에 왜 부도를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오르니 각연
사를 둘러싼 3개의 높은 산이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눈맞춤을 보내며 조망 또한 일품이다. 게다
가 옛 사람들이 신봉하던 풍수지리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절의 허한 부분을 채워주고자 하는
이른바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환으로 이곳에 힘들여 부도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 부도는 땅바닥에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기단부를 두었다. 기단 상부에는 8각형 평면의 탑신
이 얹혀져 있으며, 탑신부 위쪽에는 모임지붕의 형태를 한 옥개석(屋蓋石)이 올렸다. 옥개석 지
붕 모서리에는 곡선이 고운 내림마루를 두고 그 끝에 '귀꽃'이란 아름다운 장식을 두었는데, 꽃
잎처럼 죄다 떨어져 나가고 지금은 2~3개만 달려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파괴되어 없어졌다. 탑
신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정면과 배면에는 문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기단
하대석에는 잎을 아래로 향한 연꽃인 복련(伏蓮)이, 상대석(上臺石)에는 그 반대인 앙련(仰蓮)
이 세심히 표현되어 마치 살아 생전의 연꽃을 보는 것 같다.

부도 뒤쪽은 산으로 막혀 있는데, 아마도 등산로가 있는 것 같으며, 부도 앞에는 부도를 지키는
카메라와 태양열을 받아서 전기를 생산하는 장치가 있다. 이곳까지는 카메라를 굴릴 전기가 들
어오기 힘들기 때문에 태양열을 받아서 자체 전기를 생산하는 장치를 설치하여 그것으로 카메라
를 굴리고 부도를 지키는 것이다.


▲  8각형 탑신에 새겨진 문모양의 무늬

▲  고려 초기 부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드러낸 통일대사부도

▲  통일대사부도에서 바라본 하늘
▲  통일대사부도 전경


고려 초기 부도의 걸작인 통일대사부도를 둘러보고 미끄러운 눈길을 나무의 도움을 받으며 조
심스레 내려왔다.눈길과 오르막길이 부담이 되서 부도로 가는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엄
청나게 후회를 할 뻔했다. 그런 고생을 겪은 끝에 낙이 오고 보람이 오는 것을 말이다.

다시 절로 돌아와 따스한 기운이 넘치는 종무소에서 주지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30분 정도 설
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법문이 끝나기 직전에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
했다. 끝으로 그가 강조한 것은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 본인 중심으로 모든 걸 생각하지 말고 주변 사람을 챙기고 선
행을 베풀어라.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봉사나 선행을 한번도 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
이 제일로 불쌍하다'

법문이 끝나자 절에서 괴산의 특산물인 고추의 조그만 모형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허나 나는 늦게 들어가서 받지도 못했다.
이리하여 첩첩산중에 묻힌 고적한 산사, 각연사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다시금 찾아와 안기고 싶다.


▲  각연사를 뒤로하고 다시 속세로 나가다
속세로 내려가면서 잠깐이나마 정들었던 각연사의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잠깐 내가
내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많이도 내려왔는지 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길을 덮은
짙은 하얀 눈길과 앙상한 나무들이 나의 길을 전송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2년 1월 27일부터  


Copyright (C) 201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