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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맞이 괴산(槐山) 나들이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접수한 11월 하순 주말에 충북 괴산
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창원)에서 온 일행분들과 같이 갔는데, 그들이 괴산(槐山)으
로 답사를 온다고 하여 간만에 그들도 볼 겸, 미답지를 하나 지워볼 겸해서 답사에 동참했다.
사는 곳이 서로 반대라 괴산의 첫 답사지인 원풍리 마애불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괴산은 창원보다는 서울이 더 가깝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나 역시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된다. 그래서 찬란한 여명(黎明)이 비추기 전인 5시에 대문을 나섰다. 원풍리는 교통편이 매
우 얄미운 수준이기 때문에 차 시간을 딱 맞춰야 된다. 다행히 동서울터미널에서 6시 20분에
충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면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은 충주터미널에서 원풍리까지 시내버스
로 딱딱 이어진다.

충주행 고속버스는 1시간 24분 만에 나를 충주(忠州)로 실어주었다. 충주터미널에서 8시 5분
에 수안보로 가는 충주시내버스 240번을 타고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깃들여진 충주의 산하를
달려 8시 50분에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도착했다.
수안보에서 연풍으로 넘어가는 군내버스가 9시 정도에 있는 것 같던데 시간표를 보니 9시 10
분에 차가 있다. 그 시간이 되자 버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농촌의 인구 감소와 농어
촌버스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듯 승객은 달랑 나 혼자 뿐이다. 운전사에게 원풍리 마애불을
문의하니 마애불과 원풍리는 모른다고 그런다. 다만 신풍에서 내리면 될 것 같다고 그런다.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우회도로로 많이 한가해진 옛 3번 국도를 경유한다. 라면보다 더
꼬불꼬불한 소조령(小鳥嶺, 작은새재)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고개의 정상인 문경3관문입구
에 이르고, 고개를 넘자 얼마 뒤 원풍리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를 마중한다. 운전
사가 그곳을 그냥 지나치자 서둘러 일어나 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차에서 내려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 마애불까지 얼마나 들어가야되나 왼쪽
을 살피니 들어가고 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바위에 조그만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그들이 바
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9시 20분, 그로부터 약 40분 뒤인 10시에 남쪽 사람들을 태운 관광
버스가 도착했다.

 


♠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이불좌상(二佛坐像), 거대한 바위 중앙에 둥지를 트고
다정히 들어앉은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院豊里 磨崖 二佛並坐像)
- 보물 97호

수안보에서 연풍(延豊)으로 넘어가는 소조령 고갯길 우측 큰 바위에 괴산의 명물이자 우리나라
에는 거의 없는 2불좌상, 원풍리 마애불이 자리해 있다.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원풍리 마애2
불병좌상인데, 예전에는 원풍리 마애불좌상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근래에 그들 성격에 맞춘다고
이름을 고친건데, 그 명칭이 좀 어렵다. 그냥 속편하게 '원풍리 마애불'이라 불러도 무관하다.
그들은 속세에서 자신을 뭐라 부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가만히 있는 자신들의 명칭을
두고 속세에서 계속 왈가왈가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찾기는 쉽지만 도로보다 한층 높은 언덕에 있기 때문
에 이정표가 없던 시절에는 아무리 길가라고 해도 길 우측 위쪽 부분을 잘 살피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  도로에서 바라본 원풍리마애불

▲  수레의 왕래가 뜸해진 원풍리마애불 입구
우회도로와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2001년 이전)에는 자주 차가 막힐 정도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했다.
 

마애불은 수레의 왕래가 많이 뜸해진 옛 3번 국도와 고속질주가 벌어지는 3번 우회국도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높이 30m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에 조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6.5m 높이에 둥지를 트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마애불은 아무리 커
도 발이나 다리까지는 사람의 손이 닿는다. 허나 이 불상은 허공에 떠있는 듯, 도저히 만질 수
없게 높은 곳에 만들었다. 아마도 속세(俗世)에 찌든 속인(俗人)의 오염된 손길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고자 그런 모양이다.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서 저런 불상은 뚝딱 만들지만 옛날에는 어떻
게 새겼을까? 나무로 불상 위치까지 대(臺)를 만들고 그곳에 올라 조각을 했을 것이다.

▲  남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  북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불상의 높이는 5m로 약 6x5.5m 크기의 네모난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2구의 큰 불상을 돋음
새김으로 새긴 다음 별도로 2구의 보살상(菩薩像)을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이들
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이불좌상이자 이 땅에서 유일한 이불마애불(二佛磨崖佛)로 그 가
치가 높다. 이불좌상은 병립불(竝立佛), 병좌상(竝坐像), 이불병좌상으로도 불리며, 중원대륙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크게 유행했던 불상 양식이다.

이렇게 2명의 불상을 나란히 새긴 것은 법화경(法華經)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법화
경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渤海)에서 크게 유행했던 법화신앙으로 그 주인공은 석가불(釋迦
佛)과 다보불(多寶佛)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는 속시원한 정답은 없는 실정이다. 이들은 12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전설에는 신라 후기에 여상조사(呂尙祖師)가 조성했다고 하고, 고려
후기 고승인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인근에 상암사(上庵寺)를 세우고 몸소 새겼다고도 한다. 허
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  노부부처럼 다정하게 들어앉은 원풍리마애불

불상의 얼굴은 도드라지고 넓적하다. 머리는 민머리로 보이며, 눈은 좌우로 가늘고 길다. 코는
왼쪽 불상은 온전하나, 오른쪽은 파여서 흔적만 있다. 눈 위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눈썹이 드리
워져 있으며, 입가에는 은은하게 미소가 번져 자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통견의(通絹衣)를 걸친 불상의 몸은 반듯한 어깨와 평평한 가슴이 표현되었으며, 옷 주름이 선
명하다. 눈에 잘 들어오진 않지만 불상 뒤로는 광배(光背)가 있다. 광배에는 5구의 화불(化佛)
이 있는데, 채색과 장식을 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불상에는 전쟁과 관련된 몇 가지 씁쓸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시절에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불상 앞을 지나다가 부처의 모양이 장사처럼 생긴 것을 보고
발끈했다. '근처에서 장사가 많이 나오겠구나. 혈을 끊어야겠다'
그래서 불상 뒤에 있던 혈(穴)을 칼로 찌르고 오른쪽 불상의 코를 베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도 명나라를 지극히 숭모하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일환으로 나온 전설인 듯 싶다. 또한 불상
몸 곳곳에 나 있는 검은색은 총탄의 흔적으로 6.25시절에 근처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것이
라고 하며, 혹은 양키 미군이 불상을 사격물로 삼고 표적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  기도처가 마련된 마애불의 아랫쪽

불상 앞에는 조촐한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다. 기도처에는 마애불을 관리하는 인근 절에서 갖다
둔 복전함이 있는데, 함 옆에는 제발 돈을 빼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걸려있다. 함(函)을
보니 자물쇠가 무려 3개나 달려있다. 오죽 도난이 잦았으면 그리했을까 싶지만 너무 돈에 집착
하는 것 같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애불상은 돈과 관련없이 중생 걱정에 잠을 못이루
는데, 그런 불상을 관리하는 절은 그의 마음과 달리 복전함 걱정에 잠을 설치는 모양이다.

마애불이 깃들여진 암벽의 왼쪽에는 조그만 샘터가 있다. 수량이 적고 바가지가 없어서 마시진
않았지만 이 지역에서 이름난 샘터라고 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한쪽 구석에는 불공 때 쓰는 초
와 성냥, 청소도구 등이 담긴 함이 있는데, 돈은 복전함에 알아서 넣어달라고 쓰여 있다. 그 문
구를 보니 초를 쓰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린다.

불상 주변으로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마땅한 흔적은 없다. 왜 이
곳에 불상을 새겼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연풍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으로 하늘재보다
비중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래서 인근 절이나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승
려나 상인, 또는 충주 지역의 토착세력인 충주유씨 집안이나 연풍의 유력한 지방세력이 나그네
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마애불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그네들은 불상 앞에 절을 올리
며 안녕과 소망을 빌었을 것이며, 그들이 시주한 돈으로 마애불을 관리하거나 자신들의 배를 채
웠을 것이다.

※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① 수안보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상주에서 연풍, 수안보 경유 충주행 직행버스가 다닌다.
* 동서울터미널이나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인천, 수원, 성남, 대전, 원주에서 충주
  행 고속/직행버스를 타고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로 갈아타거나 충주터미널 밖 시
  내버스 정류장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15~30분 간격으로 운행)
* 수안보에서 괴산행 군내버스가 1일 8회 운행한다. 버스를 타고 원풍리마애불에서 세워줄 것을
  부탁하면 어지간해서는 앞에 세워준다. 원풍리마애불은 정식 정류장은 아니며, 마애불 이정표
  가 나올 때 세워달라고 하면 된다. 만약 정차를 거부하면 새터에서 내려가 버스가 가는 방향
  으로 도보 12분, 신풍에서 수안보 방향으로 도보 15분
② 괴산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 부근 군내버스(아성관광) 종점에서 수안보(1일 8회), 수옥정행(1일 2회) 군내버스
  이용 (마애불 앞 또는 신풍에서 하차)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부내륙고속도로 → 연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연풍면사무소를 지나서 수안보 방면으로
  좌회전 → 원풍리마애불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1

 


원풍리마애불을 친견하고 다음 답사지인 각연사(覺淵寺)로 이동했다. 각연사는 연풍에서 괴산가
는 길목인 태성리에 자리한 산중고찰로 속리산국립공원 북단에 고요히 묻혀있다. 이곳은 오른쪽
에 링크된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괴산 각연사 보러가기)

약 2시간에 걸쳐 각연사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괴산읍으로 길을 잡는다. 각연사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다들 시장기가 강하게 맴돈다. 시간은 어느덧 2시를 훌쩍 넘긴 상태, 점심은 매운탕으
로 이름난 괴강매운탕에서 매운탕을 먹었다.
나는 매운탕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 외로 꽤 입맛이
맞는다. 쏘가리와 피라미, 메기 등 3~4종류의 민물고기가 수제비와 갖은 진한 양념과 어우러져
매운탕이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해 사람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 밑반찬도 그런데로
깔끔하고 정갈하며, 무척 시장해서인지 반찬도 금방 동이 나 여기저기서 더 갖다달라며 아우성
이다. 밥을 2그릇이나 먹은 사람도 나를 포함하여 상당하다. 이 집은 80대 할머니가 무려 60년
가까이 꾸린 집으로 지금은 그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딸들도 와서 일을 거
들었다.

이렇게 점심을 배불리 마치고 괴산읍내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우리가 문을 두드린 곳은 홍범식
고가와 개심사란 조그만 절이다. 이들은 한곳에 뭉쳐 있어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洪命憙) 일가의 기와집
홍범식 고가(洪範植 古家) - 충북 지방민속문화재 14호

괴산읍내 북쪽 동부리에는 홍범식 고가가 있다. 정남향(正南向)을 하고 있는 이 집은 1730년경(
또는 1861년)에 지어진 풍산홍씨 일가의 집으로 면적은 1,200평, 왕년에는 50여명이 살았다. 좌
우대칭의 평면 구조를 지닌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로 사랑채는 2고주 5량가의 납도리집이
며,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 모양으로 '一'자형 광채를 합쳐 'ㅁ'자형을 하고 있다.

속세에서 이 집을 주목하는 이유는 괴산이 낳은 위인, 홍범식과 홍명희 부자(父子)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 때문이다.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으로 참
판(參判)을 지낸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광무 6년)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
서(惠民署參書)가 되었으며, 1907년 전북 태인(泰仁)군수로 부임하여 의병을 보호했다. 1909년
충남 금산(錦山)군수로 전임되어 백성들에게 아낌없는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910년 8월 경
술국치(庚戌國恥)가 이루어지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택했다. 그는 아들에게 절대로 왜
(倭)에 협력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그것을 지킨 이가 바로 홍명희이다. 나머지는 아
비의 뜻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악덕 친일파가 되었다.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명희(1888~1968)는 홍범식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가인
(假人, 可人), 백옥석(白玉石), 벽초(碧初) 등으로 보통 벽초가 널리 알려졌다. 그는 왜국 다이
세이(大成)중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귀국하여 집에 머물던 중, 3.1만세운동이 터지자 바로 이
집 사랑채에서 은밀히 만세운동을 준비해 1919년 3월 19일 괴산 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으로 왜정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가 감방에 있는 동안 왜정의 탄압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팔고 인근 제월리로 이사갔다.

출옥 이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으며, 휘문고보 교사와 오산고보 교장, 연희전문
(연세대) 교수를 지내고,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이 되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
면서 부회장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 신간회에서 주최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그 유명한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했다. 임꺽정은 1928
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당대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로 봉건 귀족을 우월성의 존재
로 파악하지 않고 천민계층을 이상화(理想化)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집단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역사소설을 통해 계급의 관점에서 식민지적 모순보다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겨냥하는 역사의식을
표출했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으나 38선 이남이 점점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
되어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중,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남북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
(平壤)에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 같이 따라 나섰다. 그러고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완전히
월북(越北)을 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며 문학활동을 하다가 1968년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홍범식 고가의 솟을대문

▲  창고

홍씨 일가가 떠난 이 고가는 60여 년 동안 그런데로 모습을 유지하다가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
속자료 146호
<당시 지정명칭 '괴산 이복기 가옥(槐山 李馥基 家屋)>로 지정되었다. 허나 집주인
이 집을 변형시키면서 말썽이 생겼고, 결국 집주인의 요구로 1990년 9월 중요민속자료에서 정리
되고 만다. 그 이후 원형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크게 망가져 끝내는 폐가 지경에 이르게 되었
고, 괴산군에서 홍범식,홍명희 부자를 기리고 관광지로 키울 생각에 이 집을 매입해 지금의 모
습으로 말끔히 손질하였다. 손질한 것은 좋지만 그 과정에서 기존에 없던 부분도 마구 덧붙이게
되었고, 그나마 남은 고색의 때도 거의 사라져 고가(古家)란 이름이 정말 무색하게 되었다.

또한 집을 복원할 때 괴산 지역 노인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바로 월북한 홍명희의 집이란
이유 때문이다. 6.25를 뼈저리게 겪은 노인들에게 북한과 북한에 협조한 이들이 좋아 보일리는
없겠지. 그래서 괴산군청은 그들을 달래며 간신히 집을 복원했으며, 집의 명칭을 '홍명희 생가'
로 하려고 했으나 역시 그들의 눈치로 '홍범식 고가(한때는 동부리 고가)'로 이름을 변경했다.

비록 홍명희는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민족지도자이자 문학가
로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6.25이후 60년이 넘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북한도 언젠가는 우리가 흡수하고 포용해야 될 존재인데, 그곳으로 넘어갔다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몰아세워 복원사업을 방해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행위이다. 지금
은 반공(反共)을 내세우던 1950~80년대가 아니다. 만약 그가 월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집이 크
게 훼손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과는 다른 높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창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  홍범식 고가의 사랑채
홍명희가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지금은 빈집이다.
신발을 벗어놓던 섬돌은 신발 대신 먼지만이 수북하여
신발로 가득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홍범식 고가의 안채 외곽 -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안쪽을 가렸다.

▲  뜨락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들
장독 안에는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저들은 이곳을 복원할 때 갖다둔 빈 장독들이다.


※ 홍범식 고가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청주와 증평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시계탑4거리이다. 여기서 직진하여 7분 정도 걸으면 괴
  산대교가 나오며,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길 오른쪽에 동부리고가가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괴산나들목을 나와서 괴산방면 19번 국도로 우회전 → 감물 → 괴강3거
   리에서 우회전 → 동진교를 건너 대덕4거리에서 직진 → 동부교차로에서 괴산읍으로 좌회전
   → 괴산대교북단3거리(역말3거리)에서 직진 → 동부리고가

* 고택 앞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비와 관람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18시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괴산읍내를 앞뜰로 삼은
작은 절집 ~ 개심사(開心寺)

▲  개심사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홍범식고가에서 뒤쪽 언덕을 보면 절집 하나가 바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이번 답
사의 마지막 장소인 개심사이다. 

개심사는 역사가 매우 짧은 절로 1935년에 지어졌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935년 괴산군 칠
성면 두천리에 있던 도덕암(道德庵)이 문을 닫자 괴산읍 서부리에 살던 김경림이란 여신도가 도
덕암에 있던 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옮겨와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 불상 2구는 조
선 후기 불상으로 199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들이 바로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한 장
본인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곳에 올 일은 정말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1998년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새로 만든 극락보전으로 옮겼으며, 요사채와 삼성각, 명부전을 지
어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절의 역사가 80년 남짓이고 지금 있는 건물은 모두 1998년 이후에 세운 때깔 고운 것들이라 고
색의 내음은 없다. 극락전 뜨락에는 자갈돌이 정갈하게 깔려져 있으며, 절이 바라보는 남쪽으로
괴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절은 작지만 읍내를 앞뜰로 품으며 열심히 미래를 꾸려간
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개심사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
(開心寺 木造如來坐像 / 木造觀音菩薩坐像) - 충북지방유형문화재 173호

려함이 배여난 극락보전 불단에는 도덕암에서 옮겨왔다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운데에 앉
은 이는 3존불의 본존불(本尊佛)로 나무로 만든 목조여래좌상이다. 그리고 그 우측에 화려한 보
관(寶冠)을 쓴 보살상은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좌측에 있는 것은 근래에 만든 것이다.

이들 목조여래좌상과 관음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
양의 머리칼을 붙였으며, 얼굴에는 그만의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양 어깨를 가린 옷을 걸치고 있다. 양 손목과 무릎
에 걸쳐 두껍게 표현된 옷주름은 조선시대 불상 양식이며, 그의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다.
관음보살좌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여래좌상 못지않은 자비로운 인상이 풍긴다. 3존불
뒤로 붉은 색채의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으며, 극락보전 좌우 벽에는 신중도(神衆圖)가
자리하여 법당을 지킨다.

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를 넘었다. 개심사를 끝으로 그날의 답사일정은 별무리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아쉽지만 여기서 남쪽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렇
게 하여 겨울맞이 괴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개심사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28-1 (☎ 043-832-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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