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문학의 새로운 성지이자 옥천의 굵직한 명소, 지용문학공원 <정지용 생가(鄭芝溶 生家), 정지용문학관>
▲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된 정지용 생가 (왼쪽에 누워있는 표석이 생가터 표석, 가운데는 시 향수를 머금은 비석) |
구읍 한복판에 자리한 정지용 생가는 그의 동상과 시비를 포함하여 지용문학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특정 인물과 관련된 공원이나 기념관, 장소는 인물의 호를 따거나 성씨를 포함한 이름을 붙이지만 이곳은 그냥 이름만 적용하여 친숙함을 배가시켰다.
정지용 생가는 그가 태어나 소년 시절을 지낸 곳으로 1918년까지 살았다. 그가 상경하여 서울 에 자리를 닦자 1929년 효자동(孝子洞)에 집을 마련하여 부인과 아들을 불러 같이 살았으며, 나중에는 부모도 올라와 3대가 같이 살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서울로 가면서 집은 다른 사람 에게 넘겼고,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는 동안 집의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가 1974년 철거 되어 새 집이 들어섰다. 이후 정지용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풀리자 옥천군청에서 1996년 7월 원래 자리에서 약간 동쪽 인 지금 자리에 생가를 복원했는데, 원래 집은 초가 옆 우물 서쪽과 향수 표석 옆에 누운 생가 터 표석 일대로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허나 문학계와 옥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는 인물인만큼 작은 모습으로 복원하기에는 체면이 서질 않아 제자리 보다 동쪽에 초가 1동과 헛간 1동을 크게 짓고, 보기만 해도 정겨운 토담을 둘러 관광객을 맞 게 되었다. 그러니까 생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크게 부풀리고 가상까지 듬뿍 첨 가하여 완전히 민속촌 초가집이나 민속박물관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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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짝 열린 서쪽 사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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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에는 방 2개와 부엌이 있는데, 기존 초가의 방식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다. 방과 부엌 안 에 담긴 물건들은 새로 만들거나 다른 마을에서 수습한 것으로 정지용 일가가 쓴 것은 단 하나 도 없다. 집은 재현했으나 정작 그들이 쓰던 유물은 남아있지 않으니 시골에서 쓰던 물건이나 오래된 생활도구를 사들여 궁색하게나마 집 안팎을 꾸민 것이다. 초가의 방문과 부엌문은 모두 열려있어 내부를 훤히 구경할 수 있으나 그저 눈으로만 구경하기 바란다. 비록 근래에 지어진 초가이나 엄연히 정지용의 생가를 칭하고 있으니 부엌이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통제되어 있다. 단 툇마루에 잠깐 앉는 것은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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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껑이 닫힌 우물과 장독대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면서 갖다놓은 빈껍데기들이다. |
▲ 정지용 생가터 우물 서쪽 공터와 담장 너머 생가터 표석 일대에 조촐하게 생가가 있었다. |
▲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초가 3간 부엌과 방 3개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초가이다. 정지용의 생가가 아닌 정지용이 살고 싶었던 큰 초가를 재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 지용유적 1호 현판 정지용을 사모하는 단체인 '지용회'가 1988년에 달아놓은 것으로 그들은 복원된 생가를 지용유적 1호로 삼았다.
▲ 정지용의 사진이 걸린 초가 우측 방 정지용이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추억의 풍물시가 되버린 부뚜막을 갖춘 옛 부엌 옛날 단양(丹陽) 시골 외가집 부엌과 비슷하게 생겨 당시의 소중한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시켜 준다. 부뚜막에 장작을 떼서 지어먹은 밥과 누룽지의 맛은 참 예술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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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문 옆에 고된 몸을 기대어 선 돌절구 |
▲ 초가 좌측 방 - 정지용 부모가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 초가 옆에 마련된 헛간 - 창고와 뒷간을 재현했다. 정지용 생가와는 애당초 관련이 없는 장식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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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간 가운데 칸은 농기구 창고로 재현했다. |
▲ 정지용문학관으로 이어지는 남쪽 사립문과 생가 |
▲ 남쪽 사립문 앞에 놓인 청석교(靑石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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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사립문을 나오면 조그만 개천과 물레방아가 있는데, 개천 위에는 넓직한 반석(盤石)이 벌 러덩 드러누워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청석교'라 불리며 원래는 생가 앞에 흐르 는 개천에 걸쳐져 있었다. 지금이야 개천이 정비되어 폭이 좀 넓어지고 반듯해졌지만 예전에는 폭이 좁아 저 돌다리로 개천을 건넜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구읍을 가르는 개천 위에 걸쳐져 구읍의 동,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구읍 출신인 정지용과 육영수도 저 다리를 건너 학교를 가고 서울에 가고 했다. 어찌 보면 민속촌 초가처럼 재현된 정지용 생가보다 유서가 깊은 다리지만 마땅한 이정표가 없어 그 냥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정지용문학관 해설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 돌다리에 대한 이야기 를 한 토막 들려주니 꼭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다리가 되어 드러누운 이 돌은 매우 단단하고 두꺼운데, 이런 넓은 돌은 옥천에 서만 나온다고 하며, 현재 옥천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목인 금강(錦江) 상류 장계유원지에도 청 석교라는 오래된 다리가 말년을 보내고 있다. (삼국시대에 지어졌다고 함) |
▲ 정지용 생가 동쪽에 자리한 정지용문학관과 정지용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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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생가 동쪽에 터를 닦은 정지용문학관은 2005년 5월에 문을 열었다. 정지용의 생애와 작 품, 문학 세계를 다룬 공간으로 2층 규모이며, 내부는 그리 넓지는 않다. 딱 하나 뿐인 전시실 인 문학전시실은 정지용의 인생과 그가 살았던 시대, 문학(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 문...)을 설명하고 있으며, 20세기 초/중반 우리나라 현대 시의 흐름과 거기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소상히 다룬다. 또한 그의 시집과 산문집, 그의 손때가 담긴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유품은 그게 전부라 아직은 좀 빈약하다.
눈으로 보는 전시실 외에 문학체험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자신의 손이 스크린이 되어 시를 직접 읽어 보는 '손으로 느끼는 시' 코너와,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의 시낭송을 듣는 ' 영상시화' 코너,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가곡 '향수'를 감상하는 '향수영상', 컴퓨터로 직접 시 어(詩語)들을 검색하는 '시어검색', 노래방처럼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의 시를 직접 부르는 '시낭송 체험실' 등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시낭송체험실은 이곳의 백미(白眉)로 다른 문학 관이나 기념관에는 거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 외에 정지용의 삶과 문학 등을 다룬 다큐멘터 리를 상영하는 영상실과 시/문학 토론, 학습, 문학동아리 활동공간으로 쓰이는 문학교실이 마 련되어 있다. (문학교실은 사전 예약 요망)
관람료는 물론이고 시낭송실 사용까지 모두 공짜이며,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 어서면 안내데스크 좌측에 옛날 복장을 갖춘 사람 하나가 실감나게 앉아 있어 깜짝 놀라게 만 든다. 그 사람은 실제 사람이 아닌 정지용을 재현한 인형으로 기념촬영용이다. |
▲ 문학전시실 내부 - 정지용의 생애와 시대상이 간략하게 기록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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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鄭芝溶)의 생애 <1902 ~ 1950(?)>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 5월 15일) 한약상을 하던 정태국(鄭泰國)과 부인 정미하의 장남 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자 이름은 지용(池龍)으로 이는 그의 생모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 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지용(芝溶)으로 이름을 갈았다. (천 주교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그의 부친은 고향에서 한약상을 개업해 제법 여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가산을 죄다 말아먹고, 고향을 떠나 이곳 구읍으로 넘어와 새 보금자리를 꾸렸으며, 처가 친척 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목구멍에 간신히 풀칠을 했다. 정지용은 당시를 회상하 며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말해 유년 시절 에 가난으로 인한 고초가 매우 심했음을 보여준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교)에 입학했으며, 1913년 11살에 나이로 동갑인 송재숙 과 혼인을 했다. (헐~~ 부럽다) 1918년 휘문고보(서울 안국동)에 입학했으며, 성적이 우수하고 교우관계가 좋았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 시절부 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문학적 소질을 발견하고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요람동인을 만들어 동 인지 요람(搖籃)을 프린트판으로 10여 호를 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이 되면서 이선근과 1년 무기정 학을 받았다. 그해 12월 서광(瑞光)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의 유일한 소 설이자 첫 발표 작품이었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을 했다. 또한 첫 시작품인 풍랑몽(風浪夢)을 썼다. 1923년에는 휘문고보 문우회에서 만든 '휘문' 창간호의 편집위원이 되 었으며,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왜열도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교토에서 시 '석류','민요풍 시편','새빨간 기관차','바다' 등을 썼으며, 학조 창간호에 '까페프란스' 등 9편의 시를, '신민', '문예시대'에 '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 을 시작했다. 1927년에는 '갈매기','갑판우','향수'등 30여 편의 시를 냈으며, 1928년 2월(음력)에는 장남인 '정구관'이 태어났다. 이후 동지사문학 3호에 '마(馬)1,2'를 발표하고 1929년 대학을 졸업, 귀 국하여 휘문고보 영어 교사로 일했으며, 옥천에 있는 부인과 장남을 서울로 불러들여 효자동에 집을 마련했다. 12월에는 '유리창'이란 시를 썼다.
1930년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여 '조선지광','시문학','대조','신생' 등에 '겨울','유리창' 등 의 시를 발표했으며, 1933년 3남 정구인이 출생했다. 또한 그해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 의 편집고문을 지냈으며, 해협의 오후 2시, 소묘1,2,3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종로구 재동(齋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이때쯤 딸 정구원이 태어났다. 1935년에는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냈으며, 그동안 발표된 89편이 수록되었다. |
▲ 1935년에 발간된 정지용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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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는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그해 3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 광','소년' 잡지에 '옥류동','별똥이 떨어진 곳'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와 삼천리문학, 여성, 청색지 등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우상' 등 수필 30여 편을 발표하는 한편, 천 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지의 시부분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박두진, 박목월(朴木月) 등을 등단시켰다.
1940년에는 기행문 화문행각(畵文行脚)을 냈고, 문장 22호 특집으로 '진달래' 등 10여 편의 시 가 실리기도 했다. 1944년에는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현 부천시 소사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1945년 휘문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이대) 교수가 되어 한국어 와 라틴어를 강의했다.
1946년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했고, 6월에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다. 이는 정지 용 시집과 백록담 등 기존의 낸 시집 가운데 25편을 가려 낸 것으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 과위원장에 위촉되었으나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7년 경향신문사 주간직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이대 교수로 복귀했으며, 서울대 문리과대학 강사로도 출강을 했다. 그리도 이듬해 이대 교수를 사임하고 녹번동(碌磻洞)에서 서예를 하며 지냈는데, 박문출판사에서 문학독본을 냈으며, 1949년 시문과 수필 55편이 수록된 산문을 출간 했다.
그리고 비운의 1950년이 밝아오자 그해 2월 '문예'에 '곡마단','사사조오수(四四調五首)'를 발 표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문단 발표였다. 4달 뒤, 6.25가 터지자 미처 피신을 가지 못했 는데, 북한군에 잡혀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고 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 로 이감되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인데, 폭사 당한 것으로 여겨 지며, 월북을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가 사라지자 이승만 정권은 그가 월북한 것이라 단정짓고, 그의 작품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982년 장남 정구관을 비롯하여 48명의 문학인과 각계 인사들이 정지용의 문학을 통제에서 풀 어줄 것을 요구하며 정지용 문학 회복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88년 3월 31일 통제에서 해금 되었으며, 그해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 제1회 지용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아 지용시문학상이 제정되고, 그의 문학세계와 작품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옥천군 청에서도 그의 생가터를 매입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만들어 문학의 성지로 꾸몄다. |
▲ 문학관 로비에 마련된 정지용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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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서도 징그럽게 많이 등장한다. 특히 '향수'가 약방의 감초 같이 자주 나오는데, 그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거의 외우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현실은 다 까먹음) 학창 시절에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시와 시조, 시험을 보면 시 부분은 많이도 틀렸고 외우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시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었고, 그런 시를 쓴 시인들을 무척 원망했었지~~ 허나 이제는 시 때문에 머리 아픈 시험을 봐야되는 굴레에서 벗어났고, 나 이를 먹어감에 따라 시의 내용을 저절로 음미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향수도, 윤동주(尹東柱)의 서시도 보면 볼 수록 빛나는 보석과 같은 시임이 틀림 없다.
정지용은 50평생 동안 14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바다와 산, 신앙(천주교), 고향이 중심 소재 였다. 향수 또한 고향을 표현한 시로 노래나 가곡으로도 나와있다. 1988년 통제에서 풀린 이후 왜정(倭政) 시절에 활약한 대표적인 시인이자 천재 시인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옥천을 빛낸 위인의 하나이자, 옥천의 든든한 후광(後光)이자 제일의 관광지로 또한 문학의 성지로 점 차 몸값을 높이고 있다.
문학전시관을 1바퀴 둘러보고 나오니 문학관 해설사가 구경 잘했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렇다고 답을 하면서 여러 질문을 넌지시 던졌는데, 거기서 생가 복원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과 사립문 앞에 누운 청석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점심을 먹고자 부근에 30여 년 묵었다는 짜장면집(문정식당)에서 간단 하게 간짜장을 먹었다. (자장면이 유명하다고 함) 별다른 맛은 없으나 밀가루 음식으로 덥수룩 하게 배를 채우고 구읍에 널린 명소들을 마저 둘러보았다.
※ 정지용 생가(정지용 문학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① 옥천까지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조치원역, 김천역, 구미역, 동대구역, 밀양역, 부산역, 마산역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옥천역 하차 (옥천역 정차 열차를 타야 됨) * 동서울터미널에서 옥천, 영동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옥천행 직행버스가 1일 20회, 청주시외터미널에서 1일 17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 앞, 대전역(중앙시장), 판암역(대전 1호선, 1번 출구)에서 607번 시내버스를 타고 옥천종합상가 하차 ② 현지교통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직진하면 우체국 너머로 4거리가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 면 옥천버스종점(군내버스터미널)이 있는데, 거기서 보은, 안남, 안내, 장계, 청산 방면 군 내버스를 타고 구읍4거리에서 하차하여 도보 3~4분 (석탄리나 수북리 방면 군내버스를 탔을 경우 구읍3거리에서 내려서 도보 5분)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계속 직진하면 구읍이다. 도보 35~40분 거리 * 옥천시외터미널에서 갈 경우에는 구읍까지 가는 버스가 없다. 택시를 이용하면 5~7분 정도면 가며, 걸어갈 경우는 대전 방면으로 걸으면 삼양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접어 들어 도보 30분 * 옥천종합상가(607번 정류장)에서 옥천군청 정문을 경유하여 도보 30분, 또는 택시 이용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문학관 앞에 주차장 있음) * 경부고속도로 → 옥천나들목을 나와서 향수공원4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3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4거리에서 우회전 → 정지용 생가
★ 정지용 생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휴관) * 매년 5월 중순에는 정지용생가와 상계체육공원에서 정지용을 추모하는 지용제가 열린다. 지 용문학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행사와 공연, 공예품 전시, 음악회, 야시장 등이 열리며, 행사기간은 보통 3일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39 (향수길 56 ☎ 043-730-3408) * 정지용문학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