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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저수지) '

▲  보살사에 제일 가는 보물, 석조2불병립상


 

겨울 제국이 슬슬 쇠퇴기에 접어들던 2월 끝 무렵, 충청도의 오랜 중심지인 청주(淸州)를
찾았다. 청주에서 나에게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왠지 그곳의 여러 명소가 땡겨
나그네 본능에 따라 미련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청주시외터미널(가경동)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가 어느덧 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
景)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선 요기부터 하기로 하고 터미널 2층에 있는 한식뷔페
기사식당에서 두둑히 배를 채웠다. 자고로 뱃속이 든든해야 일이 편한 법이다.
청주에는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진 상태라 얌전하게 그곳을 찾아가면 되는데, 우선 시내
로 나가는 청주시내버스 832번(석판↔흥덕구청)을 타고 무심천을 건너 충북도청으로 넘어
가 청주시내버스 922번(보살사↔청주대)으로 갈아탔다.

용암지구까지는 시가지가 울창하게 펼쳐져 있다가 롯데마트 상당점을 지나면서 차창(車窓
) 밖 풍경은 겨울에 잠긴 시골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 시골길을 거침없이 내달려 시내 동
남쪽 변두리에 박힌 보살사 종점에서 육중한 바퀴를 접는다.
버스에서 내려 절로 다가서니 경내 밑에 약수터가 있다. 보살사를 포근히 품은 낙가산(洛
迦山, 475m)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물 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
시려면 집에서 수돗물을 틀듯이 꼭지를 틀면 된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
을 한가득 담아 마시니 몸 속에 낀 속세의 기운이 말끔히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약수를 마시고 오른쪽으로 난 돌담길을 오르면 청주에 숨겨진 오래된 산사(山寺), 보살사
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서히 떠오르듯 펼쳐진 돌담길은 시멘트 대신 흙을 입혔으면 더
정겨웠을 것을 그것이 좀 아쉽다.


▲  보살사 경내로 인도하는 돌담길


 

♠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 낙가산 보살사(菩薩寺)

▲  보살사 극락보전

낙가산(475m) 서쪽 자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보살사는 청주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1530년
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거론된 청주의 절집 중, 지금까지 살아있
는 유일한 절이다. 즉 청주 불교의 화석과 같은 존재이다. <직지심경(直指心經)의 탄생지인 흥
덕사(興德寺)는 고려 때 파괴됨, 남이면에 있는 안심사(安心寺)는 청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생략>

보살사는 법주사(法住寺)를 세웠다고 전하는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이를
증명할 유물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창건과 관련된 다음에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1토막 전해온
다.
의신조사는 중생을 교화할 새로운 도량를 찾고자 기도에 들어갔다. 회향일(回向日)을 앞둔 어
느 날, 기도를 하던 의신은 비몽사몽간에 선인(仙人)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선인은 '그대의
기도가 지극하니 좋은 인연이 있을 것이오. 지금 대문을 나가보면 한 노파가 있을테니 그에게
물어 보시오'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의신은 밖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한 노파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이에 의신이 노
파를 부르며 불이 나게 쫓아갔지만, 노파는 돌아보지도 않고 제 갈 길만 빠르게 가고 있어 두
사람간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노파는 한참 후에야 발을 멈췄는데, 의신이 다가가
서 얼굴을 보니 그 노파는 다름아닌 관음보살 누님이었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관음보살의 등장에 기쁨에 가득 찬 의신은 무릎을 끓고 절을 올리며, 새로운 도량
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관음보살이 '그대가 찾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고는 발길
을 돌리려고 하자 의신이 깜짝 놀라 '관음보살 누님께서는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물으니 관
음보살이 웃으며 '나는 이곳에 늘 머물러 있을테니 걱정하지 마라' 답하였다. 의신은 그의 센
스 넘치는 답변에 크게 감격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의신은 관음보살이 알려준 곳에 절을 짓고, 그가 일러준 곳이라 하여 '보살사'라 하였
다. 또한 관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이라는 뜻에서 산 이름을 보타낙가산(寶唾洛迦山)이라 했
으며, 이후 그 줄임말인 낙가산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 연유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
고 있다. (충청북도에 널린 수많은 옛 절 가운데 유일한 관음도량이라고 함)
산의 이름에서부터 불교식 이름과 관음보살의 향기가 물씬 배어나오니 창건 당시 또는 중간에
관음도량으로 영업을 하면서 그럴싸한 전설을 지어내었고 산 이름도 낙가산으로 바꾼 것이다.

778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 융종(融宗)이 중창했다고 하는데, 극락보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된 이 땅에 흔치 않은 이불병립상이 있어 이 시기에 융종이 창건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918년에는 고려 태조(太祖)의 5번째 아들인 증통국사(證通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는데, 증통은
태조의 3번째 왕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의 소생으로 고려 3대 군주인 정종
(定宗)과 4대 군주인 광종(光宗)의 친동생이 된다. 광종이 925년 생이니 증통은 그 이후에 태
어난 것이 되는데, 어찌 태어나기도 전인 918년에 중창을 했다는 것인지 어이가 달아날 따름이
다. 아마도 시기가 잘못되거나 보살사와 인연도 없는 왕자 출신 승려를 억지로 끼어 넣다 발생
한 치명적인 오류인 듯 싶다.

1107년 자정(慈淨)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고려 말에는 공민왕(恭愍王)이 절을 꾸리는데 쓰라
며 농토(農土)를 내렸다고 한다. 또한 1458년에는 세조(世祖)의 어명으로 절을 중수했다고 하
니 왕실과도 적지 않게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26년 벽암(碧巖)의 제자인 경특(瓊特)이 다시 일으켜 세
웠으며, 1683년에 일륜(日輪)이 크게 중수를 벌였다. 그러다가 왜정(倭政)과 6.25를 거치면서
퇴락된 것을 1988년부터 대대적인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경내 서쪽 산
등성이 너머에도 새로 터를 다져 직지보림선원을 세웠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명부전,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직지보림선원에는 큰법당과 선방 등의 건물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258호로 지정
된 영산회괘불탱을 비롯하여 석조이불병립상, 극락보전, 5층석탑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특히 영산회괘불탱(1649년)은 석가탄신일과 주요 행사 때만 공개되
는 귀한 몸으로 평소에는 관람이 불가능하다.

한참 팽창중인 청주 시내와 적절히 거리를 두며 산 속에 포근히 자리해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절 밑에는 그 흔한 식당도 마을
도 없다. (마을은 1리 정도 나가야 됨)
절도 조촐한 규모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그리 부담이 없으며, 극락보전에는 매우 희귀한 2불
병립상이 있어 겉보기와 달리 보통 절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 낙가산 보살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청주까지 (버스, 철도)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남부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청주행 고속/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부산(노포동, 사상), 대구(동대구), 광주에서 청주행 고속버스 이용
* 김포공항, 고양, 의정부, 부천, 인천, 광명(철산역, 광명역), 안양, 성남, 수원, 평택, 이천
  에서 청주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복합/유성), 대구(서부), 천안, 원주, 강릉, 충주, 제천, 공주, 구미, 창원에서 청주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 신탄진역 건너편에서 405, 407번 청주좌석버스 이용 (도청이나 상당공원에서 하차하여
  건너편 정류장에서 922번 이용)
* 서울역, 용산역, 수서역, 광명역, 동대구역, 부산역, 마산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여수엑스
  포역에서 고속전철(KTX, SRT)을 타고 오송역 하차
② 현지교통
* 청주시외/고속터미널, 청주역, 오송역(502, 747번), 조치원역(502번)에서 상당공원/도청 방
  면 시내버스를 타고 도청이나 6거리, 상당공원(내린 자리에서 길 맞은 편)에서 922번 시내버
  스로 환승(거의 1시간 간격)
③ 승용차 (절 밑에 주차장 있음, 자세한 경로는 인터넷이나 네비양 참조)
* 경부고속도로 → 청주나들목을 나와서 청주 방면 → 강상촌분기점에서 남청주 방면 3순환로
  → 양촌분기점에서 청주 시내 방면 → 분평4거리에서 1순환로로 우회전 → 방서4거리 직진
  → 용암지하차도로 들어서지 않고 가변으로 빠져서 4거리에서 우회전 → 보살사

* 관람료와 주차비는 없음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낙가산로 168 ☎ 043-297-7526)


▲  보살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56호

보살사는 다른 절집과 달리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없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멀리감치
나와 중생을 맞이하는데, 아무도 나와있지를 않으니 그저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일주문을
세울 지형적/재정적인 여건이 안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 돌담길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오랜 내력에 걸맞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절로
생각을 했었으나 돌담길 끝에 이르러 모습을 비추는 경내를 보고 그 생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바로 앞에 펼쳐진 극락보전(극락전)과 그 주변이 절의 전부였던 것이다. (근래에 터를
다진 서쪽 직지보림선원 구역은 제외) 극락보전 앞에는 5층석탑이 서 있어 1금당 1탑의 가람배
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극락보전 좌우와 5층석탑을 둘러싼 앞 뜨락에는 금잔디가 정갈하게 입
혀져 있었다.

보살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그 주
인을 배려한 탓인지 서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맞배지
붕 건물로 전형적인 금당(金堂) 스타일을 지니고 있는데, 뜨락보다 약간 높게 다져진 기단(基
壇)에 주춧돌을 얹히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건물 기둥은 민흘림으로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굵고 높으며, 두공은 정연하게 배치되었
다. 창호는 측면의 협칸 없이 3칸이 개방된 정자형(丁字形) 분합문(分閤問)이 달려 있으며, 처
마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범자문(梵字文)과 기년명(紀年銘)이 쓰여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이곳의 오랜 보물인 석조2불병립상
과 석조지장보살좌상 등이 따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와 지
장탱, 칠성탱 등의 탱화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지었으며, 1683년
에 일륜이 중수하고 1872년에 다시 중수했다. 자연석의 주춧돌과 기둥과 지붕의 비례, 공포가
많이 짜여진 다포의 특징 등에서 조선 초/중기 건축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  고색의 검은 때가 가득 깃든 극락보전 앞 계단

▲  보살사 5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65호

극락보전 앞에 싶어진 5층석탑은 1703년에 세워진 것으로 2층 탑신에 '강희계미(康熙癸未)'란
명문(銘文)이 쓰여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귀띔해준다. 강희는 청나라 4대 군주인 강희제(康熙
帝, 재위 1661~1722)의 연호로 그 연호에 계미년은 1703년 밖에 없다.

고된 세월의 흔적이 군데군데 끼어있는 이 탑은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그 위에 복연화
문(複蓮花紋)이 새겨진 1층 기단을 올렸다. 겉으로 보면 기단이 2~3중으로 복잡하게 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꽃잎이 새겨진 부분이 전부이다.
기단 위에는 5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1층 탑신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그 안에 2개의 사
각형을 새기고, 다시 그 안에 2개의 동그라미를 넣어 글자 모양을 새겼다. 처음에는 무슨 마크
인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범자(梵字)라고 한다. 2층과 3,4,5층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하나
의 돌로 구성되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으로 균형이 제법 잡혀 보인다. 탑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이 생략된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보주(寶珠)로 이루
어져 있다.

탑의 조성시기가 새겨진 이 땅에 흔치 않은 석탑이자 조선 후기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
한 단서를 제공하며, 탑의 높이는 바닥돌까지 포함하여 약 3.5m이다.


▲  1층 탑신에 새겨진 강희계미(康熙癸未) 4글자
오른쪽 강희 부분은 조금 마멸되어있으나 눈을 보다 가까이에 대면
글자 확인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단 한자는 알아야 됨)

▲  1층 탑신에 고대 문명의 글씨처럼 쓰여진 범자(梵字)
싸인처럼 보이는 저 내용은 무슨 뜻일까?

▲  1층 탑신 북쪽에 새겨진 범자
왼쪽 범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의 심술궂은 괴롭힘에 형편없이
녹아 내렸고 오른쪽 범자만 간신히 남아 웃음을 짓고 있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과 붉은 닫집

극락보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은 조선 후기 불상으로 근래 산뜻하게 개금(改金)을 입혔다. 아
미타불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뽐내며 협시(夾侍
)하고 있는데,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덩치가 비슷하다.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며 중생들의 고통
과 보살사의 재정을 어루만지는 그들 뒤로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
데, 1759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가로 252cm, 세로 217cm 크기이다.
불단 위쪽에는 날개를 살짝 치켜 올린 듯한 수려한 자태의 닫집이 있어 아미타3존불과 극락전
내부를 더욱 화려하고 장엄하게 수식해 준다.


▲  극락보전 좌측의 석조지장보살상(石造地藏菩薩像)과 지장탱(地藏幀)

극락보전 좌측에 따로 자리를 마련한 지장보살상은 돌로 만든 것으로 1970년 4월 초파일 행사
때 우연히 석조2불병립상과 함께 경내에서 출토되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으나 상
호는 원만하며 보존 상태도 괜찮다. 허나 도금을 입히면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근래에 만든 불상처럼 되어버렸다. 
이 보살상은 석조2불병립상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등 뒤에는 화사한 색채의 지장탱이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자리해 있다.

▲  법당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는 여러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석조2불병립상과 칠성탱
칠성탱은 19세기 후반 것으로 치성광여래를
비롯한 칠성(七星)의 여러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석조 이불병립상(二佛竝立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4호

불단 옆 연화대(蓮花臺)에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석조2불병립상이 있다. 예전에는 '석조2
존 병립여래상'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2자를 줄여서 '석조2불병립상'이라
불린다. 그래도 어려운 건 비슷한 것 같다.

이들은 보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970년 4월초파일(석가탄신일) 행사 때 경내에서 우연
찮게 발견되어 화제가 된 주인공이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석조지장보살상과
함께 팔자에도 없는 생매장살이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랜 세월의 공백을 깨고 다시 햇
살을 받게 되면서 극락보전에 자리를 마련해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일광이불상(一光二佛像), 즉 광배 하나에 2기의 불상이 있는 석불이
자, 두 불상이 하나에 돌에 조각된 병립불(竝立佛)이다. (이름도 어렵다) 그들 머리는 나발로
머리 꼭대기에 육계가 솟아 있으며, 얼굴에는 동자처럼 천진난만함이 깃들여져 있어 손으로 쓰
다듬고 싶은 모습이다. 볼은 살이 조금 올랐으며, 코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양쪽 귀는 중생의
민원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리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진하게 그어
져 있어 옛 불상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으로 옷주름이 굵게 표현되었으며, 양쪽 발은 잘 보이지
는 않지만 정면을 향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둘 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우
측 상은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으며, 좌측 상은 복대의 띠 주름을 쥐고 있다.

조성 시기는 신라 후기나 고려 때로 보이며, 그들을 통해 보살사가 적어도 신라 말에 문을 열
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석가불(釋迦佛)과 다보불(多寶佛)의 병존불좌상(竝尊佛坐像)과도
연관성이 있어보이는 귀중한 불상이자 희귀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높다. 마땅히 국가지정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건만 아직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는 점이 의아스럽다.


▲  보살사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뒤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1999년에 지어진 건물로 2002년 10월 금동지장보살상과 도명
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십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을 봉안
했다. 극락보전에 이미 오래된 지장보살상이 있어 그를 명부전의 주인장으로 삼아도 될 듯 싶
은데, 그러지 않고 따로 지장보살을 만들어 봉안했다.


▲  보살사 삼성각(三聖閣)
경내 가장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1993년에 지어졌다. 삼성각은 말그대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칠성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이다.

▲  독성탱
소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 독성 할배와
그의 시중을 드는 동자가 그려져 있다.

▲  칠성탱
극락보전에 이미 칠성탱이 있는데,
또 칠성탱을 제작했다.

◀  산신탱
산신의 부하인 호랑이는 거의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보인다.

극락보전에서 뒤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숲속에는 보살사 중수비(重修碑)가 있었다. 1683년에
절을 크게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던 윤심(尹深, 1633~
1692)이 글을 작성했다.
1988년 보살사에서 중수비를 절 입구로 옮기다가 그만 어이없는 실수로 엎어지면서 절의 내력
을 머금은 비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아작난 비석의 파편은 버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 비석은 현재 없으며, 다행히 비에 새겨진 내용은 '한국사찰전서'와 충청북도 '사지(寺誌)'
에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보살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에 새로 닦여진 직지보림선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으로 가
려면 약수터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그래봐야 극락보전에서 도보 5분 거리)
고개 중턱에 이곳의 유일한 승탑(僧塔)과 탑비가 서 있다.
이 탑은 제운당 도원(霽雲堂 道源)의 사리탑으로 그의 법호는 제운(霽雲), 법명은 도원(道源)
이다. 그는 보살사에서 30여 년을 머물다가 1984년 10월 9일 새벽에 입적을 했는데 무려 10여
과의 사리가 쏟아져 나와 1985년 승탑과 탑비를 세웠다.

사리가 많이 나온 걸 보니 고승(高僧)은 고승인가 보다. 허나 승려의 몸에서 왜 사리가 나오는
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그 잘난 과학기술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해 쩔쩔
매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참 신비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  직지보림선원 7층석탑

제운당 사리탑을 지나면 직지보림선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살
사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기존 경내가 확장에 좀 문제가 있는지 버스 종점 서쪽 산자락에 터
를 다지고 큰법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과 7층석탑, 관음보살상을 지었다.

금잔디 중앙에 자리한 7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을 세우고, 7층의 탑신, 그리고 보륜(
寶輪) 등의 상륜부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탑신마다 석불이 새겨져 있고, 기단에는 팔부중상(
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  관음보살상

7층석탑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높다란 곳에 관음보살상이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보살상의 높
이는 대략 6m 정도로 요즘 우후죽순 들어서는 대형 석불보다는 조촐한 크기이다. 왼손에는 감
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어진 성모(聖母)처럼 속세를 걱정만 한다.

▲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큰법당

▲  선방(禪房)과 요사(왼쪽)


▲  큰법당 내부 - 석가3존불이 불단에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을 비롯한
탱화 3점이 내부를 수식한다.


 

♠  청주에서 만난 그림 같은 호수, 명암저수지(明岩貯水池)

▲  겨울 제국에게 봉인을 당한 명암저수지(명암지)

생각보다 작았던 보살사를 40분 정도 둘러보고 종점으로 나왔다. 5분 뒤 시내로 나가는 922번
저상버스가 들어와 적막에 잠긴 종점 주변에 힘찬 엔진 소리를 남기며 입을 벌린다.

버스에 올라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청주에서 이름난 약수터인 명암약수터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도청에서 청주시내버스 863-1번으로 갈아타고 명암저수지와 국립청주박물관, 청주드림
랜드(청주동물원)를 거쳐 명암약수터 종점(약수터 종점)에서 내렸다.

산골에 묻힌 명암약수터는 1920년대에 발견된 탄산약수이다. 허나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그 착했던 약수터는 이미 운명을 한 상태였다. 철분이 기준치 이상으로 계속 검출되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몸보신 좀 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폐쇄라니;;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진다. 허나 어찌하랴? 부적합 빨간 줄이 그어진 물을 애써 마셔봐야 좋을 것도 없
고 물도 이제 고갈되어 나오지도 않는다.
정보를 미쳐 확인하지 못한 어리석음과 샘터 코 앞에서 물도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야 되는 아
쉬움을 애써 삼키며 약수터를 떠났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 되나? 신봉동 백제고분군이나 갈까?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을 갈까? 아
니면 얌전히 청주 도심에 있는 중앙공원이나 갈까? 하지만 모두 땡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정처
를 잃은 외로운 나그네는 속칭 멘붕에 잠긴 채, 시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중간에 국립
청주박물관이 있지만 이미 입장시간이 지난 상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명암
저수지 북쪽에 이르렀다.


▲  명암저수지 북쪽과 명암타워

명암저수지(명암지)는 청주에서 가장 큰 호수로 농사와 식수 확보를 위해 1922년에 축조되었다.
청주의 덩치가 커지면서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처가 되었으며, 청주 유일의 낚시터로 강태공(姜
太公)의 발길도 잦아, 밤낚시 때는 잉어와 붕어가 잘 잡힌다고 한다. 저수지 상류에는 오리배
를 비롯한 뱃놀이를 즐길 수 있고, 호수 주변에 산책로를 둘러 평일 낮시간에도 산책이나 운동
을 하는 시민들이 제법 눈에 띈다.
또한 명암타워가 세워지면서 호수를 바라보며 결혼식 및 각종 연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식당과 찻집(까페)들이 가득 늘어서 호수의 후광(後光)을 나눠 갖는다.


▲  얼음에서 벗어난 호수 남쪽을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들

▲  압공 3인조가 순찰을 돈다.

지나가는 해와 달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매뭇새를 다듬을 정도로 경관이 좋은 명암저수지는 겨
울 제국의 지독한 시샘을 받으며 제국이 씌워놓은 얼음이란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어느 철없
는 소쩍새가 벌써부터 소쩍소쩍~♪ 울어대지만 겨울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그 소리에 호수는
용기를 내며 굴레에서 벗어나려 용을 쓰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그나마 호수 남쪽 일부는 얼음
에서 해방되어 청둥오리를 비롯한 여러 압공들이 순찰을 한다.


▲  갈대가 살랑거리는 명암저수지 남쪽

▲  명암타워 동쪽에 자리한 비석과 표석

명암타워 옆에는 오래된 비석과 표석이 자리해 있다. 호수 산책로 옆에 있어 쉽게 눈에 띄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들인데다가 그들에 대한 안내문도 없으니 태반의 사람들은 눈길
조차 주지 않고 지나간다. 나도 그냥 지나치려다가 고양이가 생선가게 앞을 그냥 못지나친다고
이렇게 사진에 담았다.

왼쪽 비석은 명암지에서 상당산성으로 넘어가는 상봉재 옛길에 있던 조씨 집안의 비석이다. 내
용을 보니 그들 집안의 충효를 기리고자 세운 비석인데, 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곳에 길이 만들어지면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른쪽에 누워있는 표석은
1922년에 명암지를 축조하면서 만든 것으로 '명암○도(明岩○道)'라 쓰여 있다. 도(道) 옆에는
가로로 쓰인 글씨가 있는데, 시멘트로 지어져 희미하긴 하지만 왜왕(倭王)의 연호인 소화(昭和
) ○년이라 쓰여 있다.

※ 명암저수지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청주체육관이나 사직4거리, 지하상가, 도청에서 862-2, 863-1, 863-2번 시내버스를 타고 명
  암저수지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호수 북쪽과 남쪽, 명암타워에 주차장 있음)
① 경부고속도로 → 청주나들목을 나와서 청주 방면 → 터미널4거리에서 우회전 → 가마교차로
  에서 좌회전 → 분평4거리에서 1순환로로 우회전하여 직진 → 용암지하차도 직진 → 명암저
  수지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담동



명암저수지를 1바퀴 돌고 시내로 나갔다. 시간은 이제 17시 반, 땅꺼미가 슬슬 짙어지기 직전

이다. 날도 이제 저물어가니 더 이상 갈만한 곳도 없고 그렇다고 만날 사람도 없다. 어두워지
면 속히 나의 제자리로 철수하여 발 씻고 자는 것이 진리.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청주와의 인
연을 정리하고 조치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청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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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3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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