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봉산 마무리
▲ 도봉서원(道峯書院) 복원 조감도(鳥瞰圖) |
만월암을 등지고 정신없이 내려가니 천축사와 길이 갈리는 도봉산장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수월 하여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에 이른다. 허나 도봉서원은 서원 주변을 철제 담장으로 빙 두르며 복원 공사에 여념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공사는 2014년까 지 진행되며, 조감도에 나온 모습대로 재현된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나름 희소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한때 서울에 는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암사동(岩寺洞) 한강변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었 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내리친 서원철폐령에 앞다투어 사라지고 말았다. 구암서원은 그 나마 조두비(俎豆碑)와 주춧돌이 남아있고, 민절서원은 사육신묘(死六臣墓) 사당이 대체 역할을 하고 있다.
도봉산입구에서 천축사나 자운봉, 우이암으로 가려면 꼭 지나야되는 목좋은 곳에 자리한 도봉서 원은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원래는 도봉산에 제일 가는 사찰이었다는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 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다고 전하며, 조선 말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사당을 비롯한 서원의 주요 건물은 1574년에 완성되었으나 남언경이 병에 걸려 양주목사를 그만 두자 서원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고, 뒤를 이어 양주목사가 된 이제민(李齊閔)과 이정암(李廷馣) 이 나머지 공사를 진행하여 1579년 완성을 보았다. 서원이 완성되자 조정에서 도봉(道峯)이란 사액을 내려 도봉서원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1608년 이후에 중건했다. 1696년에는 도봉서원 단골이던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으 며, 1723년 조정을 장악하던 세력의 압박으로 송시열의 위패가 추방되기도 했으나 1775년 영조 의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제삿밥을 받게 되었다. 서울 근교의 유명 서원으로 많은 유 생들이 찾아와 한가롭게 성리학이나 논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아작 이 나고, 위패는 땅에 매장되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임시로 단이 설치되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냈으나 6.25가 터지 면서 그마저 중단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2년 '도봉서원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우와 신문( 神門)을 복원했으나 왕년의 모습에 1/4도 안되는 규모이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정로사 (靜老祠)는 3칸 규모로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 에 향사를 지낸다. (지금도 지냄)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로 한때 재산은 전답 700여 평 이 있었다.
사우 외에는 복원을 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윤곽이 남아있고 이율곡(李栗谷)의 '도봉서원기'를 비롯하여 옛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2012년부터 기존 건물을 눕히고 한참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는데, 2014년 서원이 완성되면 서울 유일의 서원이자 도봉산 을 수식하는 명소로 선비문화 체험의 장으로 한몫 단단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봉구청에서 서원 활용에 매우 열성적임) 또한 공사중에 옛 영국사의 흔적이 나오면 주춧돌은 서원 주변에 두고, 불상 등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넘겨서 유생들에 의해 비명에 간 영국사도 조금은 위로해주 었으면 좋겠다. 도봉서원 주변 도봉계곡은 서울 근교 으뜸 계곡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서원의 주인인 조광조는 이곳을 즐겨찾기 했으며, 조정 일을 마치면 수레를 몰아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한다. 또한 송시 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관여한 권상하(權尙夏)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원래부터 경기도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찬양했고, (당시 도봉동은 경기도 양주목 관할)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한양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언급하는데, 그 계곡과 수석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도봉계곡)과 중흥동(重興洞, 북한산성계곡)이 가장 뛰어나다'했다.
이들 계곡에는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수증(金壽增)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 월 도봉서원과 하나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되었다. |
▲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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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 바로 앞 계곡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고산앙지란 옛 사람들 이 필수로 배웠던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 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산앙지 4글자 가운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계곡물에 잠겨 있으며, 앙(仰)은 절반 정도 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가뭄 때면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위쪽에 쓰인 고산(高山) 은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다. 이들 글자 가운데 산(山)은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 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를 새긴 시기가 적혀있는데 경진(庚辰) 7월 (밑 에 부분은 물에 잠겨 안보임)이라 쓰여 있다. |
▲ 광륜사(光輪寺) 앞에 솟아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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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을 지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광륜사란 절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법등(法燈)의 역 사가 만월암의 신중탱(1969년 제작)보다 더 짧아보이는데, 연혁이 담긴 안내문을 보니 이곳 역 시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쓰여있다.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의상대사를 천축사와 만월 암, 광륜사가 아주 사이좋게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경내에 오래된 유물은 전혀 없고, 고색의 기운이 말라 구체적인 창건 시기는 파악하기 힘드나 이이(李珥)가 남긴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광륜사의 옛 이름인 만장사(萬丈寺)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고려 때나 늦어도 조선 초에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한때는 영국사, 천축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절이었으나 영국사가 강제로 폐사되면서 그 영향으로 쇠락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터만 간신히 남은 것을 조선 후기 에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가 부친인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집안 선산(先山) 과 가까운 만장사터에 지금의 절을 짓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자주 찾아왔다. <인근 녹야원(鹿 野苑)에 조대비 별장이 남아있음>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조대비 별장을 가끔 찾아와 국정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1970년 이후 금득보살이 절을 크게 중창했으며, 2002년에는 신도들의 열화와 같은 시주에 힘입 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이때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절의 이름을 광륜사로 갈았다.
광륜사 앞에는 2그루의 나이 지긋한 나무가 서로 앞다투어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윗 사진 의 나무는 나이가 약 215년(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기준임, 지금은 약 250년)으로 높이 17m, 나무 둘레가 3.8m에 이르며, 광륜사에서 관리한다. 아마도 도봉서원을 들락거리던 선비들이 중 간 휴식처로 삼고자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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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륜사 앞에 솟아난 2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4호 나무 높이 18m, 둘레 1.9m로 앞의 나무보다 키가 1m 더 크고, 둘레가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무지 날씬한 나무이다. (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165년, 지금은 200년) |
▲ 도봉산 서원마을터<서원동(書院洞)>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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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 밑에 형성된 서원마을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절로 따지면 일종의 사하촌(寺下村)과 비슷한 마을이다. 이곳에 있던 마을은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국립공원 일대를 정비하면서 모두 밀어버렸다. |
▲ 북한산국립공원 표석의 위엄 도봉산이 편의상 북한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버렸지만 북한산과 도봉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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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탐방지원센터 부근에 있는 도봉동문 바위글씨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멸망한 명나라에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이며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던 어리석 은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한다. 도봉동문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대학자가 쓴 글씨가 그런지 필체가 아주 율동을 부린다. |
▲ 도봉산에서 먹은 순두부찌개와 해물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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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르킨다. 오후 2시에 올라 갔으니까 5시간 동안 도봉산을 방황한 셈이다. (도봉산 종점 → 천축사 → 마당바위 → 자운봉 고개 → 포대능선 → 716m봉우리 → 만월암 → 도봉서원 → 도봉산 종점)
도봉산(도봉동 지구)은 두부와 순두부 음식이 유명하다. 도봉산 종점과 도봉산탐방지원센터 사 이에 등산복/등산용품 가게와 온갖 식당이 밀집된 공간이 있는데, 그곳의 두부 음식이 괜찮다. 예전에 가봤던 식당에 가볼까 궁리를 하다가 적당한 식당(식당 이름은 까먹음)에 들어가 자리를 피고 앉았다.
나는 순두부조치(찌개)를 시키고, 후배는 산채비빔밥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만 먹으면 무척 허 전하니 산행뒷풀이용으로 해물파전 1장과 동동주 1동이도 같이 주문했다. 제일 먼저 해물파전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덩어리가 제법 크다. 처음에는 시장기가 상당하여 이거 가지고 되겠나 싶었는데, 먹고 보니 계속 커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맛은 괜찮아 파전 그 릇을 모두 비웠다. 파전을 1/3정도 먹은 시점에서 순두부찌개와 산채비빔밥, 동동주, 밑반찬이 나타나니 파전에게 일제히 쏠린 시선을 2/3 이상 덜게 해준다.
순두부찌개는 속세에서도 종종 먹는 음식인데, 순두부도 많고, 조개도 많이 들어가 있고, 그런 데로 먹을 만하다. 밑반찬은 김치와 콩나물, 산채나물 등 3가지 정도이며, 동동주 같은 경우는 양이 깊어서 배부른 배를 꾸역꾸역 억지로 눌러가며 간신히 동이를 비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봉 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매년 10월 중순 주말에는 도봉구 가을축제의 일환으로 도봉산축제가 열린다. 도봉산 공영주차 장과 생태공원, 도봉산 제1휴식처(광륜사 부근) 일대에서 등산대회와 도봉서원 추향제(秋享祭), 자연음악회, 도봉산 사찰음식전, 산사음악회 등을 선보이며, 보통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문의 도봉문화원 ☎ 02-905-4026,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 02-2091-22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