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백산 마무리
![](https://t1.daumcdn.net/cfile/blog/203F98464F2FF4500B) ▲ 태백산의 또 다른 수호신 석장승 - 강원도 지방민속문화재 4호 |
당골광장에서 단군성전 입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별다른 모양이 없는 석상이 마중한다. 이 석 상은 바로 석장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었는데, 1960년대 에 망경사로 옮겼다가 1987년 태백문화원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얼굴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하며, 미륵상으로 보이기 도 한다. 얼굴이 워낙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며, 머리에는 관(冠)처럼 생긴 것 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얼굴 양쪽에는 귀로 보이는 길쭉한 부분이 있다. 그의 탄생시기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천제단 가는 길목인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어 성 역(聖域) 임을 알리는 역할과 이정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덩달아 산신의 수호신상의 역 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 부분이 많이 닳아있어 마을의 수호신까지 겸한 것으로 여 겨진다. 예전에는 장승 옆에 3마리의 오리가 새겨진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22BC1464F2FF44D21) |
우리나라에는 석장승이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에는 이 장승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태백산 정상 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장승 <장생(長生)>을 많이 세워 성역(聖域) 및 이정 표의 역할을 했으며, 장승모랭, 장승백이, 장승 둔지, 장승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 땅 에 장승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나 무심한 세월과 몰지각한 사람들의 만행으 로 장승은 죄다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오로지 당골의 석장승만 살아 남아 태백이 왕년에는 장승의 낙원이었음 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따름이다. 참고로 태백의 조선시대 지명인 장생은 바로 장승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백을 이루는 동네의 하나인 장성(長省)이 장 생에서 변경된 이름임> |
![](https://t1.daumcdn.net/cfile/blog/182BF8464F2FF45521) ▲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하얀 숲터널 (석장승에서 망경사 방면)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04546384F30027B14) ▲ 당골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 이 세상에 색깔은 하얀색과 하늘색, 갈색(나무 줄기) 밖에 없는 것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84546384F30028316) ▲ 설림 속을 거닐다 집으로 고이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절경이다. 허나 나는 조물주가 아닌지가 저 풍경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대신 사진이란 것으로 그 장면을 복사해 담아가지고 왔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34546384F30028A17) ▲ 단군성전 앞에 마련된 단군상 명세기 우리의 국조(國祖)인데, 보호각 하나 놓아드려야 되는거 아닐까? 저렇게 눈과 바람을 맞게 놔두는 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04546384F3002A31C) ▲ 단군성전(檀君聖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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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승을 지나 대략 1km 정도만 전진하고 발걸음을 접고 말았다. 후배가 힘들다고 그러니 더 이 상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발길을 접 었다. 발을 돌린 지점은 아마도 해발 1,000m 정도 될 것이다. (당골광장이 거의 850m임)
내려가는 길에 당골광장 남쪽에 자리한 단군성전에 들렸다. 이 성전은 옛 조선(朝鮮)의 시조이 자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으로 1975년에 구성된 '국조단군봉사회'가 1982년에 성금을 모아 창건하고 단군성전이라 하였다. 그의 사당을 이곳에 지은 것은 그에게 제를 지내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성전을 수리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성전 현판의 글씨는 신덕선이 썼다.
비록 오래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장이다. 하지 만 등산객과 탐방객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등산로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되 는 곳에 있기도 하지만 썩어빠진 이 땅의 권력층에 의해 점차 오염되가는 역사교육의 부실과 무 관심 조장도 한몫한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74546384F30028D18) ▲ 단군성전에 봉안된 단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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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상상으로 그려진 단군의 영정(影幀),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적이다. 단 군은 옛 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의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한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를 비롯하 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과 만주, 요서, 화북(華北) 일부를 다스린 동아시아 강대국이다. 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나 산소도 아까운 식민사관(植民史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반도 북부와 요동으로 크게 축소시켰다.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의 지배권을 차지하 려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를 비롯한 서쪽 2,000리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기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 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국방력을 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 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복하고 그 자신감으로 조선을 협박했다. 조선이 반발하며 먼저 대륙을 공격하자 한무제는 이때다 싶어 군사를 보내 반격을 가했는데, 한 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러자 뚜껑이 단단히 열린 한무제가 다시 군사들을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군(漢軍)은 정비를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 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우거왕(右渠王)이 반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 해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 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단사학자와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쪽으로 보고 있다. 한4군의 하나로 유 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도 낙랑국과 낙랑군(樂浪郡) 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의견이 분 분하나 대체로 낙랑국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그러니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낙 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명 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 族)으로 대표되는 조선에서 만들어 대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 륙으로 넘어가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대흥안령산맥 쪽에서 발생 한 홍산문명(紅山文明)도 조선의 찬란했던 흔적이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44546384F3002971A) ▲ 하얀 기와집이 된 단군성전 삼문(三門) - 단군성전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뜨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덮여 설경의 극치를 이룬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54546384F3002AA1D) ▲ 단군성전 삼문 - 바깥에서 본 모습 눈이 지붕에 가득하니 혹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눈 자체는 거의 무게가 없지만 저리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 몇톤이 되버린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24546384F3002B11F) ▲ 석장승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34546384F3002B320) ▲ 눈축제를 위해 조성된 커다란 눈 이글루 마치 눈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석실고분(石室古墳)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74546384F3002C323) ▲ 당골광장에서 당골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
![](https://t1.daumcdn.net/cfile/blog/11461D464F3009EC2E) ▲ 당골 통나무집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반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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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눈 속에 애써 묻으며 당골 종점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은 12시, 뱃속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적당한 곳을 찾다가 통나 무집이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이곳은 여행사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는 뜨끈한 방에 들어가 곤드레밥 과 해물파전, 동동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잠시 뒤 콩나물과 더덕, 김치, 두부 등 8가지의 정 갈한 밑반찬이 앞에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양념장이 버무러진 커다란 두부는 반찬의 갑(甲)으 로 두부 맛이 좋아 2번 정도 더 시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찬을 먹고 있으니 곤드레밥과 소고기국밥 등의 식사가 나타난다. 곤드레밥은 정선과 평창, 영 월, 태백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곤드레나물을 비롯한 산채 나물과 김가루가 버무려진 일종의 비 빔밥이다. 곤드레밥에는 늘 구수한 된장찌개가 짝궁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의 찌개는 두부가 풍 부하다. 그렇게 먹고 있으려니 동그란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3차로 나타난다. 파전은 가격에 비해 좀 커보인다. 허나 반찬과 곤드레밥으로 어느 정도 배가 들어찬 상태기 때 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전은 일부를 남기고 거진 다 먹었는데, 뱃속에서 그만 보내라고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다보니 동동주는 둘이서 절반 밖에 마시질 못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25045464F3009E72E) ▲ 해물파전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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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풍성하게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슬쩍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보챈다. 졸음 의 희롱을 과감히 내던지고, 커피와 식당 내부 연탄 난로에서 대핀 보리차를 여러 잔 마시며 식 곤증과 추위를 몰아내고 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태백산과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리다가 미인폭포로 가기로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후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 미인폭포 보러가기)
★ 태백산 당골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① 철도 이용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태백역으로 가는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6회(휴 일에는 7회) 운행한다. * 강릉역과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열차(1일 6회, 휴일 7회)를 타고 태백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북부)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직통은 1일 9회 운행)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안산,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 원주, 제천, 삼척, 강릉, 영주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터미널에서 당골행 7번 시내/좌석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 ④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고한 → 태백시내 → 당골주차장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상동 → 유일사/백단 사 → 당골주차장
※ 태백산 관람 정보 (2014년 2월 기준)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 (단체 1,500원) / 학생,군인 1,500원 (단체 1,000 원) / 어린이 7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대형 4,000원 / 소형 2,000원 * 태백산 눈축제는 1월 중/하순에 2주 정도 열린다. (열리는 시기는 매해마다 다름) * 당골에는 콘도형 태백산민박촌이 있다. 현재 15동 73실이 있으며,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된다. ☞ 태백산 민박촌 홈페이지 가기 (문의 ☎ 033-553-7440~41) * 태백산 눈썰매장 이용료 : 어른 5,000원 / 어린이 4,000원 * 태백산 당골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사업소 ☎ 033-550-2741~42) * 태백산도립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