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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등축제 야경 즐기기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연등거리) '

▲  서울 연등축제에서 활약한 연등의 위엄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청계천 연등 (광교4거리)

▲  청계천 연등 (광통교 주변)


♠  서울연등회 저녁 연등놀이 (조계사, 우정국로)

▲  연등놀이 행렬의 선봉인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
사천왕들이 중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국동4거리를 거쳐 인사동으로 들어간다.
인사동에 잠입한 나쁜 기운들이 그날따라 똥줄 좀 제대로 탔을 것이다.

계절의 여왕으로 널리 칭송을 받는 5월(4월 말 포함)에는 많은 축제와 볼거리가 천하 곳곳에서
열린다. 그중 단연 갑(甲)은 내 기준이긴 하지만 서울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특별전이 아닐까 싶다.

서울연등회(연등축제)는 서울 및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단단히 자리
를 굳혔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금/토/일에 열리는데, 주말 전날인 금요일부터 조계사(曹溪
寺)와 강남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교4거리 구간)에서 연등 전시회가 그 서막
으로 열리며. 초파일 당일까지 오색영롱하게 불을 밝힌다.
그리고 축제의 중심인 토요일이 되면 장충동 동국대(東國大) 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16시 30
분부터 18시까지 열리는데, 이 마당은 연등행렬을 위한 몸풀기 행사로 관불의식을 비롯해 흥겨
움을 유발하는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펼쳐진다. 그 공연이 끝나면 19시부터 서울연등축제의 갑
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진행된다.
연등행렬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을 출발하여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조계사에서
끝을 맺는데, 진행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이며, 조계사를 비롯하여 서울과 전국 사찰, 불교단체
/학교에서 준비한 온갖 연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보이는 등은 무려 10만 개가 넘는다
고 하니 가
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라 매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여 전혀 식상하지가 않다. (연등행렬시간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부터 조계사까지
도로를 통제함)
햇님이 지평선 너머의 그만의 공간으로 쏙 사라지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행렬에 나온 연등은 어
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이 조계사에
모두 모이면 그 뒷풀이로 회향(廻向)한마당이 23시까지 펼쳐져 다시금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또한 그날 행군한 연등의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 종로1가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
은행) 앞에 두어 자정까지 못다한 불을 밝힌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불
교와 관련된 갖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전통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곳곳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불교 음식과 떡, 음
료수 등을 사마시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茶道) 체험, 사찰/전통 음
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까지 두루 만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축제는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여 19시부터 다시 연등놀이를 연다.
이는 전날에 벌이는 연등행렬의 축소판으로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을 1바퀴 돌고 다시 조계사
로 돌아오는 짧은 코스로 진행되며, 조계사에 모이면 모두 함께 신명나게 춤을 추고 어울리는
시간을 갖다가 21시에 모두 마무리를 짓는다.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으며, 서
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연등축제가 열린다. 그
렇다면 이 연등회는 과연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관련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
에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했던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말에 이미 절에서 연등을 밝혀 축제 비슷하게 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개최하여 만백성이 즐겼고, 연등을 며칠 동안 밝혀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에 본격적으로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
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를 연 것이 그 시초로 여겨지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 정권
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선은 고려와 달리 불교를 탄압하면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속 연등회
를 즐겼다. 저녁에는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등은 한
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을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연등을 만들어 종로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서막을 열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이후 1996년부터는 동대문운동장
(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제는 5월(4월 하순)만 되면 손
꼽아 기다리게 되는 천하 제일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 서울연등회 일정과 행사 내용, 연등은 매년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음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사천왕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전통문화마당의 후속편으로 진행되는 연등놀이는 19시에 조계사를 출발하여 인사동을 거쳐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 모두 신명나게 어울린 후 21시에 마무리를 짓는다. 이날 활약하는 연등은 전날
연등행렬에서 몸을 푼 연등으로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짧은 행군에 임한다.
햇님이 꽁무니를 뺀 시간이라 몸을 마음껏 불사르며 중생들의 환호 속에 도심을 누빈다.

연등놀이 시간이 저녁 때다 보니 시장기가 연등처럼 불타오른다. 자고로 부하들의 논공행상(論
功行賞)과 시장기는 미루지 말라는 명언이 있다.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모두 뒷탈이 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연등놀이는 일단 관심에서 꺼두고 저녁을 먹고자 북촌(北村)으로 들어가 어느 기
와집 식당에서 떡국과 만두로 시장기를 잠재우고 슬며시 조계사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21시. 연등놀이 행렬은 마무리되고 거리를 달군 연등은 조계사와 우정국로 곳곳에
포진하여 중생들의 사진 모델로 다시금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우정국로를 장악한 긴 지느러미의 목어

▲  연등 빛깔에 황홀하게 물든 조계사의 야경

▲  극락을 향한 중생의 몸부림 ~ 반야용선(般若龍船) 연등
관음보살이 용머리 배에 중생을 태우고 고통의 바다를 헤치며
극락으로 향한다.  

▲  노루, 소나무가 그려진 연등과 윤장대(輪藏臺) 연등

▲  두광(頭光)을 두룬 다양한 모습의 관음보살 연등

▲  푸른 피부의 범종 연등

▲  종로1가(종각역4거리)를 주름잡은 연등들 ▼


♠  서울연등축제의 마무리 ~ 청계천 연등거리 (전통등 전시회)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서울 도심의 어설픈 젖줄인 청계천(淸溪川)도 서울연등축제의 일원이 되어 한참 연등빛으로 물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4~5월에는 서울연등회 전통등 전시회의 현장으로, 11월에는 서울등축
제의 현장이 되는 명실상부한 천하 등축제의 성지인데, 청계천 연등은 청계광장에서 청계2가까
지로 조그만 연등이 청계천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고, 광통교(廣通橋)와 청계광장 사이에는 커
다란 등을 두둥실 띄워 연등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고 있다.
특히 이 땅의 불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큰 등이 여럿 있으며, 그 옆에 관련 해설을 붙여
놓았다.


▲  광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2가 방향)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광통교(사적 461호)와 석가탑(釋迦塔) 연등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제일 오래된 다리는
광통교이다. 청계천이 한양도성 가운데를 가르
며 흐르다보니 그것을 경계로 자연히 북촌(北村
)과 남촌(南村)으로 나눠졌고 이를 왕래하고자
광통교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 많은 다리를 놓
았다. 이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광통교와
장충단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수표교(水標橋)가
고작이며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청계천 다리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광통교
'대(大)광통교','광교(廣橋)'라 불리기도 하
며, 다리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광통방에서 비
롯되었다. 원래는 광교4거리에 있었으나 청계천
복원 때 기존 자리를 되찾지는 못하고 무교동(
무교동4거리~광교4거리 중간)에 재현되었으며,
다리 이름은 광교(광통교)지만 기존 광교4거리
와 햇갈릴 우려가 커 광통교로 거의 못박은 상
태이다.

이 다리는 청계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만큼 기구한 사연도 적지않다. 연등축제 글에 맞지 않
게 광통교 보따리를 푸는 것이 좀 그렇겠만 기왕 이곳에 왔으니 간단하게 한번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광통교는 조선 태조(太祖) 때 흙과 나무로 대충 지은 나무 다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홍수
때마다 거의 남아나지를 못하여 20년 가까이 도성(都城)의 우환거리로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돌다리로 업그레이드시키면서 그 우환은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다리 석재(石材)는 어디
서 충당을 했을까? 그 석재는 정릉(貞陵)의 석물을 차출하여 충당했는데, 정릉은 비록 친어머니
는 아니지만 의붓어머니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다. 그렇다면 왜 의붓어미 능의 석물
을 불손하게도 석재로 썼을까? 이는 그들의 오랜 악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5번째 아들이다. 한씨는
정종과 이방간(李芳幹) 등 6남 2녀로 두었는데, 좋을 날을 1년 앞둔 1391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조의 후실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자연히 부인이 되었는데 조선이 개국되면서
는 현비(賢妃)로 책봉되었다. 현비는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으로 거의 왕비(王妃)로 보면
되겠다.

신덕왕후는 곡산(谷山)강씨 집안으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강윤성
은 많은 무공(武功)을 세워 중앙에 진출한 이성계(李成桂)를 높이 평가하며 강씨 집안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 딸을 그에게 시집을 보냈다. 일종의 정략 혼인인 셈이다. 이렇게 이성계
는 무려 21세 연하를 2째 부인으로 두며 개경(開京)에 머물 든든한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강씨 집안은 토지도 넓고 재정도 풍족해 이성계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강씨는 이성계를 잘 내
조하며 한씨 소생의 자녀와도 가깝게 지냈고, 조선 개국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현비로 책봉되어 사실상 조선 최초의 왕후가 되었는데, 왕의 지극한 총애를 믿
으며, 권력에 대한 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앉
히고자 정도전(鄭道傳)고 남은(南誾) 등, 왕의 최측근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방원 등 한씨 소생
왕자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가 1396년 8월 이방원이 소란을 일으키자 병을 얻어 죽으니 그
의 나이 40세였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던 강씨가 죽자, 이방원과 이방간(李芳幹) 등은 기회를 엿보다가 1398년 그
유명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나라를 한참 반석 위에 올리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 등을 살해
하고 강씨 소생의 이방석. 이방번 형제를 때려 죽인다. 이에 충격을 먹은 태조는 왕위를 내버리
고 함흥(咸興)으로 내려갔으며, 이방원은 2째 형을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정종(靖宗)이다.

이어 1400년, 이방간이 박포(朴苞)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의 아우인 이방원을
공격하나 오히려 손쉽게 진압된다. 애시당초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정종은 이때다 싶어 그에
게 서둘러 왕위를 넘기니 그가 바로 조선 3대 군주인 태종(太宗)이다.

드디어 꿈꾸던 왕위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증오를 풀고자 그를 후궁으로 격
하시켰고, 강씨를 왕후로 인정하는 기록을 모두 없애거나 왜곡했다. 그리고 도성 안 정동(貞洞)
에 버젓히 자리한 강씨의 정릉을 1409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시키고 그것으로도 모
잘라 봉분(封墳)을 훼손하고 정자각(丁字閣)을 뒤엎으며 애궂은 석물을 생매장시켰다.
그러다가 상국(上國)인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太平館)을 보수할 필요가 제기되자 태종
은 정릉에 쓰인 나무와 석재를 동원하여 태평관 보수에 사용했다. 그리고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
말썽이 많던 광교를 돌다리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12지신상을 비롯한 정릉의 석물을 모조리 끌
어다가 광교의 석재로 사용했다.

그 이후 정릉의 존재를 영구히 은폐시킬 생각으로 수묘인(守墓人)을 두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
으며, 관료와 사대부들도 태종의 눈치로 스스로 강씨의 대한 기록을 지우고 심지어는 족보에서
도 그 존재를 지웠다. 그렇게 태종의 바램대로 강씨와 정릉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
혀져 간 것이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시절, 선조가 수레를 타고 행차하던 중,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
)이 수레 앞에 엎드려 자신은 그의 후손이라며 군역을 면제해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변
계량(卞季良)이 쓴 문서를 참조하여 능을 다시 찾았으며 현종(顯宗) 때 송시열(宋時烈)의 건의
로 드디어 제대로 된 능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광통교는 이방원의 의붓어머니에 대한 악감정에서 태어난 존재로 그 감정의 정도를 가늠
케 한다. 정릉을 때려 부시고 그 석재로 광통교와 태평관을 손질하면서 태종은 희열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반면 신덕왕후는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 역사의 패배자는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한번 몸소리치게 해주는 현장으로 강씨를 파멸시킨 승리자 태종은 후실(첩)의 소
생이 설치지 못하도록 적서(嫡庶)차별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정릉의 희생으로 돌다리로 거듭난 광통교는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로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을 잇는 통로였다. 다리 주변에는 시전(市廛)이 늘어서 있었고, 숭례문을 통
해 도성 밖으로 나가는 제왕의 어가 행렬도 반드시 이곳을 건넜다. 또한 명/청나라 사신도 이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제자리를 떠난 수표교와 더불어
매년 정월 보름에 연날리기, 다리밟기 등의 축제가 펼쳐
졌고, 4월 초파일에는 연등행사가 열려 연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영조
(英祖) 시절에 청계천을 크게 정비하면서 노원구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 광통교를 크게 손보
았으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심의 골치꺼리인 청계천을 생매장시키면서 수표교를 장충단공
원으로 강제로 옮겼다. 허나 광통교는 옮기지 않고 그냥 생매장을 시킨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래서 40년 가까이 청계천 수레길 밑에 깔려 어둠의 시간을 보내다가 2003년 청계천을 밖으로 끄
집어내면서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것이다.
긴 세월 햇살의 어루만짐을 받지 못해 많이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가온 광통교는 창덕궁과 탑골
공원 등지에 흩어진 다리의 석재를 찾아내어 복원에 활용했으며, 부족한 부분은 새로 돌을 맞추
어 끼워놓았다. 허나 기존 자리는 이미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기존
광교4거리에서 서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복원을 했다.

다리의 모습은 수표교와 많이 비슷하며, 조선 초기 돌다리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인정
되어 2005년 수표교와 오간수교(五間水橋) 등 다른 돌다리 흔적과 더불어
사적 461호로 지정되
었다.
다리 기둥에는 계사년(癸巳年)에 다리를 보수했다는 글씨가 여럿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계사년
은 1413년이다. 그리고 능의 석물로 만든 탓에 다리 북쪽과 남쪽 밑에는 구름무늬가 많은데, 그
사이로 신장상(神將像)이 합장을 선보이며 단아하게 서 있고, 반면 거꾸로 박힌 인물상도 보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 인물의 정체는 불상이라고 한다. 왜 거꾸로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2003년 다리 복원을 대충해서 그리 되었다는 말부터 태종 시절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광통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연등거리 (청계광장 방향) ▼


▲  신라 문무왕 시절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군을 격퇴했다는
명랑법사(明朗法師) 이야기 연등

▲  황룡사9층목탑과 원효대사 연등

▲  청게천 팔석담(八石潭)을 물들인 연등

청계천 연등거리를 유유자적하니 시간은 어느덧 23시가 넘었다. 이제 1시간만 지나면 그날은 재
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성황리에 열린 서울연등축제도 그렇게 막을 내리고, 조계사와 봉은
사, 청계천 연등은 초파일 당일까지 불을 밝히면서 연등축제의 대미(大尾)를 잡는다. 특히 청계
천 연등(전통등 전시회)은 달 밑에서 종일 불을 밝히는 것이 아닌 자정까지만 불을 밝히며, 연
등의 위엄에 눌려 뒤로 밀려난 달은 그 이후부터 제대로 어깨를 피며 천하를 비춘다.
이렇게 하여 서울연등축제 저녁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서울연등회 연등축제장 (조계사 주변, 청계천)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조계사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도보 5분
② 청계천 연등 거리(광통교)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에서 도보 2~3분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2번 출구)에서 도보 3~4분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도보 4~5분
* 서울연등축제 홈페이지는 바로 아랫 사진(합장인과 법륜 연등)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 청계천 연등 거리, 광통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 중구 무교동
* 조계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합장인과 법륜(法輪) 연등 (그 오른쪽에 승려가 춤을 추는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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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네모난 박스 안의 손가락 View on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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