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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의 심장 - 덕수궁, 서울광장 주변 둘러보기 '
(환구단, 대한문, 서울 성공회성당, 구세군 중앙회관)

환구단 석수상
▲  환구단 석수상의 위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중심인 시청(市廳) 주변은 늘상 복잡하다. 사
람도 무지 많고, 건물도 많고, 수레들로 늘 도로는 미어터지고, 소음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1897년 고종(高宗)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이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이 되
면서 서울과 천하의 중심지가 된 서울시청 주변에는 덕수궁과 서울도서관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옛 서울시청사, 시청 지하에 자리한 시민의 공간 시민청(市民廳)을 비롯해 시청
앞에 넓게 터를 닦은 서울광장, 무교동(武橋洞)과 다동(茶洞)/북창동(北倉洞) 먹거리 골목,
청계광장, 환구단, 서울시립미술관, 구세군중앙회관, 성공회서울성당, 덕수궁돌담길 등 조
선 중/후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명소가 즐비하다.
기분 같아서는 이들을 모두 걸쭉하게 풀어보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욕심인지
라 환구단과 대한문, 시청 주변의 근대 건축물 2곳만 풀어본다.


♠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막바지 상징물, 고종이 황제 위에 올라
하늘에 제를 올렸던 환구단(원구단, 圜丘壇) - 사적 157호

▲  환구단의 유일한 건물 황궁우(皇穹宇)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키다리 빌딩들 사이로 3층 규모의 각이 진 기와집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뒤에는 높은 키를 자랑하는 웨스틴조선호텔(이하 조선호텔)이 우
뚝 서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면 자칫 그 호텔의 한옥 별관 정도로 오인하기 쉽다. 지금은 비
록 특급호텔 그늘에 가린 빛바랜 기와집이자 도시인들이 잠시 지친 일상을 달래는 공원으로 살
아가고 있지만 그곳이 바로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황제 위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원구
단(환구단)의 찬란한 흔적으로 종묘(宗廟)에 버금가는 국가의 신성한 공간이었다. 이쯤까지 알
았다면 이 한옥이 180도 달라 보일 것이다.

이곳은 일찍이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사위인 조대림
(趙大臨)이 살던 저택이 있었다. 2째 공주가 산다고 해서 소공주댁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소공
동(小公洞)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대림은 개국 공신의 하나인 조준(趙浚)의 아들로 3살 연
상인 경정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태종은 이곳에 그들의 집을 지어주었다. 허나 조대림의
후손이 큰 죄를 저지르자 이곳 저택과 토지는 몰수당했다.

1583년(선조 16년) 선조(宣祖)는 이 집을 화려하게 고쳐 당시 총애하던 3째 아들 의안군(義安君
)에게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 남별궁(南別宮)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로 명나라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 후기에 쓰여진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남별궁에는 명설루(明雪
樓)란 누각이 있고, 그 뒤뜰에 작은 정자와 영험하기로 소문이 높은 돌거북이 있었다고 한다.


▲  환구단 왕년의 모습

이 땅에서 군주가 직접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고조선부터 시작되었다. 삼한
(三韓)을 거쳐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제천의식을 치렀으며, 고려 성종(成宗, 재위 981
~997)은 983년 송(宋)나라에서 원구단<원단(圜壇)> 제도를 수입하여 개경 남대문(南大門) 밖에
원구단을 설치해 직접 제사를 올렸다.
원구단은 중원대륙 왕조에서 시작된 것으로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내던 제단이다. 황제는 천자
(天子)를 칭했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이자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란 뜻이다. 그
래서 황제국에서만 원구단을 두어 제천(祭天)을 지냈으며, 제후국(諸侯國)이나 조그만 나라에서
는 감히 원구단을 둘 수 없었다. 허나 고려는 비록 땅은 작았지만 엄연한 황제국이라 원구단을
두었다.

성종 이후 400년 가까이 원구단을 이어오다가 1385년(우왕 11년) 제후국의 예를 따르며 원구단
을 없앴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차지한 명나라의 눈치를 적지 않게 보
던 시절이었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394년(태조 2년) 태조는 동방신 청제(靑帝)에게 제를 지내고자 원
단(圜壇, 원구단)을 설치했고 1419년(세종 1년) 고려의 예에 따라 원단을 운영했다. 허나 1464
년 세조는 나라의 자존심도 내버리고 스스로 제후국의 예로 낮추면서 원단을 폐지하고 만다.

원단이 사라지고 43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
낀 고종은 경복궁을 내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가 1년을 머물렀다. 이 우울한 사건을 이른
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1897년 2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신하들과 독립협회의 권유로 칭제건원(稱帝建元, 황
제를 칭하고 연호를 씀)을 구상하고 그해 9월 21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공간으로 덕수궁과 불
과 100m 남짓 거리인 지금의 자리에 원구단을 쌓을 것을 명했다.

원구단은 3층 건물로, 하늘을 본떠 둥그런 모습으로 만들었다. 즉 하늘은 둥그렇고 땅은 네모진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따른 것이다. 지금이야 건물을 6각형으로 짓던 10각형으로 짓던 제한이
없으나 옛날에는 원형(圓形)과 8각형 건물은 오로지 황제국에서만 지을 수 있었으며, 조선 개국
부터 1897년 이전까지는 최대 6각형 건물까지만 지을 수 있었다.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이 6각
형임>

드디어 원구단이 완성되자 즉위 날로 잡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만조백관(滿朝百官)을 거
닐고 원구단으로 행차했다. 그날 아침, 어느 선왕(先王)이 꿈에 나타나 '예로부터 있어 온 유풍
(遺風)을 바꿔서는 안된다'
라 말했다고 한다. 이상한 꿈에 기분이 썩 좋지 않던 고종은 즉위식
장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터벅터벅 나오는데, 그를 위해 준비된 40명이 메는 대련(大輦)을 보자
갑자기 뚜껑이 열려 4명이 메는 소련(小輦)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탄다고 소란을 피웠다.

급히 마련된 소련에 오른 고종은 삼색기(三色旗)를 든 전위대(前衛隊)가 앞을 서고 대신들이 말
을 타고 그 뒤를 따랐으며, 조선군이 아닌 왜군이 호위를 맡았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돌연 철
종(哲宗)의 사위이자 내부대신(內部大臣)으로 나중에 친일파로 더러운 뒷끝을 보인 박영효(朴泳
孝)가 말에서 뚝 떨어졌다. 고종은 그 모습을 보고 '불길한 일이야~!' 중얼거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덕수궁에서 원구단 정문에 이르는 연도(輦道)에는 즉위식을 보려는 백성들이 축기(祝旗)를 들며
황제를 환호했다. 드디어 원구단에 이른 고종은 하늘과 땅에 고하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지내
고 조선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라 추존하며, 금빛 찬란한 금의상좌(金
椅上坐)에 오름으로써 성대한 즉위식은 끝났다.
그리고 다음날(13일) 덕수궁 태극전(太極殿, 즉조당)에서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나라 이름
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갈면서 자신이 황제에 올랐음
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이 일로 조선 초부터 500년 가까이 이어진 명과 청에 대한 지극한 사대
주의를 청산하고 고려 때와 같은 자주적인 제국으로 잠시나마 거듭나게 된다.


▲  황궁우 남문에서 바라본 황궁우의 위엄
환구단에 서린 엄숙한 기운에 이곳을 찾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황제가 있던 대한제국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고종이 원구단에서 왕에서 황제로 업그레이드 된 그 시간 수구파(守舊派) 일부 대신들은 황제즉
위식을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지방에선 사대주의 유학에 쩔은 꼴통 유생들이 망
배(望拜)를 하며 통곡하고 있었다. 즉위식을 지켜본 어느 외국인은 '세계 역사상 이토록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없었다'
고 기록했다.

1899년 원구단 옆에 황궁우(皇穹宇)가 완성되자 완공 기념으로 태조고황제의 신위(神位)를 하늘
의 배위(配位)로 올리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지냈다. 그래서 천신지기(天神地祇)와 태조의 위
패는 황궁우에 모시고 제사는 원구단에서 지내게 된다. 황궁우의 상량문(上樑文)은 윤용선(尹容
善)이 짓고 서정순(徐正淳)이 글씨를 썼다.

황궁우는 8각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세운 8각형 전각으로 남쪽에 건물 내부로 들어
가는 출입구를 두었다. 1층과 2층은 통층으로 되어 있고 그 중앙에 천신과 태조의 위패를 모셨
으며, 3층에는 각 면마다 3개의 창을 냈다. 건물 주위로 왕릉의 돌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
로 석대(石臺)를 두어 해태와 비슷한 귀여운 돌짐승을 배치해 건물을 지키도록 했으며, 뜨락 주
변으로 넓게 또다른 돌난간을 둘러 2중의 난간으로 황궁우를 에워싼다. 그외에 어재실(御齋室)
과 향대청(香臺廳), 전사청(典祀廳), 광선문(光宣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정문 등의 부
속시설을 갖추었다.


▲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리고자 세운 석고단의 석고(石鼓)
3개의 석고는 천제를 지낼 때 쓰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진하게
새겨져 있다. 이 무늬는 조선 후기 조각품 중의 가히 일품으로 평가된다.


1900년 고종은 대신을 이끌고 제천의식을 지내고자 이곳을 찾았다. 원구단의 포장을 두르고 제
사를 올리려는 찰라 갑자기 하얀 포장 틈에서 승려 1명이 불쑥 튀어 나와 '초능력인 천안통(天
眼通)으로 폐하의 앞날을 예언하겠습니다'
외치며 소란을 피운 것이다. 그를 잡아 문초를 해보
니 개운사(開運寺, 서울 안암동)의 승려였다.
승려의 소란에 단단히 뚜껑이 열린 고종은 개화파 이동인(李東仁) 때문에 잠시 허용된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을 다시 금지시켰다.

1902년 고종 황제의 성덕(聖德)을 찬양하고 즉위 40주년을 경축하고자 3개의 석고를 갖춘 석고
단(石鼓壇)을 세웠다. 이는 주(周)나라 때 선왕(宣王)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북 모양의 돌에 새
겨 10곳에 세웠다는 고사에 따른 것으로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는 석고문(石鼓文)을 새겼으며,
웅장한 석고각(石鼓閣)을 지어 석고를 보호했다. 그리고 석고단 앞에 광선문을 두었다.


▲  정갈하게 깔린 황궁우 남쪽 산책로 (황궁우 주변 잔디는 모두 제거됨)

이토록 황제가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살던 대한제국의 상징이자 성지(聖地)였던 원구단은 1910
년 이후 나라를 잃으면서 오갈데 없는 시련을 당하게 된다.
1911년 2월, 왜정(倭政)은 원구단의 모든 부지와 건물을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시켜 1913
년 원구단을 부셔버리고 그 이듬해 붉은색의 서양식 건물인 총독부 소속 철도호텔을 세워 원구
단의 기를 눌렀다.

왜정은 그걸로도 성이 차질 않는지 1927년에는 총독부 도서관을 짓는다며 석고각의 정문인 광선
문을 남산(南山)에 있던 왜식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추방시켰다. (지금은 없음) 또한 1935
년에는 석고각마저 이토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 장충동 신라호텔 자리)로 보내 그곳
의 종루(鐘樓)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박문사는 1945년 11월 화재가 나면서 알아서 붕괴되었으나 석고각은 다행히 화재를 면했다. 이
승만 전대통령은 1958년 11월 박문사터를 찾아 석고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석
고각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서울 도심의 심장부에 있음에도 관리 소홀로 귀신도
모르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름)

이렇게 문과 집까지 빼앗긴 석고단 석고는 다행히도 자리를 지켰으나 호텔 뜨락의 장식물이 되
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으며, 환구단 건물은 달랑 황궁우와 정문 만을 남겨 석고와 함께 호텔의
장식용으로 삼았다. 아예 부실려면 다 부시던가. 아니면 모두 유지시키던가 해야되는데 왜정은
일부만 남기는 치졸한 방법(조선 궁궐과 관청, 성곽 대부분이 이런 꼴을 당함)으로 망국의 환구
단을 욕보인 것이다. 이로써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성스러움과 엄숙함은 모래성처럼 휩쓸
려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 이후 철도호텔은 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7년 철거하여 18층의 새 호텔을 지었
다. 그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환구단의 정문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유산 보존
과 활용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시절이었다.

2000년 이후 황궁우 주변을 손질하여 문화유산을 겯드린 시민공원(환구단시민공원)으로 꾸몄으
며, 사라진 정문을 우이동(牛耳洞)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하고 2009년 겨울, 소환하여 복원공사
를 벌였다. 그리고 황궁우 주변 잔디를 모두 밀어버리고 문화재 관리인을 두어 매일 망국의 제
단을 지킨다.
비록 옛날의 위엄은 거진 말라버렸지만 삭막한 도심 빌딩숲에서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잠시 쉬
어가는 공간이자 문화와 역사, 자연의 향기가 깃들여진 도심 속의 소중한 보석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배층의 지엄했던 공간이 백성들의 쉼터로 180도 바뀐 것이다.

▲  황궁우로 인도하는 동쪽 협문

▲  황궁우 서쪽 협문(夾門)

황궁우로 인도하는 협문은 높이가 낮아 들어갈 때 머리를 푹 숙이기 바란다. 그래야 뒷탈이 없
을 것이다. 이렇게 문을 낮게 만든 것은 그 시절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가 아니다. 성스러운 공
간이니 엄숙을 지키고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라는 뜻이다. 문에 부딪치지 않게 머리를 푹 숙
여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진 황궁우 남문

황궁우 남쪽에는 원구단과 이어지던 문이 있다. 이 문은 벽돌로 만들어 기와를 얹힌 것으로 조
선식 문이라기보다는 명/청나라의 문 이미지가 강하게 풍긴다. 고종과 순종은 원구단에 제를 올
리고 이 문을 통해 황궁우로 들어갔으며, 황제 내외는 당연히 신문(神門)을 상징하는 가운데 문
을 다녔고, 신하와 수행원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왔다. 문 좌우로 돌담이 짧게
나마 복원되어 둘러져 있고, 문 앞에는 돌계단이 장엄하게 깔려져 있다.


▲  황궁우로 오르는 돌계단

돌계단은 궁궐 정전(正殿, 중심 건물)의 계단과 비슷한 품격을 지녔다. 황제 내외가 오르던 가
운데 돌계단인 어도(御道)에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용무늬와 석수(石獸)상이 새겨져 있다.
계단 주변을 두른 돌난간에는 황궁우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석대(石臺)를 두고 가지각색의 표정
을 지닌 돌짐승을 배치했으며, 서쪽 난간의 돌짐승과 동쪽 난간의 돌짐승은 서로를 뚫어지라 바
라 본다.

계단 앞에는 돌로 만든 참도는 없고 어울리지 않게도 검은 돌과 흰돌이 깔려진 막다른 작은 공
터가 있다. 그 앞에는 바로 하늘 높이 솟은 조선호텔이 길과 시야를 제대로 막고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다. 뻥뚫린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밖이 휴전선처럼 막혀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원구단이 바로 앞에 있었고 시야도 좋았건만 지금은 엉뚱하게도 호텔의 1,2층 식당이
정면에 바라보이는 것이다. 내가 한참 계단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을 때 깔끔한 차림의 식당 종
업원들이 부지런히 식당을 정리하고 있었다. 신성한 제단의 문이 졸지에 호텔의 고급 식당과 거
기서 밥을 먹는 작자들이나 멀뚱히 바라보는 가련한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  황궁우 남쪽에서 바라본 남문
문 바로 앞에 조선호텔 1,2층 식당이 길과 시야를 가로막는다.
얼핏 보면 식당가로 가는 문으로까지 보일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망한 제국의 비운이다.


원구단을 제대로 복원하고자 한다면 조선호텔을 확 밀어버려 원구단과 황궁우를 잇는 길과 홍살
문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원구단 복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음) 비록 부질없는 망국(亡國)
의 제단이지만 왜정이 원구단을 부시고 황궁우 바로 앞에 호텔을 세운 것은 대한제국의 성역(聖
域)인 원구단을 훼손하여 이 땅의 역사와 자존심을 제대로 깔아 뭉개려는 간악한 속셈 때문이다.
비록 왜정 때 만든 호텔은 철거되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 계속 호텔이 뿌리를 내려 원구단 자리
를 깔아뭉개고 있으니 왜의 속셈은 여전히 먹혀들고 있는 셈이다. 다소 힘들긴 하겠지만 호텔을
다른데로 옮겨서라도 황궁우가 빌딩 그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좋겠다. 솔직히 그 호텔만
없어도 남쪽은 확 트이고도 남는다.


▲  2마리의 용이 새겨진 용무늬
 아무리 떡을 주물러 무늬를 새긴다 해도 저처럼 정교하지는 못할 것이다.

▲  일그러진 표정의 돌짐승상
원구단을 철저히 깔아 뭉개고 바로 앞에 호텔을 지은 작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정은
아닐까? 부디 저들의 표정이 씨익 밝아지는 그날이 왔으면 좋으련만~~

▲  42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환구단 정문 (지금은 문 옆에 담장을 두름)

환구단 서쪽(시청 방향)에는 환구단의 정문이 자리해 있다. 이 문은 1897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
래는 황궁우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小公路)에 있었으며, 왜정 때도 운좋
게 살아남았으나 1967년 조선호텔을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철거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 이후 2007년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이 리모델링 공사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호텔의 기
와집 정문이 1967년에 사라진 환구단 정문임이 밝혀졌다. 어찌하여 그곳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속시원한 정보는 없으나 문이 발견되자 정문 복원을 추진하여 타향살이 42년 만인 2009년 지금
의 자리로 이전되어 그해 12월 복원되었다. 원래는 본 위치였던 조선호텔 남쪽 소공로에 갖다두
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곳에는 적당한 공간이 없어서 부득이 환구단 서쪽에 복원한 것이다. 뼈아
픈 세월을 겪고 환구단의 정문으로 귀환의 기쁨을 누렸지만 끝내는 원래 자리로 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

환구단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제왕이 드나드는 가운데 칸을 넓게 만
들고 좌우 협문을 좁게 만들었다. 기둥 위에는 출목(出目)을 갖춘 2익공식(二翼工式) 공포를 달
았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 문양과 봉양문을 장식으로 달아 문의 품격을 드높였으며,
문 좌우에는 아주 짧게나마 담장이 복원되어 있다. 현재 정문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그 좌
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된다.

※ 환구단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더플라자호텔이다. 호텔 앞을 지나면 바로 길 건너
  로 하나은행이 보이는데, 그 왼쪽에 환구단 정문이 있다. 그 정문 옆을 지나거나 하나은행 남
  쪽에서 웨스틴조선호텔로 들어가도 된다.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8번 출구에서 시청 방면으로 가다가 롯데호텔을 지나면 왼쪽으로
  조그만 골목이 있다. 그 길로 가면 환구단 황궁우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 (소공로 112)


♠  덕수궁(경운궁) 주변 둘러보기

▲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大漢門) - 사적 124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옛날에는 왕족과 귀족
들만 들어갈 수 있던 금문(禁門)이지만 지금은 시대에 맞추어(물론 강제적이긴 하지만) 소정의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는 사적공원의 정문으로 안면을 바꾸었다.

환구단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앞에 있던
것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그러다가 1906년 지금의 시청앞 광장으로 자리를 옮
기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갈았다. 당시 서울광장을 포함한 시청로터리의 3할 정도는 덕수궁의 영
역으로 왜정 때 태평로의 전신(前身)인 태평통(太平通)이 뚫리면서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으
며, 1968년 태평로(太平路)를 크게 확장하고자 덕수궁 담장을 지금의 위치로 밀어내면서 대한문
도 덩달아 현재의 자리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1919년 2월, 망국의 황제 고종(高宗)이 세상을 뜨자 수많은 백성들이 문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
와 애도를 표한 현장이기도 하다.

대한문의 현판(懸板)은 당시 한성판윤(漢城判尹, 서울시장) 남정철(南廷哲)이 썼으며, 문의 이
름을 대안(大安)에서 대한(大漢)으로 바꾼 이유는 다음의 2가지 때문이다.
① 대한(大漢)은 큰 하늘(은하수)을 뜻한다. <
이근명(李根命)이 쓴 대한문 상량문(上樑文)>
   즉 하늘과 같은 황제(고종)가 계신 곳이란 뜻이다.
② 전비서승 유시만(前秘書丞 柳時萬)이 고종에게 건의하기를 '안(安)을 한(漢)으로 고치면 국
   조(國祚)가 연창(延昌)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꿨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그외에 몇 가지 헛소리로 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빗대어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漢)에는 놈이라는 뜻도 있다. 예를 들면 치한(癡漢)> ② '
갓을 쓴 여자(安)' 즉 배정자(裵貞子)가 궁궐을 들락거리는 꼴이 상서롭지 못하여 남자를 뜻하
는 한(漢)으로 바꿨다는 말도 있다. <경성 오백년(1926)>, <경성의 광화(1926)>, <조광 1937년
11월호>, <경성과 인천(1929)>
③ 근본과 핏줄이 엉망인 중원대륙 잡종들이 중원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상징한다며 빗
대어 말하는 경우도 있다. 대한은 한족(漢族)과 중원을 뜻한데나 뭐래나?
한족 대부분은 수 천년에 걸쳐 대륙을 침범한 온갖 민족들에게 유린을 당하면서 아버지를 모를
정도로 피가 복잡하게 엉킨 섞어찌개 신세가 되었다. (순수 한족은 1% 정도라는 연구 결과도 있
음) 특히나 17세기 이후에는 우리의 친척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이 대륙을 싹 잡아먹으면서 그
나마 남은 명나라 한족들은 영혼과 머리털까지 싹 털렸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양
이(洋夷)와 왜의 침략으로 중원의 잡종들은 다시 한번 비빔밥이 되고 만다.


▲  서울 도심에서 만난 중세유럽식 성당
성공회(聖公會) 서울성당(聖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호


덕수궁의 북쪽에는 옛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던 서울시의회 건물이 있다. 등록문화재 11호로 지정
된 서울시 의회(지정 명칭은 서울 구 국회의사당) 뒤쪽에는 마치 로마 바티칸이나 중세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을 진하게 풍기는 거대하고 고풍스런 성당이 하나 있다. 바로 성공회서울성당이다.
이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20세기에 지어진 양식(洋式)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 성공회(聖公會)가 들어온 것은 1890년이다. 1889년 11월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벤
슨은 이 땅에 성공회를 침투시키고자 영국 해군의 군목(軍牧)인 코프(C.J. Corfe)를 주한(駐韓)
주교(主敎)로 임명했다. 명을 받은 코프는 2명의 영국 의사와 트롤로프와 워너 두 신부를 이끌
고 1890년 9월 인천에 발을 내렸다.
도착 직후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선교를 벌이고 영국대사관 옆 미국인 선교사 집을 빌려 교회
와 시약소(施藥所)를 열었고, 그 해 12월 21일 드디어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열었다. 그때는 외
국인만 참석했으며, 조선인 하인은 바깥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4일 뒤인 25일
크리스마스 미사 때는 조선인 3명이 '이것들 뭔가?' 기웃거리며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돌아갔다.

1891년 부활절에 충무로1가(현 대연각빌딩)에 교회를 임시로 마련하여 '부활의 집'이라 불렀다.
이듬해 겨울에는 30여 평의 한옥을 새로 짓고 '강림성당'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서구인과 왜인
중심으로 미사를 열 뿐, 조선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9년 12월 18명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한국어 미사가 거행되기에 이른다.

1904년 초대 주교인 코프(우리 이름으로 고요한)가 귀국하면서 터너(A.B. Turner)가 2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고아원을 자립시키고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세워
실업 교육을 실시하고 교회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열중했다. 또한 YMCA
창립준비 작업에 참여하여 1903년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1906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 회장이 되
었으며, 우리나라에 축구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러일전쟁 이후 왜인에 의해 부활의 집이 폐쇄되어 임시로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자의 수
가 많아지자 한국어와 영어, 왜어(倭語)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 미사를 봤다.


▲  목 아프게 바라본 성공회 서울성당의 지붕

1909년 터너는 영국의 'Morning Calm'이란 선교 잡지에 '서울대성당기금' 모금을 호소했다. 이
듬해 6월, 서울에서 열린 교구협의회에서 성당 건립기금 모금을 결의했으나 그 해 10월 병사하
고 말았다.

1911년 그의 뒤를 이어 트롤로프(M.N. Trollope)가 3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진행되는 미사를 한곳으로 통합하고자 성공회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딕슨에게 설계를 의뢰했는데, 그는 몇 번을 왔다갔다 한 끝에
성채 분위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선택했다. 허나 조선에서 건축비 조달이 어려워 영국에 도움
을 청했으나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14년 왜정은 경성부(京城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통 거리를 확장시키자 성공회는 그 도로변
에 성당을 짓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1920년 영국에서 지원금을 받아 일단 대한제국의 황족과 귀
족들의 교육 공간인 수학원(修學院, 양이재)을 매입하고, 1922년 9월 24일 성당 공사를 시작해
1926년 5월 2일 173평이 완공되어 '성모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
건 완전한 완공은 아니었다. 총 공사비 3만원 중 절반도 안되는 1만 4천원만 모금되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 우선 원래 설계의 절반 정도만 지은 것이다.

트롤로프는 절반의 건축을 마무리 하며 '예비 대성당'이라 불렀다. 그는 왜국에서 열린 주교회
의에 갔다오다가 돌연 병사하면서 성공회성당은 절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세월을 지내야
했다.


▲  성공회 서울성당 주교관

그 이후 1993년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자 신자들을 독촉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던 중, 문화재
위원회로부터 김빠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증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성당 측은 '미완성 건물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설득했으나, 문화재청은 '미완성인
형태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변형은 절대 안된다. 사실을 증명할 원 설계도가 없는 한
증축은 꿈도 꾸지 마라'
답을 했다.

허나 다행히도 1993년 7월 이곳을 찾은 영국 관광객이 영국 도서관에 이 성당의 건축/설계도면
이 있다는 낭보를 전했다. 이에 성당 대표들은 서둘러 영국으로 날라가 런던 부근 렉싱통도서관
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복사하여 문화재청에 제출하자 문화재위원들은 증축 허가에 도장
을 쾅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66억의 거금을 쏟아부어 1994년 5월 27일부터 공사를 시작, 1996년
5월 2일 완공을 보았다. 이로써 트롤로프 주교의 못 다 이룬 꿈이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성당은 '十' 모양의 건물로 성채처럼 웅장하고 견고하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건물을 치장했
으며 종탑(鐘塔)이 있는 종탑부에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연결되어 있다. 지
하에는 지하성당이 자리해 있는데 트롤로프의 시신이 이곳 마룻바닥 중앙에 안장되어 있다.

이 성당은 특히 1979년 9월, 10월 유신에 대항하여 '선교 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것을 시
작으로 1987년까지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 기도회와 시위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성지(民主聖地)로 꼽히며, 성당 주교관에는 '6월 민주항쟁 진원지'란 표
석이 자랑스럽게 자리해 있다.


▲  경운궁 양이재(養怡齋) - 등록문화재 267호

성당 뒤쪽에는 옛 덕수궁(경운궁)의 전각이던 양이재가 있다. 1904~1906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
로 황족과 귀족들의 근대식 교육을 담당하던 수학원(修學院)으로 쓰였다. 이후 왜정에 의해 덕
수궁에서 분리되어 민간에 강제 매각되었는데, 대한성공회가 1920년 이 건물을 물어 이곳으로
옮겼다.
건물이 많이 변형되긴 했으나 기본적인 모습은 잘 남아있으며, 2008년에 복원공사를 벌여 지금
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곳에는 이 건물 말고도 넓게 벌려진 'П' 모양의 한옥이 있는데 이는 주
교관(主敎館)이다. 서양 중세식 성당과 우리의 옛 한옥이 한데 어우러진 조화의 현장으로 1999
년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  성공회 서울성당 앞에 누워있는 명례궁(明禮宮)터 표석

성공회성당 앞에는 명례궁 표석이 누워있다. 명례궁은 조선 후기에 비빈(妃嬪)들의 생활공간으
로 덕수궁 북쪽에 지은 것으로 덕수궁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사저도 명례궁이라 불렸다.

※ 성공회 서울성당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분 (이정표가 있음)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에서 시청 방면으로 도보 6분
* 성당 관람 시간 : 매주 화~토요일 오전 11시부터 16시까지, 성당 입구에 안내봉사자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 (문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 02-730-6611)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홈페이지는 위의 명례궁터 표석 사진을 쿨하게 클릭한다.

◀  구세군 중앙회관(救世軍 中央會館)
 - 서울 지방기념물 20호

서울시립미술관입구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북쪽으로 6~7분 정도 가면 돌담이 끝나기가 무섭
게 르네상스풍의 구세군 중앙회관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겨울마다 빨간색 자선냄비를 전국에
뿌리는 구세군의 본거지로 처음에는 구세군 본관(本館)으로 쓰였으나 근래에 중앙회관으로 이름
을 갈았다.

이 땅의 구세군은 1908년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부드(William Booth)의 지시로 영국 선교사
로버트 허가드<R, Hoggard, 조선식 이름 허가두(許加斗)> 정령이 5명을 데리고 조선에 들어오면
서 시작된다. 그들은 1909년 서대문 부근 평동에 영문(營門, 구세군 교회를 우리말로 그리 번역
함)을 세워 영업을 벌였는데, 성공회와 달리 금세 많은 교인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새문안(광화
문 부근)과 광교 부근에 영문을 추가로 지었으며 부산과 평양(平壤) 등 지방까지 영업을 확대하
여 큰 성과를 거둔다.
이처럼 구세군이 짧은 기간에 많은 교인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2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세상을
구한다는 구세군이란 명칭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 선교사들이 군복을 입고
교인이 되는 입대를 권하자 그것이 나라를 구하는 군대인줄 알고 몰려든 것인데, 조선 통역인의
엉뚱한 해석도 크게 한몫했다. 예를 들면 선교사가 영어로 '보혈 속죄','회개 성결','마귀 속박
에서 자유'를 외치면 통역인은 '국권회복','국가독립','왜정 지배에서의 독립'으로 해석했던 것
이다. 그러니 나라를 구하고자 순박했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충청도에서는 구세군에 입대하면 군복과 신식 무기를 준다는 방을 붙어 교인을 모집했으며 그들
을 모아 군사 훈련까지 벌였다.

허가드는 조선에서의 구세군 사업이 영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자 '구세신문(지금의 구세공보)'
을 통해 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강력히 경고했으며, 독립군으로 잘못 알고 지원한 이들에게 총
대신 성경을 쥐어주며 구세군의 성격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당수가 실망을 머금으며 구세군을
떠났다.

1910년 신문로에 한국 본영(本營)을 세우고, 한국인 사관을 양성하는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했
으며, 1926년 구세군 만국본영 제2대 사령관 브람웰 부드의 70세 생일을 맞아 한국 구세군이 '
미주 순회단'을 조직해 미국과 캐나다를 돌면서 7만원을 모아 1927년 친일기업인의 모임인 대정
친목회(大正親睦會)의 토지 851평을 구입했다. 이 땅은 원래 덕수궁 영역으로 선원전(璿源殿)의
부속 건물이 있었는데, 오로지 영업확장과 건물 신축에만 관심이 있던 구세군은 1928년 이들 건
물을 싹 밀어버리고 지금의 구세군 중앙회관을 지었다.
이후 건물 뒤쪽을 증축했지만 대체로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 정면의 4개의 기둥
과 지붕은 덕수궁 석조전(石造殿)과 비슷하다. 붉은 벽돌로 몸을 치장하여 색다른 분위기를 자
아내며, 중앙현관에는 1926년에 세운 국한문과 영문으로 된 석조기념관이 있고, 1층은 100주년
기념관, 2층은 자료전시실로 쓰인다. 왜정 때 지어진 서울의 근대 건축의 하나로 1995년 구세군
역사 자료를 모아 1층에 구세군 역사박물관을 설치했으며, 2002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구세군 중앙회관(한국 구세군 역사박물관)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1, 12번 출구), 덕수궁 대한문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도보 11분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에서 3분 정도 직진하면 왼쪽에 덕수초교를 경유하는 덕수궁
  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3~4분 정도 가면 구세군 중앙회관이다.
* 관람정보 : 매주 월~금요일 10시부터 17시까지 (입장료는 공짜, 토요일은 관람 요청이 있을
  경우 공개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3 (덕수궁길 130 ☎ 02-6364-4086)
* 한국 구세군 역사박물관은 위의 구세군 중앙회관 사진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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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6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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