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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나들이 '

▲  인왕산 선바위의 위엄


 

겨울의 제국이 슬슬 고개를 들던 11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간만에 인왕산 선바위를 찾았다.
오후 2시에 독립문역에서 그들을 만나 회색빛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무악동(毋岳洞) 동네
를 가로질러 선바위로 올라갔다.
선바위 밑에 자리한 인왕사 입구에 이르니 인왕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  한 지붕 다가족의 특이한 절집,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주
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기둥을
휘감게 했다. 그리고 지붕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 이름을 담은 현판을 내걸어 이곳
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지나면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조그만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
위로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빼곡히 건물을 심은 인왕사 경내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각 건물마다 별도의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
히 갸우뚱하게 한다. 분명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
로 인왕사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자 결점이다.

인왕사는 8개 종단에 15개(절집 수는 변경될 수 있음)의 절이 군락을 이루며 가람을 이룬 절이
다. 그러니까 인왕사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가지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각 절마다 달라 제각각 따로 놀았다.
이는 마치 13개의 연맹국(聯盟國)으로 이루어진 옛 가야(伽倻)와 비슷하다. 가야 역시 가야란
테두리 안에 무려 13개의 나라가 따로 놀지 않았던가.
이렇게 각 절들이 따로국밥처럼 되버리니 서로 갈등이 심해졌다. 하여 4년에 1번씩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절 전체의 살림과 행정을 맡기면서 조금씩 통합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하게 이루어진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와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락전(極樂殿)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외에는 이
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된다.


▲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사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역사가 이제 103년 밖에 안된다. 그러다보니 아직 내력(來歷)을
알리는 안내문도 갖추지 못했으며, 죄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고색의 향기는 여물지도 못했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인왕사와는 관련이 없던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창건된 인왕사가 있었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
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자료에는 대부분 쾌쾌묵은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4년에 개경(開京)을 버리고 서울
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머물던 승려
조생(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으며,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하
였고, 산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음을 가늠케 한
다. 게다가 태조가 창건한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도 가끔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에는 인왕산에 안겨있던 인왕사와 복세암(福世庵), 금강굴(金剛窟)이 경복
궁(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와 함께 부셨
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지향하던 군주로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
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절을 다시 일으켰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선바위 밑에 절을 세우고, 선바위를 뜻하는 선암정사(禪巖精舍)
라 하였다. 기도처로 유명한 선바위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세운 듯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취하지 않았으며,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
(大願庵)을 지으면서 인왕사의 한 지붕 다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에는 극락전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왜정의 태클로 인왕사 위쪽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에는 극
락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러다가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
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 및 아들을 비는 기자신앙(祈子信仰) 등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
地)였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도심 속의 무속 현장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 인왕산 서남쪽 자락은 대자연이 빚은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즐비하고 선바
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약수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
다. 게다가 매일 굿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민가(民家)와도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거리낌없이 한데
어우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국사당(國師堂) - 중요민속문화재 28호

선바위로 오르다보면 인왕사 경내 가장 윗쪽에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티가 풍기질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
기부터 존재한 서울을 지키던 신당(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
러 무속신(巫俗神)을 모시고 있으며, 무학대사를 모신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南山) 꼭대기 현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1396년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했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별탈없이 지내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시절에
강제로 정든 곳을 떠나야 했다. 때는 1925년 왜정이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
宮)을 지었는데,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
라고 요란하게 징징거렸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라 전하는 지금의 자리
로 급하게 이전되었다.
이전할 때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
하 기초는 없다. 그리고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
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드리러 온 이들
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해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드
러나 있으며, 당시 서울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국사당은 거의 매일 굿이 열려 굿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
와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많으며, 특히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나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
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고, 김형재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
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이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
과 10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을 소유한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
를 올리는데,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서울에서는 거의 잊혀진 서울 무속
인들의 안식처이자 그들의 성지로 서울 무속신앙이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현장이다. 또한 국사
당과 선바위 주변은 굿판과 기도장소로 명성이 높아 무속인들과 기도를 하려는 속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 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중요민속문화재 17호로 지정
되었는데, 그림에 그려진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부인, 호구아
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신(軍雄大神), 금
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
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
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태조 이성계가 그려진 아태조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고 전하며,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로 보기도 한다. 허나 태조의 그림이 있으니 그 왕후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에 더 큰 무게가 쏠리고 있으며, 그림 이름도 강씨부인이니 신덕왕후와 성씨도 같다.
그림에 담긴 그들의 얼굴을 보면 태조는 조금 멍해보이고, 강씨는 뭔가 불만이 많은지 인상을
잔뜩 쓴 것 같다.

우리가 국사당에 이를 때는 건물 내부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굿과 관련된 사람들
이 협칸에 머물러 있어서 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새가슴처럼 잠깐씩 열려진 문을 통해 안을
살짝 보는 선에서 그쳤다. 기분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 무신도를 마음껏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괜히 그러다가 크게 안좋은 소리나 들을 듯 싶어서 그만두었다. 무신도와 관련 설명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으니 알아서 참조하기 바란다.


▲  선바위로 올라가는 도중에 바라본 국사당과 인왕사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자리한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바위, 산악신앙 및 기자(祈子)신앙의 오랜 성지,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4호

인왕산 중턱 해발 14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이자 산악/기자신앙의 성지
로 2개의 커다란 돌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바위(禪岩)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른 법,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그리고 바위 뒤나 옆에서 보면 판초의나 우비,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화를 많이 봤다면 그런 만화에 나오는 이상한 형체의 괴물이 떠오를 수도 있
겠다. (난 선바위를 정면에서 볼 때 마다 만화나 오락에서 나왔던 새 대가리 괴물이 떠오름)

대자연이 인왕산에 기가 막히게 빚어놓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 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준수한 바위들이 많아 인왕산이 과연 바위의 산 임을 실감케
한다. 이 산에 기암괴석이 많은 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기 때문이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또는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인
왕사가 밑에 둥지를 튼 이후에는 불상으로 대우를 받아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
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 부르며, 인왕사의 든든
한 후광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대단하다.

이 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산악신앙 및 아들을 기원
하는 기자(祈子)신앙 및 민간신앙의 성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이 바위
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하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바위 밑에 둥지를 틀면서 불교의 신앙 대상이 되었고, 국사당까지 이곳으로
와 무속 신앙까지 더해져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에 '민간신앙+
불교+무속'이 되버린 셈이고, 선바위부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 상, 무학대사 상, 석불
님, 관세음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속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바위는 가만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
를 피우며, 그렇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

2개의 큰 바위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
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시멘트로 바른 제단이 있으며, 제단 좌우로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촛
불을 가득 지닌 기와집 모양의 함이 있다.


▲  선바위의 깜찍한 뒷태
판초의나 모자 달린 우비를 쓰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보는 것 같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鄭道傳)
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래서 무학대
사는 전국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는 크게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살펴보
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 못갈 팔자였다. 그래서 선바위에서 1,000일 기도
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딱 망한 모양이
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國都)가 되는 데에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
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바위는
그 밖에 있었다. 이에 태조는 하늘의 뜻으로 짐작하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
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
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 눈이 쌓인 자리에 도성을 만들었
다 하여 설성(雪城), 설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게 이름이 바뀌어 서울이 되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
징되는 불교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
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교 위에 들
어앉게 되는 것이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
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고, 나라의 중심
이념이 된 것이며, 불교는 점차 힘을 잃고 밀려
났다. 그래고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
는 혹독한 억불숭유의 시련을 겪게 된다.
도성 밖으로 밀려나 졸지에 조선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셈이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그리
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
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
는 사람들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
는 공간으로 조그만 건물을 지었으며, 바위 주
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러 성역으로 삼았다.

▲  측면에서 본 선바위 -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선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옛 국사당 자리에 솟아난 N서울타워(남산타워)가 중앙에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선바위 뒤쪽에 새롭게 터를 다진 인왕사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송림 속에 우뚝 솟은 해골바위

▲  선바위약수터

인왕산에는 남산만큼이나 약수터가 많은데, 선바위 동쪽 계곡에 자리한 약수터도 그중에 하나이
다. 인왕산이 속세에 베푼 고마운 약수이나 물을 보니 수질이 조금은 의심스러워 바가지를 대진
않았다. 이곳은 예전에 굿터 많이 쓰였으나 행정기관에서 굿에 제한을 걸면서 요즘은 약수터 주
변에 조촐하게 파라솔 등으로 머물 자리를 만들어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  선바위 동쪽 벼랑 (선바위약수터는 바로 밑, 윗부분에 솟은 바위가 선바위)


※ 인왕산 선바위(국사당, 인왕사) 찾아가기 (2015년 3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 출구를 나가면 선바위, 국사당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 무악동주민센터를 지나 인왕산현대아이파크아파트 옆
  길을 오르면 인왕사 일주문이 나온다. 독립문역에서 일주문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일주문
  에서 선바위까지는 도보 4~5분 거리
* 독립문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새마을금고가 나온다. 여기서 오
  른쪽으로 보이는 골든팰리스 앞을 지나면 통일로14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직진하면 무악동주
  민센터이다. 이후는 앞 내용 참조
* 독립문역을 경유하는 시내버스(471, 701, 702, 703, 704, 705, 706, 720, 752, 7019, 7021,
  7025, 9701, 9703, 9709, 6005(공항버스), 서대문마을11번)번을 타고 독립문역 정류장에서
  하차, 독립문역 1,2번 출구를 찾는다.
* 승용차로 인왕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일주문 윗쪽에 주차장 있음
* 매년 5~6월에 국사당에서 인왕산 산신대제가 열린다.

* 인왕사(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 (통일로18가길 20 ☎ 02-737-4434)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3-4 (통일로18가길 26)


♠  인왕산 마무리

▲  선바위에서 인왕산약수터로 올라가는 산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해발 338m의 바위 봉우리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
개를 경계로 북악산(342m)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사이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진다.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안쪽으로 둘러싼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기도 하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도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제왕이 정전
(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과 사직터널,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으
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각박하고 지형이 험하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山勢
)가 작아 보이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기면 보기와 달리 제법 넓으며, 독립문역에서 정상까진 1
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을 찍고 홍제동(환희사, 개미마을)이나 홍지문, 창의문(자하문), 부암동
으로 내려갈 경우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
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한 경관을 돕고 있
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백호
에 걸맞은 위엄을 드러내며 서울을 굽어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하여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남겨 인왕산을 격하게 찬양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선바위와 부암동, 옥인동(玉仁洞), 홍제동에 약수터가
많이 널려 속인(俗人)들의 목을 축여준다. 또한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각박하다보니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숨어버렸다. 선바위와 인왕
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은 계곡이라 하기에도 뭐한 수준이고, 산 서쪽에는 환희사(歡喜寺) 주변
으로 약간의 계곡이 졸졸졸 소리를 낸다.
산 동쪽 옥인동에는 장안 제일의 경승으로 손꼽히던 수성동(水聲洞)계곡이 있으나 옥인아파트로
크게 훼손된 것을 2011년에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12년 여름에 완성되었으며, 효자동(孝子洞)에
는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천(白雲洞天) 계곡이 있었으나 주택가에 생매장당해 흔적도 보기 힘
들다. 부암동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란 계곡이 있었지만 이 역시 생매장당해 반계 윤웅렬 별
서(磻溪 尹雄烈 別墅, ☞ 관련글 보기)에 그 일부만 남았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한양도성 길이 폐쇄
되어 선바위 주변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군부대와 초소가 한양도성 능선에 남아있어 통제구역이 조
금 남아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이 대표적이며, 중종과 단경왕후(端敬王后) 신
씨의 슬픈 사연이 서린 치마바위와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던 수성동계곡, 근래에 벽화로 유명해
진 달동네 홍제동 개미마을, 자하문고개 서쪽에 자리한 청운공원과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 관련글 보기),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속, 불교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서울에서 보
기 힘든 무속의 성지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
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선바위 사건으로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정
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다시금 꺾였다.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다'
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 만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
)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 쪽에서 무학대사에게 태클을 걸고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억불숭유에 불만을 품고 그럴싸하게 지어낸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불만을 품
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 사건을 이괄의 난이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
로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이 오른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
다. 그리고 군사<군사 가운데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
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는데,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주로 입
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
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
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
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된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에
수시로 나타나 횡포를 부렸고, 심지어 종묘까지 침입했다고 하며, 백성들의 피해가 부지기수였
다. 그래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왔으니 인왕
산은 그야말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였다. 허나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묘공(猫公)만 종종 보일 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
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현
(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며 우니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렸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는 '엥? 수진궁귀신
이라고??' 크게 놀라며 염통과 꼬리를 부여잡고 36계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
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약수터

선바위약수터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 오르면 인왕산약수터가 나온다. 아직까지는 수질 적합 판
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뭄 탓인지 물이 실처럼 가늘게 나와 바가지 하나를 채우는데 많은 인내
력을 요한다. 물을 받는 바가지도, 그 물을 마시려는 사람도 그저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과자를 먹으며, 지친 두 다리의 불만을 잠시 달래주었다. 배가 고
파서 그런지 과자에 자꾸 손이 가서 금세 가루만 날리는 빈 봉지가 되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
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모자바위(왼쪽)와 인왕산 성곽능선

▲  소나무 너머로 흐릿하게 다가오는 서울 도심

▲  해골바위 (선바위 동쪽 산자락)

선바위 동쪽 산자락에 해골바위라 불리는 괴상한 모습의 바위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바위 윗
부분에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어 마치 손상된 해골바가지를 보는 듯 하며, 화생방훈련 때 쓰는
방독면 마스크와도 비슷해 보인다. 구멍에는 치성의 흔적과 술판의 흔적, 속인(俗人)들이 남긴
하얀 글씨들이 흉물스럽게 화석처럼 박혀 바위에 적지 않은 흠집을 내고 있다.


▲  동쪽에서 본 해골바위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독립문역 주변과 안산(鞍山)
바로 저 장소에서 1623년 이괄의 반란군과 장만의 관군이 충돌했다.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뿌연 천하

▲  모자바위 (오른쪽은 한양도성)

검은 때가 적당히 낀 매끄러운 벼랑 위에 어설프게 쓴 모자처럼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모자바위,
줌을 최대한 땡겨 확대해서 보면 마치 고개를 든 개나 동물로도 보이니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
자로 표현한다는 것이 무례가 될 정도로 대자연의 숭고한 작품에 그저 탄사만 나올 뿐이다.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북←종로구→남)
콧대 높은 서울 도심이 내 발 아래로 펼쳐지고, 나는 하늘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여유롭게 굽어본다. 하늘 아래의 저 세상이
이대로 나의 세상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무악동과 종로구, 중구)

▲  범바위와 그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매바위와 인왕산 정상
산 곳곳에 터를 닦은 각종 바위와 기암괴석들은 대자연이 인왕산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인왕산의 모습은 낙산이나 남산처럼 그저 그랬을 것이고
우백호의 완장마저 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내려가면서 담은 독립문역 주변 (가까이에 보이는 기와집이 인왕사)

해골바위에서 성곽이 보이는 방향으로 내려가면 한양도성 안으로 인도하는 철계단길이 나온다.
정상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시내로 내려갔다. 어차피 나와 인왕
산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인연이 가능하다. 굳이 오늘 갈 필요는 없지~

이렇게 하여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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