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해발 338m의 바위 봉우리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 개를 경계로 북악산(342m)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사이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진다.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안쪽으로 둘러싼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기도 하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도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제왕이 정전 (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과 사직터널,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으 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각박하고 지형이 험하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山勢 )가 작아 보이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기면 보기와 달리 제법 넓으며, 독립문역에서 정상까진 1 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을 찍고 홍제동(환희사, 개미마을)이나 홍지문, 창의문(자하문), 부암동 으로 내려갈 경우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 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한 경관을 돕고 있 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백호 에 걸맞은 위엄을 드러내며 서울을 굽어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하여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남겨 인왕산을 격하게 찬양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선바위와 부암동, 옥인동(玉仁洞), 홍제동에 약수터가 많이 널려 속인(俗人)들의 목을 축여준다. 또한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각박하다보니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숨어버렸다. 선바위와 인왕 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은 계곡이라 하기에도 뭐한 수준이고, 산 서쪽에는 환희사(歡喜寺) 주변 으로 약간의 계곡이 졸졸졸 소리를 낸다. 산 동쪽 옥인동에는 장안 제일의 경승으로 손꼽히던 수성동(水聲洞)계곡이 있으나 옥인아파트로 크게 훼손된 것을 2011년에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12년 여름에 완성되었으며, 효자동(孝子洞)에 는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천(白雲洞天) 계곡이 있었으나 주택가에 생매장당해 흔적도 보기 힘 들다. 부암동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란 계곡이 있었지만 이 역시 생매장당해 반계 윤웅렬 별 서(磻溪 尹雄烈 別墅, ☞ 관련글 보기)에 그 일부만 남았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한양도성 길이 폐쇄 되어 선바위 주변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군부대와 초소가 한양도성 능선에 남아있어 통제구역이 조 금 남아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이 대표적이며, 중종과 단경왕후(端敬王后) 신 씨의 슬픈 사연이 서린 치마바위와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던 수성동계곡, 근래에 벽화로 유명해 진 달동네 홍제동 개미마을, 자하문고개 서쪽에 자리한 청운공원과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 관련글 보기),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속, 불교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서울에서 보 기 힘든 무속의 성지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 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선바위 사건으로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정 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다시금 꺾였다.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다' 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 만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 )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 쪽에서 무학대사에게 태클을 걸고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억불숭유에 불만을 품고 그럴싸하게 지어낸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불만을 품 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 사건을 이괄의 난이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 로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이 오른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 다. 그리고 군사<군사 가운데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 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는데,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주로 입 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 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 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 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된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에 수시로 나타나 횡포를 부렸고, 심지어 종묘까지 침입했다고 하며, 백성들의 피해가 부지기수였 다. 그래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왔으니 인왕 산은 그야말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였다. 허나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묘공(猫公)만 종종 보일 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 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현 (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며 우니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렸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는 '엥? 수진궁귀신 이라고??' 크게 놀라며 염통과 꼬리를 부여잡고 36계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 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