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중심지이자 도심 속의 조촐한 휴식처 ~ 서울 조계사(曹溪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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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완전 한복판인 금싸라기 땅, 종로1가 견지동(堅志洞)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 인 조계사가 자리해 있다. 견지동이란 이름은 뜻을 견고히 한다는 뜻으로 조선 때 견평방(堅平 坊, 견지동 주변)에 있던 의금부(義禁府)에서 민원이나 법을 집행할 때 굳은 뜻으로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조계사의 시초는 1910년에 창건된 각황사(覺皇寺)로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옛 중동학교터)에 있 었다. 조선시대에 서울 도심에는 정릉(貞陵)의 원찰인 흥천사(興天寺, 정동에 있었음), 탑골공 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명륜동(明倫洞)에 흥덕사(興德寺)가 있었는데, 원각사와 흥 덕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파괴되었고, 흥천사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사라지면서 서 울 도심의 사찰은 완전 씨가 마르게 된다. 하긴 억불숭유를 강조하던 조선 심장부에 버젓히 절 이 있다면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다. 이후 400년의 공백을 깨고 조계사의 시초인 각황사가 도심에 싹을 내렸다.
1911년 왜정(倭政)이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선포하여 조선의 모든 절을 이토 히로부미의 원 찰(願刹)인 박문사(博文寺,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에 귀속시키려 하자 해인사(海印寺)주지 회광, 마곡사(麻谷寺) 주지 만공(滿空), 승려 용운(龍雲) 등이 급히 각황사에 모여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었다. 이때 용운의 제의로 총본산제도를 추진하면서 조계사(각황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사찰로 서서히 싹수를 트게 된다.
1929년 승려 104명이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했다. 당시 절의 규모가 암자보다 못한 수준이라 만해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곳을 명실상부한 조선 불 교의 총본산으로 키우려고 궁리했는데, 지암 종욱(智庵 鍾郁)이 총본산 건설 31본산 주지 대표 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중 1936년 전북 정읍을 기반으로 하던 보천교(普天敎)가 왜정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사 건이 터지면서 보천교의 중심 법당인 십일전(十一殿, 전북 정읍 소재)이 경매로 나왔다. 이 건 물은 1929년에 지어진 천하에서 가장 큰 목조 단층 건물로 지암은 그 건물에 반응을 보이며, 과 감히 매입을 단행했는데, 구입 비용은 무려 12,000원이 들었으며 (지금으로 환산하면 12억 이상 ) 그 건물을 모두 분해하여 가져와 대웅전을 지었다. 공사를 맡은 이는 도편수(都片手) 최원식(崔元植)으로 1920년대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 殿) 재건 공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웅전 건립을 위해 인근 경복궁(慶福宮)과 덕수궁 건 물을 조사했으며, 단청과 벽화를 맡은 이는 당시 그림으로 알아주던 금용 일섭(金蓉 日燮)이다.
1937년 민영환 집터와 우정총국 일대를 사들여 절을 옮겼고, 1938년 10월 25일 준공 봉불식(奉 佛式)을 거행해 서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그 장엄함을 드러냈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있던 태고사(太古寺, 지금도 있음)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갈았다. 대웅전 건설과 절 이건 비용을 위해 31본산에서 100,402원 47전을 모아 보냈으며, 중앙불교전문 학교 교수였던 권상노(勸相老)가 상량문을 작성했는데, 왜정의 눈치가 심하여 조선총독의 '심전 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고자 대웅전을 지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한 많은 중생이 각자의 소 중한 물건을 발원문을 첨부해 대웅전에 넣었다. 이토록 천하가 주목할 정도로 요란하게 절을 옮겼지만 정작 경내를 메운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가 전부였다. 대웅전 하나가 여러 건물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참고로 보천교는 증산교(甑山敎)에서 파생된 것으로 차경석(車京錫)이 교주(敎主)로 있었는데,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십일전 완성을 계기로 신도들로부터 차천자 (車天子)로 추앙을 받았다. 허나 교내 분열과 친일 행적 등으로 말썽이 많았고, 1936년 차경석 이 죽자 왜정은 보천교를 강제로 폐지하고 건물을 경매로 내놓아 짭짤하게 수입을 챙겼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 불교 조계종이 발족했고, 제1대 종정(宗正)으로 한암이 취임했다. 1945년 9월에는 이곳에서 전 국승려대회가 열려 왜정 때 만들어진 사찰령과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롭게 조선불교 교헌 (敎憲)을 제정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으로 요사가 반이나 날라갔고, 대웅전도 우측 처마에 포탄을 맞 아 상처가 생겼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을 계기로 인근 안국동 선학원(禪 學院)에서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던 승려들이 이곳에 들어와 조계종의 이름을 딴 조계사로 이름 을 갈았다. 허나 그로 인해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처승 세력은 조계사를 인정하지 않고 태고사를 고집했다. 그래서 절은 하나인데, 이름은 2개인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고, 비 구를 중심으로 간신히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조계사로 이름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2003년에는 대웅전을 해체 보수했는데, 종도리를 받치는 통장혀 중앙부분 장방형 홈에서 1937년 대웅전 건립 때 넣은 상량문을 비롯해 217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시절 생활사와 상황 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으며, 200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다.
법등(法燈)을 켠지는 이제 100년을 조금 넘었고, 지금에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80년 남짓, 건 물도 대웅전이나 좀 나이가 있을 뿐 고색(古色)의 기운은 그리 익지도 않았다. 오래된 멋도 거 진 없고, 산사의 고즈넉함도 없고, 수수하게 생긴 절집도 아니다보니 그런 절을 선호하는 이들 에게는 썩 좋은 절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다고 도심 속에 박힌 잇점과 속세에 늘 열려있는 공간으로 평일에 는 잠깐 들려 쉬었다가는 직장인과 도시인들이 많다. 아마도 이 땅의 절 가운데 직장인들이 가 장 많이 찾는 절이 아닐까 싶다. 휴일에는 신도와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 고 물갈이가 잘된다. 특히 서울연등회(연등축제)와 석가탄신일에는 발을 들일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며, 축제의 절정에 이른 조계사는 절과 사람의 향기, 그리고 흥겨움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리고 매일 18시가 되면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을 깨워 회색빛 도심에 잔잔하 게 사물의 소리를 베푼다.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조계종의 본산으로 경내는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나 대웅전과 현대 식 건축물 등 으리으리한 건물이 많다보니 경내가 제법 넓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울 도심 한복 판이라 교통과 접근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조계사는 지금 크기가 딱 좋은 거 같음) 대웅전과 극락전, 설법전, 종무소, 안심당, 범종루,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교대학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천하에 희귀종인 백송 이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대웅전과 석가불도, 목불좌상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 고 있다. 또한 대웅전 뜨락에는 500년 묵은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고, 경내 동북쪽에는 우정총국 이 자리해 있다.
번잡한 도심 속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도심과 달리 절은 평온하기 그지없으며, 종로1가를 지날 일이 있으면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절집의 하나이기도 하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416394151BC2FA12A) ▲ 조계사 일주문(一柱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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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을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조계사의 실질적인 정문이다. 경내가 사방으로 뻥 뚫려있다 보니 진입로가 많아 굳이 일주문의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절의 상징적인 대문이니 경 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나갈 때 거쳐가는 것도 좋다.
원래 조계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절의 필수 요소인 일주문이 없는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 지 2005년 3월 절을 중창하면서 일주문의 백미로 꼽히는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계문을 모방해 하나 장만했고, 2007년 10월에 현판과 주련을 달아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현판과 주련은 당시 한국서예가협회장이던 송천 정하건 선생이 쓴 것이고 서각은 철제 오옥진 선생이 했다.
명세기 이 땅의 중심 절집이다보니 문의 크기는 단양(丹陽) 구인사(求仁寺) 일주문의 다음 가는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도 장대하거니와 특히 폭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569FA4151BC2FAE05) ▲ 또 다른 하늘을 이루고 있는 오색 연등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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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장대한 오색 물결 앞에 두 눈이 제대로 놀라 고 만다. 입도 한없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았지~~ 낮도 이러한데, 햇님이 꽁무니를 빼 는 저녁이 되면 더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72EFD4051BC2FB926) ▲ 연등 밑에 있는 커다란 연꽃무늬 연등
![](https://t1.daumcdn.net/cfile/blog/031B294051BC2FBF30) ▲ 조계사 사적비(事蹟碑)와 법등명(法燈明)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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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다양한 연등이 걸린 법등명 수레 옆에 미끈한 피부의 비석이 보일 것이다. 그 비석은 조 계사의 역사를 담은 사적비로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이 2009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지관은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2012년 1월 정릉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입적을 했는데, 그는 조계사에 마땅한 사적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손수 자료를 모아 9천 자에 가 까운 내용을 담았다. 비석의 밑도리와 머리장식인 귀부와 이수는 여주 고달사(高達寺)의 원종국 사탑비(元宗大師塔碑)를 본따서 만들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301464051BC2FC303) ▲ 연꽃을 들고 샤방하게 뛰어가는 동자승과 비파를 연주하는 동자 연등
![](https://t1.daumcdn.net/cfile/blog/260F6B3F51BC30050B) ▲ 조계사 관불의식의 현장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 보인다. 허나 석가탄신일이 지나면 강제로 다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야 되니 그의 심정도 모르고 떨어지는 해가 무척 야속할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034F534C51BDBEB907) ▲ 왼손을 내밀고 있는 천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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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앞에는 2006년 3월에 만든 천진불이 그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요즘 이런 천진불을 갖춘 절이 제법 되는데, 표정과 모습이 귀여운 것은 좋지만 왼손을 내밀며 '야~ 한푼 내놔~!!' 이러는 것 같아서 저 손짓만 고친다면 참 바람직한 천진불이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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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사 백송 - 천연기념물 9호 |
대웅전 동쪽에는 이곳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인 백송이 하얀 피부를 드러내며 경내에 짧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백송은 말그대로 하얀 소나무로 나이를 먹으면서 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회백색이나 하얀색으로 변하는 매우 희귀한 소나무이다. 그들의 고향은 중원대륙 북부이나 그곳에서는 진작에 씨가 말 라버린 상태이며,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기념으로 가져온 백송 일부 가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던 통의동(通義洞) 백송을 비롯해 원효로(元曉路) 백송과 보은(報恩) 백송이 숨을 거두면서 그 개체수는 이제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다행히 그들의 후손이 사릉(思陵) 전통수목 양묘장과 재동(齋洞)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 북쪽, 그리고 창경궁에서 자라나고 있어 품종 전멸은 면했다.
조계사 백송은 5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누가 가져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는 약 14m, 뿌리부분 둘레 1.85m, 가슴 높이 둘레가 1.8m이며, 수송동(壽松洞)이란 지명도 바로 이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란 뜻으로 원래는 지금의 수송공원에 있었 으나 그곳에 있던 각황사가 현 위치로 이전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져 외과수술을 크게 받을 적이 있는데, 그때 큰 줄기는 절단되 었다. 허나 절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나무에게 주어진 땅이 좁기 때문에 나무의 기운도 예전 같 지가 않아 이 땅에 오래된 백송이 또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게다가 나무 주위를 연등 으로 화사하게 꾸며놓아 나름 눈요기감을 선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를 가두는 꼴이 되어 조금 은 답답해 보인다. 연등 수입도 좋지만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그에 대한 배려도 절실해 보인다. |
![](http://4.bp.blogspot.com/-j7oBRD61TDg/Ubyoo51TL1I/AAAAAAAAD1A/Z-IQzmz4kiM/s1600/DSCN7263.JPG) ▲ 조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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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단층 불전(佛殿)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얼마나 허벌나게 크던지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죄다 개미보다 못하게 보인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무려 155.7평에 이른다. 1936년 왜정 에 의해 해체되어 경매로 나온 보천교 십일전을 거금 12,000원으로 매입하여 그 자재로 만들었 는데, 옛 십일전의 모습도 어느 정도 살렸다. 조계사가 이 큰 건물에 눈독을 들인 것은 조계사가 바로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 다. 나날이 힘이 더해지는 왜식 불교에 맞서고 민족 대표 사찰에 걸맞게 법당을 크게 지을 필요 가 대두되면서 때마침 나온 십일전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38년 완성을 보았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면서도 나름 독특한 양식을 간직한 20세기 초/중기 건물로 사방 에 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안그래도 큰 건물이 더욱 커보인다. 건물 외벽에는 온갖 꽃창살과 벽화가 장엄했으며, 대웅전 건립 기념으로 영암 도갑사(道甲寺)에서 가져온 목불좌상 을 본존불로 삼았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조계사 홈페이지에는 15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옴, 반면 문화재청에는 조 선 전기 양식을 간직한 조선 후기 불상이라고 나옴)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규모에 걸맞지 않 게 많이 왜소하다는 지적이 많자 2006년에 새롭게 거대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목불좌상은 불 단 우측으로 옮겨졌으며, 추후 영산전을 만들면 그곳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이 목불좌상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6호이다. 그리고 대웅전 현판은 조선 선조(宣祖)의 8번 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해서체로 남긴 화엄사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만든 것이다. |
![](http://3.bp.blogspot.com/-3zQ8bAWwVlI/Ubyosc4ypvI/AAAAAAAAD14/uMnSLKZtgik/s1600/DSCN7278.JPG)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그 뒤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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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장처럼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예불을 하는 중생들로 가득하다.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바친 온갖 제물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이고, 불상은 그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시 주함에는 돈이 넘쳐나 함이 터질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3존불은 2006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땅에서 단층 불전에 봉안된 불상 가운데 제 일 크다. 그들이 너무 큰데다가 금빛 찬란해 두 눈이 달아날 지경으로 그들 뒷쪽에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석가불도가 걸려있는데, 불상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석가불도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 20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 왜정 때 유명했던 불교미술작가 김일섭(金日燮)이 그린 것으로 그 시절 불교의 모 든 종단이 뜻을 합쳐 만든 불화라는 점과 김일섭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가 인 정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4770A4951BDB82F28) ▲ 대웅전 앞에도 관불의식 장소를 두었다. 철모르고 찾아온 이른 더위에 시원하게 냉수욕을 하는 그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를 다른데로 내보내고 내가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관불은 커녕 바가지로 싸대기`맞겠지..?
![](http://3.bp.blogspot.com/-j1ptmhSDi_s/UbyooL1GLRI/AAAAAAAAD04/eifm7PyAkpk/s1600/DSCN7262.JPG) ▲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연등이 의기투합하여 하늘을 완전히 지웠다. 연등은 하늘을 메우는 구름이 되고 그들을 경계로 하늘과 땅으로 나눠진 것 같다. 연등 밑은 밝은 대낮임에도 연등의 위엄에 가려 어둡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67794C51BDB82031) ▲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대웅전 뜨락
![](http://2.bp.blogspot.com/-Gx0BBx-pz_Y/Ubyoqu0ndpI/AAAAAAAAD1c/3W5NqDixpOo/s1600/DSCN7271.JPG) ▲ 조계사의 꿀재미, 연등 구름의 물결 측정불가의 깊은 하늘이 이날만큼은 대웅전 평방 높이로 팍 내려앉은 것 같다.
![](http://1.bp.blogspot.com/-XjNXd9BKysQ/UbyorLsauxI/AAAAAAAAD1o/Glx8XdI-2lk/s1600/DSCN7272.JPG) ▲ 하얀 연등이 수를 놓은 극락전(極樂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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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둔 아미타3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극락전, 2층은 설법전(說法殿)으로 쓰인다.
극락전 앞에는 다른 공간과 달리 하얀 연등이 가득한데, 이들은 죽은 이들, 즉 어려운 말로 영 가(靈駕)를 위한 연등이다. 저녁이 되면 일제히 하얀 빛을 발산해 알록달록 연등 빛보다는 다소 엄숙하거나 오싹할 수 있다.
극락전 남쪽에는 범종루, 안심당(安心堂) 등이 있으며, 안심당 지하층(거의 지상 1층임)에는 만 발(萬鉢)이라 불리는 공양간이 있다. 만발은 1만개의 발우라는 뜻으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2371B94951BDB8352C) ▲ 도시를 바탕에 둔 범종루와 극락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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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에는 부처의 메세지를 담은 4개의 물건,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오전 4시와 저녁 6시 가 되면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으로 치는데, 같은 사물 소리라고 해도 첩첩한 산주름 속 에 자리한 산사에서 듣는 것과 도시 한복판에서 듣는 것이 참 다른 것 같다. 공해가 가득한 곳 에서 들으니 그때만큼은 잠시나마 외딴 산사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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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지워진 회화나무 대웅전 뜨락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500년 이 상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귀신도 모를 정도로 장대한 나이를 먹은 그는 높이 26m, 둘레 4m로 뜨락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옛날 에는 회화나무가 군락을 이루던 곳으로 회화나 무 우물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허나 그 많던 회화나무는 20세기 이후 죄다 사 라졌으며, 나무 윗도리는 연등 구름에 가려 보 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니 구름에 감싸인 신묘 한 나무처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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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사 8각10층석탑 대웅전 뜨락에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 석탑(국보 48호)을 유난히도 많이 닮은 8각10층 석탑이 자리해 있다. 조계사는 초창기부터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왜식 석탑이 있었다. 허나 왜식 탑이라 말들이 많자 2009년 가을 기존의 탑을 불교중앙박물관 북쪽으로 치우고 고려 탑의 진수로 꼽히는 월정 사 탑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탑을 세웠다. 탑 피부에는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새겼고, 왜식 탑에 들어있던 부처 사리 1과와 조그만 불상 14,000상을 봉안했다. 그 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파라(達磨婆羅)가 기증한 것으로 그외에 논산 쌍계사(雙溪寺)에서 가져온 법화경 7권 1질과 25조 가사 1벌 등을 안치해 이 땅의 중심 사찰 석탑의 위엄을 갖추 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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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사 쉼터이자 야외까페인 가피(加被) 대웅전 뜨락 동남쪽에 늘씬한 키의 소나무가 여 럿 심어진 쉼터가 있다. 예전에는 그냥 허전한 공터였으나 조계사 신도회 부회장 오인석의 지 원으로 주변을 손질하여 2011년 4월 야외 까페 로 새로 태어났다.
이곳에 부여된 이름은 '가피'로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뜻이니 완전 사찰 까페에 맞는 이름이다. (커피와 차는 2~4천원 선)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75B5A4F51BDBEA901) ▲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북쪽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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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북쪽에는 2005년에 세워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전국 2,000여 곳의 사찰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이 들어있으며, 지하 1층에는 2007년에 문을 연 불교중앙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이 박물관은 이 땅의 불교미술사를 정리하고 다른 절의 문화유산을 위탁 관리/보존하고 있는데, 관람료는 공짜이다. (특별전 제외)
* 불교중앙박물관 관람시간 : 9시~18시 <11~2월은 17시까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우정국로 55 ☎ 02-2011-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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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전으로 밀려난 조계사 7층석탑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북쪽에는 조촐하게 산 책로가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면 왜열 도 스타일로 이루어진 길쭉한 탑을 만나게 되는 데, 그 탑이 대웅전 뜨락에 있던 조계사 7층석 탑이다.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바라가 부처의 사 리를 지참하며 천하의 불교 성지를 찾아 댕기다 가 그해 8월 조선까지 들어 왔다. 조선의 여러 절을 둘러보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 서 사리 1과를 선사했는데, 각황사에서 이를 관 리했다가 사리를 담을 탑이 필요하여 1930년 지 금의 왜식 7층석탑을 지어 그 안에 담았다. 2002년 3월 도량확장 불사로 탑을 옮겼을 때 사 리를 꺼내 친견법회를 봉행했으며, 사리함을 보 수하여 다시 안에 넣었다. |
그 이후 왜식 탑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생기자 2009년에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모델로 하여 왜식 탑을 대체할 8각10층석탑을 세웠다. 그래서 왜식 탑에 담긴 사리를 새 탑에 넣었고, 왜식 탑은 부시기에는 좀 아까워 그해 10월 인적이 별로 없는 응달진 구석에 자리에 처박아 두었다. 단지 왜식 탑이란 이유에서였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0143FC4951BDBEA218) ▲ 7층석탑의 1층 부분 - 난간 무늬와 덩굴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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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구석진 곳에 두다보니 처음에는 탑을 완전 아작낸 줄 알았다. 아무리 왜식 탑이라 해도 그 들도 이 땅의 엄연한 역사이자 문화유산이다. 옛 조선총독부나 이 땅의 정기를 흐트리고자 꽂은 말뚝 등 심히 눈꼴사나운 것들은 정리해야 마땅하나 그외에 평범한 것들은 보존하여 관광/역사 자원으로 삼는 것이 좋다. 또한 이 탑은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조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외지에서 만든 것과 백 송, 회화나무는 제외) 각황사와 태고사 시절의 역사가 담겨진 만큼 부시지 않고 자리만 옮긴 것 은 착한 결정이라 본다. 구석에 있어 찾는 이도 별로 없지만 탑 주변에는 늘 꽃이 가득하여 관 리는 그런데로 해주는 모양이다.
이 땅에 거의 흔치 않은 왜식 탑으로 왜인이 만든 것이 아닌 조계사에서 만든 것이며, 가야(伽 倻)를 밀어내고 왜열도를 점유한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왜인들을 교화하고자 불교를 내리면서 그곳에도 불교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왜열도로 전해진 불교는 차차 그들만의 불교 스타일로 변 화해 갔고, 격동의 구한말 시절, 그들의 불교가 그 전래지인 조선으로 넘어와 왜식 불교가 잠시 성행을 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 탑을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화란 다 돌고 도는 것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343CB4F51BDBEAB1B) ▲ 7층석탑 주변에서 만난 두툼한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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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경내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장엄등이 슬슬 꿈 틀거리면서 연등회의 마지막인 연등놀이가 기지개를 켰다. 이후 내용은 생략~~~
※ 조계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안국동로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우정국로) 길로 가면 조계사이다. (도보 6분) * 조계사 경유 서울시내버스 노선 ① 조계사 : 109번(우이동↔광화문), 151번(우이동↔중앙대), 162번(정릉동↔여의도), 172(하계 동↔상암동), 606(부천시 상동↔종로1가), 1020(정릉동↔종로1가) ② 조계사 건너편 : 151, 162, 172, 401번(장지동↔광화문), 406번(개포동↔광화문), 704번(송 추,부곡리↔서울역), 7022번(구산동↔서울역), 9401번(분당 오리역↔광화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조계사 홈페이지는 위에 불두화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