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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駱山) '
(한양도성, 이화마을, 낙산공원)

▲  낙산공원 한양도성 바깥길 (낙산에서 동소문 방향)

 


가을이 여름 제국(帝國)의 잔여 세력을 힘겹게 몰아내며 천하를 진정시키던 9월 끝무렵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을 찾았다. 서울 땅을 거진 꿰고 사는 본인이지만 정작 낙산은 아직
까지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미답처로 쭉 남아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건만 인
연은 정말 지지리도 없던 곳이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낙산의 품
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영원한 보물 1호,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일행을 만나 낙산
의 남쪽 관문이나 다름없는 동대문성곽공원을 찾았다. 이번 낙산 투어는 이곳에서 시작된
다. (본글에서 한양도성과 한양성곽은 같은 곳임)


♠  동대문성곽공원 (한양도성)

▲  동대문 쇼핑타운을 굽어보는 동대문성곽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병원을 밀어내고 동대문 북쪽에서 잠시 끊긴 한양성곽(漢陽城郭)을 복원
하면서 만든 공원이다. (이대병원은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감) 성 안쪽이자 하얀색의 병원 건물
이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잔디를 곱게 입혔고, 갖은 들꽃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공원 중앙에는 네모난 정자를 지어 나그네의 조촐한 쉼터가 되어준다.

공원 북쪽에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한양성곽길이 여장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흥인
지문4거리(로터리)와 맞닿은 성곽 남쪽에는 동대문교회가 있었으나 공원 확장을 위해 2014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만 일부 남아 있음)

근래에 조성된 공원이라 성곽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도심 속의 소중한 쉼터로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는 돋보이며, 낙산의 남쪽 관문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낙산 나들이를 벌이
는 것도 괜찮다. 또한 공원 북쪽에는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있는데, 그 안(1~3층)에 2014년 7월
31일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담겨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은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박물관으로 서울 도심의 갑옷이던 한양도성의 모
든 것을 담고 있는데, 1915년 왜정에 의해 가루가 되버린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유일한 흔
적인 돈의문 현판(1749년에 제작됨)이 100년 만에 처음 외출을 했다. 그밖에 동대문 추녀와 지
붕에 달던 용머리와 잡상(雜像) 8점, 한양도성을 돌며 촬영한 순성(巡城) 체험 3면 영상 등이
있으며,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9월 14일까지 남산 회현동(會峴洞)과 남산도서관 주변에서 발굴
된 유물과 성돌, 발굴 성과를 다룬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었다.

★ 한양도성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10월 기준)
* 관람요금 없음
* 관람시간 : 평일 9시~21시 /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 9시~19시 (겨울은 18시까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를 나오면 흥인지문4거리이다. 여기서 성곽이 보이는 동
  북쪽(10번 출구는 동쪽)으로 건너가면 동대문성곽공원으로 공원 북쪽에 박물관을 머금은 서울
  디자인지원센터가 있다. (박물관은 내부 1~3층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70-6 (율곡로 208, ☎ 02-2152-5800)


▲  동대문성곽공원 정자(亭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1칸짜리 조촐한 정자로 이름은 아직 없다.
그 흔한 이름 현판도 없음..

▲  낙산으로 인도하는 한양도성길 (동대문성곽공원 북쪽) ▼

※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한양(漢陽)의 듬직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국도(國都)를 개경(開京)에서 남경(南京)이던 한양으
로 천도했다.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은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우선 경복궁과 종묘(宗廟
), 사직단(社稷壇)을 1395년까지 완성한 다음, 1396년 1월 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한양성곽 코스는 정도전이 모두 짰으며, 수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이라 불
리는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모두 끼고 돌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총 59,500자
(18.2km)로 고려의 국도인 개경보다는 형편없이 작은 수준이며, 평지에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세웠다.
도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 징발령(徵發令)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
을 완공했고, 농사철에는 축성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사를 지
어야 뜯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에 79,400명을 징발
하여 다시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만들어 도성 축조
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1422년 1월 전국에 약 32만 2천명을 동원하고 기술자 2,200명을 소환해 보수 공사
를 벌였다. 그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성곽 보수 공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이라 추앙을 받는 세종이지만 꽤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
에 사망한 인부가 872명에 달했으며, 그렇게 피와 땀을 바쳐 완성시킨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이다.

세종 때 피나는 업그레이드 작업으로 도성은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추게 되었으며,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
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져나서 20세기까지 붕괴된 적
도 없고,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된 것은 제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쪼잔한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평양(平壤)으로 서둘러 줄행랑
을 쳤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앞장서서 도망치니 누가 도성을 방어하겠는가? 그래서 왜군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는 정도로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아무리 도성을 단단하게 만든 들 무능
한 집권층 앞에서는 그 성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나 수성전(守城戰)이 없던 탓에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
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양을 에워싸며 위엄을 드러낸 한양성곽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
던 1899년 이후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1899년 조선황실은 미국(米國)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을 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
들었다. 콜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잠든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가시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주청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하여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동대문과 서대
문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를 만들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랐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統監府)는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
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한양성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으
며, 1910년 이후 서울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성벽 곳곳을 잘랐다. 그래서 서대문<
돈의문(敦義門)>과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이 사라지고, 동소문이 있던 고개는 그 고개마저 깎
여 도로가 생겼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또한 어둠의 시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6.25가 터지면서 왜정(倭政) 때 이상만큼이나 무거운 상처
를 입었으니, 이때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성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
하문) 등이며,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과 숙정문은 홍예문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성
벽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 장충동, 성북동 등 산 중턱만 남았고, 시가지 쪽은
대부분 녹아버렸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안고 쓰러진 성곽을 뒤늦게나마 1975년 복원사업을 벌여 광희문과 숙정문
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 10.5km를 수리했다. 이후 형체도 없이 사라진 동소문을 다시 일으
켜 세우고, 사라진 부분의 성곽을 조금씩 복원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또한
근래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긴 탐방로를 만들어 인기가 대단한데, 북악산 주변
과 인왕산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공원, 서울시 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
교, 장충체육관~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성북동 서울과학고 북쪽)

예전에는 한양도성을 서울성곽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한양성곽이라 부른다. 허나 서울
성곽이라 불러도 별 무리는 없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서울이란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
한토막이 전해온다.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국도로 삼고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데 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에 따라 성곽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몽골의 서울은 울란바토르' 이런 식으로 말이다.


▲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한양도성 (이화마을 남쪽)

▲  이화마을 남쪽을 지나는 한양도성

▲  이화마을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창신동(昌信洞)과 숭인동(崇仁洞), 신설동을 비롯하여
멀리 아차산(阿且山) 능선과 남한산성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에 둥지를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벽화 및 달동네의
성지(聖地)로 크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 이화(梨花)마을

▲  이화마을 옆구리로 흘러가는 한양도성

서울에 있는 마을 가운데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마을은 어딜까?? 아마도 북촌한옥마을(북촌)
과 이곳 이화마을이 아닐까 싶다.
이화마을은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의 달동네로 행정 구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梨花洞
)이다. 조선시대에는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던 한양도성의 외곽으로 마을이라고 해서 시골마을이
나 산골 마을은 아니다. 그냥 낙산 남쪽 자락의 이화동 달동네를 이화마을('이화동 벽화마을'이
라 불리기도 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향기가 깊게 서린 산동네(달동네)로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서
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조성된 달동네의 하나이다. 주황색 기와의 조
그만 집과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산동네를 이루었는데, 그곳에서 서민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조금씩 싹틔우며 힘겹게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제법 비중을 이루며 형성되던 달동네는 199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조가 바뀌고 달동네의 초췌한 집 대신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 등
이 그 자리를 채워나간 것이다. 이화마을 역시 이런 세월의 변화는 감히 거스를 수가 없어 주황
색 기와집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나 지붕 색깔과 집 외형만 조금 바뀌었을 뿐, 동네 구조와 가옥
구조, 주민들의 삶은 거의 그대로라 달동네의 모습은 아직 여전하다.

어린 시절을 달동네(금호동, 약수동)에서 어렵게 살았던 본인인지라 이곳에 들어서니 정감이 참
많이 간다. 그 시절 온갖 추억을 소환하는 빛바랜 일기장 같은 곳, 이곳을 거닐면 나의 어린 시
절의 모습, 또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까지 두근거린다. 달동네를 누비며 위엄을
날리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꿈은 얼마나 실현이 되었을까? 당시의 순수함은 얼마나 남아있을
까? 지금 나는 어떠한가? 등등 어렸을 때를 바탕 삼아 잠시 나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곳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급하게만 변해가는 세상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의 거친 흐름도 이곳만
큼은 고삐를 늦추며 천천히 흘러간다. 1960~8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에 힘겹게 둥지를 튼 이들
의 초심이 서린 곳이라 세월도 이곳에선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번잡한 도심이 바로 밑이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도심을 비웃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  이화마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타워

이화마을이 속세에 이름 4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마을을 수놓고 있는 그림 때문이다. 2006년 서
울시에서 'Art in City 2006'이란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소외된 지
역의 시각적인 환경을 개선하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이화마을을 점찍고 '낙산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래서 70여명의 작가들이 찾아와 집과 담장,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
는데, '남의 집 벽에 뭐하는 것이야?' 반감을 가지던 동네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동네의
역사와 동네 주민들의 옛 기억, 풍물, 희망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림에 반영했다. 그렇게 하여
우울한 흑백 분위기에 이화마을은 그림을 품은 색채감 돋는 벽화마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저 하얀색과 회색, 주황색 기와가 전부이던 우중층한 동네에 알록달록 색깔을 머금은 그림을
입혀놓으니 동네가 확 달라보이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희망 어린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진 마을로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속세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늘어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이 나게 찾아오면서 이제
는 서울의 이름난 명소로 크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곳을 시작으로 벽화마을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달동네나 시골마을을 대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벽화를 머금은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인왕산(仁王山) 북쪽
에 누운 개미마을이란 달동네가 있는데, 그곳도 벽화마을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고, 근래에
는 성내동(城內洞) 주택가에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되어 벽화마을의 유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화마을은 전국에 벽화란 불을 지핀 벽화마을의 성지인 셈이다.

마을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가파른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어 오르락내리락이 여간 힘들지 않
다. 게다가 벽화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그
림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진쟁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관광객과 사진쟁이의 방문이 늘다보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과도 조금씩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제 예로 2012년에 어느 유명 가수가 마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겠다며 사람
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동네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지운 일이 있었고, 마을 분위기를 사진에
담는다면서 남의 집을 침범하거나 골목길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등의 민폐가 종종 발생한다. 사
람들은 오로지 벽화와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는 것에만 혈안이 되있을 뿐, 이화마을이란 동네와
그곳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어
찌보면 현대판 민속마을인 셈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늘어나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 관광객을 수입으로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탓이다. (겨우 동네 구멍가게와 찻집/까
페, 장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있을 뿐임)

단순히 이화마을을 목적으로 오는 것보다는 낙산(낙산공원) 나들이의 일부로 살펴보는 것을 권
하는 바이다. 벽화와 달동네 풍경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벽화와 마을을
목적으로 왔다면 은근히 허기질 수 있으니, 이화마을을 품은 낙산 일대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
을 것이다. 낙산 자체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니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이화장을 비롯해 낙산에
안긴 여러 명소와 한 덩어리로 둘러보길 바라며, 이화마을 자체가 달동네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달동네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좋은 타임머신이 될 것
이다.

이화마을은 현재 재개발지역에 들어있다. 다행히 마을을 뒤덮은 벽화가 유명세를 타면서 개발의
칼질도 고개를 숙였지만 벽화가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다. 개발을 하더라도 마을 사람
들과 벽화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최적의 답안을 찾아 서로가 좋은 방향으로 개발을 했으면 좋
겠는데, 많은 것들이 잘못된 이 나라에서 그런 것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다.


▲  이화마을의 새로운 명물, 이화마루 텃밭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낙산으로 가다보면 성곽 쪽에 이화마루 텃밭이란 작은 공원이 나타
난다. 도심 속에 왠 텃밭?? 집이 다닥다닥 여유도 없이 들어찬 이런 곳에 조촐하게나마 밭이 있
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이화마루 텃밭은 이화마을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대에 자리한 공간으로 작은 밭과 평상, 의
자, 정자나무 4그루, 상자텃밭이 전부인  조그만 공원이다. 이곳은 원래 집 2채가 있었는데, 철
거되어 짜투리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 잉여 공간이 이렇게 참신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 건국대 건축학부 동아리인 'FAS(외부공간) 프로젝트 그룹'에서 건축계의 최대 관심
사인 '녹색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텃밭'과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을 주제로 선정했다. 그들
은 서울의 달동네나 낙후 지역에 텃밭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 이화마을을 선정했다.
마침 동네 정상부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바로 이곳으로 집 2채가 철거되어 버려
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텃밭을 닦기로 했으나 문제는 집의 잔재를 비롯한 쓰레기가 무려 35
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팀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150만원의 처리 비용
을 마련했지만 그들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팀장은 방법을 찾다가 작년 폭설로 동주민
센터에 3,000여 개의 삽이 지원되었다는 것을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화동주민센터를 찾았다.

허나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그들의 제안서에 '대학생들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부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다행히 설득이 되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작업에 들어갔고, 종로구청에서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또한 환경미화원과 동네 주민들
도 나와 그들의 프로젝트를 거들었다. 팀원들은 아침 8시부터 모두 나와 12시간 넘게 쓰레기를
치웠고, 그로 인해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작업 기간은 3달로 크게 늘어났다.

쓰레기를 치운 이후 팀원들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허나 그 프로젝트가 팀원과 종
로구청, 마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전체적인 공간
구성과 조화를 더 우선시했지만 구청은 텃밭을 우선시 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려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주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해 9월, 텃밭과 주민들의 소중한 공원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팀원들은 이곳이 이화마을의 꼭대기라하여 '이화마루'란 이름을 붙였고, 마땅한 쉼터와 나무가
없던 마을에 소중한 오아시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촐한 갤러리도 조
성되어 문화공간의 역할도 종종 겸하고 있다.


▲  이화마루 부근에 있는 흑백 벽화
벽화 속에 또다른 달동네가 담겨져 있다.

▲  이화마루 동쪽에 있는 성곽 암문(暗門)
성 내외를 이어주는 문으로 동대문과 낙산공원 사이에 2곳이 있다.

▲  이화마을 언덕 골목길 - 어린 시절 저런 골목길을 많이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게 누적되다보니 저런 길을 오르는 것도 힘들다.

▲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이화마을의 막다른 골목길

▲  하트 풍선을 든 토끼와 곰탱이의 표정이 썩 밝아보이진 않는다.
온갖 경쟁과 세상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적(경쟁자)과 공존해야 되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은 아닐까...?

▲  이화마을의 백미(白眉), 꽃계단

이화마을 중간 부분에 있는 꽃계단은 흔히 볼 수 있는 달동네 계단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그 밋밋한 계단에 어여쁜 꽃잎을 그려놓으면서 이제는 이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귀한 존재가 되
었다. 마을에 널린 다른 벽화는 크게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이 꽃계단만큼은 정말 인상이 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기념 촬영에 임하느라 부산한데 비록 사람들이 유화로
그린 그림이지만 자연산 꽃잎에 못지 않게 화사하다. 그들의 방긋~♪ 웃는 모습에 속세에서 오
염되고 상처받은 마음마저 싹 정화되는 듯 하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 우울한 환경이지만 꽃계단 꽃잎의 응원에 힘입어 다들 귀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모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 이화마을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 있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12분 정도 오르면 이화마루 텃밭이 나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곽 안쪽 동네가 이화마을이며,
  여기서 서쪽(대학로 방향) 골목길로 내려가면 다양한 벽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 서울시내버스 102, 107, 108, 301, 7025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화동(이화장) 하차, 동대문 방
  면(동쪽)으로 조금 가면 산쪽으로 난 율곡로19길이 나온다. 그 길을 올라가면 이화마을이다.
* 이화마을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크게 떠드는 등의
  민폐는 삼가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0번지 (율곡로19길, 낙산성곽서길)


♠  좌청룡(左靑龍)을 타고 서울 도심을 굽어보다 ~ 낙산(駱山)
(낙산공원, 한양도성 산책로)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
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하며,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都城)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
기서 내4산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자리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342m)>과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에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에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들
중에 낙산이 가장 부실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지만 꽤나 알차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호랑이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
산 못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허나 낙
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같은 언덕이다. 옛 사람
들이 신봉했던 풍수지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착한 산은 아니다.
그래서 한양을 서울로 삼은 조선은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낙산 남쪽에 있는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지만 낙산 동쪽은 보문동 방향
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
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
축하진 못했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임>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
히 다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앞다투어 낙산에
정자와 별장, 거처를 짓고 살았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조선 후기 문인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
묵객들이 자주 발걸음을 하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명한 이수광(李睟光)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의 애환이 서린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
위가 많았던 쌍계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
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
다투어 안겨져 있었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
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절 보문사(普門寺), 구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있다.

낙산 정상에 깔고 앉아 산의 미관을 크게 망치던 낙산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정상 주변
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닦았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
해 2002년 6월 완공되었는데, 다양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의 편익시설,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마당, 3개의 전망광장,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갖추고, 소나무를 비롯한 15만 그루의 식물
을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처이자 답사/나들이/데이트
장소의 성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공원 면적 201,779㎥)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
곽이 잘 남아있다. 1999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무책임하게 희생된 낙산을 조금씩 되살리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여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
부 탐방로는 동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1리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
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전구간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
역(6호선)과도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
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동쪽을 제외
하고는 주변이 거의 평지라 조망도 그런데로 일품이다. (도심과 북쪽 방향의 조망이 좋음) 특히
서울 도심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대단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 이르
러 성곽길이 지루하다면 서쪽으로 대학로(마로니에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도 되고, 동쪽으로 창
신동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
동천),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등의 명소가 있으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리가 조금 있
지만 동망봉, 청룡사,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 명소까지 겯드린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4거리(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한성대입구역(4호선)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20분 (4번 출구를 나와서 2~3분
  정도 가면 한양성곽과 탐방로가 나옴)
* 혜화역(4호선) 2번 출구에서 마로니에공원 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낙산공원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도보 10분
*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에서 종로03번 마을
  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까지 도보 16분)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743-7985~6)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앞에 혜화동(惠化洞)을 비롯해 명륜동과 성북동(城北洞), 북악산과 북한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2)
혜화동과 서울대병원, 창경궁, 창덕궁,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안산(鞍山) 등이 바라보인다.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3) - 혜화동과 원남동, 종로 지역

▲  낙산정에서 바라본 천하 (4) - 종로와 중구, 남산

대학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낙산정은 2002년에 지어진 조촐한 정자이다. 비록 고색의 내
음은 익지도 않았지만 4대문 안 서울 도심은 물론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 등 서울의 내
4산이 모두 바라보여 조망도 제법 일품이다.


▲  낙산공원 종로03번 마을버스 종점

빈틈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이 여기서 잠시나마 끊긴다. 그 사이로 마을버스가 귀여
운 뒷태를 선보이며 바퀴를 멈추고 쉬고 있다. 이곳은 예전 낙산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저 길로
나가면 창신동과 비우당, 숭인동 방면으로 이어진다.


▲  낙산공원 정상부 (놀이마당 주변)

▲  낙산공원 놀이마당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혜화동과 종로구 일대)

▲  낙산공원 마크와 동소문 방면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 방면 한양도성과 성곽 바깥 탐방로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1)
혜화동과 명륜동, 성북동, 북악산 줄기와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한양도성 (2)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덤으로 북한산까지)


▲  성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동과 돈암동, 한성대(오른쪽 건물들)
낙산공원에서 동소문 구간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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