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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明倫洞) 겨울 나들이 '

▲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층층이 이어진 후원 돌담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監査院)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서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교 후문이 나온다. 이들을 지나면 길이 서서히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
진 창덕궁 후원 돌담이 오른쪽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펼쳐져 있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그 사이에 소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경계선 역할을 하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
다. 또한 담 너머로 삼삼한 숲의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한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입구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과연 넘어가는 길이 있을까?' 주
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곱게 접어 후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계속 길을 재
촉하길 바란다. 이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숲길(산책로), 창덕궁 후원 뒷길(후
원 뒷길, 후원 돌담길)이다.


▲  후원 뒷길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부근)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돌담 수구문(水口門)

▲  새롭게 손질된 돌담 - 오래된 돌담 사이에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 오른쪽
으로 가면 나머지 후원 돌담길이 펼쳐지고 (직선으로 가도 상관 없음) 왼쪽으로 가면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다.

이곳 돌담길은 야트막한 고개로 흙길이라 상태라 조금 울퉁불퉁하다. 돌담 바로 옆구리로 돌담
을 어루만지며 갈 수 있는데, 그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내리막 길이 펼쳐지고, 돌담 너
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원이 살짝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성균관대(成均館大)
건물이 진하게 보이는데, 그 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
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르게 된다.

후원(後苑)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을 기준으로 성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까지 1리 남짓 거리다.
바로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으로 넘어가는 와룡고개 밑부분으로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 와서 그렇지 봄이 무르익은 4월 이후나, 여름의 한
복판, 늦가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 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산길이다.
 
내가 후원 뒷길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2011년 말, 그 이전에는 이런 숲길이 있다는 것도 몰랐
다. 후원 북부에 워낙 통제구역이 많다 보니 와룡고개와 후원 사이 무성한 숲에는 국가의 예민
한 시설들이 숨겨져 있어서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이 강한 나
도 그 공간은 애써 들어갈 생각을 못했는데, 알고 보니 언제든 안길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허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 외에도 많을 것이다.
한때 비원(秘苑)이라 놀림 받았던 창덕궁 후원은 3살짜리 어린 애도 다 아는 대중적인 명소이지
만 후원 뒷길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서울 도심을 두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고갯길, 와룡고개도
사람과 차량의 통행은 많지만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  후원 뒷길 고개 -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이곳은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기도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급격히 내려가는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며 숨겨진 후원 돌담은 근래에 보수를 하여 무너지거나 낡은
부분은 새로 만들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쪽 구역은 후원 특별 관람 때 들어갈 수 있
는 비싼 구역으로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고,
후원 북문인 북문(북장문)도 볼 수 있다. (북문과 태극정 주변 숲은 통행 불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은 밋밋한 시멘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이나 철책이 생기면
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
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
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
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후원 뒷길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성대 법학관 앞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과 성대 돌담, 그 사이에 생긴 틈
사람이 다가서기 힘든 틈 속에는 낙엽이 가득 널려 그들의 마지막 세상을 열어간다.

▲  후원 담장 너머로 애타게 바라보이는 후원 태극정(太極亭)
태극정 부근에 소요정(逍遙亭)과 옥류천(玉流川)이 있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후원 북문(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로 통하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
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담장 중간에 여닫는 문
짝을 만든 것이 고작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 창덕궁
에서 고종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과 왜군은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군의 공격에 후원
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
길을 거쳐 도망쳤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랐다. 단 홍영식
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로 들어갔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 8번 출구)이나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을 타고 감사원 하차, 고려사이버대학교 쪽으로 쭉 들어간다. 안국역에서 도보 20분
* 성대입구(명륜3가) 정류장에서 성균관대 교내를 거쳐 법학관과 대운동장 쪽으로 가도 된다.
* 후원 돌담은 굳이 넘으면 안되며, 북장문 주변 돌담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명륜동(明倫洞)에서 만난 조촐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성균관로 17길'을 따라가면 하마비와 함께 흥
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나란히 반긴다.

내 정보에는 전혀 없는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태종 1년) 태조 이성계가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로 삼으면서 크게 성장했으며, 왕실의 사찰로 법등(法燈)을 두툼하게 유지했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유물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
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에 도중에
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
을 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
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그 이듬해 1883년 이곳에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그가 관우 사당을 요청한 걸 보면 아마도 관우를 중심 신으로
받들었던 모양이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오래된 허접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주요 인물로 촉나라를 세운 유비(劉備)
의 의제이다. 의형과 의제(장비)를 따라 사내들간의 돈덕한 의리를 남기며, 대륙을 누빈 인물이
나 220년 손권(孫權)의 수하인 여몽, 육손에게 보기 좋게 패해 그가 지키던 형주(荊州) 지역을
모두 잃고 그 자신은 손권에게 처단되고 만다.
이후 관우 신앙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점차 유교에 버금갈 정도로 대륙의 주요 민간신앙
으로 흥행했는데,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
구하자 명은 수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는 관우
열성 신자가 많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
蔚山城)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아마도 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 쉬고 있었다. 그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
)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면
서 금 4,000냥을 보내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제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
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장소를 급히 물색하다가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
이 국립 관우 사당 1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
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  북묘 하마비

1883년에 명성황후가 지은 북묘는 그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은 왜군과 협조
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과 박영효, 서
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북촌을 거쳐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치고, 그들과 작
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군사 7명과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씨
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광학교(東
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서
옮겨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었으
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南山) 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
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현재 서울 장안동에 있음)도 그 자리의 일부
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현재는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이나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
조리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뻥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시에서 관
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생각하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있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曾朱
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꽤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4자의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동쪽에 있는 서울과
학고등학교 교정에 '금고일반(今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간 이후, 증주벽립 바위글씨 주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
렸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는데,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
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설처럼 사라
지고,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도 정말 딱
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가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하게 자행
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보기도 흉한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혹여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
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
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방문화재로 지정되
지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
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이 바뀌었다.


▲  가까이서 본 증주벽립 바위글씨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
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그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 호는 우암(), 화양동주()로 1607년 충
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바로 그만뒀으며, 1635
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게 도망쳤
으며, 1637년 1월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항복하자 열받은 나머
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
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
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나라 조정
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우
리나라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인 북벌(北伐)을 도왔
으나 아쉽게도 이듬해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의 복상문제(
)가 발생하자 기년설(: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葬地)
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
정(左議政) 허적()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하고 이듬해 좌
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설
(: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면서
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가 되었으며, 1683년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
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과 감
정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패거리로 분열되
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
(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에 집
을 짓고 살았으며, 유교(성리학, 주자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자가 참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
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언
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허무맹랑한 유언을 남
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의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준
으로 커진 탓이다. 동아시아의 약소국이자 호구 국가였던 신라(新羅)도 당나라에 저렇게까지 하
지는 않았는데,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 이상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
내니 참 할말을 없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또는 백제와 부여국(夫餘國)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
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은
섬나라 왜국에까지 밀렸다. (조선 중기부터 밀렸다고 보면 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휴유증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
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재이니 감
히 해꼬지는 어렵다

※ 송시열집터, 북묘 하마비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
  민생활관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종로 08번 하차 기준, 종로07번은 오른쪽임)으로 올림픽기
  념국민생활관 서쪽 담장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
  쪽으로 2분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가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정문 곁에 있는 송시열집터 표석
송시열 집이 쓸데없이 넓었던 모양이다. 증주벽립에서 여기까지 200m나 되니 말이다.
아니면 표석의 위치가 어긋나있을 수도~~ (위치가 틀린 옛터 표석도 은근히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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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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