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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 나들이 '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 남산 N서울타워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도심

   

 


 

나의 어린 시절 진한 추억이 서려있는 서울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문득 그의 품이 그리워
꼬마 시절의 흐릿한 추억도 잠시 소환해볼 겸, 간만에 남산을 찾았다.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정말 다양해서 취향에 따라 골라 잡으면 된다. 이번에는 나의 첫 동
네였던 약수동(약수역)에서 남산 나들이의 첫 단추를 여밀었는데, 약수역과 동대입구역(장
충동) 중간 고개 정상부에 두 골목길(동호로17길, 동호로20길)과 만나는 4거리가 있다. 그
왼쪽(남쪽) 골목길(동호로17길)에 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이 눈짓을 보낸다.


 

♠  한양도성(漢陽都城) 장충동 지구 - 사적 10호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1)

다산동(옛 신당2동, 신당2동과 3동 일대를 약수동이라 불렀음)과 장충동(奬忠洞) 경계에 자리한
성곽을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문화재청에서 그렇게 부름)라 부른다.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반
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옛 타워호텔) 뒷쪽까지 이어지는 약 1.1km의 성곽으로 왜정(倭政)과 6.25
를 거치면서 도성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무거운 상처를 입은데 반해 이 구간은 그 시련을 잘 극
복하여 옛 도성(都城)의 위엄과 고색의 내음을 짙게 선사한다.
허나 '장충체육관~광희문' 구간과 옛 타워호텔 남쪽 구간이 20세기 혼란기를 틈타 장대한 세월
의 의해 지워지면서 양쪽이 모두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장충동 지구 성곽길은 오랫동안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다가 도보길 유행에 따라 성 바깥에 탐
방로를 내고, 성곽길 또한 모두 해방되면서(신라호텔 구간도 포함) 성 안/바깥 산책이 모두 자
유로워졌다.
이 탐방로는 옛 타워호텔을 거쳐 국립극장, 남산까지 이어지며, 길 중간에 암문이 있어 성곽길
이나 성밖 길로 갈아탈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 한양도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
고 조선이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
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전국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
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무척이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에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
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
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
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래서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원성을 들
어가며 단단하게 지은 도성이었지만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
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던 도성, 허나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
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
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뽐내던 한양도성은 근대
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시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해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벽
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
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괴상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
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고, 1910년 이후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서대문<돈의문
(敦義門)>까지 헐값에 민간에 매각하여 없앴으며,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
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였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발
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문(
城門)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
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
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
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관 동쪽~
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동>
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
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
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곽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
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2)

나의 옛 고향인 약수동(藥水洞) 뒷쪽(서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장충동 지구 성곽은 조선 태조와
세종 때 축성된 성벽이 거의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성벽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성돌은 수백 년
이나 숙성된 고색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까무잡잡한 피부를 이룬다. 그들 사이로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이 군데군데 자리를 닦으며 선배 성돌을 닮아간다.

성 바깥 탐방로 부분은 예전에는 거의 수풀이 무성했고, 성곽길 통제 구역이라 마음 놓고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그 자물쇠가 풀리면서 자유롭게 두 다리를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한양도성을 살펴보면 간혹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공사 구역 표시
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적은 것으로 여기서는 담당 고을
과 구역 정도만 나왔는데, '?海始面' 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모르겠음) 그것을 통해 해로
끝나는 고을 사람들의 공사 구간이 여기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참고로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
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의 암문(暗門)

한양도성은 4대문 4소문 외에도 숨겨진 암문을 여럿 두었는데, 이 암문도 그중 하나이다. 약수
동(다산동)에서 국립극장과 남산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지름길로 약수동에 살던 시절 많이 이용
했던 문이라 옛 친구처럼 무척 반갑다. 여기서 성안 또는 성바깥 탐방로로 바꿔 탈 수 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3)
국내외 졸부들이 많이 자고 가는 붉은 색의 신라호텔이 바라보인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 (성곽마루 입구)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시작된 장충동 지구 성곽은 옛 타워호텔 뒷쪽에서 뚝 끊기면서 성곽 탐방
의 흥을 깨뜨린다. 성곽은 남산을 거쳐 북악산까지 내달리고 싶으나 옛 타워호텔과 장충단고개
구간이 복원되지 못해 여기서 옆구리를 보이며 강제로 길을 접고 만 것이다.

이곳에서 성곽길로 갈아타 다시 장충체육관 방면으로 이동해도 되고, 옛 타워호텔 뒷쪽으로 난
산책로로 국립극장 방면으로 넘어가도 된다. 그리고 남쪽에는 성곽마루란 2층 정자가 있으며,
동쪽은 약수동(다산동) 주택가로 6호선 버티고개역과 이어진다.


▲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
내 인생의 거의 40% 가까운 시절을 보냈던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약수동도 그렇고 옛 신당3,4동 지역은 달동네의 정석을 보여주던 동네였는데
개발의 칼질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  성곽 탐방로 (남쪽 종점 주변)

▲  성곽마루 2층 정자(亭子)

성곽마루는 약수동(다산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다산동 주택가 바로 뒷쪽이다. 성곽
탐방로를 닦으면서 새로 지은 정자로 이곳에 오르면 남산 동부와 신당동, 약수동, 한남동, 장충
동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新堂洞) 지역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한남동(漢南洞)과 용산구 지역

▲  지워버려야 될 남산의 옥의 티
졸부들이 몸을 푸는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
(옛 타워호텔) 운동시설

▲  타워호텔 남쪽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넘어가는 탐방로


▲  저만큼 멀어진 성곽마루 정자

성곽마루 입구에서 나무로 만든 탐방로를 따라 가면 옛 타워호텔 경내로 이어진다. 지금은 외우
기도 어려운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로 간판을 갈아서 그 이름만 봐도 적지 않게 눈과 머리를
고달프게 한다. 이름도 외우기 힘들고 말이다,
이곳은 이 땅에 잘나가는 고급 호텔로 졸부들의 낙원과 같은 곳이라 그 이름만큼이나 유쾌한 곳
은 아니다. 한복을 매우 싫어했던 신라호텔과 나란히 손 잡으며 남산의 경관을 해치고 있는 옥
의 티로 도성과 남산 숲 복원을 위해서는 언젠가 쿨하게 지워야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립
극장도 마찬가지이나 여긴 대중적인 공간이니 봐주자~!)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옛 타워호텔을 지나 국립극장교차로에 이르니 온갖 나들이객들로 길거리가 북새통을 이룬다. 우
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뎅과 번데기 등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 다음, 성난 파도처럼 몰려드
는 인파 속의 하나의 점으로 묻혀 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남산둘레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인데,
북쪽 길은 남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수레의 바퀴 자국을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거의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삼국지의 주요 인물인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와룡묘(臥龍廟)가 있다.
그리고 남쪽 길은 남산 정상과 N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
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되면서 '국립극장→남산 정상 밑→남산도서관' 방
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서식했던 어린 시절, 가족 또는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상춘약수터) 입구까지 차
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갈림길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장으
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조금은 옳지 못하지만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고 해서 몇 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산의 건강과 도보길 활성화를 위해 도로 폭의 1/3 정도를 잘라서 뚜벅이길을 닦았고 차
량 통행에도 크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
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02,03,05번)와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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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공원길 (서울타워 방향)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다시 모습을 비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여기서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밑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
까지 보다 빨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도로로 가는 것보다는 짧은 거리이고 제일 최근에 개방된 남산의 따끈한 속살 부분이라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성곽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
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으니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 의해 냉수마찰이
라 불리는 샤워를 받곤 했다. 특히 겨울에도 그랬었지.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감기가 안걸린
다나..?
예전에는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서울에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서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차츰 사
라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산 정상까지 가다보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전망대 2곳을 만날 수 있
다. 이들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과 동작
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대모산 등이 사이좋게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
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낙타산)과 더불어 한
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백
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 보면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찾는 휴
식처이며, 경주 남산(468m)과 충주 남산(663m) 등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
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하며, 그 외에 인경산(引
慶山),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리기도 했다.
1395년 태조는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
祠)를 남산 정상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
고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
에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
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은 악명
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비
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
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開化期)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
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고,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이던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으니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쓰레기 잡귀들로 바뀌고 말았다.
왜정이 남산에 남긴 잡다한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
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긴 채, 1945년 8월 패전 당시, 연합군에 살려달라며 비굴
하게 굴던 왜왕(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
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
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인 서
울타워(남산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이름을 N서울타워로 갈았다.


▲  남산공원길 (아랫전망대와 윗전망대 사이)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악
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많은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남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
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남산이 베푼 약수터가 뿌리를 내리며 나그네의 목을 축여주고 있는데, 그중에
서 부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
라진 상태이다. 그외에 많은 약수터가 있으나 도심 속에 있다는 단점으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
다. 이미 몇몇은 부적합으로 문닫기 직전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과 여러 갈래의 계단길, 숲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공원에서 정상 동쪽
까지, 남산도서관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그외에 남산1호터널과 필동, 후
암동(厚岩洞), 남산야외식물원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길 외에는 모두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
의 접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
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
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N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산책.나들이 명소 및 조촐한 등산 명소로 나날이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서울에 오면 꼭 가야 되는 서울의 상징적인 명소로 외국인 관광객까지 날을 가
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든다. (서울을 찾은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
단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 인왕산, 조선 왕궁과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의 옛 추억이
수십 권씩 녹아있는 살아있는 일기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신당동과 금호동 시절 물을 뜨러 온 횟수만 수백 번이 넘고, 친구들과도 지겹도록 올랐다. 그때
는 오로지 두 다리로 돈 한푼 없이 남산 정상과 약수터를 오갔지. 무일푼으로 갔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남산이 베푼 약수와 청정한 기운 뿐이다. 그래도 그때는 참 가슴이 찡할 정도로 재밌
었고 행복했었지. 지금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남산에 안겨도 그때의 기분과 행복은 절대 재현
하기 힘들다.
어린 시절 그렇게나 안겼던 남산은 나이를 먹으면서 그 애정도 푹 식어버렸다. 그나마 요즘 들
어 방문 횟수가 조금 늘긴 했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2~3번도 갈까말까였다. 아마도 옛
시절에 지겹도록 안겼던 탓은 아닐까?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한남동과 보광동, 이태원, 강남, 관악산 산줄기, 국립현충원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동작구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후암동, 용산구, 마포구, 여의도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N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과연 어떻게 만들었을까?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3, 05번 종점)에 이르니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
시내로 내려가는 사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룬다. 시내버스와 관광버스
가 멈추기가 무섭게 무수한 사람들을 뱉어내면서 그 시장통을 더욱 부추긴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없음)
이곳에서 무수한 인파의 물결을 뚫고 경사가 좀 각박한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과 서울타워이며, 서남쪽 남산공원길을 내려가면 남산도서관과 소월길로 이어진다.

※ 남산 정상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6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으로 돌아가면 4거리 남쪽, 국립극장
  방향에 정류장이 있음)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국립극장(남산, 한남동 방향 정류장)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2번 출구)에서 02,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
  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
  하차, 정상까지 도보 25~30분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9번 출구에서 03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서울역버스환승센터(9-1번 출구
  )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 장충단공원(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도보 50~60분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필동, 예장동, 회현동 / 용산구 후암동, 한남동 등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야외식물원(야생화공원)까지

▲  남산 팔각정(八角亭)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N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 등이 있다. 그 현장에서 남북으
로 펼쳐진 일품 조망을 누려본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로 인도하는 탑처럼 하늘 높이 솟은 N서울타워는 초등학교 시절 2~3번 가
본 인연이 있다. 허나 그 이후로는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정상까지 오더라도 그저 타워
밑에서 좀 맴돌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도 해도 미친 입장료로 딱히 땡기지도 않는다.

N서울타워와 남산봉수대 사이에 자리한 팔각정은 서울타워와 함께 남산을 빛내는 보석의 하나다.
이곳에는 1959년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치켜세우고자 그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
는데, 1960년 4.19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의 팔각정
을 본 따서 지금의 팔각정을 지어 남산타워를 수식하는 존재로 삼았으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
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팔각정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늘 머물고 있
으며, 정자 자체는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나 N서울타워, 봉수대와 더불어 남산 꼭대기를 수식
해주는 남산의 주요 상징물이다.


▲  남산서울타워 종점 남쪽 한양도성과 오솔길

정상이란 자리에 오래 머물러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적당히 있다가 내려와야 뒷탈이 없다.
이번에는 남산도서관 방면 대신 오던 길로 내려가 남산야외식물원으로 길을 잡았다.

남산공원길 윗전망대를 지나면 야외식물원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살며시 손을 내민다. 남산에서
는 별로 없는 흙길로 남쪽 자락에 조성된 소나무숲을 지나가는데 그 길을 7~8분 정도 내려가니
남산야외식물원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남산야외식물원

소월로와 접한 남산 남쪽 끝에는 남산야외식물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에는 외인아파
트 2동이 남산을 건방지게 가리며 흉물스럽게 있었는데, 1994년 그 아파트를 쿨하게 밀어버리고
9,811㎡ 부지에 야생화공원을 닦으면서 남산야외식물원은 시작되었다. 즉 아파트의 희생으로 태
어난 신선한 공간인 셈이다.

1995년 전국 광역단체 시도에서 옮겨온 소나무 80그루로 팔도소나무숲을 닦았으며, 1997년 2월
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이 땅의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 185종과 나무
93종을 심었고 생태연못을 조성했다.
야생화공원을 포함한 공원 면적은 59.241㎡, 품고 있는 식물은 10여 개의 주제(죽림원, 알뿌리
식물원, 설화/연료식물원, 양치/음지식물원, 팔도소나무단지, 서울시보호식물원, 화목원, 남산
자생식물원, 나무밑 야생화원, 음지식물원, 4계절야생화원, 약용식물원, 향기식물원, 생태연못
등)로 나눠 배치했으며, 현재 식물 269종 117,132주가 심어져 거대한 야외식물원을 이룬다.

이곳 야외식물원의 중심은 야생화공원이며, 그외는 그냥 자연공원이다. 숲이 짙고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으며, 야외식물원이라고 하여 입장료를 받거나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절대 아
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이다. 이처럼 좋은 곳을 이제서야 오다니! 남산을 안방
처럼 들락거린 나인데, 그동안 등잔 밑이 어두웠던 모양이다.


▲  주말 오후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남산야외식물원 산책로

▲  야생화공원 산책로 갈림길

▲  대나무 잎소리가 사각사각 속삭이는 죽림원(竹林園)

▲  전국에서 가져온 소나무의 안식처 팔도소나무단지
남산이 소나무로 유명하다보니 천하에서 80그루의 소나무를 소환해
이렇게 소나무단지를 닦았다.

▲  솔내음이 속세에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팔도소나무단지

▲  팔도소나무단지의 상징, 정2품송 맏아들나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이 땅의 소나무 가운데
단연 스타급의 존재이다. 그 나무가 서울에 살짝 아들을 두니 그가 이곳에 있는 정이품송 맏아
들나무이다.
정2품송의 씨앗을 이용하여 심은 그의 첫 후손 나무로 2010년 4월 5일 식목일에 서울시장과 산
림청장 정광수가 식재했다. 지금은 비록 10살도 안된 나이라 많이 초라하지만 기백(幾百)의 세
월이 흐르면 그 아비처럼 멋드러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내 생애의 그가 어
른이 되는 모습은 볼 수가 없구나.. 사람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나무보다는 생명줄이 훨씬 짧
으니 말이다.


▲  생태연못으로 인도하는 생태계곡 산책로
야외식물원 서쪽에는 2002년에 지어진 생태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서 발원한
조촐한 계곡이 싱그러운 자연을 머금으며 세상으로 흘러간다.

▲  생태계곡의 으뜸 양념, 물레방아의 위엄

▲  수중식물과 개구리가 마음껏 나래를 펼치는 생태연못

2002년에 조성된 생태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해 많은 수중동물/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식물이 너
무 무성해 마치 자연 속의 늪지대를 보는 듯 한데 연못은 조촐한 크기로 주변에 산책로와 나무
데크길이 놓여져 있으며, 연못 중간에 나무 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생태연못을 끝으로 남산 나들이는 이렇게 막을 고한다. 남산야외식물원은 마치 주마등(走馬燈)
처럼 둘러보았는데,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다시금
둘러보고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생태연못

※ 남산야외식물원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2번 출구)에서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정류장 바로
  뒷쪽이 남산야외식물원이다.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서울역 9-1번 출구)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현역 중
  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2동 258-148 (소월길 323 ☎ 02-798-3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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