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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 겨울 나들이 '

▲  기기국 번사창


 


겨울 제국이 차디찬 위엄으로 천하를 꽁꽁 얼리던 연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을 찾았
다. 유난히도 매서운 한파였지만 옷만 두둑히 챙겨 입으면 낮에는 햇님의 보우에 힘입어 그
런데로 다닐만하다. 날씨가 춥다고 마냥 집에 박혀있는 것도 그리 좋지는 못하지. 당당하게
겨울 제국에 대항하며 바깥 바람을 많이 쐬야 건강에도 좋고 추위에도 잘 적응이 된다.

서울 도심 속에 자리한 북촌(북촌한옥마을)은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
각산),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매년 적어도 10번 이상 발걸음
을 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그곳에 나만의 꿀단지를 숨겨놓은 것은 아니다. 북촌한옥마을 자
체가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나 마찬가지이니 따로 나만의 꿀단지를 숨길 필요는 없겠지. 다
만 북촌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꿀단지의 질도 틀려지며,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꿀단지
라도 빈 단지가 되고 만다.
북촌 답사의 갑(甲)은 본인이 늘 강조하지만,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북촌8경이나 정독도서
관, 삼청동길 등의 유명 장소와 맛집, 까페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골목 곳곳에 숨겨진 한
옥과 박물관, 공방, 문화유산, 그리고 북촌을 거쳐간 옛 사람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의 삶과 향기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옥과 삶터를 지나치게 건드리거나 뒤집지는 말자. 적당하게
선을 지키며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북촌은 껍데기만 남은 민속마을이 아닌 사람들이 살
며 삶을 꾸리는 살아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살던 집
원서동 고희동 가옥(高羲東 家屋) - 등록문화재 84호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고희동 가옥 외경

창덕궁길이 2갈래로 갈리는 원서동 빨래터 정류장에 붉은 피부의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옥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곳이 바로 2012년 11월에 개방된 고희동 가옥이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희동, 그는 누구일까?

고희동은 제주 고씨 집안으로 호는 춘곡(春谷)이다. 1886년 3월 11일 서울 수표동(水標洞)에서
구한말에 군수(郡守)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91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899년 한성법어학교(
漢城法語學校)에 입학하여 4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다. 바로 그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서양화
를 처음 접했고,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04년 궁내부(宮內府) 주사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 등
을 담당했다. 1905년에는 궁내부 외사과 주사(主事)가 되었고, 전주 조경단(肇慶壇) 공사를 담
당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06년 궁내부주사 판임관(判任官) 4등으로 승서되었고,
1907년에는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고자 그 시절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
진(趙錫晉)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다.
허나 당시 미술계는 동양화 일색이었다. 그런 동양화에 금세 진절머리가 난 고희동은 서양화를
배우기로 작정하고 장례원(掌禮院) 예식관 주임관 4등을 지내던 1909년에 황실의 지원을 받아
왜열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해 이 땅의 사람으로는 최초로 서양화를 배웠다.
당시로는 생소한 서양화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그림 수업을 마치고 귀국해 신미
술 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졸업 작품으로 '자매','정자관을 쓴 자화상(현재
동경예술대학에 있음)'을 출품했고, 이때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그를 '서양화가의 효시'라고
소개하면서 이 땅 최초의 서양화가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가야금
을 타는 미인'을 출품했고,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중동고보, 휘문고보 등 서울 장안에서 꽤 잘
나가던 중등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켰다.

1918년에는 스승인 조석진, 안중식과 서화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바로 그해에 지금의 집을
설계하여 만들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 있던 왜인 화가와 연합해 고려화회(高麗畵會)를 발족하
여 고문이 되었고, 1921년에는 중앙고보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해 자신의 서양화를 천하
에 선보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어느 뜰에서'란 그림으로 입선했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
람회 유채수채화 부문에서 4등을 차지했다. 1936년에는 동아일보의 조선화단 칼럼과 제15회 협
전(協展)을 기고했으며, 1940년 중원대륙 북경(北京)에서 조선미술관이 개최한 '십대가산수풍경
화전'에 출품해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에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으며, 해방이 되자 조선문화
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 회장
도 겸했다.

1946년 10월에는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열린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출품했고, 동
화화랑에서 조선미술협회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했다. 1947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으로 천거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을 1바퀴 둘러보고 왔다.
1948년에는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해 정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창설했는데, 1959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및 초
대작가로 활동했다.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상임위원이 되어 정계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1954년에 예술원의 종
신회원 겸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5년부터는 민주당의 고문이 되었고, 1956년 국립박물관 국보
전 선정위원이 되었는데, 고희동 외에도 그의 열성제자로 간송미술관을 세웠던 간송 전형필(澗
松 全鎣弼)과 서양화가로 유명한 배렴이 그 위원에 선정되었다.
1957년 홍익대 명예교수가 되어 중앙공보관에서 '화필 50년 기념전'을 가졌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으로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부인 조씨가 별세하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천주
교에 귀의했고, 1965년 10월 22일, 79세의 나이로 영원히 붓을 놓고 만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새로운 조형 방법을 가르친 현대미술의 선구자이다. 화단
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25년 이후에는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해 서양화적 수법을 동양화
에 가미했다. 또한 휘문고보 재직시 제자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해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존재였으며, 그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명성에 비해
그만의 그림 화법을 이루지 못했고, 많은 그림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생생히 기억은 하지만 정작 그의 그림을 별로 모르는 실정이다.
 
* 고희동 가옥
1918년에 고희동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것으로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 기와집이다. 서양과 왜열도 주거문화의 장점을 반영하여 지었으며 이후에 사랑
채 겸 화실(畵室)을 추가로 증축했다.

고희동은 여기서 41년을 머물며 많은 제자를 길렀고, 여러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사교성이 풍부하고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의 사랑방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벗들이 안주 1
그릇씩 가져오면 주량대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일기회(一器會)를 1주에 1번씩 열었다고 하며,
종종 흥취에 젖으면 즉석에서 벗들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한시(漢詩)에도 관심을 가져
한시 창작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의 집을 들락거리던 그의 벗으로는 1907년 같이 그림 공부를 했던 이도영(李道榮), 1918년 서
화협회를 함께 조직했으며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그리고 노수현(盧壽鉉)과 이용우(李
用雨), 변관식(卞寬植), 이상범(李象範) 등 이름만 들어도 거진 알 것 같은 현대화가들이 주류
를 이룬다. 그 시절 문학가의 모임 장소가 성북동(城北洞)에 있는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
壽硯山房)이었다면, 미술가의 모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속세의 계속되는 무관심으로 폐가처럼 변해갔고, 2002년에는 한샘이
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무실과 연구소를 두면서 주차장을 만든다며 이 집을 매입해 완전히 밀어
버리려고 했다. 그 회사의 부질없는 야욕 앞에 현대미술의 산실이 사라질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
가온 것이다. 다행히도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나서면서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
게 좌절되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가루가 되는 꼴은 면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쓰러지기 직전인 집을 보수해 비공개로 두다가 2012년 11월 비로소 속
세에 개방했으며, 그 기념으로 2013년 1월 중순까지 '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란 테마로 오픈
기념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북촌의 새로운 명소이자 현대미술의 성지(聖地)로 북촌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의 염통을 쫄깃하
게 만들 정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시간이 더 지나면 북촌의 주요 성지가 될 것으
로 기대된다.

※ 고희동 가옥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에서 내린다. 허나 거리
  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가볍게 걸어가는 것
  도 괜찮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4분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0분
* 관람시간 : 10시~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
  에 무료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활짝 열린 고희동 가옥 대문


▲  고희동 가옥

복원된 고희동 가옥은 전체적인 모습은 한옥이지만 왜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의 일종이
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뜨락과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옥이 나타나는데, 가옥 내
부에는 사무실을 비롯하여 사랑채와 화실,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옥 북쪽 부분은
통제구역이다.
왜식으로 이루어진 현관에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서
면 된다.


▲  뜨락 서쪽에 자리한 대나무의 위엄
겨울 제국의 압제로 푸른 기운을 찾기 힘든 시절이지만 대나무밭만큼은
겨울도 어쩌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제국에 저항하며 독야청청을
유지하는 대나무의 위엄 앞에 잠시 엄동설한을 잊어본다.

▲  뜨락에 놓인 동그란 나무 의자와
길쭉한 돌덩이

▲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둔 돌확으로
고희동 일가와는 관련이 없다.

▲  화실 방향 복도 (중간 문이 사무실)

▲  전시실 방향 복도


▲  예술 문인가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랑방
왜정 때 미술가의 모임 장소로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으로 고희동이 쓰던
물품과 가옥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갖다둔 물품이 섞여 있다.

▲  문방사우가 갖춰진 탁자에 걸쭉하게 그려진 난초 수묵화
저들은 고희동과는 관련이 없다. 사랑방의 분위기와 고희동의 문향(文香)을
더해주고자 복원 이후에 갖다둔 장식품이다.

▲  옷걸이에 걸린 하얀 저고리 - 옷의 때깔이 무지 깨끗해 고희동의
체취가 담긴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장식용~~

             ▲  고희동 가옥 화실
사랑방과 이웃한 화실은 고희동의 여러 그림이
앞다투어 눈을 뜬 곳이다. 하지만 그의 화실과
관련된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그가 활동했던 왜
정 때와 1950~60년대 화실 스타일을 참조해 어
림짐작으로 재현했다.

 


◀  사랑채와 화실 복도


▲  전시실에 진열된 고희동 관련 문서들

가옥 서쪽 부분에는 2개의 전시실이 있다. 좌측에 자리한 전시실은 고희동과 관련된 문서와 사
진, 신문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문서 중에는 복제품이 여럿 있다. 그리고 우측 전시실은 고희
동과 그의 벗들이 그린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진품은 구우일모(
九牛一毛)처럼 섞여있지만, 어느 것이 진품인지 설명문에 표시가 없어 관계자도 아리송할 정도
이다.


▲  위에 있는 문서는 1905년 고희동을 9품 종사랑(從仕郞)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는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이다. (복제품)
밑에 있는 것은 그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장(1915년 졸업)이다. (복제품)

▲  고희동의 빛바랜 사진과 1901년 한성법어학교 재학 시절에
학업 우수로 받은 상장 (이것도 역시 복제품)

▲  고희동과 그의 가족 사진들
윗줄 가장 왼쪽 사진은 그의 부모 사진이며, 중간줄 왼쪽은 왕년의 그의 사진이다.
그 오른쪽은 간송 전형필 집에서 찍은 것으로 부채를 든 이가 간송이다.
오른쪽 그림들은 고희동이 그린 그림이다.

▲  한국 근대화단의 개척자란 이름으로 실린 고희동 (미술 1964년 6월호)
밑에는 왜정 때 이 땅의 화가들이 조직한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발간한 서화협회회보

▲  고희동 관련 신문기사와 사진들

윗줄 왼쪽은 춘곡의 개인전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40년 11월 5일 기사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고희동의 화필생애50년을 기념하는 작품전시회 목록(복사본). 그 오른쪽은 1940년에
서울부민관에서 찍은 개인전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상허 이태준도 있음)
아랫줄 왼쪽은 1957년 3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춘곡의 변(辯)이란 신문기사로 '춘곡'이란 호
는 이름 희동에서 동(東)을 의미하는 춘(春)과 양곡(暘谷)이란 고문자에서 곡을 따서 지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은 양화 수입의 선구자라며 고희동을 소개한 1940년 1월 6일 동아일보 기사


▲  왼쪽부터 한국인물화전 팜플렛과 고희동을 소개한 한국현대미술사
서적(동양편 1976년, 서양편 1977년), 오른쪽은 '현대미술 100년
춘곡 고희동'이란 제목으로 그를 소개한 한국일보 신문기사

▲  자신의 모습을 담은 고희동의 그림들 (복제품)

◀  고희동 가옥의 뒷모습
붉은 벽돌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어있다.


▲  삼청동(三淸洞)에서 만난 어느 갤러리

북촌에는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전시관, 공방이 있어 북촌 나들이의 꿀맛을 더해주는데, 공예
품이나 장식물을 만들고 판매하는 갤러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지나가는 길목에 만난 갤러
리(윗 사진)도 그 중 하나로 한국금융연수원 남쪽 언덕배기에 있다.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온갖
공예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으며, 가격이 좀 야박하다. 굳이 구매가 아니더라도 북촌이나 인사동
에 이런 공간이 즐비하므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갤러리에서 만난 이쁜 공예품들


 

♠  구한말에 지어진 무기 창고 ~ 기기국 번사창(機器局 飜沙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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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1호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한국금융연수원이 나온다. 이곳은
북촌 명소가 아닌 한국은행 소속의 연수원이라 많은 나들이객들은 '삼청동에 왠 연수원?' 고개
를 갸우뚱하며 지나갈 뿐이다. 허나 그 안에 조선 후기 무기 공장 겸 창고인 기기국 번사창(이
하 번사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생뚱맞은 한국금융연수원이 조금은 달리 보일 것이다.

번사창은 연수원 내부 북쪽에 있는데, 이곳을 보려면 연수원 정문 경비실에서 관람 허가를 받아
야 된다. 너무 이른 시간이거나 18시(겨울에는 17시) 이후가 아니면 거의 통과시켜주니 관람에
는 별 문제는 없다. 상황에 따라 번사창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안으로 들어서면 연수원 북쪽에
벽돌로 꼼꼼하게 무장된 번사창 건물이 듬직한 모습으로 답사객을 맞이한다.

건물 주위에는 공원용 의자가 넉넉하게 놓여져 있으며, 번사창 바로 북쪽에 화장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또한 번사창 남쪽 연수원 건물 바깥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커피가 공짜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음)
이곳에 들어온 연수생이나 직원, 기타 업무로 찾은 이들을 위해 공짜로 한 것인데, 시중 자판기
보다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서 종류별로 뽑아 마시며, 추위를 녹였지. 근데 상황에 따라 커피를
뽑지 못하도록 매정하게 잠궈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럼 번사창은 어떤 곳일까?
이곳은 격동의 시절인 구한말, 근대식 무기를 만들고자 세운 기기국(機器局) 소속의 무기 공장
겸 창고이다. 1883년 5월에 착공하여 1884년 6월에 준공된 것으로 1984년 해체 보수공사를 벌일
때 이응익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나와 건물의 탄생 시기와 성격을 알려주었다.
상량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무기를 저장코자 터전을 반석 위에 정하고 쇠를 부어 흙과 합쳐
건물을 지으니 이를 번사창이라 하였다. ~~~ 칼과 창 등 정예한 무기를 제조/수선/보관하는 건
물은 기예의 으뜸가는 수준으로 지어져야 한다'

건물 이름인 번사(飜沙)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한 용기에 화약을 넣고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빛은 대낮처럼 밝다'
는 뜻이다. 근대식 무기가 화약
무기 중심이니 딱 그에 걸맞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창(廠)은 공장을 뜻한다.

1876년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단단히 털린 조선 조정은 신식 무기를 만들고자
기기국이란 관청을 세웠으나 정작 무기 공장은 1884년에야 만들었다. 부국강병을 향한 조선의
꿈이 대단했는지, 기기국과 번사창의 위치를 삼청동 명당(明堂)에 세웠음을 상량문에서 밝혔다.
허나 조선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부 시절을 제외하면 늘 약소국을 면치 면했던 나라라 부국강병
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곧이어 터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이후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제대로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결국 1910년을 끝으로 기기국
의 역할은 강제로 마감되고 만다.

번사창은 장대석(長臺石)과 사괴석(四塊石)으로 기단을 다지고 바로 그 위에 검은색과 회색 벽
돌로 사방을 꽁꽁 둘렀는데, 이는 청나라 건축과 서양 건축을 적당히 섞어서 지은 청나라 양식
의 기와집이다. 이렇게 지어진 것은 1881년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조선 조정에서 파견
한 영선사(領選使) 출신이 공사를 지휘,감독했기 때문이다.
1883년 번사창을 지을 때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청나라 장인
4명을 잡아와 5월부터 건물 공사에 들어갔는데, 영선사를 이끈 김윤식(金允植)을 비롯하여 박정
양(朴定陽), 윤태준(尹泰駿) 등이 감독을 했고, 김명균이 상해 험취소(驗取所)에서 무기 제조
기기를 구입해서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건물 준공이 늦어지자 인부들을 독려했으며, 이때 모래
뒤치는 곳, 쇠붙이 불리는 곳, 목양(木樣) 만드는 곳, 철모자 만드는 곳, 고방(庫房) 등을 만들
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띄고 있으며, 기존 조선의 건물과는 다른 청나라식 건물이라 조금은 이국적
이다. 허나 아무래도 보안이 필요한 무기고(武器庫)이다 보니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저렇게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건물의 길이는 33m, 폭 8.5m, 연면적은 217.58㎡에 이른다.

건물 정면 중앙에는 홍예 다리처럼 아치를 튼 붉은색 문을 내었고, 우측 부분에 조그만 문을 두
고 붉은색 벽돌로 띠를 넣었다. 내부 환기를 위해 5개의 창을 냈는데, 창문은 녹색이다. 측면에
는 문을 1개, 창문을 2개 냈으며, 지붕에는 무기 제조 및 수리로 인해 발생하는 열을 배출하고
자 조그만 창틀을 냈고 그 위를 맞배지붕으로 마무리 지었다.

번사창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철저히 군사용으로 쓰인 곳으로 군기시(軍器寺)의 창고인 별창(別
倉)이 있었다. 군기시 관청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창(北倉)이라 불렸으며, 화약무기를 제조했기
때문에 화약고(火藥庫) 터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화기(開化期)에 기기국에 통합되어 이
일대는 기기국 소속이 되었으며, 500여 년 이상 군사용으로 쓰인 이곳의 전통은 군대해산 이후
1910년에 끊기고 만다.
주인을 잃어버린 기기국 관청은 왜정에 의해 죄다 사라지고 겨우 번사창 하나만 목숨을 건졌는
데, 왜정은 조선의 관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거나 어정쩡하게 1~2개만 남겨 망국(亡國)을 철저
하게 우롱하였다. 그 이후 기기국 자리에 엉뚱하게 한국금융연수원이 들어섰고, 번사창은 그 뜨
락의 장식물이 되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북촌의 숨겨진 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생각이지만 한국금융연수원을 외곽으로 쿨하게 옮기고 북촌과 삼청동을 위한
문화/쉼터 공간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에 있던 국군수도병원도 이전
되어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왔는데, 은행 연수원이 북촌 핵심에 굳이 있을 필요는 없
다. 청와대나 국무총리공관, 주변 군사시설 등 국가에 예민한 시설은 어쩔 수 없지만 연수원만
큼은 꼭 옮겨 북촌과 시민에게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연수원은 유동인구가 많은 이런 곳보다는
한적한 외곽이 딱 제격이다.

※ 기기국 번사창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2번 출구),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금융연수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국금융연수원 정문이다.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4번 출구)에서 광화문과 삼청동길을 따라 도보 25분
* 공개시간 : 9시 이후부터 18시 이전(겨울은 그보다 일찍), 연수원 사정으로 개방이 안되는 경
  우도 종종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28-1 (삼청로 118)

▲  우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좌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북막골

겨울 제국에 저항하며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햇님은 커텐을 치고 사라졌고, 달님이 검
게 탄 천하를 갸날프게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꽤나 늦은 것도 아니다. 이제 6시인 걸.
제아무리 태양계에서 제일 크다는 햇님이라 할 지라도 겨울 제국의 위엄 앞에서는 맥도 못추는
모양이다.
본글에 언급한 명소 외에도 여러 곳을 덧붙여 둘러봤지만 상당수는 이미 지겹게 가본 곳이라 제
대로 사진을 남긴 고희동 가옥과 번사창만 다루었다. 본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고희동가옥이
며, 번사창은 조연, 나머지는 엑스트라로 보면 된다.

세상이 검게 타들어가니 햇님의 눈치에 잠시 움츠려들던 추위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게다가 모락
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라 시장기도 추위와 앞다투어 나를 괴롭힌다. 삼청동을 비롯한 북
촌 일대에는 북촌의 오랜 전통만큼이나 괜찮은 식당이 꽤 많은데, 이번에는 안가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북악골도 아닌 북막골, 삼청동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자
리한 식당으로 입구에 식당을 알리는 이정표가 요란하게 서 있다.
북막골은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발을 감싼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
어가서 방에서 식사를 해야 된다. 보온을 따스하게 했는지 방이 매우 따스하며, 천정에는 대들
보를 비롯해 한옥의 선이 우아하게 빛나 있고, 방에는 여러가지 전통 장식물이 달려있어 밥이
나올 때까지의 무료한 시간을 조금 달래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은 바로 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방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떡국, 전골, 보쌈, 막국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가격은 시중보다
조금 얹혀진 편. (삼청동과 인사동은 괜찮은 식당은 많지만 가격이 좀 있음) 떡국 가운데 겨울
별미라는 굴떡국(한시적 메뉴임)이 있길래 그것을 함 먹어보기로 했지. 어렸을 때는 굴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요즘은 그냥 퍼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잠시 뒤 밑반찬이 차려지고 떡국이 나오는데, 국물도 제법 숙성이 되어있었고 굴과 떡, 김, 파
가 어우러져 괜찮은 떡국을 자아내고 있었다. 밑반찬 가운데는 물김치(나박김치)가 있는데, 맛
이 시원해서 좋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니 방의 온기와 배부른 뒤에 찾아오는 식곤증이 나를 희롱한다. 추운 곳에
서 오래 있다가 따스한 곳에 들어앉아 뜨끈한 것을 먹으니 졸려서 정신을 못차리겠다.


▲  북막골에서 먹은 굴떡국의 위엄

▲  북막골 툇마루에 있는 달덩이 같은 하얀 백자

▲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집에서 먹은 십전대보탕과 팥죽

저녁을 배불리 먹었으니 후식으로 차 1잔의 여유를 누려야 되겠지. 더군다나 북촌에 왔으니 차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삼청동에는 맛집도 많지만 닭의 털처럼 찻집/까페도 많이 있다. 허나 북촌의 성격을 망각한 장
사치와 행정당국의 그릇된 생각으로 한옥 찻집이 줄어들고, 서구 스타일의 거의 획일적인 까페
와 양식당,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적당히 있으면 상관은 없다. 무엇이든 적당하면 참 좋
은데, 그 바람은 북촌 곳곳을 들쑤시고 있으며, 삼청동길은 북촌인지 서구의 어느 구석인지 햇
갈릴 정도로 변해버려 뜻 있는 이들은 많이 안타까워한다.
일반 대중들이야 삼청동길이 이상하게 변하든 말던 이런 모습도 좋다고 찬양을 하겠지만 상술로
인해 지나치게 상업/서구화 되어 북촌의 성격과 개성에 크게 도전하는 것은 썩 좋지가 않다.

삼청동길이 서울 도심 이상이나 요란하게 변하고 있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지닌 찻집이 하나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 찻집인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다. 찻집 이름치고는 너무나 긴 편
인데, 첫째로 잘하는 집도 아닌 둘째를 칭한 것이 참 이채롭다. 그렇다면 첫째로 잘하는 집도
있어야 되는데, 그 집은 아직 없는거 같다.
첫째를 칭하지 않고 둘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좀 겸손해 보이기도 하고, 1등을 향해 열심히 장
사를 하겠다는 의지로도 보이며, 자칭 서울 2위라는 우월의식과 자부심도 느껴지기도 한다. 어
쨌든 이름부터가 확 눈에 띄는 이 집은 현란한 분위기의 까페와 달리 1960~70년대 빵집이나 다
방 같은 소박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찻집 내부도 그렇고, 의자와 탁자도 그렇지. 3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찻집으로 20대는 물론 중장년층도 많이 찾는다. 삼청동의 다른 까페/찻집은 거의
20~30대 위주인데 반해 여기는 전 연령층을 소화한다.

30여 년을 이어온 집에 걸맞게 손님도 많아 평일과 휴일 저녁에는 자리 잡기가 힘들다. 찻집 관
계자도 알아서 손님들이 와서 매출을 올려주니 조금은 배부른 모습이고, 내부를 조금 늘렸다고
는 해도 좁은 것은 마찬가지. 삼청동을 숱하게 들락거린 나도 이번에 처음 방문한다. 이곳을 몰
라서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별로라서 그리 내키지가 않았고 늘 사람들로 가득하니 들
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동지(冬至)도 코앞에 다가오고 해서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 자리가 하나 있어서 덥썩 물었다.

이 집은 십전대보탕과 녹각대보탕, 팥죽이 유명한데, 슬슬 건강을 생각할 때라 나는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을, 여인네는 팥죽을 먹었다. 둘다 가격은 6~7천원선, 십전대보탕은 밤과 죽을 비
롯해 온갖 한약제가 뒤섞여 있는데, 차가 아닌 거의 한약이다. 찻집에서 먹는 한약, 이거 먹고
몸 좀 좋아졌으려나 모르겠네. 팥죽은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너무 달콤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하여 북촌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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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2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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