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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나들이 '

▲  망우산, 용마산 산줄기

▲  아차산4보루

▲  망우산1보루


 

여름 제국이 저물고 가을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9월의 한복판에 나의 즐겨찾기 산의 하나
인 아차산을 찾았다.
아차산은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이자 해돋이와 일몰 명소로 유명하여 오랫동안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야무진 산이다. (나들이와 산행, 답사, 야간 등산 팬들이 많음) 산세
가 완만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마음 편히 안길 수 있으며, 산 좌우가 죄다 평지
다보니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거룩한 넋이 깃든 보루가 20개 가까이 펼쳐져 있고, 아차산성과 아차산3
층석탑, 온달샘석탑, 석실고분 등의 문화유산과 영화사(永華寺)와 범굴사 등의 오래된 절,
긴고랑계곡, 관룡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해 눈이 마음이 심심치가 않다.
아차산 북쪽에는 용마산, 그 북쪽에는 망우산이 자리해 있는데, 이름만 다를 뿐, 모두 아
차산 식구들이며, 조선 때는 아차산의 영역이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이르렀다.
(본글은 편의상 아차산4보루부터 시작하겠음)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용마산에서 바라본 아차산4보루 (사진 가운데가 4보루)

아차산4보루는 아차산(용마산 ,망우산 제외)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남한에 있는
고구려 성터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꽤 남다른데,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서 발견된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나머지 보루는 터만 간신히 남은 것에 비하면 상태가 다소 나았던 것이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않았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 (2개의 치로 이루어진 부분)

구리시(九里市)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
움을 받으며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5~6세기에 쌓은 보루임이 명백해졌
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구리시(4보루가 구리시 땅임)에서 2008년부터 복원
을 적극 추진하여 2년 동안 공을 들여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달려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을 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
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
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했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
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남쪽에는 이중치를 두었는데, 두 성벽 사이가 서로 떨어져 있어 보루 출입구로 여겨
지며, 고구려 축성 양식의 하나인 들여쌓기 형식이 잘 깃들여져 있다.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로 이루어진 독특한 치가 눈길을 끈다. 전체 길이 13.2m로 나무로 목
책(木柵)이 둘러진 중간에 2.5m의 뚫린 공간이 있어 이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
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아마도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에 이슬처럼
사라진 구의동(九宜洞)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보루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며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 안정감을 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이 쏟아져 나와 인근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대 병참
기지로 추정된다.

▲  4보루 서남쪽 치

▲  4보루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남쪽 계단을 통해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
님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앙상하게 터만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
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 내부가 어땠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
는 숙제이다.

건물터는 7개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1호 건물터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여기서는 온
돌유구 2기와 주춧돌,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 투구 등이 나와 높은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3호 건물터 밑에서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
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를 통해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지었던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4보루 1호 건물터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는 2개의 저수시설이 나왔다. 이들은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이들의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
'670x610x깊이 350cm'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앞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4보루는 아차산 능선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어 북쪽을 제외하고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서
울 광진구와 성동구, 송파구,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속시원히 시
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새해 해돋이 수요가 많다. 게다가 아차
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능선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하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강동구, 송파구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산줄기 중간에 자리한 용마산(龍馬山)

▲  아차산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4보루에서 북쪽 능선길을 10여 분 정도 가면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은 용
마산, 북쪽은 망우산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용마산 정상을 찍고 망우산으로 가기로 했다.

아차산과 망우산 사이에 자리한 용마산(348m)은 아차산의 일원으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
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한다.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아차산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아차산보다 50m 이상 키가 크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울 동부와 구리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찌감치 고구려와 신라가 능선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지금까
지 발견된 보루는 7개로 1,2,4,5보루는 고구려, 3,6,7보루는 신라(新羅)가 세운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
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죽였다. 그러자 용
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
나 전설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해오고 있어 아마도 무인(武人)을 차
별하던 고려 중기나 조선시대에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말목장이 있었는데, 용마급 말
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산이라 했다는 이야기
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듯 싶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중랑구 면목4동/면목7동


▲  헬기장이 되버린 용마산4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능선 갈림길에서 용마산 정상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헬기장이 있다. 바로 이곳에 고구
려가 심어놓은 조그만 점, 4보루가 있었다.
용마산4보루는 성벽 둘레 약 228m로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灰黑色) 연질토기와 대형 항
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북서쪽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다. 동쪽 능선에 보루를
이루던 석축터가 일부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의 중간 지점인 저지대는 집수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 서울시에
서 다시금 조사한 결과 하나의 보루로 확인되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
며, 하루 속히 주변을 싹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구수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꺼냈으면 좋겠
다.


▲  용마산4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왼쪽 산)과 용마산 사이 움푹 들어간 골짜기는 긴고랑이다.
그 너머로 광진, 성동, 송파, 강남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힌다.

▲  시내를 향하고 있는 용마산 조망대

용마산4보루를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용마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서쪽 길로 내려가면 서
울을 향해 고개를 쳐든 조망대가 있으니 꼭 가보기 바란다. 그곳의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조망대는 정면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마치 하늘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기분인데, 산
으로 막힌 동쪽을 제외하고 북쪽, 서쪽, 남서쪽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눈 밑으로 천하 최
대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 시내가 납작하게 바라보인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 중랑
, 동대문, 성북, 도봉, 중구, 송파, 강남, 서초, 동작, 용산구 지역과 남산, 도봉산, 북한산(
삼각산), 북악산(백악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
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용마산 서남쪽 산줄기와 긴고랑을 비롯해 광진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광진구, 중랑구, 동대문구, 강남구, 한강, 중랑천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 북한산, 도봉산 등이 바라보인다.

▲  밋밋하게 솟은 용마산 돌탑 (아차산~망우산 주능선)
아차/용마산을 꾸미면서 새로 심은 돌탑으로 딱히 의미는 없다.

▲  용마산 돌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 동쪽 자락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하남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용마산 조망대에서 다시 아차산~망우산 능선길로 나와서 북쪽으로 향했다. 헬기장을 지나 부
드럽게 이어진 능선길을 고집하면 돌탑 하나가 넉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그를 지나치면
얼마 안가 헬기장이 나오는데, 그곳에도 고구려가 뿌린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용마산5보루
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
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지역이, 동쪽으로는 한강과 구리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보루를 세워 아차~용마~망우산 주변을 지켰던 것이
다.
성벽 둘레는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의 조그만 보루로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
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헬기장이 들어앉으면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했
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하였다. 허나 이곳 역시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
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  헬기장에 짓눌린 보루의 현실 - 용마산5보루
산 밑을 바라보며 위엄을 부렸던 보루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정말 세월무상 그 자체로다.

▲  용마산5보루에서 바라본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동쪽 천하
구리시 아천동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 산줄기 북쪽에 자리한 망우산(忘憂山)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망우산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어 통행은 그리 어렵지는 않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서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
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우리는 망우산을 조금 둘러보고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망우산은 해발 281m로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이루고 있다. 아차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위치
상 망우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북쪽은 망우리고개까지 이어진다. 서울 시민들의 사후 안식처
로 그 유명한 망우리시립묘지(망우리 공동묘지)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리공원으로 세탁되었다.

망우산에는 고구려가 심어놓은 보루 유적이 3곳 발견되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흔적만 남
아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환자 상태이다. 하여 1보루만 아차산보루군의 일원으로 사적 455
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다행히 그곳은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가면 된다.


▲  망우산 산길 (1보루 방면)

망우산에는 망우리시립묘지가 넓게 누워있다. 이곳이 졸지에 서울 시민들의 사후(死後) 공간
이 된 것은 왜정(倭政) 시절로 이태원(梨泰院)에 있던 공동묘지를 서울 시가지 확장을 위해
1933년 이곳으로 모두 옮겼다.
공동묘지를 옮긴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굳이 망우산을 고른 이유
가 있었다. 바로 인근에 자리한 조선 최대의 왕릉(王陵) 밀집 구역 동구릉(東九陵)을 엿먹이
기 위함이었다. 동9릉은 망우산 동북쪽에 자리해 있는데, 동9릉과 한줄기로 이어진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써서 동9릉의 기를 누르려고 했다. 이는 왜정이 산마다 천박하게 말뚝을 박으며,
이 땅을 모욕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무덤이 많이 조성되어 최대 3만 기 넘게 들어찼으나 이후 이장을 장려하면서
지금은 절반 이하로 크게 줄었다. 특히 이곳에는 독립운동가와 문학가, 정치인들도 적지 않
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오세창(吳世昌), 안창호(安昌浩), 종두법으
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이 꽤 있다. 안창호 선생 등 일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아직도 많은 20세기 초~중반 역사 인물들이 묻혀 있어 그들 무
덤을 찾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립묘지를 1바퀴 돌던 5.2km의 순환도로는 손질하여 1998년 5월에 '사색의 길'이란 그럴싸한
간판을 달았는데, 숲이 짙고 기운이 맑아 산책 명소로도 아주 좋으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
름답다.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사색의 길은 완전 동화 속의 풍경, 선경(仙境) 그 자체이
다.


▲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망우산1보루는 망우산 남쪽 끝 봉우리(해발 280.3m)에 자리해 있다.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
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
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싹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온다. 허나 이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라 문화재청에서도 현
재 손을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두 갈아 엎어야 된다. 그래야 망우산 보루에 대한 진실이 나오기 때문이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1보루 옆구리를 지나는 탐방로
보루 보존을 위해 보루 아랫쪽과 윗쪽 옆구리에 탐방로를 냈다.

▲  망우산1보루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
후손들의 손길이 그쳤는지 무덤이 잡초에 완전 뒤덮여 주변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묘비와 상석(床石)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들도
없었다면 이 무덤은 자연 속에 완전히 잊혀졌을 지도 모른다.


망우산1보루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되었다. 저녁 시장기가 한참 피어오를 시간이
된 것이다. 아차산역에서 시작된 아차산 답사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배도 고프다. 게
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 임박으로 여기서 곱게 길을 접고 용마산 북쪽 갈림길로 돌아왔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사가정공원으로 길을 잡았다. 중간에 용마제일약수터가 있는데, 아직은
적합 수준이라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털어낸다. 산에서 약수터나
샘터만큼 반가운 존재가 없다.


▲  용마제일약수터

▲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는 계곡길

용마제일약수터에서 계곡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망우산 서남쪽에 자리를 닦은 사가정
공원에 이른다. 공원을 지나면 시내의 모습이 더욱 짙게 다가오고 공원 입구인 용마한신아파
트 교차로에서 아차~용마~망우산 나들이의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배인 현장, 아차~용마~망우산 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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