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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 (낙성대역에서 관음사까지)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음사국기봉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관음사국기봉

 


 

늦가을이 절정의 끝을 보이던 11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관악산(冠岳山)을 찾았다. 관
악산이라고 해서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戀主臺)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고 사당능선의 관음
사국기봉까지만 짧게 탔는데, 사당능선 북쪽에 숨겨진 봉천동 마애불 생각이 모락모락 피
어올라 오랜만의 그의 얼굴도 볼 겸, 간만에 관악산의 품을 찾았다. 봉천동마애불은 대학
교 재학 시절인 2004년에 2번 찾은 것이 끝이다.

오후 2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분식집에서 김밥과 만두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길을 재촉했다. 서울대로 들어가는 관악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인헌아파트까지 좀
편하게 가려고 했으나 밥을 먹는 사이에 그만 그 중요한 대중교통 환승할인시간이 초과되
고 말았다. 하여 편하게 갈 생각을 쿨하게 버리고 뚜벅뚜벅 걸었다. 어차피 걸으러 온 것
이니 1.6km를 더 걷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  관악산 입문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관악산 산길

인헌아파트는 낙성대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중간 산자락에 자리한 3동 규모의 조촐한 아파트
이다. 아파트의 이름인 인헌(仁憲)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姜邯贊)장군
의 시호로 이곳이 정녕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릴 정도로 산
속에 묻혀있어 마치 외딴 산골 아파트 같은 분위기이다.

아파트 가게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봉천동 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관악산
의 품으로 들어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산길도 예전과 달리 조금 정비가 되었고, 마
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도 산길 입구에 세워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길눈이 되어준다. 여기서
관악산 연주대까지는 대체로 1시간 40~50분 정도 걸리며, 마애불까지는 25~30분 정도이다.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주변과 관악구 지역)
이제 몇 걸음 시작한 상태라 보이는 범위는 매우 좁다. 첫술에 벌써부터
배가 부를 수는 없겠지.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인헌동과 사당동, 강남 지역)

▲  울퉁불퉁 산길
마애불로 인도하는 산길은 상당수 느긋한 수준이다. 가끔 흥분한 산길도 튀어나와
숨을 헐떡이게 하지만 그렇게 염려할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관악산의 푹신한 산줄기

▲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삼성산, 호암산 줄기)
하늘과 불과 100m 가까워졌을 뿐인데, 조망의 품질은 그만큼 높아졌다.

▲  봉천동 마애불 남쪽에 자리한 상봉약수터 쉼터

인헌아파트에서 25~30분 정도 오르면 250m 고지에 자리한 상봉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약
수터 주변에는 온갖 운동 시설과 의자가 놓여져 있어 잠시 몸을 풀며 쉬어가기에 좋다 산속의
아늑한 쉼터로 인근 낙성대동과 인헌동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속세에 지친 심신을 달랜다.
약수터는 원래 봉천동 마애불을 품은 바위 남쪽에 있었으나 이번에 와보니 샘터가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수맥의 문제가 있어서 그런 듯 싶으며, 샘터 주변에 천막을 설치했다. 허나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약수는 붉은 색의 부적합 판정 도장을 받은 상태.. 거기다가 늦가
을 가뭄으로 물도 말라버려 도저히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물이 풍부하게 나오고 수질만 보
장이 되었다면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100점짜리 안식처가 되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
러다가 이 약수터도 영영 목숨이 끊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물이 말라버린 상봉약수터

▲  상봉약수터에서 마애불로 가는 산길

상봉약수터까지 왔다면 봉천동 마애불은 다 온 것이다. 약수터 북쪽에는 큰 바위가 누워있는
데 그 서쪽 옆구리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있다. (찾기는 쉬움) 바위를 오른쪽에 바짝 두고
산길을 조금 더듬으면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문과 봉천동 마애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봉천동 마애불의 거처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磨崖彌勒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9호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으로 서울을 굽어보는 관악산, 그 북쪽 산자락에 관악산의 은자(隱者)
인 봉천동 마애미륵불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상봉약수터 북쪽에 있는 아주 큰 바위 서쪽 면
에 조용히 자리한 그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울의 100년 이상 묵은 8개의 마애불(磨崖
佛) 가운데 유일하게 한강 이남에 있다.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으로 접근성이 영 좋지가 않고, 산길을 기본으로 30분 정도 타야 된
다. 다행히 산길은 느긋한 수준이라 그나마 다행인데 외딴 곳에 있다보니 인지도도 밑바닥이
라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살짝 찾아오는 숨겨진 명소이다.

2004년에 2번 인연을 지은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새 나는 그만큼 나이가 누적되었으
나 마애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니 그의 정정함이 부러울 따름이
다. 그가 이토록 정정한 것은 자리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에는 추운 바람과 눈을, 여름
에는 비를 피하기가 좋으며, 서쪽에서 뜨는 햇님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기에 좋다.

이 마애불은 1630년에 박산회(朴山會)란 사람의 시주(施主)로 조성되었다. 아주 고맙게도 마
애불 옆구리에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 수가 있는데, 명
문에는 '彌勒尊佛 崇禎三年 庚午四月日 大施主 朴山會'라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마애불의 정
체가 미륵불이며, 1630년(숭정 3년) 경오년 4월 박산회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렇게 1630년이라는 절대 연대(年代)를 가지고 있어 조선 중기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
주며, 17세기 마애불을 대표하는 존재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명문이 없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한참이나 깎였을 것이다. 

대시주 박산회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름 앞에 관직이나 작위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이나 양반으로 여겨지며, 멀리갈 것도 없이 관악산 밑 금천(衿川) 고을에 살던 사람
으로 파악된다. 그러니까 관악산 외딴 산골에 마애불을 지었을 것이다.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백성들의 산악신앙(山岳信
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은 아
무 바위에나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애불의 정체가 미륵불이라 미륵신앙(彌
勒信仰)이 그 시절 백성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유행하고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당시 무능했던 인조(仁祖)와 서인(西人)패거리
의 잘못된 국정(國政)과 대외정책으로 나라가
아주 어지럽던 시절이라 이렇게 미륵불을 짓고
자신과 집안의 안녕을 빌며 의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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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불 옆에 선명하게 새겨진 명문


▲  고독을 즐기는 봉천동 마애불

마애불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져 있는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로 상투 모양의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아주 낮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길고 갸름한 편으로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
는 않는다. 당시 백성들의 원망이 담겨진 탓일까? 아니면 고독하고 적적한 삶에 지쳐서일까? 그런 얼굴에는 눈썹과 눈, 코, 입이 새겨져 있으며, 입술이 좀 두껍다. 그리고 두 귀는 어깨
까지 축 늘어져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다.
둥글게 깎인 어깨는 작은 편으로 가슴 위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데, 두 가슴이 크게 쳐진 모습
이다. 미륵불은 분명 남자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여자인 것일까? 표정도 가만 보면 나이도
제법 깃든 비구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어깨와 가슴 아래, 다리를 덮고
있으며, 얼굴 뒤에는 2겹으로 된 두광(頭光)이, 몸통 뒤에는 신광(身光)이 동그란 선을 보이
며 그를 비춘다. 불상 밑에는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가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체 비율도 거의 맞아 떨어지고, 조각 수법도 제법 뛰어나 적지 않은 감동
을 선사한다.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허나 미륵불은 그런 시
시콜콜한 속세의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것이다. 56.7억년 이후에 온다는 자신이 중심이 되
는 미륵세계를 어떻게 구상할까 머리와 마음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뿐이니 말이다.

미륵불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 그의 신상이 적지 않게 염려가 된다. 불온한 자들이 마음만 먹
으면 무슨 짓을 벌이기에 좋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흉흉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전기를 가져와 CCTV를 달기도 어려울 것이고 참 난감하다. 그저 상봉약수터를 자주
찾는 사람과 마애불 단골 고객들, 그리고 달과 별이 지킴이가 되어 잘 지켜주기를 바랄 수 밖
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산4-9


▲  봉천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속세의 소리가 소슬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살며시 날라온다.


마애불 앞에는 절을 할 수 있는 조촐한 공간이 있다. 돌바닥이 약간 경사가 있을 뿐, 절을 하
는 데는 그리 무리는 없으며, 성인 3명 정도 앉으면 자리가 거의 꽉 찬다. 그 앞에는 낮은 벼
랑과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에 발을 딛으면 서울대와 낙성대 등 관악구 지역이 훤히 바라보
여 조망도 제법 괜찮다.
봉천동 마애불과 오랜만에 상봉의 인사를 나누며 10분 정도 머물다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그를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스쳐
가는 수많은 존재의 하나일 뿐이며, 그도 나에게는 이번 나들이의 엄연한 중간 경유지일 뿐이
다.

상봉약수터에서 7~8분 정도 오르면 사당능선 능선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
로 1시간 정도 오르면 관악산 연주대, 북쪽 능선으로 가면 사당역으로 이어진다. 저만치 아른
거리는 연주대의 뒷통수를 보니 순간 '연주대까지 확 질러버릴까'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
지만, 시간도 어느덧 16시가 넘어 괜히 무리해서 좋을 것도 없다.


▲  능선3거리에서 바라본 천하 (관악구와 영등포구 지역)
능선3거리 북쪽에는 목재로 지어진 전망대가 있다. 이곳은 360m 고지라 앞서 봉천동
마애불보다 조망의 질감이 높다. 하늘과 100m나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  가까이에 보이는 선유천국기봉


 

 

♠  관악산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 헬리포트 (헬기 착륙장)

능선3거리에서 2분 정도 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능선길을 버리
고 북쪽 숲길로 가면 우리의 국기, 태극기가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이 모습을 비춘다.
이 봉우리는 해발 약 330m로 육중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관악산과 삼성산(三聖山), 호암
산(虎巖山) 일대에 태극기가 심어진 13개의 국기봉이 있다. 국기봉이란 이름은 태극기가 있어
서 비롯된 것이다.
왜 관악산과 삼성산에 태극기를 지닌 국기봉이 이렇게 많은지 궁금할 따름인데, 이유가 어찌
됐든 평소 잊고 살던 태극기를 산에서 보니 하늘님이 내린 신성한 깃발 마냥 엄숙하게 다가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태극기를 휘날리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는 이 좁은 땅에서만 휘날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국기가 분명하다. 이 땅을 넘어서 모
든 천하에 꽂힐 그날을 막연히 염원해본다. 미국 화이트하우스, 영국 버킹엄 궁전, 중원대륙
북경 자금성(紫禁城), 러시아 붉은광장에 그들의 꼬질꼬질한 토종 국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리
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참 마음이 흐뭇해진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  바람 잘 날 없이 늘 분주하게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의 위엄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관악산
사진 중앙에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의 뒷통수가 바라보인다.

▲  관악산 사당능선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센 서울이 눈 밑에 내려앉았네~~~
학의 등에 올라탄 듯, 조망이 제법 명품이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봉천동, 신림동)와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와 한강 너머로 남산,
마포구, 성동구,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줄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사당능선과 사당동과 남현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줄기가 흔쾌히 바라보인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관악산 동부와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산줄기

▲  선유천국기봉 동쪽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관악구와 동작구는 물론 한강 너머로 남산과 서울도심,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바위로 아기자기하게 이루어진 사당능선
경사가 좀 있어서 그렇지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오가기는 편하다.

▲  거북바위
사당능선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며 자리한 탓에 선유천국기봉 못지 않게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용산구, 남산과 도심 지역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방배동 전원마을과 우면산(牛眠山, 293m)을 중심으로 서초구와 강남구,
우면지구(오른쪽), 대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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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바위 옆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 동부와 남태령,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  속세와 하늘을 이어주는 계단일까? 사당능선 철계단

유천과 관음사국기봉 구간은 바위와 벼랑이 즐비한 까칠한 구간이다. 하여 산꾼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철계단을 많이 깔았는데, 위에서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하게 보이고 밑
에서 보면 마치 하늘과 이어진 계단처럼 장대하게 보인다. 계단은 2명이 지날 정도의 폭으로
계단 밑은 구멍이 쏭쏭 뚫린 철판이라 계단 밑 땅바닥이 정말 아찔하게 보인다. 계단과 땅바
닥이 그리 가까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염통이 은근히 쫄깃해질 것
이다.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전망대

철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나타나면서 잠시나마 오르막길이 꿈틀거린
다. 그 바위를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관음사국기봉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관악산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최전방 봉우리로 서울시내에 아주 가깝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여 바로
밑으로 서울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조망이 제법 휼륭하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산 북쪽 자락과 서울대, 낙성대, 관악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의 힘찬 기운은 시내까지 파고들어가 관악구와 동작구의 경계를 그으며
까치산근린공원, 상도동 살피재를 지나 국립현충원과 노량진까지 이어진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서초구, 한강, 남산, 북악산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5)
사당동과 방배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와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  오늘도 바쁘게 펄럭이는 관음사국기봉 태극기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벼랑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래서 철계단
을 밑으로 늘어뜨렸는데, 그 중간에 바위에 뿌리를 내린 태극기가 서울을 향해 부지런히 휘날
리고 있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태극기 밑으로 바위를 타고 오가는 지름길이 있으
나 다소 위험하므로 우회길을 이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2)
(사당동과 동작구, 강남구, 서초구, 용산구, 남산, 북한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초구와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시나마 가까워졌던 하늘을 등지며 관음사국기봉을 내려가면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을 되찾는
다. 단단하고 자잘한 돌이 많던 산길의 시대는 가고 조금은 촉감이 부드러운 흙길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도 흥분한 구간이 여럿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관음사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산이
란 자신을 만만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까칠하게 굴기 때문이다.

산길을 직진하면 남현동(南峴洞) 흥화브라운빌아파트로 이어지는데, 관음사로 가려면 동쪽 산
길로 꺾어야 된다. 중간에 체육시설이 여럿 설치된 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관음사가 조그만 점처럼 모습을 비춘다. 그렇게 그를 향해 내려가면 절은 그만큼 정비
례로 커져 보이며, 절의 옆구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  관음사로 인도하는 산길
속세는 아직도 늦가을의 기운이 완연한데, 산속은 벌써부터 겨울 제국(帝國)의
마수가 심술을 부린다. 벌거숭이가 된 나무가 도처에 보이고,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며, 화려한 윤회를 꿈꾼다.


 

 

♠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안긴 오래된 관음도량
관악산 관음사(觀音寺)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다.
밤비에 고함을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소나무, 회나무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는다.

변계량(卞季良)의 '관음사 절경'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관음사는 절 이름 그대로 관세음보살을 내세운 관
음도량(觀音道場)이다. '남태령 관음사','승방골 관음사'라 불리기도 하며, 절을 끼고 흐르는
계곡을 절골이라 부른다.

관음사는 89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활
약햤던 변계량(1369~1430)이 지은 '관음사 절경'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 전해오고 있어 절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가람고(伽藍考)','여지도서(與地圖書)' 등에 관음사가
잠깐 소개되어 있고 1977년 극락전(極樂殿)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는 1716년
4월 21일 극락전을 개축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절 밑에 승방벌(승방뜰)이란 일종의 사
하촌(寺下村)이 있어 절의 규모가 제법 컸음을 가늠케 한다.

1863년 8월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시주로 절을 정비
했으며, 1883년 봉은사 승려들이 절을 중수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1924년 승려 석주(
石洲)가 주지로 부임하여 신도들의 시주로 큰방 10칸을 지었고, 1925년 요사를 지었다. 뒤를
이은 주지 태선(泰善)은 1929년에 칠성각, 1930년에 산신각을 짓고, 1932년에 용화전을 세웠
으며, 1942년 극락전을 보수했다.
허나 1950년 이후, 조계종과 태고종(太古宗)간의 재산소유권 분쟁으로 10여 년 간 지루한 송
사에 휘말리게 된다. 승려들이 속세(俗世) 정화와 중생 구제 등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종교의 탈을 쓰며 보기 흉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동안 건물은 황폐화되고, 절은 거의 문 닫
기 직전까지 이른 것이다.

대법원이 조계종의 손을 들어주면서 간신히 절의 목을 조르던 재산 다툼이 끝나자 1973년 진
산당 박종하(晉山堂 朴宗夏)가 주지로 부임해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허나 절의 부지가
국유지와 시유지(市有地), 사유지가 뒤섞이면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고, 거기다 개발제한구
역과 여러 가지 규제까지 발목을 잡으면서 중창의 길은 거의 쉽지가 않았다.
그런 시련을 간신히 극복하며 1977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고, 1980년대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삼성각과 용왕각을 크게 보수했다. 그리고 1992년 대웅전 밑에 지하 강당과 법당을 만들어 1
천불을 봉안하고, 1997년에는 명부전과 요사, 9층석탑을 지었다. 2001년에는 요사채를 신축하
고 용왕각 부근 지하 150m에서 수맥(水脈)을 찾으면서 그들을 끌여와 석조를 마련했다.
2002년에는 미타전과 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들어 관음도량의 면모를 갖추었고, 2007년 4월 일주
문을 세움으로써 34년에 걸친 중창불사는 그런데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재단법인 불교방
송이 경내에 '불교방송개국기념대탑(불교방송대탑)'을 조성하면서 절의 명성을 드높였다.

절의 규모는 거의 조촐한 수준으로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용왕각, 삼성각
, 요사 등 약 9~10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오랜 내력에 비해 고색의 내음은 맡기
가 힘들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파도가 관음사의 고색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보살좌상이 있으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다.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사당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충분히 닿는다. 사당역을 기
점으로 관악산을 오를 경우 반드시 지나쳐야 되는 곳이며, 시내와 지척이지만 숲속에 단단히
묻혀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그윽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519-3 (승방1길 109-80 ☎ 02-582-8609)


▲  관음사 경내 (왼쪽이 불교방송대탑)
불교방송대탑은 1997년 불교방송국 기념대탑으로 세운 것으로
높이는 거의 15m에 달한다.

▲  명부전(冥府殿)과 요사

경내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머금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
작지붕 건물로 1997년에 지어졌으며, 우측 옆구리에는 요사 1채를 익랑(翼廊)처럼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건물 뒷쪽에는 대나무밭이 우거져 있는데, 중간중간에 조그만 석불이 자리를 폈
다.


▲  명부전 불단 - 온후한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좌상과 저승의 식구들

▲  삼성각(三聖閣)

명부전과 대웅전 사이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이 건물은 1929년에 태선이 칠성각으로 지은 것으로 1989년 삼성각으로 개축하여 관음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1988년에 조성된 칠성탱 앞에 1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관음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1호)이 있으나 그
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  용왕각(龍王閣)과 둥그런 석조(石槽)

성각 뒤쪽에 자리한 용왕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아주 단출한 맞배지붕 건물이
다. 이 집은 용왕(龍王)을 봉안하고 있는데, 바다와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전혀 연관
성이 없어 보이는 용왕의 거처를 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바로 옆에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
고, 앞에는 관음사의 목을 축여주는 석조가 있으니 용왕을 배려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물은 모두 용왕의 관리 대상이기 때문이다.
용왕각은 1930년에 태선이 슬레이트로 지은 것으로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했으며, 내
부에는 1989년애 조성된 용왕탱과 비천상 1쌍이 자리를 메운다.

용왕각 앞에 자리한 석조는 관악산이 중생들에게 베푼 조촐한 선물이다. 이곳에서는 그를 수
각(水閣)이라 부르며 대우를 하고 있는데, 하늘을 향해 어여쁜 잎을 펼쳐 보인 연꽃이 새겨진
연화석조로 진짜 꽃을 보듯 아름답다. 석조 위에는 귀여움이 묻어난 동자승이 두 손으로 거북
이를 들고 있는데, 거북이는 관악산의 옥계수를 졸졸졸 뿜어낸다. 이들 석조는 2001년에 지하
150m 지점에서 수맥을 발견하면서 닦은 것이다.


▲  관음사의 이름값을 하는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입상

삼성각과 대웅전 사이에는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연화대좌 위에 부드럽
게 서 있는 그는 2002년에 관음도량의 품격을 갖추고자 장만한 것으로 자태도 곱고, 조각 솜
씨도 걸작이라 1번 보고, 2번 보고, 자꾸만 보게 된다. 왼손에는 감로수(甘露水)가 든 정병(
政柄)을 들고 시무외인의 제스쳐를 취했다.


▲  관음사 대웅전(大雄殿)

관세음보살입상 좌측에는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이 앉아있다. 이곳에는 원래 1942년에 지어진
극락전이 있었으나1977년에 밀어버리고 지금의 대웅전을 앉혔다. 그때 1716년에 극락전을 개
축했다는 상량문이 튀어나와 조선 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꾸렸음을 밝혀주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관음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불단에는 금
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3존불 뒤에 1990년에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붉은 면바탕에 금니로 초를 내고 부분 채색한 그림으로 매우 생소한 형태이다. 건물 좌측 영
단(靈壇)에는 1974년에 만들어진 조그만 범종이 자리해 있다.


▲  추억의 덤블링
관음사는 지하 강당에 어린이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뜨락에 어린 시절 많이
봐왔던 정겨운 덤블링을 두어 잠시나마 어린 시절의 향수로 인도한다.

▲  웃음삼매에 빠진 관음대장군/여장군 장승
지하대장군/여장군을 칭한 장승은 많이 보았지만 관음을 칭한 장승은 처음이다.
관음사가 관음도량을 칭하다보니 장승까지도 관음이란 이름을 단 모양이다.


늦가을이 깃든 관음사에서는 약 20분 정도 머물렀다. 이곳은 예전에 여러 번 인연이 있고 구
미가 확 당길만한 유혹거리가 딱히 없다. 게다가 햇님도 퇴근 직전이라 서둘러 속세 귀환을
종용한다.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향하면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허나 내려가는 것이기 때
문에 눈과 얼음이 없는 이상은 별 무리는 없다. 길 옆에는 새하얀 석등이 주차장까지 이어지
는데, 석등의 모습이 왜열도 양식과 좀 비슷하여 모습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석등 중간에는
관음대장군과 여장군을 칭한 장승 1쌍이 뻐드렁니를 시원스레 드러내며 해맑은 표정으로 중생
을 환송한다.


▲  관음사 일주문(一柱門)

주차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관음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이 문은 2007년에 새로 지어
진 것으로 높이가 상당하여 매우 장엄하게 다가온다. 허나 그 중요한 고색의 향기가 우러나오
질 않으니 나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절골이라 불리는 관음사계곡이 오른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늦가을 가뭄 탓에
물이 넝실거리던 관음사 석조와 달리 계곡은 거의 타들어간 상태이다. 그런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남현동 주택가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  관악산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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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1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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