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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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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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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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16나한상 |
▲ 우측 16나한상 |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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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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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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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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