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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대웅전 뜨락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봉원사에서 열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조계사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연꽃축제로 2012년 이후 매년 인연을 짓고 있는데, 여름
이 왔으니 친(親) 여름파인 연꽃을 구경해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
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연꽃 축제날이 다가왔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후배 여인네를 만나 서울
시내버스 272번(면목4동↔남가좌동)을 타고 이대부고(봉원동)에서 하차, 다시 7024번으로
환승하여 봉원사 종점에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변
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완전 대
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 종점으로 쓰이는 봉원사 주차장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
쪽으로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석종형(石
鐘形)부터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들 7~8기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마을은 절 턱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붙어있으며 나무도 많아 산골마을 같은 분
위기이다. 여기가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곳 일대를 봉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을 견주며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달군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들
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싹 정화시켜준다.


▲  삼삼하게 우거진 연꽃 밀림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하얀 피부와 연분홍 피부가 적절히 섞인 청초한 연꽃

▲  웃음 짓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낸 홍련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오늘도 방긋 웃는 연잎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①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②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③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④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⑤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
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두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업어온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
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해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
에 있음) 등이 건물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
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
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과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
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
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6.25 시절의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또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  봉원사 범종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찾기는 매우 쉬움) 그는 예산 덕산(德山)
에 있던 가야사(伽倻寺)의 것으로 1760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당(
明堂) 욕심으로 파괴된 그 절이다.
종 높이는 84.5cm, 입지름 61cm으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동종 중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다. 또한 종형도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外線)이 종신(鐘
身) 2/4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올라가다가 3/4부분에서 종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다.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는 2마리의 용의 용뉴를 표현했으며, 그 아래 종신
은 2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종신을 크게 3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단에만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천판 아래에는 내부에 '옴'자가 새겨지고 외곽에 돌기를 표현한 원권(原權)의 범자 8개가 부
조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꼴 형태인 연곽 4개가 있는데, 사선문으로 연곽대를 구획하고,
그 안에는 연뢰(蓮蕾) 9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빈 공간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
는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준제진언(準提眞言)'을 간략하게 표기했다.

종 피부에는 종의 탄생시기와 봉안처 외에 덕산과 예산, 대전(회덕, 진잠), 천안, 결성, 옥천
지역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고, 사장(私匠)인 이만돌(李萬乭), 신덕필(申德必), 최종취(崔宗就
)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태가 양호하고 경상도 이씨 일파의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이 만든 작품 양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문을 통해 종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후분 동종의 양식과 사장
에 대한 계보, 활동을 연구하는제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했는데, 그 과
정에서 범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 종은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 안착하면서 서울살이를 하
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승려 안진호가 작성
한 '봉원사지' 제9절 제3항에 봉원사의 재산으로 기재되어있어 늦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온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원군이 왕실 원찰의 하나인 이곳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범종이 묵비권
을 행사하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고 그 휴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 명당의 치명
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신탱
이 산신은 돈이 좀 있는지 앳된 동자와 동녀를 4명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호랑이는 귀여운 것이 토실토실하여 귀티가 넘쳐 보인다.
(다른 산신탱은 동자가 1~2명 정도임)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
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
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  물이 졸졸 쏟아져 나오는 수각(水閣)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
靈駕)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
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 그리고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보통 전통 공연을 처음에 내밀고, 초청 가수
(대부분 트로트) 공연을 제일 뒤에 내민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하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17시(또는 18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
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
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1/3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사찰 축제를 이용해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
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
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지
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지장보살
상과 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10왕 끝에는 패기가 짙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자리해 명부의 식구들을 지킨다.

명부전에 왔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상도 좋지만 명부전 현판은 꼭 눈에 넣도록 하자.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다면 무려 620년을 묵은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는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던지라 역시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봉원사가 태조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연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글
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로 교체
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라
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여기
저기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
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옆구리에서 만난 아리따운 홍련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
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며, 그 인등으로 인하여
인등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이 서 있는데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
식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한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나오기가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해야지. 꼭 56.7억년 후에 나타
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 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
기이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다. 아미타불과 박정희 전대통령 내외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자
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150~200년 정
도 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내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살피지 못
했다. (만월전은 올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음)


▲  삼천불전 앞 산사음악회 무대에서 펼쳐진 즉석 그림 전시회
봉원사 화승이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그림을 삼천불전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그림에 담겨진 붉은 꽃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이다.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연
꽃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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