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초기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 왕족들의 묘역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寧海君派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
무수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해군파묘역은 세종의 9째 아들인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이 묻힌 왕족 일가의 묘역이다. 무수골은 뒤에 도봉산, 앞에 무수천이 흐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착한 명당(明堂)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15세기 초반에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가 가장 먼저 이곳을 닦았 고, 영해군, 진주류씨, 함열남궁씨 순으로 무덤을 썼다. 이중 영해군파묘역이 가장 묘역이 넓 은데(1,630.4㎡)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의 명당으로 꼽 힌다. (무수골의 이름도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영해군파묘역은 크게 4구역으로 나뉜다. 묘가 몰려있는 중앙 구역은 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 당(李瑭) 내외를 비롯해 그의 장인어른인 신윤동(申允童), 영춘군의 아들인 강녕군 이기, 이 기의 노비인 김동(금동)의 묘가 있다. 이당 묘역 뒷쪽 산속에는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 君) 이희(李禧)와 완천군의 3째 아들인 평성수(平城守) 이질(李耋)의 묘가 있고, 동쪽 능선에 는 길안도정 이의의 묘, 묘역 직전 서쪽 능선에는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 이인의 묘와 신도 비, 부원정 이이(영해군 손자의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
묘역은 영해군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4대가 묻혀있으며, 묘비가 없는 한참 후 손들의 무덤도 여럿 꼽사리로 끼어있다. 묘역은 영춘군 이인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더 확대되었으며, 특히 중앙 구역 밑에 아주 조그맣게 충노(忠奴)로 포장된 금동의 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들은 새로 손질된 부분이 거의 없는 16세기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족들의 무덤 양식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
▲ 충노 김동(金同)의 묘
|
묘역 중앙구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충노 김동(금동)의 묘를 만나게 된다. 이 무덤은 영해군 파묘역의 다른 무덤과 달리 매우 아담한 모습인데, 이는 김동이 노비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게 솟은 봉분(封墳)은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적당할 정도로 작고, 풀도 별로 없다. 석물도 네모난 비좌(碑座)를 갖춘 묘비(높이 64cm, 너비 37cm, 두께 13cm)가 전부로 그 역시 꼬마 키보다도 작아 죽어서도 신분 차별을 주었다. 묘비는 비좌 위에 '故 忠奴 金同'이라 쓰인 빗돌을 세워 무덤의 주인을 알렸고, 빗돌 위는 반 원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습의 장식을 달았는데, 마치 위스키병처럼 보인다. (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러면 김동은 누구이고 왜 왕족 묘역 한쪽에 이렇게 무덤까지 있게 된 것일까?
김동은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노비로 원래 이름은 금음동(今音同)이다. 연산군 시절에 흥청( 興淸)에 소속된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받자 그의 아비인 김숙화(金淑華)가 그 권 세를 믿고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기가 김숙화의 요구를 거절하자 뚜껑이 열린 김숙화는 이기가 노비 금동을 시켜 자신을 욕했다고 왕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는 이기가 노 비 금동과 함께 거친 말을 하며 항의했다고 함) 이에 뚜껑이 폭발한 연산군(燕山君)은 이기의 가족과 장인을 모두 연좌해 잡아들이고 집을 봉 쇄하고 노비까지 모두 압송케 했다. 이때가 연산군의 마지막 해인 1506년이다.
왕은 추관(推官)들에게 명해 낙형(烙刑)을 가하며 이기와 그의 아비인 영춘군 이인을 고문케 했다. 죄가 없는 이기 부자는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허공의 메아리로 끝날 뿐, 아무 소용이 없 었다. 그러자 김동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소인이 혼자 한 짓입니다. 나으리는 아무 것도 몰 라요!' 진술을 했다. 그 말을 신뢰하지 않던 왕은 거짓말 말라며 금동에게 6번씩이나 고문을 벌였다. 왕이 듣고 싶 던 말은 바로 이기가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었다. 허나 금동은 끝까지 자기 소행이라 주장했고 그의 고집에 지친 왕은 결국 김동의 단독 범죄라 단정하여 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이기 부자 는 장형 100대, 이인은 장형 80대를 때려 유배형에 처했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이기와 연산군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숙화는 이를 악용해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 했고, 연산군은 단순히 그의 무고만으로 이기를 잡아들였 으며, 김동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 자백하자 자신이 바라는 답변을 얻고자 더 고문을 가한 것 을 보면 이번에 아예 이기를 족치려고 작정했던 듯 싶다.
목숨을 건진 이기는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고, 김동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묘역 한쪽에 조촐 하게 그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사연을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김동을 의노(義 奴)라 칭찬하며 1508년 4월 5일에 동네 어귀에 문려(門閭)를 세워주었고, 김동 가족의 요역( 徭役)을 면해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다시 명을 내려 집 앞에 정문을 세워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기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 공로로 김동과 그의 처자식은 면천이 되어 평민이 되었 고,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노비 김동의 묘가 무려 조선 왕족인 영해군파묘역 속에서 비록 작은 규모 이지만 주인 일가와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거의 흔치 않은 노비의 묘로 묘비까지 갖춘 것은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로 그 가치는 높다. 하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주인을 살렸으 니 이 정도 정성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 강녕군 이기(江寧君 李祺)와 그의 전/후처의 묘
|
김동 묘 옆에는 그의 주인인 강녕군 이기의 묘가 있다. 비록 무덤의 덩치는 김동 묘보다 크지 만 그와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자리해 있어 죽어서도 김동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함께 하겠다 는 주인의 지극한 마음이 담겨있는 듯 하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리 했을 수도 있음, 속 사정이야 당사자만이 알 것이니) 이기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합장된 무덤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모습이다. 호석 (護石)을 두른 네모난 봉분과 비좌와 이수를 갖춘 비석, 상석(床石)이 전부로 그 부친대까지 는 봉분도 크고 문인석과 장명등까지 갖추었지만 이기부터 무덤이 간소하게 변화된다. 그만큼 먼 왕족이 되고 벼슬도 크게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는 영춘군 이인의 차남으로 영해군의 손자가 된다. 부인은 양주조씨인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며, 후처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그의 태어난 시기와 사망 시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 으며, 연산군 말엽인 1506년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세은가이의 아비 김숙화가 집을 뺏고자 시비를 걸자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의 무고로 가족과 노비가 모두 압송되어 이기와 이당 부 자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노비 김동이 자신을 불태워 이기의 가족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이기는 장형 100 대를 맞고 먼 곳으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중종 때는 이정숙(李正淑) 등과 폐비 신씨(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했다가 죄를 받은 김정 (金淨)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분을 쌓았다. 허나 1519년 기묘 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당이 모두 아작이 나자 그의 일당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죽은 이후 그 흔한 시호도 받지 못했다가 1794년 유림에서 그도 기묘사화 때 화를 받은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하나라며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문경(文景)이 란 시호를 내렸다. |
▲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平山申氏)묘
|
강녕군 이기와 노비 금동의 무덤 윗쪽에는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묘가 있다. 평산신 씨는 신윤동의 딸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를 낳았으며, 남편의 무덤 옆이 아닌 친정 아비의 무덤 밑, 남편 무덤보다 2단계 밑에 따로 자리한 것이 이채롭다.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2기까지 갖추고 있 으며, 이들 석물에는 500년 세월의 때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 무 덤 2기가 봉긋 솟아있다. |
|
|
▲ 평산신씨묘와 묘비, 장명등 |
▲ 고된 세월에 지쳐보이는 우측 문인석 |
|
|
▲ 눈망울이 큰 좌측 문인석 |
▲ 평산신씨묘에서 바라본 이기묘(왼쪽)와 금동묘(오른쪽) |
▲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申允童)묘
|
영해군묘와 평산신씨묘 중간에는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 묘가 자리해 있다. 영해군파묘역 중 간 구역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리해 딸과 손자, 노비 금동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는데, 사 위와 딸 무덤 사이에 둥지를 튼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영해군 집안(전주이씨) 묘역에 부인도 아닌 다른 성씨의 인물이 잠들어 있는 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해도 엄연한 다른 성씨이기 때문이다. 허나 조선 초까지는 집안 묘역에 사위나 장인 등 다른 성씨의 인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흔했 다.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정몽주(鄭夢周) 묘역(용인시 능원리 소재)에도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과 그 후손이 묻혀 있고,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은 부인인 거창신씨 집안의 땅에 묻혀있다.
신윤동은 좌의정에 추증된 신효창(申孝昌)의 손자이자 신자경(申自敬)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은 왕실과 매우 가까워 세종의 왕자들에게 여럿 시집을 갔는데, 고촌사촌인 제안부부인(濟安 府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부인이며, 숙 부 신자수(申自守)의 딸은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에게, 자신의 딸은 세 종의 9남인 영해군 이당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니 집안도 배경도 다들 탄탄하다. 허나 영해군만큼이나 역사에 요란하게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 인지도는 영해군파묘역에 와서야 확인이 될 정도로 매우 낮다.
신윤동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서울시장)을 지내고 죽은 이후 의정부 좌 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는 것 등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신효창은 큰아들인 신자근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일찍 죽자 막내 신자수를 신자근의 후사로 삼으려 했다. 허나 마음을 바 꾸어 신자경의 아들인 신윤동에게 신자근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신윤동이 사망하자 신효 창에 대한 제사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또한 신윤동의 행적이 적혀있을 묘비(묘표)도 안타깝게도 마모가 되어 확인이 불가 능한 실정이다.
무덤의 구조는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석 앞면에 '증 의 정부 좌찬성 신윤동지?(贈議政府左贊成申允童之?)'라 쓰여 있다. 끝 자는 훼손되었으나 다른 묘비의 예를 볼 때 묘(墓)가 분명하며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의 무덤 1기가 조용히 자리 한다. |
▲ 신윤동 묘의 뒷모습
▲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묘
|
신윤동 묘역 윗쪽에는 영해군파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당의 묘가 있다. 묘역 중앙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장인과 부인, 후손의 묘를 굽어보고 있는 이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고색의 내음이 진한 묘비(묘표), 상석, 날씬한 장명등,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영해군(1435~1477)은 세종의 9째 아들로 신빈김씨(愼嬪金氏) 소생이다. 처음 이름은 이장(李 璋)이었으나 나중에 이당으로 갈았으며, 성격이 화목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7살 에 영해군에 책봉되어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1477년 42세의 나이로 죽자 성 종은 안도공(安悼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400년이 흐른 1872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 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신윤동의 딸인 임천군부인(林川君夫人) 신씨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 등 2남1 녀를 두었으며, 보통 부인과 같은 봉분에 묻히거나 봉분을 달리해서 나란히 배치한 것이 보통 이나 영해군은 2단 밑에 부인의 묘를 두었다. 영해군묘는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뒷쪽 숲속에는 그의 손자인 완천군 이희( 영춘군 이인의 아들), 완천군의 3째 아들이자 영해군의 증손자인 평성수 이질 묘가 있으나 찾 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음) 묘비 앞면에는 '영해군시 안도공당지묘(寧海君諡安悼公瑭之墓)'라 쓰여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으며,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적혀있으나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
▲ 뒷쪽에서 바라본 영해군묘 (그 너머로 신윤동, 부인 평산신씨, 이기의 묘가 있음)
|
|
|
▲ 영해군묘 우/좌측 문인석 장대한 세월에 제대로 지쳤는지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좌측 문인석은 세월이 씌워준 검은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제대로 풍긴다. 세월이 달아준 얄미운 훈장이라고나 할까?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묘 |
영해군묘와 신윤동묘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길안도정 이의의 묘가 모습을 비춘 다. 동그랗게 솟은 봉분에는 이의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잠들어 있는데, 그 앞에는 장대한 세월이 제대로 태워먹어 온통 검은 피부가 되버린 고색의 묘비(묘표)와 새로 세운 묘비, 상석 , 향로석(香爐石),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으며, 묘역 앞에 조촐하게 계단이 닦여져 있다.
이의는 영해군의 차남으로 구체적인 생몰시기는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여산송씨 집안의 송 자강(宋自剛)의 딸과 청주한씨인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은계군 이말숙 (銀溪君 李末叔, 한씨부인 소생), 시산군 이정숙(詩山君 李正叔, 송씨부인 소생), 청화수 이 창숙(淸化守 李昌叔), 송계군(松溪君), 벽계도정 이종숙(碧溪都正 李終叔), 옥계군(玉溪君) 등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벽계도정 이종숙은 황진이(黃眞伊)와 가까웠던 인물로 벽계수 (碧溪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의 묘비에는 '증 명선대부 길안도정행 창선대부 길안정(贈 明善大夫 吉安都正行 彰善大夫 吉安正)'이라 쓰여 있으며, 이의의 손자인 이휘(李徽)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와 그의 아비, 할아버지 등 3대가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의의 아들인 이말숙의 묘비명에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이의와 사별했다고 나와있어 이의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 다. |
|
|
▲ 이의묘의 옛 묘비와 새 묘비 |
▲ 조각 솜씨가 일품인 옛 묘비의 이수(螭首) |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묘
|
영해군파묘역 중심 구역을 둘러보고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영춘군 이인묘를 찾았다. 묘역 서쪽 구역에는 이인 내외와 부원정 이이 내외의 묘, 그리고 이인의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는 이 묘역의 유일한 신도비로 이인의 높은 위치를 알게 해준다.
이인의 묘는 이인과 부인 유씨<유양(柳壤)의 딸>의 봉분을 비롯해 묘비 1기, 상석 2기, 혼유 석 2기,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望柱石) 2기는 물론 무려 신도비까지 갖추고 있어, 영해 군파묘역 중의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묘역의 시조는 분명 그의 부친인 영해군이지만 그 부친보다 묘가 더 있어보여 이인묘가 이 묘역의 실질적인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영춘군 이 인 묘역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 특히 이들 묘역의 무덤들은 무덤 필수품인 망주석이 하나도 없는데 반해 이인 묘에는 망주석 이 있으며, 무덤도 동그란 형태가 아닌 앞은 네모, 뒷쪽은 세모로 총 5각형으로 이루어진 특 이한 모습이다. 동그란 봉분과 네모난 봉분(조선 초까지 많이 나타남)은 많이 봤어도 5각형은 처음이라 참 신선하며, 봉분 밑에는 호석을 둘러 단단히 다진 다음 두툼하게 봉분을 쌓았다.
영춘군 이인(1465~1507)은 영해군의 아들로 자는 자정(子靜)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이씨( 신윤동의 부인)의 손에서 자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하며, 10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 )의 영춘군에 봉해졌고,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거쳐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이 총애하던 흥청 소속의 세인가비의 아비 김숙화의 무고로 이인과 이기 부자( 父子)가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이인은 남해로 유배를 갔다. 다행히 중종반정(中宗反正)으 로 풀려나 복권되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으며, 1507년 4월 27일, 42살에 사망 했다. 하여 그해 8월 임신일에 지금의 자리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이인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대단했는데, 11살에 어머니 신씨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치 렀고, 그 상이 끝나기도 전에 부친 영해군이 사망하자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상례를 잘하여 종친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으며,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뜨락에 심는 것을 좋 아했다고 한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오른 덕에 집안 묘역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
|
|
▲ 이인 묘비(묘표) 봉분 사이에 묘비 하나를 두었다. |
▲ 키 작은 장명등 |
|
|
▲ 동자승처럼 생긴 우측 문인석 |
▲ 홀을 쥐어든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도 홀을 쥐어들고 있음) |
▲ 확트인 이인묘 앞부분 영해군이 묻힌 중심 묘역과 길안도정 이의묘는 숲속에 묻혀있어 시야가 좋지 못하다. (주변에 보이는 건 나무, 위로는 하늘 뿐) 허나 이인묘는 나무의 눈치들이 적어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이인 내외 묘의 뒷모습 앞은 네모, 뒤는 세모를 취한 독특한 모습으로 5각형을 이루고 있다.
▲ 이인묘에서 바라본 수락산(水落山, 638m)의 위엄
▲ 이인 신도비(神道碑)
|
이인묘에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으로 고위 관료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존재이다. 이인 역시 부모를 잘만 나 모태부터 왕족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지녔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영해군과 아들의 무덤에 는 신도비가 없으니 이는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봉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지만 이곳은 서남쪽에 비석을 두었 다. 땅바닥에 네모지게 바닥돌을 깔고,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 대신 연꽃 무늬와 안상이 새 겨진 두툼한 비좌를 얹힌 다음 백일석(白一石)으로 만든 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가 여 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머리장식인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의 높이는 273cm로 장대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많이 끼어있지만 그 덕에 중후한 멋과 고색의 미가 크게 돋보인다. 특히 이수에 새겨진 이무기는 비대칭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꽤 섬세하여 은근히 탐이 난다.
이 비석은 1509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16세기 초를 대표하 는 비석으로 꼽힌다. 도봉산 자락에는 신도비를 갖춘 조선시대 무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도 이 비석은 단연 갑(甲)이며, 17세기에 세워진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신도비(서울 사당 동에 있음)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빗돌에는 이인의 생애가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 袞, 1471∼1527)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으며, '목성공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는 바로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 다. 특히 도봉과 노원, 무수골의 옛 지명인 수철동 등 도봉/노원 지역의 옛 이름과 현재 이름 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지역 지명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여겨져 지역 연구에도 큰 열쇠 를 제공해준다. 겉모습만 착할 뿐 아니라 빗돌에 새겨진 내용들도 착한 것이다.
지금은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 묘역이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 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이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역 전체 로 확장된 것이다. |
▲ 현란한 조각 솜씨를 드러낸 신도비 이수 소용돌이치듯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2마리의 이무기가 재주를 부리며 여의주를 다툰다. 비록 검은 때가 자욱하긴 해도 아직은 정정한 모습을 자랑해 500년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 이인 묘 밑에 자리한 부원정 이이(富原正 李㶊)와 부인 전주유씨 묘역 이이는 영해군 이당의 증손으로 조용히 살다간 사람이다. 이이 부부의 봉분을 비롯해 세월에 검게 그을린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등이 있다.
|
무수골을 주름잡던 영해군파묘역을 싹 둘러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도 퇴근본능에 따 라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고 달님과 땅꺼미가 조금씩 드리우기 시작 한다. 오랜만에 찾은 무수골, 개발도 그 칼날을 접은 곳이라 아직 산골과 시골 분위기는 여전 했다. 집에서 도보로 25~30분 정도면 충분히 안길 수 있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지만 1년에 고작 1~ 2번 가는 것이 고작이다. 집 인근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도봉 산의 숨겨진 비경, 무수골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1-1 (도봉로169라길 1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