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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상큼한 뒷동산, 봉화산 봄 나들이 '


▲  봉화산 아차산봉수대


 

봄이 보름달처럼 차오르던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중랑구(中浪區) 봉화산을 찾았다.
둥근 해가 높이 걸린 오후 2시, 태릉입구역(6,7호선)에서 그를 만나 금강산도 식후경(食
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부근 식당에서 감자탕으로 늦은 점심을 들고 봉화산
의 품으로 들어선다.


 

♠  조선 태종의 후궁으로 조용히 살다 간 여인 ~
숙선옹주 안씨묘역(淑善翁主 安氏墓域)

봉화산 북서쪽 끝으머리에는 숙선옹주 안씨묘역(선빈안씨묘역)이 작게 둥지를 틀고 있다. 너
무 없는 듯 자리하여 아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묘역을 알리는 어떠한 이정표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다만 근래 닦여진 묘역 북쪽 도로가 '숙선옹주로'를 칭하면서 조금
은 그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숙선옹주로 덕분에 묘역의 존재를 눈치챘음)
묘역은 4차선 숙선옹주로 길가에 자리한 소강회관 뒷쪽 산자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
는데, 도시와 자연이 팽팽히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이 묘역을 경계로 앞쪽은 인간들의 진
흙탕 세상, 뒷쪽은 대자연의 싱그러운 공간이다.

묘역의 주인공인 숙선옹주(?~1468) 안씨는 태종(太宗)의 수많은 후궁 중 하나로 검교한성윤(
檢校漢城尹) 안의(安義)의 딸이다. 1422년에 태종의 8번째 아들인 익령군(益寧君, 1422~1464)
을 낳았고, 태종의 8번째 서녀(庶女)인 소숙옹주(昭淑翁主, ?~1456)와 태종의 10번째 서녀인
경신옹주(敬愼翁主, ?~?), 애기 때 요절한 옹주 1명 등 모두 1남 3녀를 두었다.
옹주들의 탄생 시기를 알 수 있다면 숙선옹주의 나이와 후궁이 된 시기를 대충 짐작해 볼 수
있겠으나 아쉽게도 단서가 부족하다. 다만 태종이 1422년에 55세의 나이로 승하했으므로 3명
의 옹주는 익령군보다 먼저 태어났음이 100% 확실하다. 1년에 1명씩 생산한다고 하면 태종이
세종(世宗)에게 왕위를 넘기고 뒤로 물러앉은 1418년 이후에 후궁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크
다. 그런 케이스로 연산군묘(燕山君墓) 밑에 잠든 태종의 마지막 후궁,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가 있다.

1421년 세종은 안씨를 숙선옹주로 책봉, 그의 아비인 안의에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제
수했으며, 궁궐 뒷전에서 조용히 살다가 1468년에 약 60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400
여 년이 흐른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선빈(善嬪)안씨로 추증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옹주(翁主)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옹주하면 왕의 후궁이 낳은 딸을 일컫는다. 허나 고려 때는 왕자의 부인을 지칭했으며, 제왕
의 공주와 후궁은 보통 궁주(宮主)라 불렸다. 그러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왕비 소생을 공주,
후궁 소생을 옹주로 구분했다. 그리고 후궁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
원(淑媛, 종4품)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숙선옹주도 그렇고 그의 아들 익령군도 그렇고 그저 평범한 수준으로 인생을 마무리했다. 비
록 가늘게 이름은 남겼어도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으니 역사는 그들의 대한 기록에 매우 인
색했다. 하여 그들의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숙선옹주 묘역

▲  옆에서 본 숙선옹주묘 봉분

숙선옹주묘역은 옹주가 잠든 동그란 봉분(封墳)을 비롯하여 묘비 2기, 상석(床石), 향로석(香
爐石), 문인석(文人石) 2기, 장명등(長明燈) 2기, 양석(羊石) 2기, 망주석(望柱石) 2기 등 정
말 있을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왠만한 사대부(士大夫)의 묘역과 비슷한 크기로 원래는 지금보
다 약간 북쪽에 누워있었는데, 산자락을 밀고 신작로(숙선옹주로)를 내면서 그 라인에 있던
묘역은 개발의 칼질에 현 자리로 밀려났다.
그때 후손들(숙선옹주 소생인 익령군의 후손)이 묘역을 이전/정비하면서 묘비와 장명등, 문인
석 등 기존 석물 외에 망주석과 양석, 장명등, 비석, 상석, 향로석을 새로 달고 봉분 밑에 무
려 12지신상을 갖춘 호석(護石)까지 둘렀다. (원래 호석은 없었음) 그리고 묘역 밑의 익령군
의 시호인 소강(昭鋼)을 딴 소강회관을 만들어 묘역을 옆구리에 두고 관리한다.

후손들의 지극정성도 좋지만 오래된 무덤에 하얀 피부의 반질반질한 석물을 잔뜩 심어 옛것과
새것이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되었고, 봉분까지 깔끔하게 손질하면서 장장 500년이 넘은 무덤을
졸지에 50년 된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  묘역 우측 석물

▲  묘역 좌측 석물

묘역을 이루는 석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文人石) 1쌍과 조그만
장명등, 묘비 정도이다. 숙선옹주가 1468년에 세상을 떴으니 무덤과 석물은 적어도 1469년까
지는 닦여졌을 것이다. 그 장대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입혀져 다들 월남에서 돌아온 시커먼
김상병처럼 까무잡잡한 피부를 자랑한다.

▲  고색의 기운이 가득한 묘비

▲  근래에 새로 닦은 묘비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는 무려 2기가 있는데, 이상하게 봉분 바로 앞에 두지를 않고 모두
봉분 좌우에 우두커니 세워 두었다. 묘를 이장하면서 새 묘비를 만들고자 기존 묘비를 옆으로
옮긴 것 같은데, 새 묘비 역시 봉분 앞에 두지 않고 좌측에 비켜 있다.
우측 묘비는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 위에 비석을 얹힌 단출한 모습이며, 고색의
기운이 역력하고 세월이 달아준 주름이 많다. 그에 비해 젊은 나이의 좌측 묘비는 꽤 말쑥한
모습이다.


▲  묘역 구석에 자리한 오래된 장명등 (지금은 묘역 앞 제자리에 있음)

묘역 구석에는 고색이 매우 짙은 키 작은 장명등(석등)이 서 있다. 이 석등은 원래 무덤 앞에
있었으나 새 장명등을 달면서 한참이나 후배인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뒷전으로 물러나 한가로
운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후배를 밀어내고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금 장명등의 역할
을 수행하고 있다.

조선 초기 왕족과 귀족묘의 장명등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그는 높이가 1m도 남짓으로 지
금까지 보아온 장명등 가운데 가장 작다.
비록 새옷을 많이 입어 묵은 티가 줄긴 했지만 무덤 초창기에 조성된 석등과 문인석, 묘비 등
이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어 15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무덤은 그렇더라
도 석등 정도는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보인다. 참고로 이곳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
왕후(新德王后) 강씨의 정릉(貞陵)과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 연산군묘 밑에 자리한 의정궁
주묘 다음으로 오래된 왕족 묘역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1동 120-3 (공릉로2라길 48)


▲  뒷쪽에서 바라본 숙선옹주묘역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소강회관)


 

♠  봉화산 둘러보기

▲  봉화산 산길 (묵동다목적체육관 옆)

숙선옹주묘역에서 숙선옹주로를 따라 신내동(新內洞) 방면으로 조금 가면 묵동다목적 체육관
이 나온다. 체육관 동쪽에는 봉화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푸른 산길이 나있는데, 산 전체가 근
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산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게다가 산 허리에 요즘 유행하는 둘레길
까지 걸쳐놓아 봉화산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봉화산(烽火山)은 중랑구 북부 한복판에 홀로 솟은 야트막한 뫼로 키는 160,1m이다. 묵동(墨
洞)과 중화동(中花洞), 상봉동(上鳳洞), 신내동에 넓게 걸쳐있으며, 동남쪽의 망우리고개와
아차산(峨嵯山) 산줄기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주변에 마땅한 언덕이 없어 시야가 확 트여 있
다. 하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꽤 일품이며, 북쪽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도봉산(道峯山),
서쪽은 북한산(삼각산)과 서울 도심, 남쪽은 광진구와 강남 지역, 동쪽은 아차산 산줄기와 중
랑구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그러다보니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어 고구려(高句麗)는
정상 남쪽에 보루(堡壘)를 설치하여 주변을 살폈다. 이 보루는 고구려가 사패산에서 수락산을
거쳐 아차산 남쪽까지 보루를 줄줄이 달아놓은 보루 라인의 중간 경유지로 도봉산과 아차산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들 보루(약 20여 개가 발견됨)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고 전한다.
(보루 둘레 약 268m, 내부 둘레 약 4,190㎡, 정상 남쪽에 일부 남아있으나 확인하기 어려움)

조선 때는 봉화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했는데, 함경도(咸鏡道)에서 오는 봉화(烽火)를 한이
산(汗伊山, 남양주시 진접읍)에서 받아 남산(南山)으로 넘겼다. 산의 이름인 봉화도 바로 이
봉화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칭으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봉수대 이름은 아차산봉수대)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대와 도당(都堂)이 있으며, 매년 음력 삼짓날에 도당제를 지낸다. 정상
남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묵동과 중화동, 상봉동, 신내동에서 정상
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어디서 출발하던 정상까지는 길어봐야 20~30
분 정도면 닿으며, 정상을 찍고 다른 쪽으로 내려가도 길게 잡아봐야 1시간 이내이다. 게다가
경사도 거의 느긋하여 산의 품이 꽤 포근하다.
산은 작지만 봉화산이 내린 약수터가 즐비해 도처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고, 소나무가 많아 솔
내음이 그윽하다. 게다가 중랑구의 오랜 특산물인 먹골배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나무 농장들
이 북쪽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중랑구청 뒷쪽에는 '봉화산 신내근린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으며, 산 북동쪽에는 근래 옹기테
마공원이 닦여져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  저 산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묵동 봉화산 성황당(城隍堂)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묵동 봉화산 성황당'이라 불리는 돌탑과 제단이 나온다. 이곳은
묵동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성황제(城隍祭)를 올리는 곳으로 거의 동그랗게 석
단(石壇)을 쌓고 서쪽에 제물을 올리는 상석(床石)을 두었으며, 석단 중앙에는 성황당의 역할
을 하는 돌탑이 두툼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그리고 돌탑 남쪽에는 2005년에 세운 검은 피
부의 '묵동 봉화산 성황당' 비석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동네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이 여전한지 성황당 주변은 정비가 잘되어 있으며, 지금도 성황제
를 지내 마을의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 아직까지
동제(洞祭)와 성황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성황제나 산신제 등 마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음) 서울이 20세기부터 사람이 산 것도 아니고 구석
기시대(舊石器時代)부터 살던 터전이라 그런 민간신앙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봉화산 주변도 원래 농사를 짓거나 먹골배를 재배하던 시골로 그들 모두 동제를 지내는 공간
을 갖추고 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거쳐가면서 시골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전통 풍
습도 사라지거나 토박이 주민들만 조용히 지내는 정도로 크게 축소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남
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  울창한 숲을 가르며 정상까지 이어진 산길

▲  중간에서 만난 숲속 쉼터 (비봉각 직전)

▲  비봉각(飛鳳閣) - 봉화산도당굿 보존위원회

느긋하게 펼쳐진 산길을 계속 오르면 정상 북쪽에 경쾌한 처마선을 드러낸 3칸짜리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이 기와집은 '비봉각'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데, 겉으로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경사를 이용한 2층 건물이다.
그는 2009년 2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한옥으로 '봉화산 도당굿 보존위원회'에서 관리하
고 있으며, 2층은 도당굿 보존위원회 사무실과 도당굿을 준비하거나 가르치는 방, 그리고 마
루가 있다. 1층에는 창고와 식당이 있으며, 파전과 동동주, 라면, 간식류를 팔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비봉각

▲  봉화산 도당(都堂)과 대문

비봉각 옆에는 봉화산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도당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아차산봉수
대 곁에 도당이 자리해 있지만 도당 주변을 누런색 담장으로 꽁꽁 두르면서 봉수대에서는 뻔
히 바라보임에도 접근할 수가 없다. 봉수대와 도당 서로를 완전 차단한 것이다. (도당이 봉수
대터 일부를 차지하고 있음)

봉화산 도당은 봉화산 정상에 자리해 있는데, 봉화산 산신할머니를 봉안하고 있다. 산신할머
니 외에도 산할머니, 불사할머니, 미륵할머니로도 불리며 보통은 산신으로 통한다. 이렇게 산
신을 봉안하고 있다면 그냥 속편하게 산신각(山神閣)을 칭하면 되겠지만 특이하게도 조선시대
조정의 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다른 명칭, 도당(都堂)을 칭하고 있다. (한자도 같음)
도당은 부군당(府君堂)과 더불어 서울 지역의 오래된 당집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도당에
서 지내는 제사를 도당제(都堂祭), '도당굿'이라 부르며, 이곳 도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봉화
산 도당굿이라 부른다. 산신을 봉안한 공간이다보니 도당굿 외에도 산신제도 같이 지낸다.

봉화산 도당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실록 29년(1446년) 3월 4일 부분에 '봉
수대 상단에 가옥을 만들고 병기(兵器)와 아침 저녁으로 공급되는 물과 불을 담는데 필요한
기물을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건물이 도당으로 전환되었다는 설이 있다.
도당은 그 시대에 맞는 건물 스타일로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원형을 많이 잃었는데, 구
한말 이후로 아차산봉수대가 은근슬쩍 사라지면서 봉수대의 빈터까지 적지 않게 차지하고 있
다. 그러다가 1992년 여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붉은 벽돌과 시멘트로 새로 지었다. 

이 도당은 400~500년 동안 봉화산 주변 주민들(묵동, 상봉동, 중화동, 신내동)이 마을의 안녕
과 풍년을 기원하던 오랜 성지로 이곳을 통해 서로의 결속과 대동의식을 고취시켰다. 즉 주변
마을 사람들은 봉화산을 구심점으로 뭉쳤던 것이다.
도당굿은 매년 음력 3월 3일(삼짓날)에 지내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들 동네에서 번갈아 지냈
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묵동이 손을 때자, 나머지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에서 30여 년 간
번갈아 가면서 제를 지냈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봉화산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서 토
박이들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도당굿이 나날이 퇴색해가자 2000년부터 중랑문화원에서 '봉화
산 도당제 보존위원회'를 결성하여 직접 도당굿을 챙기고 있다. 그러다가 2005년 1월 '봉화산
도당굿
'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34호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봉화산 도당

도당굿은 비록 때가 맞지 않아 구경하진 못했지만 오랜 내력에 걸맞게 평소에도 도당을 찾아
치성을 올리는 아낙네들이 어느 정도 있는 모양이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어서 도당까지 접근
할 수가 있었는데, 도당에는 아줌마 신도 2명이 있었다. 그중 1명은 기도를 하고 있었고, 다
른 1명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살짝 살펴본 도당 중앙에는 조그만 산신할매상이 빨간 방석에 앉아있었다. 옷은 순 하얀색의
장삼으로 머리에 고깔을 쓰고 있어 마치 승무(僧舞)를 벌이는 승려 같다. 그의 얼굴은 뽀송뽀
송한 하얀 피부로 산신에 걸맞지 않게 귀여움이 적지 않게 묻어나 있고, 그 옆에는 산신의 비
서격인 작은 동자상이 있다. 뒷쪽에는 산신과 관련된 산과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는
데, 그림 아래쪽은 산신상과 방석에 가려져 있으나 아마도 산신과 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있어야 비로소 산신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산신상이 앳된 것을 보면 근래에 다시 만든 듯 싶다. 초창기 산신상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이건 정말 국가 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옛것은 진
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산신상을 막 사진에 담으려고 하니 청소하던 아줌마가 이제 문을 닫을 것이니 나가라고 그런
다. 그래서 군소리 내지 않고 대문을 나가니 바로 대문을 굳게 봉해버렸다.


▲  봉화산 도당의 주인장, 산신할머니상

봉화산 도당굿은 굿 하루 전날에 당주가 찾아와 직접 도당굿에 필요한 제물을 점검하며, 바로
다음날(삼짓날) 도당과 아래 공터에 마련된 제단에 제물이 차려진다.
굿 진행 순서는 '거리부정'을 시작으로 주당물림, 앉은 부정, 불사할머니거리, 가망청배, 진
적, 본향, 상산, 별상, 신장, 대감, 산제석, 창부, 군웅, 용신, 대잡이 등이며, 2005년 도당
굿에서는 진적에 앞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무녀(巫女)는 도당 안에 들어가 앉아 부
정을 친 후, 봉화산 할머니를 모시는 불사굿을 한다. 당 안에서 청배한 후, 마당에 놓인 물동
이를 타고 공수를 주며, 불사굿이 끝나면 나머지 굿은 도당 밑 비봉각 앞에 차려진 가설 굿청
에서 한다.
군웅굿에서는 소머리 사실을 세우고 그것이 쓰러지는 방향을 주시하는데, 특정 마을 방향으로
쓰러지면 그해 좋지 않다고 믿었다. 대는 참나무를 사용하여 굿청을 1바퀴 돌고 서낭당에 놓
는다.
온갖 잡귀를 풀어 먹이는 뒷전을 끝으로 도당굿을 마무리하며, 보통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하
루 종일 펼쳐진다. 또한 예전에는 음력 6월 초하룻날도 소를 잡아서 치성을 올렸으나 이제는
도당굿만 지낸다.
도당굿 지정 무당은 신위행(1939년생 여자), 지정 악사는 김광수(1945년생 남자)로 이들은 봉
화산 도당굿 기능보유자이며, 굿은 신들린 무당을 불러서 하고 악사(樂士)는 피리, 대금, 해
금을 담당한다.


▲  아차산 봉수대터 - 서울 지방기념물 15호

도당 바로 옆에는 복원된 아차산봉수대가 자리해 있다. 도당과 더불어 봉화산의 정상을 누리
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봉수대 이름이 봉화산도 아니고 '아차산봉수대'를 칭하고 있다는 것
이다.

이 봉수대는 두만강(豆滿江)에 있는 함경도 경흥(慶興)에서 시작하여 서울 남산까지 이어지는
조선 봉수로의 1번 노선으로 그 노선의 끝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직전 남양주 한이산(汗伊山
)에서 봉수를 받아 조선 봉수대의 중심인 남산 봉수대로 넘겼으며, 아차산봉수대로 인하여 이
산은 봉화산 또는 봉우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활발하게 봉화를 피우던 이곳은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되자 철저하
게 버려졌다.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과 사람들의 괴롭힘으로 봉수대는 어느 세
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졌고, 봉화산 도당이 그의 빈 자리를 둥지로 삼았다.
아차산 봉수대가 얼마나 완벽하게 잊혀졌던지 그 위치마저 잃어버렸다. 해방 이후 아차산 봉
수대 자리를 그 이름에 따라 광장동 아차산 능선에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정작 아차산에서는
봉수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의
지도에 봉화산을 아차산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비로소 아차산 봉수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었
고 그로 인해 아차산의 영역이 봉화산까지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었다.

1994년 11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고자 완전히 쓰러진 아차산 봉수대를 그럴싸하
게 복원했는데 애초 5개의 봉수가 있었으나 1개만 재현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티는 아예 여
물지도 않았고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너무 반질반질하다. 그래서 문화재청 지정명칭
도 아차산봉수대가 아닌 '아차산봉수대터'이다. 끝에 '터'를 붙여 '터'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차산봉수대가 있는 봉화산은 동남쪽 아차산 산줄기를 제외하면 주변이 죄다 평지라 봉수대
위치로는 아주 좋다. 여기서 봉수를 피면 약 10km 떨어진 남산 봉수대에서 쉽게 확인이 가능
했으며, 눈이나 비가 내리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남산으로 달려가 상황을 알렸다.

▲  북쪽 밑에서 바라본 아차산봉수대

▲  봉수대의 뒷통수


▲  봉화를 피우던 봉수대
이제는 봉화를 피울 일이 없으니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은퇴자 신세이다.
허나 그의 쓸쓸한 체면도 살려줄 겸, 봉화 체험을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1994년에 복원된 봉수대이니 그리 손해는 없을 것이다.

▲  봉수대 창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봉화를 피웠다. 봉화 연기는 봉수 꼭대기로 모락모락
피어올라 하늘을 긴장시키고 남산 봉수대를 바쁘게 만든다. 특히 두만강
너머 애들이 난을 일으키면 더욱 그렇다.

▲  아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정상 남쪽

봉수대 남쪽에는 쉼터와 조망대가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조망대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망
우동과 상봉동, 면목동 지역을 비롯해 아차산 산줄기, 동대문구 동부, 광진구, 성동구, 멀리
강남을 품은 대모산(大母山)과 구룡산(九龍山), 우면산(牛眠山) 산줄기까지 훤히 시야에 비친
다.


▲  속세를 향해 고개를 내민 봉화산 정상 조망대

▲  정상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중랑구와 광진구, 성동구 지역)
멀리 대모산, 구룡산, 우면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봉화산 정상에서 상봉동으로 내려가는 소나무 산길

정상이란 자리는 꿀이긴 해도 한편으로는 독성도 적지 않아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이다. 하여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렇게 정상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상봉동 보현정사 방향으로 내려갔다. 이 길은 소나무가 무
성하여 그들이 베푼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후각이 말끔히 정화되는 기분이며, 산길 주변
에는 조그만 바위들이 진을 치고 있어, 오로지 흙길로 이루어진 묵동다목적체육관 기점 산길
보다 덜 차분한 모습이다.


▲  내려가면서 바라본 중랑구 지역
아파트로 거의 도배가 된 신내동(신내택지지구), 그 너머로 망우동과
면목동,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상봉동 보현정사 입구

정상에서 15분 정도 내려가니 보현정사(普賢精舍)란 조그만 절이 나온다. 이 절은 20세기 중
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역사가 매우 짧고 소장 문화유산이 없는 절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항아리 겉돌 듯 짧막하게 둘러보고 나왔다. 여기서 2~3분 정도 내려가면 중랑구청 서
쪽에 자리한 신내12단지이다.

* 봉화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
* 아차산봉수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산46-19


 

♠  신립의 아들로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무인, 충익공 신경진 묘역
(忠翼公 申景禛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5호

봉화산을 둘러보고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넘쳐서 여기서 멀지 않은 망우동 용마공원으로 이
동했다. 용마공원은 용마산(龍馬山, 348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공원으로 그 서쪽에 충익공
신경진을 비롯한 그의 평산신씨 묘역이 숨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신경진 묘역과 신도비는 그
묘역의 갑(甲)이자 상징과 같은 존재로 따로 지방문화재의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신경진 묘역은 묘와 신도비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날에는 호랑이가 담배를 물고 나타나도 이
상할 것이 없는 깊은 산자락이었다. 그러다가 서울이 나날이 팽창하면서 면목동과 망우동 지
역이 개발되어 묘역 서쪽과 북쪽, 남쪽까지 주거지가 들어찼고, 동쪽으로 가늘게 용마산 산줄
기를 붙잡고 있었으나, 그 동쪽 마저 도로를 내고 주차장을 닦으면서 도로 속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묘역의 주인공인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은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 집안으로 임진왜란 초기 충주 탄금대(단월역) 전투를 거하게 말아먹고 사망한 신립(
申砬, 1546~1592)의 아들이다. 자는 군수(君受)로 서울 출신이며, 전사한 아비의 후광으로 선
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다.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部都事)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했으며, 태안군수와 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진 첨사(僉使)가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와의 화의를 반대하며 그들
이 보낸 사신을 접대하지 않고 내쫓았는데, 그 일로 체임(녹봉을 당분간 받지 못함)이 되기도
했으며, 이후 함경도 갑산(甲山)부사가 되었고, 함경남도 병마우후(咸鏡南道 兵馬虞候)를 지
내던 중,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를 지내 함경도 변방을 관리
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올라 여진족의 후금(後金)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
책을 펼치자 이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고 관직을 접고 쉬다가 1620년 광해군에게 반감을 품은
김류(金瑬),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반란을 모의, 그와 인척 관계에 있는 얼떨떨한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위에 세우기로 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반
란 준비를 꾀했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면서 이듬해 자행된
인조반정(1623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반정 이후 인조의 명으로 공조참의(工曹參判).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
兵曹參判)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 호위청(扈衛廳). 포도청(捕盜廳) 대장을 겸해 왕실을
호위했다. 또한 반정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이면서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운 공로로 이
름도 허벌나게 긴 '분충찬모입 기명륜정사 일등공신(奮忠贊模立 紀明倫靖社 一等功臣)'에 녹
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뚜껑이 뒤집혀 난을 일으키자 인조와 서인 패거
리들은 충남 공주(公州)로 줄행랑을 쳤다. 이때 신경진은 훈련대장으로 어가를 호위했고, 난
이 평정되자 이괄이 추대했던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멋대로 쳐죽여 대간의 탄
핵을 받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평성
부원군(坪城府院君)으로 승진했다.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리던 신경진은 자신의 공과 지위를 과시하며 남의 집터 수천 칸을 빼앗
는 등, 영 좋지 않은 행동을 보였으며, 그로 인해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 목릉(穆陵)
과 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이 되었으나 능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다시 복직
되어 형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겸했다. 그리고 이듬해 1636년에는 병조판서까지 겸하게 되었으
나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급하게 줄행랑을 친 인조를 받들며
청나라군에 대항했다. 허나 청군이 산성을 포위한 채, 소규모의 도발만 벌이며 조선군의 식량
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니 인조는 결국 배겨나지 못하고 45일만에 문을 열고 항복했다.

1637년 이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
했는데 이때 호란 이후 민심수습책을 논의하고 지방 수령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건의했다.
1638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좌의정이 되었으며, 최명길과 의논해 승려 독보(獨步)
를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
선의 명나라를 향한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1641년에 다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인질로 잡혀있던 김상헌(金尙憲) 등을 옹호했으며,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서 병으로 사퇴했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0일도 안되어 병사했다.

신경진은 그의 아비를 닮아 무예가 뛰어났다. 그래서 훈련도감, 호위청 등의 친병(親兵) 관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왕의 호위를 맡았다. 또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 시절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영의정까지 꿰고 찬
것이다.
그는 외교 활동에도 소질이 있어 청나라에 여러 번 사신으로 가면서 청나라의 과도한 내정 간
섭을 줄이게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훈서(勳西)와 청서(淸西)로
분열되어 훈서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자신이 무신임을 내세워 간여하기를 꺼렸다. 또한 송시
열 등의 사림을 천거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의 시호는 충익(忠翼)으로 1651년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은혜를 받았던 송시열이
직접 찬한 내용이 신경진 신도비에 전하고 있다.


▲  신경진 신도비(神道碑)

▲  옆에서 본 신도비

▲  신도비의 뒷모습

신경진 묘역의 백미는 바로 신도비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묘역이 아닌 신도비만 지방문화재
로 지정될 만큼 아주 괜찮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 서쪽
에 비석을 두었다. 아마도 신경준묘의 신도는 서쪽이었던 모양이다. 비석 높이는 3.68m로 특
히 귀부(龜趺)의 몸집이 상당해 더욱 장대하게 다가온다.
땅바닥에는 바닥돌과 기단석을 차례대로 깔고, 그 위에 거북 모양의 귀부를 두었다. 그의 얼
굴을 보면 마치 성이 난 듯, 무엇인가를 뿜어낼 듯한 기세 같으며, 입에는 동그란 무언가를
물고 있으니 아마도 여의주가 아닐까 싶다. 앞다리는 바짝 웅크려 앉아있는 모습이며 등짝에
는 세월의 검은 때가 가득 입혀진 거북 등껍질이 새겨져 있다. 뒷쪽에는 뒷다리와 두꺼운 꼬
랑지가 서쪽으로 말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생동적이고 귀여워 진짜 거북의 꼬랑지 같다.

귀부 위에는 빗돌을 세워 신경진의 생애를 다루었고, 꼭대기에 정교하게 처리된 용머리 장식
인 이수(螭首)를 두었다. 신도비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으며,
머리글인 두전(頭篆)은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비석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는 커다란 거북받침돌 덕에 '거북비'라 불리웠는데, 귀부가 지나
치게 커서 전체적인 비례는 좀 떨어진다. 허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 조선 중기
신도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건강을 위해 비석 주위로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도비 주변이 황당하게도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
이라 차들이 자칫 바퀴를 잘못 굴릴 경우 비석의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  신경진 묘역

신도비 동쪽 언덕에는 신경진 묘역이 자리를 닦았다. 묘역과 신도비 사이에는 주차장이 닦여
져 있는데, 묘역 주변은 철책을 둘러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허나 철책 바깥에서
도 보일 것은 다 보이니 굳이 개구멍을 찾거나 철책을 넘어갈 필요는 없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신경진 묘역은 호석을 두른 동그란 봉분(封墳)을 비롯하여 묘비,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으로 이루어진 이 땅
에 흔한 사대부(士大夫) 묘역 스타일로 주변이 나무로 무성하다. 특히 동자상을 상석 주변에
깔고 있어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묘역 동쪽 산자락에는 신경준의 선조와 후손들 무덤 30여 기가 흩어져 있다. 신경준묘역을 비
롯한 이들 묘역을 덩어리로 묶어 평산신씨 묘역이라 부르는데, 신말평(申末平, 1452~1509)과
그의 아들인 신상(申鏛, 1480~1530), 신경준의 손자 신여철(申汝哲, 1634~1701) 등이 묻혀있
으며, 그중 신상은 신도비도 갖추고 있다.
조선 초부터 후기까지 조성된 묘역으로 조선 초/중/후기 무덤 양식을 고루고루 살펴볼 수 있
으며, 묘역 보호를 위해 철책을 꽁꽁 두른 탓에 접근하지는 못했다. 어딘가 숨겨진 개구멍이
있을 듯 싶지만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오로지 신경준묘와 신도비
만 염두에 두었고, 그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미련없이 선을 긋고 자리를 정리했다.

신경진 묘역을 끝으로 5월 초, 봉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충익공 신경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 69-1 (망우로70길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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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5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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