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락산 벽운동계곡 (벽운동 기점에서 염불사까지)
▲ 벽운동계곡(碧雲洞溪谷) 하류 |
벽운동계곡(벽운계곡)은 수락산의 주요 계곡의 하나로 수락동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벽운동 이란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조선 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선비와 양반들의 발길 이 빈번했으며, 그들이 우수한 경관에 부여하는 동천(洞天)의 지위까지 누리면서 벽운동천(碧 雲洞天)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곡을 유람에서 끝내지 않고 별장까지 지어 머문 이가 있다. 바로 사도세자(思 悼世子)의 장인이자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다. 그 는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져 별장을 지었는데, 계곡에 바위가 하얗게 드러난 수락산 절경이 골짜기와 어우러져 마치 흰구름이 머무는 것 같다며 벽운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계곡 뿐 아니 라 계곡 밑에 자리한 마을까지 벽운동(碧雲洞)이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이후 홍봉한이 영의정이 되고 조정의 실세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벽운동 별장을 찾았다. 그로 인해 벽운동은 자연히 양반들의 순례 명소가 되었고, 혜경궁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벽운동계곡은 바위와 암반이 많고, 상류와 중류에 폭포와 소(못)이 여럿 널려 있다. 계곡 하 류(염불사 직전)는 수심이 얕고 숲이 무성하며 쉬어갈 자리도 넉넉하여 적은 발품으로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덕성여대생활관 직전 계곡 북쪽에는 벽운동마을을 이루고 있는 식당들이 터를 닦고 있어 백숙과 도토리묵, 파전 등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허나 좀 더 세련 된 경관을 원한다면 하류를 버리고 과감히 위로 올라가길 권한다.
염불사를 지나면 암반들이 적지 않게 펼쳐지며, 벽운산악회를 지나면 이 계곡에서 가장 큰 폭 포(그래봐야 높이 5m도 안됨)와 못이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큰 암벽과 조촐한 폭포 줄기 를 볼 수 있으나 더 이상은 괜찮은 곳이 없다. |
▲ 수락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벽운동계곡길(동일로250길)
▲ 물이 거의 말라버린 벽운동계곡 (덕성여대생활관 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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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운동계곡 기점에서 염불사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이 길은 '김시습 문화 산책로'란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하 나였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梅月堂)이 이 계곡에서 잠시 은둔을 했었다. 하여 그를 기리고 자 그런 이름을 씌운 것이다. 허나 그와 관련된 유적과 설화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다. 포장길(동일로250길)이 싫다면 계곡 길로 가도 되며, 덕성여대생활관 북쪽 계곡에는 벽운동천 을 비롯한 바위글씨들이 숨어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계곡길은 염불사 부근까 지 이어져 있다.
포장길 중간에는 펜스가 둘러진 덕성여대 생활관이 있다. 이곳이 바로 홍봉한의 벽운동 별장 자리로 우우당(友于堂)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마저 근래에 철거되어 주춧돌만 남은 실 정이다. 그는 'ㄱ' 모습의 건물로 우우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썼다고 전하나 세월 의 거친 흐름 속에 누가 잡아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홍봉한이 꽤 잘나갔던 시절에는 사랑 방으로 쓰였는데 손님들로 늘 부산했다고 하며, 혜경궁 홍씨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계곡 경치 를 즐기며 감수성과 서정성을 키워나갔다.
홍봉한이 사라진 이후, 그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가 19세기 후반에 서예가로 유명한 국봉 이 병직(鞠峰 李秉直)의 고조부가 사들였다. 우우당 바깥 계곡 바위에는 벽운동천(碧雲洞天), 운 원수(雲源壽), 국봉(鞠峰), 소국(小鞠) 등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이는 이병직이 새겼다고 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병직은 국봉 외에 송은(松隱)이란 호도 가지고 있는데, 교육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후학 양성에 공을 들이다가 결국 거덜이 났다. 그래서 1957년 6월 덕성학원에서 매입해 생활 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한옥 상당수를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우우당만 겨우 남게 되었다가 그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성북동 성락원(城樂園), 부암동 석파정(石坡亭)과 더불어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별장( 별서) 유적인 만큼 서울시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적극적으로 지켜주었으면 좋으련만 현 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
▲ 벽운동계곡의 주름진 반석들 (염불사 부근)
▲ 염불사 정문 (오른쪽은 시립수락양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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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운동계곡 기점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염불사가 있다.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 一柱門) 대신 철로 된 철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도맡고 있는데 낮시간이라 문은 활짝 열려있다. 철문을 들어서면 바로 날씬하게 솟은 염불사 표석이 중생을 맞이하고, 그를 지나면 허전한 주 차장과 아주 짧은 숲길이 나오면서 바로 염불사 경내가 모습을 내민다.
염불사는 수락산 그늘에 살던 시절, 수없이 수락산의 품을 오갔음에도 1번도 들어간 적이 없 었다. 왜냐?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생각을 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그곳에 이렇게 발을 들인 것은 생각 외로 좀 오래된 절이고 무려 지방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근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인터넷의 도 움이 무지 컸다. 절이 오래되었음에도 내력을 알리는 안내문 조차 꺼내놓지 않았으니 그동안 지나친 것은 어쩌 면 당연하다. 오래된 역사에다 문화유산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런 절만 보면 격하게 구미가 땡 기는 것이 본인의 습성인지라 이번에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
▲ 염불사(念佛寺) 경내 (왼쪽이 큰법당, 오른쪽이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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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벽운동계곡에 조촐히 터를 닦은 염불사는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 아마도 조 선 중기나 후기에 살짝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서울에는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우기는 절이 유난히도 많다. 아무래도 그가 고려 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승려이고 서울 천도에도 크게 관여를 했으며,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니 그동안 많은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던 원효(元曉)나 의상(義湘), 도선(道詵) 등의 쾌쾌묵은 존재보다는 더 무게감이 컸을 것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랫동안 마땅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03년에 상궁(尙宮) 김씨 가 돈을 대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지장전을 지었다. 이때 자신의 부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주머니를 남겼다. 6.25 때 절이 파괴된 것을 다시 지어 영몽사(靈夢寺)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후 쌍몽사(雙蒙寺 ), 염불사(念佛寺)로 간판을 바꾸었다. 1965년에는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 신(山神)의 덕이라며 절에 산신각을 지어주었으며, 2005년에 2층짜리 큰법당을 짓고, 대웅전 을 부시고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큰법당과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독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腹臟) 일괄','지장시왕도'가 있 다. 이중 목관음보살좌상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나 원래부터 이곳 불상은 아니며 지 장시왕도와 함께 다른 곳에서 넘어온 것이다.
절이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고색의 기운은 싹 말라버렸으며, 수락산의 주요 산길인 벽운 동계곡 산길 옆에 자리해 있어 산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근히 들려 온다. 허나 절을 감싸고 있는 짙푸른 나무들이 그 소리를 크게 걸러주니 고적한 산사의 기운을 누리기에 부족함은 없으며, 일렁이는 숲과 멋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산바람과 물바람, 풍경소리에 번뇌가 싹 달아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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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염불사 큰법당 |
▲ 큰법당 석가3존불 |
경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큰법당을 찾았다. 이곳에 염불사의 보물이 있을 듯 해서이다. 큰 법당은 이곳의 중심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요사(寮舍) 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2층이 큰법당으로 옆으로 난 계단을 통해 오르면 된다. (1층 내부에서 올라가도 됨)
큰법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단에 장엄하게 자리한 석가3존불은 문수보살(文殊菩薩) 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 뒤로 후불탱이 자리해 있고, 윗쪽에는 붉은 단청을 칠한 닫집이 화려하게 보궁(寶宮)을 이룬다. 천정에는 7마리의 새 모형 이 날개를 활짝 퍼득이며 날고 있다. 석가3존불 좌우에는 조그만 감실(龕室)을 가득 만들어 작은 금동불(金銅佛)을 안치했는데 이 들은 중생들에게 시주를 받아 달아준 원불(願佛)로 죄다 금빛을 내고 있어 너무 화사하다 못 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허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대충 봐도 된다. 다 2005년 이후에 조 성된 따끈따끈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봐야 되느냐? 석가3존불 옆을 보면 3중으 로 이루어진 조그만 붉은 기와 닫집이 보일 것이다. 닫집 밑에는 유리막에 감싸인 불상이 있 는데, 그가 바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목관음보살좌상이다. (그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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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관음보살좌상은 1695년에 조성된 보살상이다.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는 63 cm로 조그만 편인데, 그의 뱃속에서 조성시기가 담겨진 발원문(發願文)과 후령통(候鈴筒), 법 화경(法華經) 3책, 주사다라니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어 그의 정체를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발원문에 따르면 박삼룡과 박용산 등의 시주로 전라도 장흥 사자산 봉일암과 수도암(修道庵) 의 불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조각승인 득우와 덕희가 만들었다. 봉일암과 수도암이 어떤 절이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집을 잃고 이러지러 옮겨 다니던 것을 어찌어찌하여 이곳 염불사까지 흘러들어왔다.
그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발원문이 남아있 어 17세기 후반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보여준다. 비록 보살상의 한계로 법당 불단을 차지하 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났지만 석가3존불과 달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특별히 유 리막까지 씌워 그를 보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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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무늬의 보관(寶冠)을 씌워져 있다. 보관은 귀까지 내 려와 있는데, 여러 장식물이 주렁주렁 달려있 고,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가 약간 보인다. 넓 은 이마 한복판에는 동그란 백호가 찍혀 있고, 눈썹은 약간 구부러져 있으며, 눈초리는 가늘 고 길다. 코는 조그맣고, 입술은 붉으며, 수염이 가늘게 표현되어 있는데,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살이 좀 올라 보인다. |
▲ 옆에서 바라본 목관음보살좌상 |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덮고 있는데, 가슴 쪽은 드러 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옷주름 선은 아래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고, 대좌(臺座)를 일부 덮고 있다. 붉은색 대좌는 닫집과 함 께 절에서 마련한 것으로 그의 거처가 은근히 탐이 난다. |
▲ 상궁김씨의 복장주머니와 목관음보살좌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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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법당 남쪽 벽에는 오래된 문서와 주머니를 머금은 액자가 걸려있다. 이것들이 뭔가? 살펴보 니 글쎄 괘불(掛佛)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복장 유물이 아닌가? 보통 절에서 복장유물은 공개 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 한다고 해도 박물관을 통해서 살짝 할 뿐인데, 유물 모두 부피가 가 벼운 것들이라 신변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허나 염불사는 박물관도 아닌 그들 법당에 복장 유물을 과감하게 공개하는 위엄을 보였다.
액자 왼편에 있는 호리병 모양의 물건은 1903년에 상궁김씨가 지장전을 지어주면서 자신의 부 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만든 발원문을 담은 복장주머니이다. 천하에 무려 300곳 이 넘는 절을 찾아갔지만 복장주머니는 처음 본다. 수락산이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내려주는구 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액자 오른편에 있는 문서는 목관음보살좌 상 뱃속에서 나온 문서로 법화경(法華經)과 주사다라니이다. 글씨는 모두 붉은색인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
▲ 염불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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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 유물 액자 옆에는 빛바랜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1869년에 위국과 그의 처 박씨, 유오 등이 별세한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조성한 것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 금암당 천여(錦巖堂 天如)가 그의 제자 취선(就善), 묘영(妙英)과 함께 그렸다. 처음에는 동대문 밖 감로암(甘露庵)에 있었으나 6.25로 염불사 탱화들이 죄다 못쓰게 되자 급 한데로 감로암에 있던 이것을 소환하여 봉안했다.
그림 중앙에는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이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발산하며 하얀 대좌에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저승의 10왕과 문관(文官)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일제히 지장보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등장 인물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다소 여유로 운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필선과 정교한 금니 문양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19세기 탱화 채색은 거의 원색적인데 비해 이 탱화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색채 대비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채도를 낮추어 은은하면서도 맑은 17세기 불화 채색 양식을 보여준다.
큰법당 보물들을 한참 살펴보고 있으니 1층에서 신도 아저씨가 올라와 주름진 인상을 보이며 왜 사진을 찍냐고 물어본다. 하여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인상을 풀면서 여러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예전에 서울시에서 이들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관련 문화유산을 사진에 담아갔는데, 복 장 유물은 방바닥에 펼쳐놓고 사진에 담았다고 하며 그때 찍은 복장유물 사진이 절에 있으니 필요하면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는데, 아직까지 관련 사진 은 오리무중이다. 허나 솔직히 필요는 없다. 지방문화재 보유 기념으로 2008년 4월 26일에 알만한 가수를 소환하여 '염불사 산사음악회'를 떠들썩하게 열기도 했다. 안그래도 오래된 내력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는 열악한 형편인데 이 렇게 지방문화재를 지니게 되었으니 이만한 꿀단지가 없다. 그 외에 개인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을 고하고 법당을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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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불사 지장전(地藏殿) 큰법당 뒷쪽에는 지장전과 이제 막 피어난 마 애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지장전은 1903년 상궁 김씨가 지어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었으며, 내부에는 지 장전의 주인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 10 왕, 금강역사상, 시왕탱, 지장탱 등이 봉안되 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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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채감이 넘치는 지장전 내부 |
▲ 근래 조성된 마애약사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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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지붕 2가족, 산신각과 독성각 |
▲ 산신 가족을 담은 붉은 색채의 산신탱 오른쪽 벽에는 붉은 칠성탱이 걸려있다. |
지장전을 지나면 큰 바위와 산신각(山神閣)이 나온다.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65년에 신도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신의 덕이라며 흔쾌히 지어 준 것이다.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봉안하고 있는데, 칠성(치성광여래) 가 족을 담은 칠성탱은 산신탱 옆에 놓았으나 독성의 공간은 그 옆에 독성각(獨聖閣)이란 독자적 인 현판을 달며 1칸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지붕은 하나, 건물 이름과 현판은 2개를 이루고 있다. 건물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뒷배경으로 자리한 산신각의 모습이 마 치 산꼭대기 부근 바위에 홀로 자리한 모습처럼 보인다.
※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가면 수락산입구 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쪽 으로 들어서 은빛3단지를 지나면 벽운동계곡이다. 염불사는 수락산입구 교차로에서 도보 15 분 * 벽운동계곡은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으니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벽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 염불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51 (동일로250길 44-142, ☎ 02-938-93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