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단은 종암초교 남쪽이자 제기동 주택가 한복판에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이곳은 1476년에 조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관경대(觀耕臺)로 조선의 제왕들이 신하를 거느리고 농사의 소중 함을 알렸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이 제사를 선농제(선농대제)라고 하며, 거기서 선농단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농 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은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고 농사를 권장했다는 기록은 신라 초인 기원전 41년에 처음으로 나 타난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비와 함께 6부(六部)를 순행(巡行)하여 농사와 잠사( 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했다고 하며, 매년 경칩(驚蟄)이 지나고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왕이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거나 또는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경주 동쪽인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제를 지냈으 며, 입하(立夏)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 선농제란 이름은 바로 신라 때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는 983년 1월, 성종(成宗)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 을 갈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냈다. 하여 이때부터 이 땅의 토속적인 농사 신(神) 대 신에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성종은 송 나라와 교류를 하며 중원(中原) 문화에 깊이 심취해 그곳의 문화와 제도를 마구잡이로 가져온 군주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려는 황제(皇帝)가 원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풍년을 같이 기원했고, 매년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서도 일종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 별도의 선농제 는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던 선농제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조선 초부터이다.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 祭之法)을 제정하고 태종 때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했으며, 1430년에는 박연(朴堧)의 건의 로 선농지악(先農之樂)에 쓰이는 토고(土鼓)를 대체하고자 가죽 테를 한 북을 만들어 사용하 였다. 그러다가 1476년 성종의 왕명으로 관경대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선농단이며, 사직단( 社稷壇), 선잠단(先蠶壇), 영성단(靈星壇)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제단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선농제를 지낼 때는 제왕이 직접 신하를 거느리고 제를 지냈으며, 그것이 끝나면 동적전<제기 동과 전농동(典農洞) 일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적전을 관리하는 적전령(籍田令)이 푸른 보 자기에 감싸인 쟁기를 제왕에게 올리며, 그것을 받은 제왕은 직접 쟁기를 잡고 밭에 5번 쟁기 질을 하는 이른바 친경(親耕) 쇼를 벌였다. 쟁기가 끝나면 관경대로 올라가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발된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로하고 그 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런 다음 농작물 씨앗이 얼어죽는 것을 막는 절차까지 마 무리 되면 의식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궁궐로 돌아간다. 이렇듯 친경의례는 농사의 소중함을 제왕이 몸소 보여주고 비록 잠깐이지만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도 활용되었 다. 허나 친경의례는 성종 이후 어쩌다 1번 벌일 정도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으며(연산군 1회, 중 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숙종( 肅宗)은 의식을 치루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했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영조 시절에 비로소 다시 치러지게 된다.
동적전이 있던 제기동과 전농동 지역은 지금은 완전 주택가라 썩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20세 기 초까지만 해도 너른 경작지였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는 터란 의미로 선농단에 서 비롯된 이름임> 왕실에서 관리하던 적전(籍田)은 2곳이 있었는데 선농단 근처에 동적전이 있었고, 개성(開城) 동쪽 전농동에 서적전(西籍田)이 있었다. 동적전은 제사용 곡식을 저장했는데, 선농단(관경대 )과 희우정(喜雨亭), 필분각(苾芬閣)이 있었고,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 반면 개성에 있는 서 적전에는 형향각(馨香閣)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나온 곡물은 종묘제례에 주로 썼으며, 서적전 곡물은 왕실에서 벌이는 온갖 제사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들 적전에서 쓰고 남은 곡물은 백성을 구휼할 때 쓰거나 의약청(議藥廳 ), 산실청(産室廳) 및 제왕과 왕비의 예장(禮葬)에 사용했다. |
이렇듯 왕실의 주요 행사로 바쁘게 살았던 선농제는 1909년까지 잘 유지되었으나, 1908년 이 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순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국가 제단을 정리하면서 사직단에 통합되었다. 허나 동적전 친경의례는 1910년 5월까지 이루어졌는데 그때 순종이 신하와 백성 을 거느리고 친경을 하는 장면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왜정(倭政) 때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농제가 조촐히 진행되었으나 1940년대 왜정이 망국의 제단을 욕보이고자 선농단 주변에 청량대공원(청량대)을 닦으며 제단을 아작내고 동적전이 있 던 곳에는 전농공원을 닦았다. 이때 제단 북쪽 땅이 떨어져나가 보통학교(현 종암초교, 1922 년 개교)가 지어졌고, 1935년에 제단 남쪽에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들어서 면서 남쪽 땅까지 썰려나갔다. 또한 군수물자 징수란 명목으로 제사 도구를 거의 뜯어가 제사 도 중단되고 말았다. 어둠의 시절 이후에도 수난은 여전하여 1946년 이후 제단 주변에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30 년 이상 잠수 아닌 잠수를 타며 주택가에 묻혀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농단의 이름도, 존재감 도 모두 희미해져 세상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 제기동에 뜻있는 이들이 '선농단친목회'를 결성하여 자비를 들여 1년에 1번 씩 치제(致祭)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선 농단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선농단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동대문구와 같이 제례를 지내다가 1988년 행 정기관장 최초로 동대문구청장이 선농제 초헌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92년에는 '선 농대제 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대문구의 흔쾌한 지원과 폭풍 홍보에 힘입어 지역의 대 표 축제이자 문화행사로 제대로 거듭났다. 행사 규모도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나날이 커져 갔다. 그러다가 선농단 복원 여론이 강하게 피어나면서 2013년 8월, 선농단 주변에 장막을 치고 복 원 공사에 들어갔고 2015년 4월 공사가 완료되어 다시금 세상에 위엄을 드러냈다. 옛 선농단 의 모습이 상당수 회복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 북쪽에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닦아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이해를 돕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농단의 구조는 단 주위로 크게 터를 다지고 그 한복판에 단을 두었다. 단이라고 해서 높이 구축된 것은 아니며 땅바닥에서 조금 솟은 정도이다. 제단 테두리는 돌로 잘 다지고 안쪽은 흙으로 다졌는데, 2015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부득이 하얀 피부의 석재가 다소 섞여있 다. 기존에 쓰였던 옛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 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 돌도 선배 돌을 닮아가며 고색의 기운을 머금을 것 이다. 제단 외곽에는 낮은 키의 토담을 쌓았고, 동쪽과 서/남/북쪽 테두리 중앙에 붉은 피부의 홍살 문을 세웠는데. 이들 문과 토담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농단 남쪽에 1단의 석축을 두었 으며, 단 서남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향나무가 영욕의 세월을 견딘 제단을 굽어보고 있다. |
선농대제는 처음에는 정월 길(吉) 해일(亥日)에 했으나 태종(太宗) 때 경칩이 지난 첫 해일로 변경되었다. 그때가 농사가 시작되는 3월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첫 신일(辛日)에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0년에는 양력 5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후에는 4월 말~5월 초/중순 사이에 하다가 지금은 4월 하순 토요일에 하고 있다.
제향(祭享)은 10변(籩) 10두(豆)의 중사(中祀)로 거행하고, 친림제향 때는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다. 집례(執禮)의 창홀 (唱笏)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육일무(六佾舞)를 추며, 제례 봉행 순서는 ① 전폐례<奠幣禮, 농업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 → ② 천조례<薦俎禮, 제신(祭神)에게 음 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의식> → ③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1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 는 의식> → ④ 아헌례<亞獻禮, 아헌관이 2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⑤ 종헌 례<終獻禮, 종헌관이 3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 ⑥ 음복례<飮福禮, 제관이 제 사를 마치고 신이 내린 제물을 먹는 의식> → ⑦ 망료례<望燎禮,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 는 의식> 순으로 거행된다.
영신악(迎神樂)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전폐례에는 숙안지악(肅安之樂). 진찬례에 는 옹안지악(雍安之樂),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며 일무생들은 문무(文舞)를 춘다. 이어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할 때는 일무생들은 무무(武舞)를 추기 시작하며, 아 헌례와 종헌례 때는 수안지악을 다시 연주하고 철변두(徹籩豆)할 때는 옹안지악을, 송신할 때 는 경안지악을 연주한다. (절차가 매우 복잡함)
제사 제물로는 소와 돼지, 양의 고기와 피, 쌀과 기장, 과일, 떡, 술 등을 올렸으며, 모든 행 사가 끝나면 친경에 쓰인 소를 잡고, 제물로 쓰인 소고기를 넣어 탕을 끓였다. 그리고 제물로 쓰인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돼지고기는 편육으로 썰었는데, 탕에 밥을 말고 편육과 여러 반찬을 겯드려 행사에 참여한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제물에 김치가 없기 때문에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쓰지 않기 때문에 소금으로 탕의 간 을 맞추었다. 오늘날 설렁탕을 먹을 때 파와 소금을 겯드리는데, 그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설농탕','설롱탕'이라 불렸 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가운데 글자가 살짝 움직여 지금은 '설렁탕'으로 주로 불린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의 하나이자 서울의 토박이 음식 설렁탕은 이렇게 선농대제 뒷풀이 음식으 로 태어난 것이다.
또한 설렁탕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설농탕의 유래에 대해서 1940년에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선농탕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햇갈림을 준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던 때에 비가 심하게 내려서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드니 왕이 친경에 쓰던 소를 잡아서 맹물에 넣고 끓이라 하였다. 고기 끓인 국물에 소금을 넣어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다' 그 외에 오랫동안 탕을 끓이면 국물이 흰빛을 띠어 '눈처럼 뽀얗다','눈과 같이 무르녹는다' 는 뜻에서 설롱탕이 되었고, 그것이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허나 보통은 선농탕 유래를 많이 신뢰한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거듭난 선농대제는 보통 10시부터 시작된다. 왕산로에서 선 농단까지 짧게 어가행렬을 비롯한 제례행렬을 선보이며, (예전에는 동대문구청에서 출발했음) 10시 20분 정도에 개회식을 갖고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제례를 봉행한다. 제례를 치르는 동안 선농단 북쪽 종암초교에서 동대문구 공무원과 새마을단체 사람들이 점심 을 준비하며 12시부터(보통 11시 30분 이후부터 배식함) 선농대제의 백미(白眉)이자 상징인 ' 전통 설렁탕 재현 및 나누기' 시간을 갖는다. 설렁탕은 누구든 먹을 수 있으며, 전통에 따라 탕에 밥이 말아져 나온다. 반찬으로는 설렁탕의 단짝인 김치와 깍두기를 비롯해 떡과 생수가 제공된다. 설렁탕은 넉넉히 준비하기 때문에(보통 2,000~3,000명 분을 준비함~)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 다. 초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미어터져 밥이 오기까지 상당한 인내를 요하니 차라리 사람이 많이 빠져나간 12시 30분 이후에 먹기를 권한다. 음식은 각자가 알아서 챙겨먹는 것이 아닌 새마을단체 사람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이 알아서 갖다준다. 늦게 갔을 경우에는 밥을 먹을 의 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으며, 가급적 13시 이전에 가는 것이 좋다. (떡과 김치 깍 두기 등이 빨리 떨어짐)
공짜 설렁탕이지만 맛은 생각 외로 괜찮아 왠만한 설렁탕 전문점을 울게 할 정도이다. 시중에 서 거의 7,000~9,000원 하는 설렁탕을 선농대제의 일환으로 공짜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3시부터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설렁탕 요리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며 요리가 끝나면 시식 기회를 제공한다. (대회 참가 자격은 동대문구 관내 식당이나 학교, 단체에 한함 ) 음식을 맛보고 괜찮은 음식에게 점수를 주면 되며 그것을 토대로 요리대회 승부를 결정한다.
※ 선농단, 선농단역사문화관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1번 출구를 나가면 바로 선농단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지시 에 따라 오른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가로수길을 5분 들어가면 선농단이 나온다. 선농단 역사 문화관은 그 북쪽 3거리(종암초교 정문 동쪽)에 자리한다. * 지하철 6호선 안암역(3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4번을 타고 종암초교에서 하차, 여기 서 길 반대쪽으로 건너면 종암초교로 인도하는 골목길(무학로44길)이 있는데 그 길로 도보 3분 * 선농단 관람 시간 : 10시 ~ 18시까지 (11~2월은 17시까지) * 선농대제는 4월 하순 토요일에 열린다. (4월 중순 쯤에 선농단 역사문화관에 전화문의를 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음) * 선농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선농단역사문화관 ☎ 02-355-7990) * 선농단역사문화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