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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서구의 지붕을 거닐다. 개화산 나들이 (약사사) '

   

▲  약사사 3층석탑
◀ 풍산심씨 심사손 묘
▶ 약사사 석불입상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여름이 봄을 밀어내고 천하를 한참 삼키던 6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강서구의 상큼한
뒷동산인 개화산을 찾았다.
개화산은 서울 서쪽 끝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북쪽 끝으머리에 매달린 우리집(도봉동)에
서 꽤 먼 곳이다.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지만 서로가 끝과 끝이라 거리도 거의 40
km,
지하철로 가도 족히 1시간 반은 걸려 그곳에 가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그
러다보니 개화산을 비롯한 강서/양천 지역은 발이 잘안가게 된다.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개화동(開花洞)과 방화동(傍花洞)에 걸쳐있는 뫼로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강서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은 작고 야트막하지만 평지 속에 솟아있는 존
재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일품이며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매우 무성하여 풍경도 아
름답다. 산 동북쪽에는 꿩고개라 불리는 치현산(雉峴山)이 이어져있고, 북쪽에는 한강과
5호선 방화차량기지, 서쪽은 김포평야(金浦平野), 남쪽에는 방화동과 김포국제공항이 있
다.

개화산의 첫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때 주룡(駐龍)이란 도인(道人
)이 살고 있었는데, 매년 9월 9일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
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 9월 9일마다 주룡산에서 술을 마심~)'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
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이며,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또한 주룡 설화 외에
도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는 뜻의 개화산
(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산이 코끼리, 개화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북쪽 행
주산(幸州山, 덕양산)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서
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
(獅象之形)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겉모습은 작지만 속은 알찬 개화산에는 괘 많은 명소가 안겨져 있는데 오래된 석
탑과 석불을 간직한 약사사를 비롯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미타사 석불입상, 호국충
혼위령비, 방화근린공원, 신선바위,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봉수대터, 봉수대, 상사
마을 은행나무 등이 있으며 약수터도 많이 있었으나 그 수가 계속 줄어 이곳의 제일가는
물이었던 약사사 약수터가 2013년 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산 허리에는 강서둘레길 1코스인 개화산숲길(개화산 둘레길 3.35km)이 닦으면서 조
망이 괜찮은 곳에 전망대(개화산, 아라뱃길, 신선바위)를 설치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해
준다. 다만 군부대가 정상과 북쪽 자락에 있어 정상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본글에서는 능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약사사를 살
펴보도록 하겠다.


 

♠  옛 능말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 16-3호)와 느티나무(서울시 보호수 16-6호)

개화산에 안기기 바로 직전에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오래 숙성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형제로 삼정초교 남쪽에 작게 터를 닦은 느티어린이공원(이
하 느티공원)에 자리해 있는데 나는 약사사와 미타사, 풍산심씨 심정공파 묘역, 강서둘레길에
만 눈이 어두웠지 그들 고목(古木)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 나들이가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인 이들 나무는 공원 남쪽에 삼삼하게 우거져 공원 전체
에 그늘을 드리우며 무더위를 제대로 긴장 타게 한다. 그들 가운데
몸통이 큰 동쪽 나무 2그
루가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서쪽 나무 2그루는 그들의 후손임)
가장 둘레가 큰 나무는 은행나무로 높이 11m, 둘레가 4.44m에 이른다.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시기는 1972년 10월 12일로 그때 추정 나이가 435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의 세월이 강제
로 얹혀져 지금은 480년 정도 된다. 그 옆의 느티나무는 여기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존재로
높이 17m, 둘레 3.86m이다. 1974년 4월 2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480년
이라 지금은 520년 정도 되었다.

이들은 솔직히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아직까지 말
단 보호수에 머물러 있다. 우리집과 가까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아무 손
색이 없거늘, 오랫동안 보호수로 있다가 2013년 봄에서야 겨우 지방기념물로 승진된 바 있고,
반면 가치는 좀 떨어져 보이는데 외람되게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나무들도 적지 않아 도대체 무슨 기준인지 의문을 내던지게 한다.
허나 이들이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잣대에 관심이나 있을까? 보호수이든 천연기념물이든 그런
것은 관심 밖일 것이다. 올해도 무탈히 잎을 피우고 길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나무로
서의 소소한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무는 신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이 아니다.

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심정(沈貞)이 심은 것으
로 전해진다. 중종(中宗) 시절에 심정 일가가 이곳에 정착해 자연마을을 이루었는데, 심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심씨마을<또는 심울(沈蔚)이라 했음>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정곡리, 긴동
리와 함께 옛 방화동을 이루던 마을로 인조 시절에 왕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 1632년
인조에 의해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의 능을 양주에서 이곳으로 옮기려다가 터가 좁아서 김포
풍무동으로 옮겼는데 그 연유로
능(陵)이 들어가는 능말(또는 능골, 능리)로 불리게 되었다.

1992년 능말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가해지면서 마을은 강제로 사라졌고, 주민 대부분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 자리에는 방화택지지구가 들어서 성냥갑 아파트와 건물이 잔뜩 심어
지면서 전원(田園) 분위기는 많이 녹아내렸으나 다행히 이들 나무는 개발의 칼질도 쏙 피해가
면서 제자리를 지켜 옛 능말의 추억을 아련히 되새기게 해준다. 만약 보호수 등급이 아니었다
면 아무리 몇백 년 묵은 나무라고 해도 진작에 아작이 났을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의 현실이다.


▲  느티공원 놀이터에서 바라본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위엄

능말의 정자나무이자 당산나무였던 이들 나무 형제는 낯선 이들로 이루어진 방화지구의 정자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4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에는 거의 그대로지만 주변이 싹
낯설게 변해 나무 자신도 가끔 놀랄 것이다. 이제 그들이 옛 능말의 유일한 흔적인 것이다.
개발의 칼질로 고향을 떠난 이들은 능우회(陵友會)란 모임을 결성했는데, 1992년 10월 17일에
그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담긴 '애향(愛鄕) 능말 옛터' 비석을 나무 그늘에 세워 추억 속
으로 사라진 옛 고향을 그리워한다.

* 느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799


▲  개화산약수터

티공원에서 서쪽으로 가면 바로 숲내음이 진동하는 개화산이다. 여기서 북쪽 길로 가면 문
정공파 묘역의 시조(始祖)인 심정 묘역이 나오고, 정면으로 보이는 서쪽 산길을 3분 정도 오
르면 개화산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방화역을 나올 때 마신 커피음료가 목구멍에서 채 마르기도 전이지만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
냥 못지나치듯 샘터를 보면 꼭 물을 한모금 마셔야 발길이 떨어진다. 그래서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마시니 확실히 자연산이 더 좋은 것인지 앞서 마신 음료보다 더 시
원하고 달달하다. 아직 수질은 적합 판정을 받고 있지만 약사사 약수터를 비롯해 개화산에 적
지 않은 약수터가 개발의 칼질에 목이 달아난 상태라 이곳의 미래도 나처럼 장담하기가 어렵
다 부디 다음에 올 때도 이곳의 물을 꼭 마셔야 되는데, 아무쪼록 무탈하기를 기원해 본다.

산길 옆에는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자연 그대로 두지 않고 계곡 양쪽에 시멘트을 발
라 둑처럼 만들면서 아주 심하게 옥의 티를 선사하고 있다. 그래도 엄연한 산골인데 돌에 걸
터앉아 발을 담굴 수 있게 해줘야 진정한 계곡이 아닐까 싶다.


▲  개화산약수터 주변 오솔길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 文靖公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7호

▲  심정(沈貞) 묘역

개화산 동쪽 자락에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이하 문정공파 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들 묘역은 심정을 시작으로 그 자손들 50~60여 기의 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1~2곳에 뭉쳐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주로 방원중교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금낭화로17
길 주변과 삼정초교 서쪽 산자락에 있음)
이들 무덤 중 심정과 심사손, 심사순, 심수경(沈守慶) 묘역과 그에 딸린 석물, 신도비가 지방
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아님) 개화산을 주산(主山)으로 한 명당자리로 명
성이 자자하다.


정공파 묘역의 시조는 심정이다. 그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묻혔기 때문이다. 허나 먼저 묻힌 이는 심정의 아들인 심사손
이다. (심정은 1532년, 심
사손은 1528년에 사망)
심정의 묘역은 문정공파 묘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해 있는데, 삼정초교 바로 뒤쪽(서쪽)이다.
이곳에 가려면 느티공원에서 개화산으로 들어서자마자 북쪽 언덕 길로 가면 되는데 심정 쉼터
를 지나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샛길이 보인다. 그 길로 들어서면 심정과 심사순의 묘역이 모
습을 드러낸다.

심정(1471~1531)은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으로 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이던 심응(沈膺)이며,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1495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502년 별과(別科)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503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1506년 연산군(燕山君)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
안(成希顔) 등에게 붙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가했으며,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
등에 녹훈(錄勳)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며, 귀국하여 남
곤(南袞), 김극성(金克成) 등과 짜고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를 제거하고자 옥사(獄
事)를 벌이지만 실패했다.
1509년 성천부사(成川府使) 등을 지냈고, 1515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했으나 삼사(三司
)의 태클에 물러나고 만다. 1518년 형조판서(刑曹判書) 후보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를 중
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공격을 받아 소인(小人)으로 찍혔고 이조판서이던 안당(安瑭)의
거부까지 겹쳐 결국 떨려나고 만다.

이후 심정은 집과 가까운 가양동(加陽洞) 한강변에 자신의 호를 딴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
래다가 아들 심사손까지 사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사림패거리에 대한 원망이 아주 머리 끝
까지 치솟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머리가
좋고 꾀를 잘 내어 주변으로부터 지혜주머니라 불렸는데, 이때부터 그 주머니가 복수의 칼날
을 위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1519년 조광조가 왕에게 중종반정 공신들의 위훈(偉勳) 삭제를 청하면서 훈구파(勳舊派)를 건
드렸다. 이때 심정도 정국공신 자격을 삭탈당했는데 훈구파는 물론 왕의 후궁들까지 조광조에
게 치를 떨게 된다. 바로 이때다 싶어 중종의 후궁인 경빈박씨(敬嬪朴氏)와 짜고 조씨전국<趙
氏專國 : 조씨(조광조)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이란 말을 궁중에 퍼트려 왕을 홀리게 했다.
조광조와 조금 거리를 두던 중종은 그 말에 넘어가고, 훈구파의 주요 인물인 남곤, 홍경주(洪
景舟)와 연합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림패거리를 죄다 아작을 내버렸다. 사림의 핵
심인 조광조와 김식(金湜)은 쓰디쓴 사약을 먹여 영원히 보냄으로써 피맺힌 원한을 아주 속시
원하게 푼 것이다.

이후 남곤과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라 그와 사이좋게 국정을 장악했으며, 1527년 남곤이
죽자 좌의정(左議政) 및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李沆), 김극핍(金克愊)을 수하
에 두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세자<나중에 인종(仁宗)>의 인척 관계자이자 라이벌이던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를 귀양 보내 제거하려고 했다.
허나 경빈박씨의 동궁(세자) 저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심정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면
서 심정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김안로는 이때다 싶어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
예(權輗)를 구워삶아 심정을 탄핵했으며, 중종의 명으로 평안도 강서군(江西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심정의 부하인 이항과 김극핍까지 엮어
신묘삼간(辛卯三奸, 1531년)으로 내몰면서 끝내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딱
60이었다.

심정의 시신은 그의 일가 뒷쪽 개화산에 묻혔으며, 1534년 부인이 합장되었다. 이후 김안로가
죽자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받으니, 그 연유로 그의 묘역이 문정공파 묘역이 된 것이다.
시호는 받았지만 명종(明宗) 이후 권력의 핵심에 서서 훈구파 못지 않게 파행을 일삼은 사림
파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를 제대로 절단낸 경력 때문이다. 그들은 남
곤과 심정을 한데 엮어 곤정(袞貞)이라 부르며 소인배의 대명사로 손가락질했고, 그것은 지금
까지 전해져 심정하면 개혁을 꿈꾸던 사림을 아작낸 기묘사화의 원흉, 지나친 권력의 화신 등
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도 그렇음)

심정은 권력욕이 대단하고 자신의 지혜를 과신해 많은 무리수를 두었으며, 끝내 그 무리수로
스스로를 말아먹게 된다. 허나 다행히도 그와 아들 심사순 정도만 권력싸움에 패해 불명예스
럽게 퇴장했을 뿐, 그의 자손들까지 화는 미치지 않았으며, 아들 심사손과 손자 심수경은 많
은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형제간의 우의가 대단해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
지 살펴주었으며, 형제와 가족을 잘 챙겨주었다.

심정의 묘역은 부인(하양허씨)과 합장된 봉분(封墳) 1기와 묘비<묘갈(墓碣)>, 상석(床石), 문
인석 2기가 전부인 조촐한 모습으로 신도비는 없으며, 묘갈은 15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손
자인 심수경이 짓고, 증손자인 심일취가 글을 썼다.

▲  심정과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  심정묘를 지키는 문인석(文人石) 2쌍
500년 가까운 고된 세월의 무게를 입고 있지만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다. 저들이 멀쩡히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심정묘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해서 지방
문화재로 지정됨)


▲  심사순(沈思順)과 부인 덕수이씨 묘

심정 묘 밑에는 심사순의 묘가 자리해 있다. 심사순(1496~1531)은 심정의 아들로 자는 의중(
宜中), 호는 묵재(默齋)이다. 심정의 맏형인 심원(沈元)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후사로 들어갔
으며, 시를 잘짓고 문장에 아주 뛰어나 17세에 초시(初試)에 장원해 사림패거리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1516년 진사시(進士試)에 붙었고, 1517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승문원(承
文院)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그리고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30년 산릉(山陵)에 대한 지문(誌文)을 작성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1531년 그 지문의 글이 문
제가 되어 필적을 대조받기도 했다. 그때 심정 일가를 아작내려는 김안로가 이름을 숨기고 글
을 썼다는 이유를 내세워 옥에 가두었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결국 거
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의 묘는 부인과 합장된 조그만 봉분과 묘비(묘갈), 상석, 문인석 1쌍이 전부로 바로 정면이
낭떠러지이다. 그 너머(동쪽)로 삼정초교와 방화1단지 아파트가 보이며, 예전에는 경사진 곳
이었지만 방화지구 개발로 인해 각박한 낭떠러지가 싹둑 잘리게 된 것이다.


▲  심정묘에서 약사사로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

▲  심일취(沈日就)와 부인 광산김씨 묘

방원중학교에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 중간에 심사손의 아들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이번에는 모르고 빼먹었다. 하여 본글에서는 다루지 않
는다. (어차피 예전에 다 봤음)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 직전에 문정공파 묘역을 알리는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판이
있다. 그 동쪽 산자락에 무덤이 여럿 있는데, 윗쪽에 심일취의 묘가, 밑에는 심사손 묘와 신
도비가 자리한다.

심일취는 심수경의 2번째 아들로 자는 중진(仲進)이다. 1547년에 태어나 1573년 식년시(式年
試)에 3등으로 급제했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냈으나
딱히 두드러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장을 잘 지어 심정과 심사손의 묘갈(墓碣)을 직접 썼으
며, 죽은 이후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상석과 묘갈(묘비),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심사손의 묘가 나온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沈思遜, 또는 沈士遜>과 부인 전의이씨 묘

심사손(1493~1528)은 자가 양경(讓卿)으로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517년 대과(
大科)에 급제했고, 승문원(承文院)과 예문관(藝文館)에서 사필(史筆)을 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는데, 이때 군무(軍務)를 익혀 그런데로 문무를
겸비하게 되었다.

1525년 의정부(議政府)에 배치되어 사인(舍人)이 되었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홍
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던 중, 압록강(鴨綠江) 너머의 여진족이 저항할 조짐을 보이자 중
종은 그의 품계를 높여 만포진(滿浦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했다. 만포는 평안북도 강
계(江界) 서쪽에 자리한 변방이다.
심사손은 덕과 무력으로 여진족(女眞族)을 달래고 정벌하면서 변경을 안정시키니 군사와 여진
족들은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복종했으며, 1528년 1월 진중에 땔감이 부족하자 군사를 이끌
고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南滿洲)에서 나무를 벌채하였다. 그때 여진족이 불만을 품고 습격을
하는 통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명줄이 다되었는지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면서
사망하고 만다.

사망 소식을 접한 중종은 명신(名臣)을 잃었다며 크게 슬퍼했고, 며칠 동안이나 제때 수라를
들지 못했다고 하니 그만큼 왕의 신망이 대단했음을 가늠케 한다. 그의 시신은 그해 3월 11일
개화산에 묻혔으며, 문정공파 묘역의 첫 무덤이 되었다.
부인 전의이씨는 남편이 죽자 기절하여 간신히 소생했으며,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스
럽게 여겼다. 그는 1578년 86세의 나이로 뒤늦게 남편을 따랐다.

심사손의 묘는 봉분 2기, 묘갈(묘비),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
정과 심사순도 갖추지 못한 신도비를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정과 심사순은 권력싸움에
밀려 곱지 않게 죽은 탓에 간신히 문인석 1쌍만 갖추고 끝났지만 심사손은 나름 공적도 크고
왕과 아버지의 후광(後光)도 대단해 신도비까지 두게 된 것이다. 만약 1531년까지 살아있었다
면 그도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묘라고 꼭 무탈한 것은 아니다. 2009년 가을에 도굴을 당했기 때문이다. 문정공파
묘역은 정말 도굴은 모르고 살았건만, 도굴범의 마수가 이곳까지 미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이때 무엇이 도굴당했는지 파악된 것은 없다. 무덤 부장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범인도
아직 잡히지 못해 더욱 분노를 치밀게 만든다.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  심사손 묘갈

▲  부인 전의이씨 묘갈


          ◀
  심사손 신도비(神道碑)
심사손묘 동남쪽에 자리한 이 신도비는 1580년
에 세워졌다. 신도비는 고위 관리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세울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보통 신
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의 동남쪽에 세운다.
비석 높이는 311cm, 폭 120cm로 비문(碑文)은
영의정 홍섬(洪暹)이 짓고, 여성군 송인(宋寅)
이 썼으며, 행온성도호부사 한준(韓準)이 두전
을 썼다.
네모난 비좌(碑座)에 오랜 세월의 때가 멋지게
낀 비문을 세우고, 그 위에 2마리에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를 두었는데,
이수 조각이 꽤 섬세하고 생동적이다.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약사사로 통하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들어가면 심
  수경, 심일취, 심사손의 묘역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계속 직진하면 개화산이다. 여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가면 심정묘와 이어지고, 직진(서쪽)하면 약사사길(금낭화로17길)과 만난다.
* 방화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651, 654, 672, 6629, 6648, 6712, 강서구 마을버스 07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산152-5일대


 

♠  오래된 석불과 석탑을 간직한 개화산의 상징적인 명소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가면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오른쪽은 약사사, 개
화산전망대로 이어진다. 봉화정과 강서둘레길 1코스 서쪽 구간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속세를 향해 활짝 문을 연 약사사 정문

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가면 개화산의 상징, 약사사가 모습을 비춘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작성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와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
라 때 창건된 것으로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다. 개화산약사암중
건기와 양천읍지도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대신 경내에 고려 때 석탑
과 석불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기부터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임진왜
란 시절 격전지인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인 가양동이 근방이고, 개
화산은 이들을 이어주는 요충지라 그때 절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
절 매우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병연
(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으로 있
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
히 알려준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
(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
(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감로당과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
해주며, 석불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
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
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
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겯드린다면 아주 영
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개화산 약사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방원중교 옆으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온다.
   방화역에서 도보 20분
②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하면 개화산이며, 여기서 직진을 하거
   나 오른쪽으로 가서 심정묘 직전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약사사로 이어진다. 1번 코스보다는
   5분 정도 빠르다.

* 약사사 공양밥이 꽤 맛이 좋다고 한다.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일반인도 공
  양이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 17길 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삼성각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매점과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에는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있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공양간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는 독성상(獨聖像)
산신, 칠성과 달리 그림은 없다.

▲  전륜(轉輪)을 쥐어든 칠성상과 다소
빛이 바랜 칠성탱(七星幀)

◀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상과
산신탱(山神幀)


▲  감로당(甘露堂)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약사사가 적어
도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 높이는 4m로 땅에 바닥
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
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
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한 것들이다.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대웅전 앞부분
정면 양쪽 모서리 기둥에는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을 그려놓아 대웅전의 화려함을
더욱 돋군다, 약사사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에게 용을 새겼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겉면이 아닌 내실이다. 너무 겉치례만 차리지 말고
속세와 중생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오래된
존재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조그만 금동석가불이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불단의 많은 불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 아무리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재현된 미륵불(彌
勒佛)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름
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삼아 애지중지한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너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앞에 있는 금동석
가불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기에도 좀 그렇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후배 금동불을 압도하는 석불입상의 위엄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마라.
생긴 건 저래도 꽤나 알찬 불상이다.

▲  약사사 돌담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 숲길

정말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약사사를 둘러보고 범종각 옆 매점 아줌마에게 이곳의 명물인 약
수터의 위치를 문의했다. (이때는 약수가 없어진 것을 몰랐음) 예전에도 와봤지만 그 약수터
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그 약수는 2013년 봄에 폐쇄되었다는 답변을 듣고 기운이
싹 빠지는 듯 했다. 안그래도 개발의 칼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서울인데 유명한 약수터 하
나가 허무하게 져버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그 칼질을 개념 없이 조정하는 행정관청 밥버
러지들, 개발업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매점 아줌마가 목이 마르면 생수 1병에 500원이니 사먹으라고 그런다. 그래서 가난한 중생이
라 돈이 없다고 둘러대니 물 1컵 먹고 가라며 정수기 물을 제공했다. 약수터가 없으니 절도
천상 정수기 물에 의존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물을 싹 비우니 아줌마가 더 마시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니 역시 한가득 담아 제
공한다. 그래도 이곳은 물을 주는 인심이 있구나 싶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나와 개화
산숲길을 거쳐 개화산으로 올라갔다. 이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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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3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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