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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  낙성대 3층석탑

▲  낙성대 안국사

▲  신림동 굴참나무



봄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며 천하만물을 곱게 물들이던 5월의 첫 주말에 일행들과 낙성대를
찾았다.
이제 5월의 시작임에도 철모르고 찾아온 따스함을 넘어선 더운 기운에 여름이 벌써 근처까
지 진군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고 구라청으로 유명한 기상청에서
입을 모으고 있으니 여름 제국의 시련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오후 3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부근 마트에서 간단하게 음료수와 김밥을 사
들고 낙성대(안국사)로 향했다. 그곳으로 갈 때는 낙성대입구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통하는
낙성대로를 따라가면 손을 뒤집듯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렇게 가지 않고 낙성대동 주택가로
조금 돌아갔다. 그 이유는 밀림 같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허나 지금은 주택가 속의
외로운 공원이 된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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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방기념물 3

▲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봉천동 218번지(낙성대동)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이자 귀주
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기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안국사(安國祠) 일대를 일컫지만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
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의 이름이 아님~~!!>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이 근처
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그
는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가니 그 집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
, 금천구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었는데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
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4번째 별로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나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나 문곡성을 빌려 표현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중원(中原)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의 사신, 무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오갔다. <
중간에 흑산도나 가거도를 경유하기도 함>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당시 남경(南京)>로 돌아
갈 이유는 없다.
이곳을 거쳐가지도 않았을 사신을 애써 끌어들인 것은 온갖 문화가 혼합된 중원의 문화를 좋아
하고 중원대륙을 동경하던 옛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앞서 문곡성의 예를
통해 문곡성의 화신(化身)으로 여기고 그의 탄생일에 맞춰 그 별이 떨어진 것으로 탄생설화를
꾸민 듯 하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이 그에게 문곡성이라 존칭하며 굽신거렸으니 그에 맞게 중
원대륙 사신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
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개 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보이나 그게 코 앞에 다가왔을 때는 꽤나 난감한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리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
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강감찬이 세상을
뜬 이후,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이곳이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라 불렀다.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그의 탄생지를 길이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
탑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이며,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 자리를 지키다가 1974년 이곳 남쪽에 사당인 안국사를 세우면서 탑을 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으며,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
대유지(遺址)'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무와 꽃이 가득하여 조촐하게 소공원의 역할을 한다. 강감찬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 주변을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을 때 꼭 발굴조사를 벌였
으면 좋겠다.

강감찬생가터(옛 낙성대)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왼쪽으로 낙성대역길이 나온다,
  길을 3분 정도 가면 오르막이 나오면서 길이 왼쪽(동쪽)으로 꺾이는데 그 꺾인 길로 2번째
  골목길인 낙성대역4길로 2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긴 옛 낙성대가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낙성대의 상징이던 3층석탑이 새 낙성대로 옮겨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를 지키고자 1974년에 세워진 것이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
로 하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
)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
세웠으며 그 위에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 높이는 2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제자리를 떠난 3층석탑과 함께 오랜 숙성을 자랑하는 나이 지긋한 향나
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리는데 그것
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살이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
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묶여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본글 끝 부분에 있음)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 서울시 보호수 1-23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 무심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
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확장/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한 나무를 물색하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高陽市)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
이 누워있음)


 

♠  낙성대공원과 낙성대3층석탑

▲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이동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후문으로 가
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19746월에 조성되었는데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 공원에는 팔작지붕 기와집 매점이 전부였으나 그새 빨간 피부의 도서관과 야외놀이
마당, 전통혼례식장 등을 새로 그려넣어 그때보다 더 활력이 넘쳐보인다.

봄이 내려앉은 공원에는 산책,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거의 시장통을 이루었고, 공원 북쪽에 자
리한 전통혼례식장에서는 혼례가 열리고 있어 하객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우리는 그런 풍경의
일부가 되어 의자에 앉아 바깥에서 가져온 음료수와 김밥을 먹으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  빨간 카페트가 깔린 관악예절원 전통혼례장

▲  안국사로 인도하는 그림 같은 숲길
오랜만에 찾은 새 낙성대에 이런 숲길이 있었다니 결코 낯선 곳이 아님에도
처음 만난 듯 신선하기만 하다.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낙성대공원에서 안국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개이다. 하나는 숲길(윗 사진)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국사 정면으로 난 홍살문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숲길로 들어가 홍살문으로 나오기
로 했다.
숲길 좌우에는 나무들이 봄이 안겨준 좋은 세상에 심취하며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 풍경이 고와 벌써부터 눈이 호강을 누릴 지경인데 늦가을이면 그 화사함에 두 눈이
멀지도 모르겠다.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숲길을 들어서니 안국사 관리사무소가 나오고, 그 옆으로 안국사의 외삼문(外三門)인 안국문이
윤기가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드러내며 위엄을 뽐낸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모두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
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된다. 안국문 앞 계
단은 약 3m 높이로 문의 위엄을 수식하고 있으며, 계단 남쪽에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바위
글씨가 있다.


▲  커다란 돌에 새겨진 낙성대 바위글씨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바위글씨는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
성대 3글자를 자연산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자리가 넓은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11일 상량
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45천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
내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바위글씨 앞 표석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재미없게 쓰여 있어 독재시대의
우울했던 단면을 보여준다.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지은 이를 너
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안국문과 내삼문 중간 (안국문에서 바라본 모습)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진 원효로 남
(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뜬금없이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려주는 존재로 13
,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운 것이다. 공덕을 기
린다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이 얼
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가 되버린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도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
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이라 다른 절에 있던 탑을 가져와 낙성대의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
기는 경우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서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
운 탑이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
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속시원
히 때려잡아주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의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
壇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라 쓰여 있어 이
탑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년을 묵은 탑이지
만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
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
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  서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남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소 거부감을 들게 한다.
그래도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
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본전을 가리고 선 내삼문(內三門)
저 문을 들어서면 안국사의 본전이 나온다.


 

♠  낙성대 안국사(安國祠)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
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생애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는 이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
殿)을 본따서 지었는데 무량수전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옆에서 본 안국사 본전의 위엄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 많은 사
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렇게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 듯 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습
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휘하
여 그린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
정이 되어 그와 관련된 사당에는 그의 그림이 사당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긴 김은호(
殷鎬)의 제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화풍을 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111일에서 12일 사이에 그만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
악구청은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
의 나이를 이유로 거절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
줄 것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네 주었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 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
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진짜 영정이 아닌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
었다면 정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제대로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직접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본전 뒤쪽 풍경 - 나무들도 강감찬을 존경하는지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본전에 그늘을 드리운다.

▲  차가운 이미지의 상징, 안국사 홍살문 - 그 앞에 어린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어 근엄한 홍살문의 역할을 무색하게 만든다.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 자리한 강감찬 장군의 동상은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하
고 있다. 청동(靑銅)으로 다져진 이 동상은 199710월에 세워진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흔쾌한 지원으로 기존의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해 낙성대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금천강
씨는 진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으로 넘어와
터전을 일구었으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이 되었다.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김유신(金庾信)과 최영(崔瑩), 남이(南怡), 이순신(李舜臣) 등과 더
불어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
들을 통해 크게 부풀려져 신화처럼 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인
을 만나 그와 인연을 맺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들이 부지기수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악
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30대까지 금천에서 대부분을 지냈으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에 과거에 응
, 갑과(甲科)로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흔히 그
를 장군이라 하여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
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
인 윤관(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해
인재를 발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너희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나?'
호통을 치니 관속들이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게 맞
지가 않는다.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리
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구리
의 입을 막게 했는데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
.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 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
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하지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
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
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강동6(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주지 않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
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
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
숙흥(金叔興),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행
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
온 전란이 있었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
했다'
적혀있어 그의 공이 실로 엄청났음을 가늠케 한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오랫동안 옛 조
선과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아오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나라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
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칠순이었다. 남들 같으면 이미 꺾
이고도 남을 나이에도 총대장이 되어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니 그의 건강과 무예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12천을 뽑아 압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
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
게하고 거란군이 그 강을 건너자 쇠가죽으로 다진 둑을 터뜨려 그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
으면서 매복시킨 기병으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신
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사냥했고, 거란군이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성을 나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고 소배압의 거란군
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보고 소배압은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의 우수한 기마병의 힘을 보여주마. 각오해라!' 다짐
하며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걸었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리는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란에게는 개망신에 가까운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
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죄다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
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란 대작품을 일구고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들고 개경
으로 개선하자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
현종은 친히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
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했다. 1030년에는 현종에게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문하시중이 되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절대로 안된다며 3일에 1번씩 입궐
토록 했으며 이듬해(1031) 6월이 되어서야 겨우 사직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해 1031,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덕종(德宗)3일 동안 조회를 멈
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
)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평시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
숙한 태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한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
려를 작지만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
대첩에서 완전히 게임이 끝나니 거란도 이제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려의 침공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
쟁으로 지쳐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12세기 초까지 압록강 가교 사건 등을 제외하고
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었
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이 얼마나 두
터웠는지 보여준다. 그의 찬란한 이름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3척동자도 '강감찬하면 귀
주대첩~!'을 떠올릴 정도로 이 땅의 대표적인 위인의 하나로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녹아내리
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용
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안 무
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후손들이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무덤을 복원했다.

낙성대 안국사(낙성대공원)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낙성대역길이 나오고 그 길로 접어
  들어 왼쪽(남쪽)으로 가면 관악구 마을버스 02번 정류장이 있다.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음)
  그 버스를 타고 낙성대공원(영어마을) 하차
*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3~4분 직진하면 낙성대입구 교차로이다. 거기서 왼쪽(남쪽) '
  성대로'로 진입하여 도보 12(낙성대역에서 도보 15)
* 매년 103째 주에는 낙성대공원에서 관악 강감찬축제가 열린다. 원래는 '낙성대 인헌제'
  1988년 추석(920) 때 처음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관악구의 주요 축제인 '관악산 철쭉제
  '와 통합하여 관악 강감찬축제로 이름을 갈았다.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강감찬을 주제로 별페스티벌, 출병식과 전승행렬 거리 퍼레
  이드, 주민화합 한마당, 고려촌 테마부스,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가 열리며
  올해(2017)1020~21일에 열린다. (문의 관악구 문화체육과 ☎ 02-879-5605)
* 안국사 관람시간 : 9~18(겨울은 17시까지, 낙성대공원은 24시간 개방,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난곡(蘭谷)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들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에 자리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1-1

낙성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또다른 강감찬 나무를 찾고자 관악
구 서남쪽 끝으머리에 박힌 난곡으로 이동했다.
난곡은 서쪽으로 금천구 독산동, 남쪽은 금천구 시흥동(始興洞)과 맞닿아 있으며 예전에는 신
림동(新林洞)의 일원으로 그 기치 아래 똘똘 뭉쳐있었으나 신림1~10동이 모두 별도의 이름을
칭하게 되면서 신림7동이던 난곡은 난곡동과 난향동으로 분리되었다.

서울 달동네(산동네)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현장으로 달동네 스타일의 분홍색 기와집과 판자
집이 가득했으나 1999년 이후 10년이 넘게 재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몸을 풀면서 동네 상당수
가 성냥갑 아파트와 단독주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음지에는 아직도 달동네의 흔적이 남아있
으며 재개발의 과정에서 많은 가난한 서민들이 강제로 터전을 떠나야 했다. 개발의 칼질은 늘
있는 것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나치게 포악하다.

난곡이란 이름은 난초 골짜기란 뜻으로 달동네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이 난곡이
라 불리게 된 것은 정정공(貞靖公) 강사상(姜士尙)의 손자인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낼 때 난초를 많이 길러 유래되었다는 설과 원래 이름은 낭곡(狼谷)이었는데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姜緖)가 동네 이름이 별로라고 하여 난곡으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그리
했다는 설이 있다. 강홍립은 난곡 위쪽에 자리한 조부(祖父), 강사상의 묘역에 묻혀 있다.

난곡에 이르러 난우중학교 정류장에서 내리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 주위로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이 조촐히 터를 이루고 있는데 공원에는 운동시설 여럿이 닦여져 있다.
그 나무의 정체가 궁금해 안내문을 살피니 무려 410살을 먹은 나무로 1972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약 370)
마르기는 커녕 오히려 넘쳐나는 세월의 샘을 양분으로 삼아 키 17m, 둘레 496cm로 어엿한 노거
수로 성장했는데 나무 주위로 속인들의 주택과 건물이 뿌리를 내려 그를 위협한다, 그래도 그
들에 굴하지 않고 정정함을 과시하며 오늘도 공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난곡로 느티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난우중학교 입구
  에서 하차하면 바로 보인다.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곡동 697-40


▲  건영2차아파트 남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곡로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난곡의 명물인 신림동 굴참나무를 보고자 건영2차아파트로 이동했
. 거리는 1km 남짓, 햇님은 퇴근 본능이 발동해 자꾸만 꽁무니를 숨기려고 한다. 날이 어두
워지면 디카도 흥분하지 못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길은 바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잠시 마트에 들려 음료수로 불만에 잠긴 목을 좀 축이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뚫으며 난곡초교 방면으로 가니 서쪽으로 건영2차아파트가 보인다. 그 아
파트로 다가서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대한 굴참나무가 마중을 한다.

이 굴참나무는 키 17m, 가슴 높이 둘레 2.5m, 나무 밑부분 둘레가 2.9m로 나이가 무려 1,000
을 헤아린다고 전한다.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연유로 '강감찬나무'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1018년 거란군을 공격하러 출정할 때
이 나무를 심고 무사 귀환을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연 강감찬과 관련이 있는 나무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관악구 지역은 그의 고향으로
그가 남긴 유적과 전설이 허다하며 백성들이 그를 기리고자 붙인 전설도 여럿 있다.
 
나무의 나이가 1,000년이 맞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된다. 아파트 주민들도 강감찬
의 지팡이가 자란 나무로 여기고 있는데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덩치가 작아 고개를 좀 갸우뚱
하게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원래 나무는 옛날에 죽고 그의 후손이 자라나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추정 나이는 250년 정도로 여겨지나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
니다. (사람은 나이가 적으면 좋지만 문화유산은 오히려 많아야 빛을 보는 법임)

굴참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세포벽(細胞壁)은 물에 젖지 않아 방수
, 방음, 방열 효과가 있어 이 나무로 코르크(cork)를 생산하며 이 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힌 집
이 강원도에서 옛날에 많이 보였던 너와집이다.
나무 인근에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을 딴 은천사(殷川
)란 조그만 절이 나무를 지키고 있으며, 매년 2회 음력 71일과 101일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고 함)

이 나무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림동 굴참나무'이다. 이는 이곳이 신림동 관할이기 때문인
데 이제는 신림동이 아닌 난곡동이라 불리고 있으니 명칭을 변경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난곡
동 굴참나무'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부르던 저렇게 부르던 그에게는 관심 밖일 것이다. 자신
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으니 말이다.

나무의 높이는 앞서 느티나무와 비슷하고, 둘레는 거의 60% 수준으로 얇으나 대신 가지가 좌우
로 넓게 퍼져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느티나무를 압도한다. 게다가 강감찬과 관련도 있고 나이도
오래되다보니 그런 것들이 이들 나무의 팔자를 바꿔놓은 것이다. 느티나무는 겨우 보호수 등급
, 굴참나무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의 귀한 존재로 말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의 높은 곳으로 아랫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철이 없는 개발의 칼질은
나무 주위로 높게 석축을 쌓고 그곳에 터를 다져 건방지게 아파트와 주차장을 올렸다. 아파트
주차장이 나무의 허리 높이 정도 되는데, 나무 밑에서 보면 그런데로 나무가 커 보이지만 주차
장에서 보면 나무가 몇십 년 밖에 숙성되지 않은 그저 그런 나무로 보인다.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82, 건영2차아파트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들어섰다.
무리 개발의 칼질이 개념을 밥말아 먹어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지닌 굴참나무의 위엄을 건드
리지 말았어야 했거늘, 나무 바로 옆에 아파트를 두게 했으니 참 딱할 따름이다. 나무 동쪽에
있는 집들은 그렇다쳐도 아파트는 좀 가혹했다.
철학과 역사의식이 빈약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폐해라고나 할까?


▲  동쪽 주택가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태극마크가 새겨진 파란 피부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면 바로 나무 앞이다.

▲  굴참나무의 밑도리
예전에는 이보다 더 너른 땅을 누리고 살았건만 개발의 칼질은 그의 영역을
빼앗아 구석살이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보니 나무 자리가 정말
답답해 보인다. 마치 맹수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은 기분..

▲  아파트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의 밑도리

▲  나무 북쪽에 어이없게도 쓰레기통과 분리수거통을 두어 나무에게
제대로 민폐를 부린다. 쓰레기 악취가 그의 건강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  주렁주렁 매달린 굴참나무 꽃
신림동 굴참나무를 끝으로 관악구에서 즐긴 강감찬 장군의 흔적 더듬기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신림동 굴참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강중입구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난곡(난향동) 종점 방향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으로 가
  면 난곡로35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을 계속 들어가면 건영2차아파트가 나오는데, 아파트단지
  로 들어서 쭉 들어가면 나무가 나오며, 아파트 대신 난곡로35번길을 계속 고집하면 난곡초교
  석축으로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도 나무가 나온다.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7~8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721-2 (난곡로35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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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10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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