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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서울 가양동 나들이 '

▲  궁산에 복원된 소악루(小岳樓)

▲  궁산 산책로

▲  소악루에서 바라본 한강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놓은 듯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이 가볍다.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양천 일사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1797년 정조 임금이 양천 관아를 방문하면서 남긴 시


 

여름 제국의 패기가 기승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서구 가양동(加
陽洞)을 찾았다.

가양동은 한강(아리수)이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동네로 1992년까지 김포평야(金浦平
野)의 일부를 이루던 농촌이었다. 허나 인근 등촌동(登村洞)과 더불어 아파트단지가 조성
되면서 시가지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지금이야 강서구(江西區)의 일원이자 서울의 1개 동
에 불과하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부터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이자 양천허씨
의 영원한 고향으로 많은 명소를 숨죽여 품고 있다.

양천 지역은 신라 중기까지 제차파의(齊次巴衣)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 공
암(孔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후기에 김해허씨 일가가 공암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김해허씨 시조<가락국 김수로왕
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이자 양천허씨의 시조가 되는 허선문(許宣文)이 구암
공원 서쪽에 있는 허가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하고자 군
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을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의 지
위를 얻었다. 이후 태조는 그의 공을 더욱 치하하고자 장경공(莊景公)의 작위(爵位)와 함
께 공암을 본관으로 내리면서 양천허씨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된다.

공암은 1301년 양천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고을 관청이 잠시나마 신정동 연의골로 옮겨
지기도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양동 궁산 남쪽이 쭉 양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200여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고을로 계속 현(縣)에 머물러 있다가, 1895년 조선8도
를 23부로 개편했을 때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다가 13도제를
하면서 경기도 양천군이 되었다. 허나 1914년 김포군에 강제 통합되면서 오랫동안 독립적
인 고을을 유지했던 양천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1963년 옛 양천 일대가 서울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강서구(江西區)에서 남쪽 일대
를 양천구(陽川區)로 분리하면서 잊혀진 옛 이름 양천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양천 고을의 범위는 현재 강서구와 양천구, 영등포구를 비롯하여 구로구 일부, 김포시 고
촌읍 일부로 매우 작았다. 김포평야의 일부로 너른 평야가 고을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고
을 북쪽에는 한강이 흘러 수많은 선박들이 오갔다. 허가바위 부근에는 서울과 행주나루를
잇는 공암나루가 있었고 광주바위와 소요정(逍遙亭), 소악루 등 한강을 옆구리에 낀 멋드
러진 명승지가 즐비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양천현감(縣監)으로 부임
하여 양천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낌없이 그림에 담았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쓴 허준(
許浚)의 고향이기도 하다.

서울의 일원이 된 이후, 오랫동안 김포평야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시골 마을로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개발이 가양동 일대를 칼질하면서 전원 풍경이 퇴색되고 그 화려했던 명소
들마저 적지 않게 희생되거나 궁색한 처지가 되었다.
한강 남쪽을 가르는 올림픽도로가 닦이면서 허가바위와 궁산 북쪽까지 넝실거리던 한강은
북쪽으로 밀려났으며, 가양택지 개발로 광주바위는 옛날의 명성을 잃고 구암공원 한쪽 구
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 가양동의 명소들은 양천허씨와 관련된 구암공원 주변과 양천 고을과 관련된 궁산 일
대로 나눠볼 수 있다. 구암공원에는 광주바위와 양천허씨의 성지(聖地)인 허가바위, 허준
과 이 땅의 한의학을 집대성한 허준박물관이 있으며, 궁산(宮山)에는 서울 유일의 향교인
양천향교와 오래된 성터인 양천고성터, 근래에 복원된 소악루, 양천관아터, 겸재정선미술
관, 궁산 산책로 등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거리도 가까워 넉넉잡아 4~6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옛 양천현아(陽川縣衙)터

양천향교 남쪽에는 양천 고을을 관리하던 관아가 있었다. 양천현아는 중앙에 고을 현감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 종해헌(宗海軒)>이 있었고, 동쪽에 객사(客舍)인 파릉관(巴陵館)
이,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읍치(邑治)라고 한다. 주목할 점은 이 땅의
옛 고을 중 동헌과 객사, 향교 등의 읍치가 50m 반경 내에 싹 몰려있는 곳이 이곳 양천뿐
이라는 것이다. (양천은 읍치와 고을을 지킬 읍성도 갖추지 못했음)

종해헌 남쪽에는 아전들이 일을 보는 길청이 있었고, 향청(鄕廳) 동쪽에는 장교청(將校廳
)이, 그 좌우로 창고가 있었으며, 종해헌 부근까지 한강수가 넝실거렸다고 한다. 허나 왜
정(倭政)에 의해 이들은 고약하게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겨우 향교만 살아남았다.
현재 동헌 자리에는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찼고 객사 자리에는 홍원사란 절이 둥지를 틀었
다. 그 외에 사직단(社稷壇), 성황사 등이 향교 주변에 있었으나 겨우 성황사만 남아있다.


 

♠  옛 양천고을 교육의 중심지, 서울 유일의 향교로 주목을 끄는
양천향교(陽川鄕校) - 서울 지방기념물 8호

▲  양천향교 홍살문

향교(鄕校)는 조선 정부가 서울을 제외한 각 고을에 세운 유교식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
학교와 비슷하다. 양천향교는 양천고을의 유교식 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서울 유일의 향교란
점이 크게 주목을 끈다. 지금은 서울의 일부로 조용히 묻혀있지만 1914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
도에 속한 별도의 고을이었다. 그래서 향교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향교는 1411년에 창건되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이후 교육 기능이 상실되고 제
사기능만 남으면서 슬슬 황폐화된 것을 1945년 명륜전을 중수했으며, 1965년 대성전과 외삼문
을 보수했으나 많이 부실했다. 하여 1977년 복원 계획을 수립, 1980년 복원공사에 들어가면서
1981년 1차 복원공사를 마무리 했으며, 1986년 2차 보수를, 1994년에 3차, 2007년에 4차 보수,
그리고 2008년에 전면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1990년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양천향교'가 아닌 '양천향교
터'이다. 아마도 1980년 이후 기존 건물을 싹 갈아서 그렇게 이름을 정한 모양으로 근래에 복
원된 탓에 고색의 무게는 크게 내려앉아 다소 아쉬움을 선사한다. 항상 문이 닫힌 여타 향교
와 달리 속세에 늘 개방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향교 앞에는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뾰족한 홍살문이 아주 차갑게 나그네를 맞이한
다. 홍살문 서쪽에는 유예당(遊藝堂)과 전통놀이마당이 있으며, 홍살문을 지나면 향교로 들어
서는 외삼문과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서쪽에는 가양동 일대에서 수습된 비석 9기가 똘똘 뭉
쳐 있는데, 이들은 양천현감이나 이곳에 들린 경기도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
비(不忘碑)이다.

좌측만 열린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조그만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은
향교 학생들의 숙식공간이다. 그런 동/서재를 바라보고 있는 명륜당(明倫堂)은 교육 공간으로
지금의 교실이나 강의실과 같다. 향교에서 2번째로 중요한 건물이라 규모가 우람하며 현역에
서 은퇴한 신세지만 여전히 위엄이 넘친다.
명륜당 옆구리를 지나면 높다란 계단 끝에 내삼문이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 향교의 중심인 대
성전(大成殿)에 이른다. 허나 내삼문은 석전대제(釋奠大祭) 외에는 늘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
고 있어 굳이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리자에게 요청하기 바란다. 허나 최근에 복원된 건물이
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이 향교에는 서울 유일의 홀기(笏記)인 양천현 홀기가 전하고 있다. 이는 양천고을 현감이 참
여하는 행사와 의식 절차를 적은 것으로 홀기 11종, 축문(祝文)과 제문(祭文) 3종 등, 14종의
문건을 하나의 서첩(書帖)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객사에서 지내는 망궐례(望闕禮)를 비롯
하여 사직대제(社稷大祭), 성황제(城隍祭), 려제(癘祭), 알성례(謁聖禮)와 국상시(國喪時) 곡
반례(哭班禮) 등으로 19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4호이다.

◀  양천현 홀기 (문화재청 사진)
이 문서는 관람이 거의 불가능하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외삼문(外三門)
보통은 좌측문(동쪽문)만 열려있고 가운데 문은 석전대제 때만 열린다.

▲  외삼문 우측에 옹기종기 모인 비석들

외삼문 우측에 심어진 비석 9기는 양천 고을의 오랜 역사를 가늠케 해주는 유물로 양천현감과
경기도관찰사의 선정비 및 불망비이다. 저들 중 진정으로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자는 몇이
나 될까? 태반은 형식적인 비석이거나 세금 착취를 위해 만든 비석일 것이다.
가장 오른쪽의 비석은 고색의 무게가 크게 깃들여져 중후함이 느껴지며, 앞줄 가운데 비석은
특별하게도 기와 모양의 지붕돌을 지녔다.

▲  서재(西齋)
일반 백성 자재들의 숙소로 그 모습은
동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동재(東齋)
양반이나 관리 자재들의 숙소로 지금은
관리사무소로 쓰인다.


▲  공자왈 맹자왈이 들릴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교육 공간으로 교궁(校宮)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통 학생 30~50명이 수업을 받았으
며, 교수(敎授) 1명과 직원 1명이 교육을 담당했다. 비록 갑오개혁 이후 교육의 기능은 사라
졌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과 초/중/고생을 위한 한문과 서예 등의 교양 강좌가 열리고 있어 명
륜당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  글씨에 힘을 불어넣은 듯한 명륜당
현판의 위엄

▲  대성전을 품은 채, 입을 봉한
내삼문(內三門)


대성전(大成殿)은 향교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자 중심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5성(공
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과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우리나라 18
현(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등)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위치가 높은 건물이라
보통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둔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내삼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은데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담장 너머로 보려고 해도 가파른 곳에 높게 울타리를 친 터
라 대성전의 얼굴 조차 보기 힘들며, 문틈으로 보이는 범위도 매우 한정적이다. 일개 대성전
의 얼굴이 그렇게 비쌌단 말인가? 보물로 지정된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272호)이나 강릉향교
대성전(보물 212호)도 저렇게 비싸게 놀지는 않는데 말이다.


▲ 대성전 우측에 자리한 전사청(典祀廳)
대성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우측에 자리한 맞배지붕의 전사청만 온전하게 보인다.
전사청은 제례와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  명륜당 뒤쪽 굴뚝
흙과 기와로 닦여진 그 모습도 정겨운 굴뚝
2개가 명륜당 뒤에 숨어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양천향교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강서농협이 있다. 농협
  앞 골목길(양천로49길)을 따라서 7분 정도 쭉 들어가면 양천향교가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발산역(3번 출구)에서 6630, 6645, 6657번 시내버스를 타고 양천향교역(휴먼빌
  아파트) 하차, 길 건너편에 있는 강서농협으로 건너가서 양천로49길 골목길로 진입하여 쭉
  들어가면 된다.


★ 양천향교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다.
*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정(丁)이 들어가는 1번째 날>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 양천향교역 내부에 향교홍보관을 운영하고 있어 향교 홍보물과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외삼
  문에 방명록과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다. 이 땅에 많은 향교가 있지만 이렇게 홍보물과 홈페
  이지까지 갖춘 향교는 거의 없다.
* 단체관람을 원할 경우 미리 연락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 성년례와 혼례, 상례와 제례 등의 가정의례와 한문, 예절, 충효 등의 교양강좌를 운영한다.
  자세한건 전화 문의 또는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양천로47나길 53 ☎ 02-2659-0076)
* 양천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가양동의 든든한 뒷동산, 궁산(宮山) 둘러보기

▲  녹음이 짙은 궁산 산책로

양천향교 뒤쪽에는 가양동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는 궁산(74.3m)이 야트막하게 누워있다.
한강변에 솟은 조촐한 뫼로 가양동에는 궁산 외에 탑산도 있었으나 개발의 난도질을 당해 겨
우 허가바위 주변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궁산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지인 가양동에서 유독 하늘 높이 솟은 궁산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
鎭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한강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삼국시대부터 한강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 자락에는 희미하게나마 백제나 신라 때 지어진 옛 성터가 있으며, 임
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집결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18세기에는 겸재 정선이
양천 고을의 현감으로 부임와서(1740~1744년까지) 궁산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 현장
이 바로 소악루이다. 또한 6.25시절에는 국군이 주둔하며 북한군을 격퇴했다.

궁산에는 양천고성터와 복원된 소악루, 관산성황당, 양천향교 등의 오래된 명소가 있으며, 조
망이 일품이라 한강을 배경으로 한 주변 풍경이 아주 예술이다. 강서구에서는 궁산을 근린공
원(면적 약 133,700㎡)으로 삼아 산책로와 운동시설, 조망터 등을 만들었으며, 양천향교 서쪽
과 겸재정선미술관, 마곡금호어울림아파트 쪽에 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산이 워낙 작아
서 빨리 둘러보면 30분 정도, 아주 여유롭게 둘러보면 1~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소악루
와 궁산 정상은 한강을 낀 야경 출사 장소로 썩 괜찮은 곳이다.


▲  궁산의 작은 꽃, 소악루(小岳樓)

한강이 두 눈에 바라보이는 궁산 북쪽 절벽에 단아하고 조촐한 맵시의 소악루가 있다. 이 누
각은 조선 영조 때 동복(同福, 화순군 동복면) 현감을 지낸 이유(李糅)가 궁산 강변 악양루(
岳陽樓)터에 재건한 것으로 중원대륙 동정호(洞庭湖)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의 경치에 버금간
다하여 소악루라 하였다. 즉 작은 악양루인 셈이다. (이유는 동정호의 악양루를 가본 적도 없
음)

소악루에 오르면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인왕산(仁王山)과 안산(鞍山) 등 서울 도심을 둘러싸
고 있는 산과 멀리 관악산(冠岳山),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가까이로 탑산과 선유
봉(仙遊峰), 한강 줄기가 이어져 예로부터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겸재 정선도 소악루에 올
라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당시의 경관이 고스란히 담
겨져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소악루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원래 위치는 가양동 산6-4번지 세숫
대바위 근처로 여겨지는데, 이미 아파트들이 첩첩하게 들어선 상태라 제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각이라기 보다는 공원에 지은 아담한 정자 같다. 게
다가 흙이 아닌 보도블록 바닥에 뿌리를 내린 탓에 정취와 옛 명성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복
원을 하더라도 소악루와 주변 풍경을 배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 역시 대충대충 탁상행정이
빚어낸 폐해이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1)
한강을 벗삼아 시원스레 뚫린 올림픽도로와 한강에 다리를 담군 가양대교,
그 너머로 쓰레기를 발판 삼아 어엿한 산맥이 된 하늘공원이 바라보인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한강 건너편은 고양시 덕은동과 현천동 지역, 저 멀리 북한산(삼각산)의
힘찬 줄기가 살짝 위용을 드러내 보인다.

▲  목멱조돈(木覓朝暾)

소악루에는 겸재가 궁산에서 그렸다는 진경산수화 복사본과 해당 그림의 해설판이 있다. 그러
니 그림에 담겨진 풍경과 실제 풍경을 대조해보며 주변 풍경을 대해보기 바란다. 억겁의 세월
이 한강수처럼 흐르는 동안 그림에 담긴 모습과 현재 모습이 참 많이도 달라졌지만 산줄기만
큼은 그림에 그려진 그대로이다.

목멱조돈은 겸재 정선이 1740년 궁산에서 바라본 남산을 그린 그림이다. 높이 솟은 두 줄기의
산은 북한산(삼각산)이며, 그 아래 야트막하게 목멱산(木覓山, 남산)이 솟아있다. 그 주변에
노고산과 와우산, 만리동고개, 애오개 등의 윤곽이 보이며, 지금은 하늘공원에 가려 만리동고
개와 애오개는 보이지 않는다.


▲  안현석봉(鞍峴夕熢)

안현(鞍峴, 갈마재)은 연세대 뒷산인 안산(鞍山)이다. 겸재가 안산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저
녁 봉화불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이를 그림에 담은 것으로 가까이에 탑산과 광주바
위(그림 오른쪽 아래)를 그림 앞쪽에 끌어낸 것을 보면 궁산에서 탑산과 안산을 바라본 풍경
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그림 왼쪽에 소악루가 있고, 그 부근에 조그만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곳이 소악루를 세운 이
유의 집으로 여겨진다. 그림 오른쪽에는 탑산, 선유봉 등이 있고, 멀리 남산과 와우산이 보름
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밑에 바위 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  양천고성터(陽川古城址) - 사적 372호

소악루 서쪽 산자락에 아련히 남아있는 양천고성터는 궁산 정상부에 축조된 것으로 길이 220m
, 면적은 29,370㎡인 조그만 산성(山城)이다, 백제 또는 신라 중기(6~7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성 이름은 딱히 전해오는 것이 없어 고을 이름인 양천을 따서 양천의 옛 성이란 뜻
의 양천고성이라 불린다. 한강과 접한 북쪽은 경사가 급하며, 남쪽은 느긋하다.

성과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
지(大東地志)' 등에 전하며 성벽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적심석(積心石)과 성돌이
몇몇 남아있고, 높이 2~3m 정도의 성곽 윤곽이 일부 남아 이곳에 산성이 있었음을 희미하게
전할 따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권율(權慄) 장군이 오산 독산성(禿山城, 세마대)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곳
에 잠시 머물다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일구어냈으며,
행주산성과 오두산성(파주 통일전망대에 있음) 등과 더불어 한강을 지키던 요새였다.


▲ 양천고성의 흔적
한강을 지키던 산성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나무와
수풀만이 가득하다. 역시나 인간이 만든 것은 대자연 앞에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  민간신앙이 깃들여진 관산성황당(關山成隍堂)

궁산 정상부 남쪽 소나무숲에 자리한 관산성황당은 가양동의 안녕을 기원하던 마을 당집이다.
여기서 관산은 궁산의 옛 이름으로 보통 성황당의 한자는 '城隍堂'인데 반해 이곳은 '城' 대
신 '成'을 쓰는 특이함을 보인다.

이 당집은 '도당(都堂)할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도당할매는 서울 지역 당집에서 많이 봉안하
는 존재이다.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成隍祠)가 성산(궁산의 옛
이름)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500년 이상 묵었음을 보여준다.

성황당의 도당할매는 백성들의 번영과 행복을 도와주고 악귀를 몰아내주며,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준다고 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굿을 벌인다. 당집은 퇴
락된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정비했는데 덕분에 오래된 당집 분위기가 완전히 퇴색되고
말았다. 당집이라기 보다는 그냥 창고 같은 분위기다.

조선 후기에 황진(黃瞋)이란 사람이 이곳과 관련된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양천고성)도 다 없어졌는데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 사람을 본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한다.


▲  누런 풀밭의 궁산 정상

궁산은 거의 야트막한 뒷동산 수준이지만 주변에 마땅한 산이 없어 그 존재가 무척 커 보인다.
그래서 사람이든 산이든 위치를 정말 잘 잡아야 된다.
정상 서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은 물론 행주산성, 서울 서부 지역이 거
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휼륭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6,7,8일대


▲ 궁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강에 다리를 담군 다리는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역까지 달리는 공항전철
다리이다. 그 너머로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방화대교가 있으며, 사진 가운데에
자리한 산이 행주대첩의 현장,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  궁산 서쪽 산책로

▲  공항칼국수에서 먹은 버섯칼국수의 위엄

이렇게 가양동 나들이를 마치고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김포공항 입구에 있는 공항칼국수집을
찾았다. 가양동이나 등촌동에서 먹어도 되지만 문득 공항칼국수 생각이 간절하여 송정역까지
6631번 시내버스를 타고 그 집을 찾은 것이다.

김포공항입구교차로에 둥지를 튼 공항칼국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30여 년 묵은 집이다. 그
곳에 들어가니 본격적인 저녁 시간 이전(18시 이전)임에도 사람들이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버섯칼국수를 주문했는데 끓여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닌 국수사리
와 버섯, 채소가 한몸이 된 검은 피부의 냄비가 나와서 마련된 버너에 몸을 푹 끓인다. 그렇
게 5분 이상을 두면 버섯칼국수가 보글보글 자신을 끓이면서 진국이 된다. 반찬은 고작 김치
하나가 전부, 허전한 반찬을 보며 그래도 2가지는 나와야 덜 허전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버섯
과 어우러진 칼국수와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쏙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김치도 적당히 숙성이 되서 입맛에 그런데로 맞았는데 어느 정도 먹기가 무섭게 식당 아줌마
가 알아서 김치를 갖다주어 김치 수급문제는 없었다.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칼국수는 젓가락이나 국자로 각자의 그릇에 담아 먹는 것인데 너무 시
장한 나머지 국수와 버섯이 귀해지자 국수사리 하나를 시켰고, 국물에 밥 2개를 볶아서 말끔
히 냄비를 비운다. 국물과 하나가 된 볶음밥 역시 맛이 괜찮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가양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칼국수 국물에 밥까지 싹 비벼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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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7년 12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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