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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서울 궁동 나들이 '
(궁동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  구로올레길 (와룡산~지양산 구간)

궁동생태공원 (궁동저수지생태공원)

▲  정선옹주 묘역

▲  궁동생태공원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산지도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남들보
다 일찍 지리(地理)와 역마살에 두 눈이 뜨면서 10대 시절부터 서울에 온갖 명소를 쑤시
고 다녔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다녔지만 서울에는 아직도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
未踏處)가 수두룩해 나의 자존심을 적지 않게 긁어 놓는다.

늦가을이 절정에 치닫던 어느 평화로운 날, 미답처 사냥을 위해 서울 장안 서쪽 끝에 위
치한 궁동을 찾았다. 이곳은 아직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신선한 곳이다.
궁동(宮洞)은 구로구(九老區)의 일원으로 동/서/북쪽이 와룡산(臥龍山)과 매봉산의 야트
막한 산줄기에 막혀있고, 남쪽만 뚫려있는 반 분지 지형으로 3면이 산에 감싸여 있어 포
근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농사를 짓던 시골로 지금도 밭두렁
이 적지 않게 펼쳐져 있어 전원(田園) 분위기는 여전하다. 게다가 궁동생태공원, 정선옹
주묘역, 구로올레길 등의 참신한 명소가 숨겨져 있어 이번에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
지우기로 했다.
참고로 궁동은 법정동명으로 행정동명인 수궁동(水宮洞)의 관할구역이다. 수궁동은 온수
동과 궁동을 합친 이름으로 흔히 생각하는 용왕의 수궁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던 14시, 오류동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6613번 시
내버스(양천차고지↔대림역)를 타고 궁동의 좁디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러 서서울생활과학
고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서울이 무색할 정도의 전원풍경과 함께 이번의 첫 메뉴인 궁동생태공원
이 바로 모습을 드러낸다.


 

♠  농업/낚시용 저수지에서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  북쪽에서 바라본 궁동생태공원 1구역 (이하 1구역)

궁동 한복판에 자리한 궁동생태공원은 기존의 궁동저수지를 손질한 일종의 호수공원이다. 길
게는 '궁동저수지생태공원'이라 불리며 저수지 중앙에 도로(오리로)가 지나가면서 강제로 2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서쪽은 2구역, 동쪽은 1구역이라 불린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1구역 동
쪽에 조그만 골목길로 서서울생활과학고에서 회차하는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오갔다.

궁동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는 궁동저수지는 1943년에 농업용수 해결을 위해 왜
정(倭政)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저수지 자리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 불리
는 우물이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듯한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나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허나 궁동 일대 경작지가 종종 물부족에 허덕이자 왜정은 농업용수 해결과 쌀 수
탈을 위해 우물을 밀어버리고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우물에서 솟던 물이 자연히 저수지를 채워주면서, 저수지는 늘 마를 날이 없었고, 궁동을 비
롯해 이웃 오류동(梧柳洞) 주민들까지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풍수
지리(風水地理)적으로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든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까지
그럭저럭 띄게 되었다. 허나 왜정의 수탈은 나날이 심해갔고, 왜인(倭人)이 저수지를 소유하
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까칠함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저수지는 국유지로 바뀌었으며, 인근 항동저수지와 함께 서울의 주요 낚시터로 인
기를 모았다. 이 땅에서 저수지란 존재가 참 흔한 존재이긴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는 인근 항
동(航洞)과 궁동 2곳 밖에는 없었다. 저수지가 넓고 물이 깨끗하여 물놀이 수요가 많았고, 거
기에 연꽃까지 심으면서 한여름에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까지 펼쳐졌다.

이렇게 서울의 외진 시골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궁동은 1970년대 이후 도시화의 물결이 몰아
치면서 많은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적지않은 경작지를 밀어내고 연립주택과 온갖 도시형 주
택이 들어서면서 농업 인구와 경작지는 그만큼 줄어들었고, 저수지는 자연히 낚시터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낚시꾼들에게 소정의 이용료를 받고 마을 기금으로 활용했으며,
저수지가 넓다보니 배를 타고 관리했다.

낚시터로 그런데로 밥값을 하던 궁동저수지는 2000년 이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계속되는 궁
동 지역 개발로 시가지는 궁동저수지 남쪽까지 밀려왔고, 서울~부천간 도로 확충으로 궁동 북
쪽에 도로(신정로)가 뚫리면서, 부일로(1호선 경인선 북쪽 도로)와 그 도로를 잇는 신작로(오
리로)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도로가 저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저수지의 한복판을 건방
지게 가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저수지는 2개로 갈라졌고 덩치 또한 반토막이 되었다.
이후 수맥에 문제가 생겨 저수지는 날로 야위어 갔고 수질까지 영 좋지 않게 변하면서 낚시터
로도 더 이상 부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점차 동네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변해갔다. 궁동
의 꿀단지이던 저수지가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인해 꿀이 쏙 빠진 깨진 단지가 된 것이다.

천덕꾸러기가 된 저수지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심하다가 구로구에서 2003년 9월, 저
수지와 주변 일대 10,205㎡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하였다. 즉 요즘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생태공원 카드를 내민 것이다. 그래서 39억을 들여 저수지 리모델링을 추진했으나 돈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2008년 4월 완성을 보았으니 이렇게 하여 자칫 폐기될 뻔한 위기를 극복하
고 생태공원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저수지 주변에는 25,000여 그루의 꽃과 나무를 심고 2구역 저수지 북쪽에는 3,379㎡의 생태습
지(궁동 생태습지원)를 닦아 생태공원의 풍경을 돕게 했다. 100여 마리의 비단잉어를 풀어 저
수지에 다시 물고기가 살게 했으며, 1구역과 2구역 저수지 위로 목재로 생태 탐방로를 만들었
다. 또한 저수지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정자(수궁정) 등을 두어 쉼터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했다.
오리로로 저수지가 동서로 분단된 탓에 조금은 좁아 보이며, 저수지 2구역 서쪽 야산에는 궁
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안동권씨 묘역이 자리해 있어 같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궁동을 넘어 이제는 구로구의 꿀단지로 고개를 든 궁동생태공원은 궁동 산신제를 비롯해 동네
의 여러 행사가 열리는 광장이 되었고, 지역 사람들의 쉼터이자 변변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
던 구로구의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저수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1구역 생태 탐방로
저수지의 중앙을 빈틈도 없이 관통하는 오리로와 달리 저수지에게도
숨쉴 틈을 주어 생태 탐방로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  쉼터가 놓인 생태 탐방로 중간
부분과 1구역 북쪽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1구역 분수대


저수지 1구역과 2구역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소소하긴 하지만 서로를 이어주
는 수로 4개를 두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도로를 냈을 때 저수지를 배려하여 지금처럼 꽉막힌
둑처럼 공구리치지 말고 밑도리가 뚫린 다리로 놓았다면 저수지가 최악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이다. 다행히 조그만 수로를 내어
죽어가는 저수지를 위로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  남쪽에서 바라본 1구역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단 왼쪽에 오리로를 빼고) 갈대와 나무,
꽃, 전봇대, 그리고 푸른 하늘을 거니는 구름과 햇님, 달님도
수면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궁동생태공원 2구역(이하 2구역)과 생태 탐방로
늦가을과 갈대가 너무 익다 못해 이제는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궁동저수지의 원흉인 오리로를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면 저수지의 나머지 부분인 2구역이 펼쳐
진다. 2구역은 1구역과 비슷하게 수면 위로 생태 탐방로를 남북으로 내었고, 8각형 정자인 수
궁정을 북쪽에 두어 경관을 돕게 했다. 그리고 1구역보다 갈대가 더 수북하게 자리고 있어 이
곳이 1구역보다 생태공원의 질감이 더 높아 보인다.


▲  서쪽에서 본 2구역과 생태 탐방로

▲  2구역을 장식하고 있는 상큼한 존재들
거북이 등짝에는 토끼가 귀엽게도 서 있다. 저들은 이곳과 전혀 관련은 없지만
이곳 행정동명이 '수궁동(水宮洞)'이다보니 그 이름에 아주 잘 어울리도록
별주부전(鼈主簿傳)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를 갖다 놓은 것 같다.

▲  저수지를 바라보고 선 2구역의 감초, 수궁정(水宮亭)

▲  돌탑과 솟대

솟대는 삼한시대 종교 성역이던 소도(蘇塗)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겁나게 흐른 지금
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솟대에는 보통 오리 등의 날짐승을 두어
하늘(신)과 인간을 잇는 중간 역할로 삼았다.
솟대는 그렇다치고, 솟대가 몸을 의지한 돌탑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돌을 차곡차곡 얹혀
서 오리지날 돌탑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아주 편하게 돌에다가 시멘트를 발라서 돌탑 형식만
띄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날림 돌탑이 어딨단 말인가? 구로구청의 철밥통 발상이 애
써 꿀단지로 일으킨 궁동생태공원의 옥의 티를 유발시켰다.

* 궁동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서 구로구 궁동 42-2, 42-4


 

♠  궁동을 호령했던 옛 주인들의 사후 안식처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제일 앞쪽이 권세태묘)

궁동생태공원 2구역 서쪽 언덕에는 궁동을 호령했던 정선옹주와 그의 시댁인 안동권씨 일가의
묘역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분명 묘역은 권협(權悏, 1553~1618)을 중심으로 한 안동권씨 묘
역이지만 공주가 묻힌 탓에 세상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정선옹주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의
딸인 옹주의 위엄 앞에 권협 일가의 이름이 묻힌 것으로 권협이나 공주의 남편인 권대임이 아
무리 잘나도 왕실 공주보다 감히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묘역에는 모두 6기의 묘(권근중 묘까지 합치면 8기)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권협과 전주최씨 부인의 묘가 1단을 이루고 있고, 그 밑에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
(權大任)과 정선옹주의 묘가 2단을 이룬다. 그 아래로 권대임의 부모인 권신중과 전주이씨 묘
(3단), 권대임의 아들 권진과 남양홍씨 숙부인(淑夫人)의 묘(4단), 권진의 장남 권이경의 묘(
5단), 권이경의 장남 권세태의 무덤(6단)이 차례대로 자리한다.
그리고 별도로 권협 묘역 북쪽에는 권대임의 삼촌이 되는 권근중(權謹中) 내외의 묘가 숨겨져
있으며, 이들 무덤은 기본적으로 묘비와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1쌍, 망주석(望柱石) 1
쌍을 갖추고 있다. (단 권대임/정선옹주묘는 호석에 장명등까지 지니고 있음)

묘역과 생태공원 사이 산자락에는 권대임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권
협의 신도비가 자리해 있어 이곳을 비선거리 또는 비석거리라 불렸다. 권협을 기준으로 6대가
이어져 내려온 묘역으로 묘비와 문인석, 상석, 호석(護石), 장명등, 촛대석 등이 잘 남아있어
조선 중기(16~17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음)

그럼 묘역의 주인공이 되버린 정선옹주(
貞善翁主, 1594~1614)는 누구일까?
정선옹주(이하 옹주)는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7녀로 정빈(靜嬪)민씨의 소생이다. 정
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여인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옹주 또한 그런 생모를 닮아서 공손하고 부
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한다.
옹주가 권협의 손자인 권대임에게 시집가자 선조는 궁동(궁골)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하며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래서 공주의 위엄에 걸맞게 고래등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궁궐만큼이나 컸다고 하여 동네 이름도 궁골, 궁동(궁마을)이 되었다.

옹주의 집은 궁동생태공원 북쪽인 서서울생활과학고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 정문 안쪽에 궁골
유허비를 세워 옹주의 고래등 저택이 있던 곳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이 집은 6.25전쟁까지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며, 당시 집의 면적은 700여 평, 집 크기는 50칸이었다고 한다.
허나 6.25로 인해 집은 모두 불타버려 가루가 되었고, 그 자리는 경작지로 쓰였다가 서서울생
활과학고가 들어앉았다. 생각 외로 옹주의 집은 1950년대 초반까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생
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림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허나 궁동 토박이들의 증언과 집터에서 쏟아져나온 기왓조각과 도자기, 옹기 파편을 통해 집
이 제법 대단했음을 가늠케 하며, 집의 모습과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아직 조사를 벌이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궁집(가민속문화재 130호,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 내외의 집)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그것도 정답은 아니니 각자 취
향에 따라 조선 중기 옹주의 집을 머릿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


▲  정선옹주/안동권씨 묘역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와룡산 자락에 안긴 정선옹주 묘역은 명당(明堂)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질 정도로 아주 대단
한 명당 자리로 우리나라 100대 명당의 으뜸으로 꼽힌다. 궁동을 북쪽으로 감싸는 와룡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으로 뻗어간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서쪽으로 흐르는 산
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정중앙에 고추처럼 생긴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흐르니
그 산줄기 끝에 이들 묘역과 궁동저수지가 자리한다. 이 지형을 풍수지리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 부른다. 그냥 닭도 아닌 금닭이 알을 품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지형인가?

허나 한참 뒤에 일이지만 옹주의 집이 전쟁으로 박살이 나고, 그 후손도 딱히 두드러지는 인
물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10%가 부족했던 명당이었듯 싶다. 명당이나 묘자리에 관심이 있
다면 한번 가보기 바란다. 저수지로 인해 그런데로 배산임수를 취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전망도 확 트여있어 욕심이 확 날 정도로 자리도 괜찮은 편이다.


▲  고된 세월의 때가 입혀진 권대임(權大任) 신도비

정선옹주 묘역에는 2기의 신도비가 있는데, 그중 북쪽 산자락에 권대임 신도비가 서 있다. 궁
동생태공원과 묘역 중간에 자리해 있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신도비란 고위 관료와 왕족들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네모난 비좌(碑座)에 권대임의 일대기를
담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권대임(1595~1645)은 권협의 손자이자 권신중(權信中)의 아들로 자는 홍보(
弘輔)
이다. 서예를 매우 잘하여 선조 임금에게 자주 칭찬과 상을 받았으며, 1살 연상인 정선
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다. 허나 옹주는 1614년 20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
을 떠나 19살의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으며, 1635년 선무공신(
宣武功臣)의 적손(嫡孫) 자격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지자 못
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공적으로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고 도총관(都摠管)이
되었으며, 163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의 재화를 싹 털어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
혀간 사람들(특히 노인들)을 데리고 돌아와 칭송이 자자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해 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신도
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렸다.


▲  권협(權悏) 신도비

궁동생태공원 솟대 옆에는 묘역의 최고 어른인 권협의 신도비가 있다. 형태는 앞서 권대임 신
도비와 비슷하며, 비석의 피부가 꽤 꺼무잡잡하여 고색의 기운이 진하다.

권협(1553~1618)의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
낸 권상(權常)의 아들이다. 1577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
文院), 춘추관(春秋館) 등을 거쳐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1589년 전국에 괴
질이 유행하자 함경도로 파견되어 백성을 돌보고 제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 선조에게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선조는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패검(
佩劍)를 하사했다고 함>
1596년 시강관(侍講官)과 응교(應敎)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급히 명나라로 파견
되어 원병을 청했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정(李楨)은 '당신네 나라 지세를 알
아야 우리가 도울 수 있소'
무리한 부탁을 하자 별수 없이 조선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막힘 없이 설명을 했다.
솔직히 명나라군은 왜군 조총의 밥으로도 아까울 정도의 쓰레기 수준으로 조선에서 온갖 민폐
를 아끼지 않았는데, 선조를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 위정자들은 명나라에 쓸개까지 다 내주며
지나친 사대주의를 일삼아 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기밀이나 다름없던
조선의 지도를 명나라에게 그려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조선 지도를 얻은 명나라 신종(神宗)은 흡족해하며 군사와 군량을 보냈으며, 원군을 끌고 온
공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60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길창군
(吉昌君)에 봉해져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宗廟) 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홍문관(弘文館)의 탄
핵을 받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618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충정
(忠貞)이다.


▲  두툼하게 솟은 권진(權瑱)과 숙부인 남양홍씨묘 봉분
묘비를 세웠던 자리에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현란한 무늬의 비좌만 멀뚱히 남아있다.

▲  권진 묘역의 뒷모습 (저 밑에 권이경, 권세태묘가 보임)

묘역 가장 앞쪽에 자리한 권세태는 이 묘역의 막내로 권이경의 장남이다. 1659년에 태어났으
며, 1690년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붙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권세태의 아버지이자 권진의 아들인 권이경(權以經) 묘가 있는데, 그는 사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런 아들과 손자묘를 굽어보는 권진은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장
남으로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를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권신중(權信中)과 부인 전주이씨묘

▲  권신중과 전주이씨묘 뒷모습

묘역 3단에 자리한 권신중(1575~1633)은 자가 군집(君執)으로 권협의 아들이자 권대임의 아버
지이다. 부인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160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 3등 45위로 합격하여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
고, 이듬해 의정부도사(議政府都事)가 되었다. 이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강서현령(江西縣令
),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김제군수(金堤郡守). 단양군수(丹陽郡守) 등 여러 내/외직을 거
쳤고, 말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장남 권대임이 길
성군(吉城君)에 봉해지면서 좌찬성(左贊成)과 우의정(右議政)에 차례로 증직되었고, 이후 길
흥군(吉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말수가 적고 위엄이 대단했다고 전
한다.

권신중은 원칙대로라면 권협묘 밑에 있어야 된다. 허나 며느리인 정선옹주가 일찍 세상을 등
지자 일찍 묘역을 조성했는데, 아무래도 신분이 높은 공주이고, 그런 공주를 맞아들인 아들
권대임이 왕의 사위이기 때문에 권신중이 자리를 양보했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묘역 2단을 이루고 있는 권대임과 정선옹주묘는 같은 묘역임에도 다른 묘와 좀 차별화를 두었
다. 봉분(封墳)만 봉긋 오른 나머지 묘와 달리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장명등(長
明燈)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족이다보니 그런 파격적인 옵션을 달게 된 모양이
다. 역시 사람은 돈 많고 신분이 높고 봐야 된다.


▲  권대임과 정선옹주묘 뒷모습과 묘역 전경

▲  정선옹주묘 서쪽 문인석

▲  정선옹주묘 동쪽 문인석


▲  묘역의 어른인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최씨묘

▲  뒤에서 바라본 권협 내외 묘

묘역 1단에는 권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자손들을 굽어본다. 묘 뒤쪽에는 권근중 내외의 묘가
자리해 있는데, 그곳까지는 알지 못해 살피지는 못했다.

구로구에서는 이곳과 궁동생태공원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역사/자연공원으로 삼고자 계획하고
있으며, 묘역을 지정문화재 등급인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고자 서울시와 협의를 했으나 아직
까지 비지정에 머물러 있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조선 중기 묘역
들이니 구로구와 후손들이 잘 나서준다면 지방기념물 자리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구로
구에는 이곳 외에도 많은 사대부 묘역이 궁동과 천왕동(天旺洞), 고척동(高尺洞), 오류동 일
대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 유순정(柳順汀). 유홍(柳泓) 묘역과 함양여씨 여계(呂稽) 묘역이 지
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궁동생태공원(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온수역(8번 출구)에서 6613, 6616, 6716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서울생활과학
  고(서울전파관리소)에서 내리면 바로 궁동생태공원이다.
  (6613번은 양천차고지 방향 차를 타야 되며, 6616번은 원각사입구에서 하차, 6613번과 6616
  번은 정진학교와 온수힐스테이트아파트로 크게 돌아가므로 6716번 버스를 타는 것이 빠름)
* 지하철 1호선 오류동역(3번 출구) 북쪽 오류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6613, 66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1번 출구를 나가서 180도 뒷쪽)에서 6716번 시내버스 이용
* 정선옹주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54-2

 


 

♠  구로구의 지붕, 구로올레길을 거닐다

▲  궁동 서쪽 배밀 밭두렁

정선옹주묘역 서쪽에는 밭두렁이 펼쳐져 있다. 와룡산 산줄기에 동/서/북이 막힌 골짜기로 채
소밭과 비닐하우스가 가득해 갑자기 머나먼 시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골짜기에 일군
경작지의 모양이 마치 뱀과 같아서 또는 뱀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여 '배밀'이라 불렸으며, 정
선옹주묘역 남쪽은 '양지말'이라 불렸다.
궁동 배밀은 서울 변두리에 널린 시골의 하나로 회색빛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이런 전원 풍경
은 눈을 맑게 하는 안약과 같은 존재이다. 특히 서울에서 만나는 전원 풍경은 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천박한 개발의 칼질은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이미 사람과 건물, 차량들로 비대해진 서울에서 이런 시골은 꼭 필요하다. 괜히 성냥갑 아파
트나 잔뜩 짓지 말고 조금은 어수선한 밭두렁이나 반듯이 정비하여 동네 경작지나 주말농장으
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


▲  원각사로 오르는 언덕길 (원각사 직전)

▲  원각사 직전에서 바라본 궁동

배밀 밭두렁 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와룡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
은 원각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산자락 숲속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그런데로 풍기고 있는데, 옛날에 절이 있던 터로 '절안'이라 불렸으며, 원각사는 바로 그 옛
터에 세운 현대 사찰로 이곳에 있었다는 옛 절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정보가 없다.


▲  원각사 요사(寮舍)와 미륵불입상

원각사(圓覺寺)는 60년도 안된 절이라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구미가 당길만한 오
래된 보물이나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늦가을이 만연하게 깃든 산사의 풍경이
너무 고와서 이번 나들이가 주는 보너스로 생각하고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숲속에 자리한 경내에 이르면 넓은 주차장이 먼저 나타나고 그 서쪽 높은 곳에 'ㄱ'모양의 요
사가 있다. 이곳은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는데, 그 북쪽에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이 시무
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동쪽을 굽어본다.
미륵불에서 북쪽 오솔길로 가면 6각형 범종각이 있고, 그 길의 끝에 법당(法堂)이 있다. 기와
집으로 이루어져 전통 불전(佛殿) 양식을 취했으나 철과 알루미늄 등으로 집을 크게 불리면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여래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3
존불을 이루고 있고 그 좌우에 지장보살과 칠성탱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원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1-56 (오리로21가길 146, ☎ 02-2688-5421)

▲  서울을 굽어보는 미륵불입상

▲  6각형으로 빚어진 범종각(梵鍾閣)


▲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원각사 법당
기존의 조그만 법당을 크게 확장하면서 저런 모습이 되었다.

▲  갖출 것은 다 갖춘 법당 내부 (석가3존불, 지장보살, 칠성탱)

▲  범종각 앞에서 바라본 원각사 요사 주변

범종각 옆에는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 있다. 절이 궁동 구석에 자리해 있
고 속세에 그리 알려진 절이 아니라서 좀 고적하긴 하지만 와룡산과 구로올레길로 마실과 나
들이를 나온 이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녀 고적한 절에 잠깐잠깐씩 활력을 불어놓는다.

범종각 옆 산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바로 산능선인데, 이 능선이 와룡산 능선으로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가 지나간다. 동시에 서울과 부천(富川)의 경계선 역할도 겸한다.


▲  구로올레길 산림형 2코스 (원각사 뒷쪽)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島), 그곳에는 담장길을 뜻하는 올레길이 있다. 그 올
레길을 시작으로 도보 산책길이 전국에 급속히 번져나갔는데,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많은 지
역에서 앞다투어 도보길을 내놓고 있다. 서울도 도보길의 성지인 북한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
을 비롯해 관악산둘레길, 강서둘레길, 동작충효길, 강동그린웨이, 아차산둘레길, 안산(鞍山)
자락길, 구로올레길 등이 있다.
도보길의 명칭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산을 낀 곳은 상당수 '둘레길'을 칭하고 있으며, '갈맷길
'이나 '산막이길','동작충효길','산꼬라데이길' 등 토속적인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구로올레
길은 그런 도보길 유행에 따라 구로구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책로로 둘레길을 칭하지 않고 제
주도를 따라 올레길이라 했다.

구로올레길은 기존의 산길과 숲길, 골목길, 하천길을 활용하여 도심형 코스 2개. 하천형 코스
3개, 산림형 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가 찾은 길은 산림형 2코스로 온수역에서 궁동을 감
싸는 와룡산과 지양산 산줄기를 따라 매봉초교에 이르는 4.8km의 산길이다. 구로구의 지붕과
같은 곳으로 이중 와룡산과 지양산 남쪽 구간은 서울~부천의 경계선을 이루기도 하며, 접근은
온수역(5번 출구)과 정진학교, 원각사, 궁동3거리, 신정이펜하우스4단지, 매봉초교에서 하면
편하다.

우리는 2코스 구간 중, 원각사뒷쪽~궁동터널 북쪽 구간을 이용했는데, 이 구간은 전형적인 산
길로 경사도 거의 느긋한 편이며, 상당수가 능선길이다. 해발도 아무리 용을 써봐야 120~130m
정도이고, 숲이 무성하고 공기가 청정해 간단히 몸도 풀 겸, 마실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산길에 딱히 볼거리는 없으며, 그냥 나무와 꽃, 바위, 숲 너머로 펼쳐지는 조망(서울 구로구
와 부천 작동, 춘의동 지역)이 전부이다. 올레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그들만의 숨
겨진 공간이었으나 올레길로 포장된 이후 조금씩 세상에 알려져 외지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  차돌바위 쉼터
의자 너머로 보이는 하얀 바위가 차돌바위이다. 그 유래는 모르겠음.

        ◀  작동터널 윗쪽 (수렁고개)
능선길이 상당수를 이루며 흘러가는 산림형 2
코스 구간 가운데 가장 쑥 주저앉은 구간이다.
그래서 여기서만큼은 급한 경사로 내려갔다가
다시 급하게 올라가야 된다.
저 밑에는 작동터널이 뚫려있어 온갖 차량들이
굉음을 부르짖으며. 저 양쪽으로 작동과 궁동3
거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작동터널 북쪽 (수렁고개)

▲  지양산 국기봉으로 오르는 올레길
겨울 제국의 도래를 앞두고 늦가을 약기운이 다된 나무들은 그동안 걸친 나뭇잎을
떨어트리며 늦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낙엽이란 우울한 이름을 단 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지양산 국기봉
지양산 남쪽 봉우리에 신성한 태극기를 달고 국기봉이라 하였다.

▲  지양산 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산줄기 너머로 구로구와 양천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시내에서 별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제법 멀리 나온 것 같다.

▲  구로올레길 궁동3거리 북쪽

▲  구로올레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탄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

햇님이 뉘엿뉘엿 꽁무니를 빼면서 땅꺼미가 조금씩 약기운이 더해지자 잠시나마 정을 붙인 구
로올레길을 버리고 속세로 철수했다. 기분 같아서는 동쪽 종점인 매봉초교까지 가고 싶었지만
어둠에 잠긴 산길 산책도 썩 좋은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야간 사진은 제대로 담기도 힘들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올 여운을 충분히 남기며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에서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갈아타 신정3지구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갔다.


▲  소나무가 가득한 지양산 생태순환길

▲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가는 지양산 생태순환길

지양산 생태순환길로 접어들어 6~7분 내려가니 어느덧 회색빛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내
에서 고작 바로 옆 산, 그것도 높이가 낮은 산에 오른 것인데 산속을 꽤나 깊이 들어간 기분
이다.

지양산 생태순환길은 양천구(陽川區)에서 닦은 숲길로 신월7동에서 지양산 동쪽 산줄기를 따
라 궁동터널 북쪽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순 100% 산길이다. 이와 별도로 지양산 주능선을 쫓아
서 양천둘레길이 지나가는데 지양산 국기봉에서 매봉초교를 거쳐 계남근린공원까지 구로올레
길과 같은 길을 쓴다. 이 구간은 구로구와 양천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마을3단지로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칼퇴근의 달인 햇님은 이제 보이지도 않고 달
님이 하늘에 높이 떠 위엄을 부린다. 이렇게 하여
구로올레길을 겯드린 궁동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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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0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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