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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불암산 학도
암 ~~~~~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학도암 마애사리탑

▲  약사전 석조약사3존불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다
무척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
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경기도 지역과 멀리 경북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2003년)까지 찾아가곤 했으
나 2011년부터는 서울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인다. 서울 시내에도 오래된 절이 제법 많
고 역사는 짧아도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을 찾아다니
기가 어언 10여 년, 이제는 미답(未踏)으로 남은 절이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뿐인 초파일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예전에 가봤던
오래된 절 중, 문화유산을 보유한 절까지 포함시켜 절 투어 동선을 짜보았다. '어디를
가야만 잘갔다고 칭찬을 들을까~?' 장소를 물색하다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에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학도암은 이미 여러 번이 인연을 지은 절이나 정작 마애사리탑은 만나지 못했다. 그는
2015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새내기 문화유산으로 아직까진 낯설은 마애사리탑의 생
김새도 구경하고 학도암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그곳을 이번 초파일의 첫 답사지
로 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꿈나라에서
서둘러 벗어나 오전 11시에 도봉동 집을 나섰다. 집 부근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창동역(1,4호선)으로 이동한 다음, 중계본동으로 가는 114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
여 노원우체국에서 두 발을 내린다.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중계본동의 여러 아파트를 지나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골목(중계
로14다길)으로 들어섰는데, 날이 날인지라 절로 향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징하게 말뚝을 박은 노원교회를 지나면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들
대신 불암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숲 바로 직전에는 황금색 배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배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토산품인 먹골배로 봉화산(烽
火山)과 태릉 주변, 불암산 주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번잡한 시가지가 주로 연상
되는 서울에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배밭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에서 고구려 청동
호우를 만난 듯 꽤나 낯설고 신선하다.

불암산의 시원스런 산바람에 번뇌를 살짝 부탁하며 숲길을 오르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
로 추앙받는 서울둘레길이 마중한다. 총 거리가 무려 15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은 불
암산둘레길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살방한 산길의 정석인 둘레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연등의 물결을 따라 계속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보이지 않던 학도암 경내와 주차장이 슬슬 꽁무니를 비춘다. 여기서 잠시 경
내를 접어두고 주차장 직전 오른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를 주목해보자. 그 바위 피부
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마애사리탑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하지만 너무 없는 듯
자리하고 있어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불암산 숲길
녹음(綠陰)에 잠긴 나무들이 시원한 내음을 베풀며 벌써부터 달라붙은
더위의 산물(땀)을 싹 단죄한다.


 

♠  학도암(鶴到庵) 입문 (마애사리탑)

▲  학도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4호

경내 직전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는 마애사리탑 2기가 살짝 서려있다. 마애사리탑이란 적당
한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조선 후기(19세기)에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 사찰에서 나타나는 서울 스타일의 사리탑<승탑(僧塔)>이다. 현재 학도암과 도봉산 천축
사(天竺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으며,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상도동 사자암(
獅子庵)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전할 뿐, 널리 유행하지는 못했다.

마애사리탑을 지닌 절은 하나 같이 산중에 자리해 있어 사리탑을 닦을 자리가 여의치 못했고
재정도 넉넉치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여 절 부근 바위를 활용해 조촐하게 공간을 다듬고 감
실을 닦은 다음 사리함을 봉안한 마애사리탑이 반짝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 승탑보다 제작
비용도 많이 저렴하며 공간도 적게 잡아먹을 뿐 아니라 바위만 있으면 되니 갖추기는 쉽다.


▲  바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마애사리탑
왼쪽은 '청신녀월영영주지탑', 오른쪽은 '환
당선사취근지탑'


학도암 마애사리탑은 바위 피부에 비석 모양으로 길쭉하고 얕게 자리를 만들고 윗쪽에 네모난
감실을 두어 사리함을 봉안했다. 하지만 그 감실은 오래전에 털렸고 그곳에 깃든 사리함 등의
유물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다.

왼쪽 사리탑은 '청신녀 월영영주지탑(淸信女 月影靈珠之塔)'으로 월영영주란 여인의 납골당이
다. 승려도 아닌 여인 신도의 사리탑을 경내 밑에 만들어줄 정도라면 절에 대한 공헌이 꽤 컸
던 모양이다. '嘉慶(가경)二十四年 己卯十月'이란 글씨가 옆에 새겨져 있어 가경24년 을묘년(
1819년) 10월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오른쪽에 대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
가 하나 있을 뿐,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그리고 오른쪽 사리탑은 '환□당선사 취근지탑(幻□堂禪師 就根之塔)'으로 '환(幻)'과 '堂'
사이에 마치 총탄이 요란하게 할퀴고 간 듯, 크게 구멍이 나서 그 사이에 자리한 1자는 확인
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글씨는 멀쩡하여 '환ㅇ당 취근 선사'의 사리탑임을 알려준다.
조성 시기는 쓰여있지 않으나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양식으로 미루어 왼쪽 사리탑과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다만 누가 더 나이가 많은 지는 견주기가 어렵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마애사리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감실이 잘 남아있으며, 고맙게
도 사리탑 주인공과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하여 뒤늦게나마 2015년 8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만약 그 글
씨가 없었다면 비록 서울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라고 해도 그 가치
를 저평가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리탑을 조성한 옛 사람들의 작은 센스가 이들의 가치를 돋보이게 해주어 사리탑의 미
래까지 챙겨준 것이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학도암 (오른쪽 바위 위에 석조지장보살상이 있음)

학도암의 낯선 존재, 마애사리탑을 둘러보고 초파일의 흥겨움으로 가득 묻어난 학도암 경내로
들어섰다. 절은 가파른 경사에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포근히 자리를 닦았는데 주차장에서 경
내로 인도하는 길은 크게 2개로 계단길과 차량을 위해 넓게 지은 오른쪽 길이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되나 이들 모두 경사의 압박이 조금 있어 잠시 숨을 헐떡이게
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중계본동과 하계동, 월계동,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새 건물 냄새가 진동하는 대웅전(大雄殿)

몇년 만에 다시 찾은 학도암은 세월의 흐름 그 이상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뇌리 속에 깊히 박힌 학도암의 모습 대신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또다른 모습이 나를 맞이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선방, 요사(寮舍),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모두 도맡았던 법당이 대웅전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에 그 건물을 부시고 번듯하게 대웅전을 지어올렸고 지장보살상이 있
던 자리에는 종무소를 닦았다. (지장보살상은 바위 쪽으로 밀려남) 그리고 대웅전 아랫쪽에는
공양간을 갖춘 요사를 두어 철저히 분업화시켰다. 하여 예전보다는 정리되고 깔끔한 모습이지
만 한편으로는 낯설게 다가온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관음보살로 이
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뜨락에는 하얀 천막과 의자를 넉넉히 깔아 중생들의 편의
를 배려하였고, 관불의식의 현장도 닦아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도암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현판의 위엄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학도암은 불암산(507m) 서남쪽 자락 160m 고지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절이다. 숲이 무성
하고 작은 계곡이 옆에 흐르며, 멋드러진 바위가 주변에 포진해있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
다. 예로부터 이렇게 빼어난 경승지에는 학과 관련된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이곳 역
시 학이 날라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하여 학이 왔다는 뜻의 학도암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이 절은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불암산 어딘가에 있던 옛 암자를 옮겨와 창건했다고 한
다. 허나 그 암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불암산에는 적당한 절터도 전해오
지 않는다. 게다가 관련 기록도 남아있질 않아 창건 시기에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
나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17~1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70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주에 힘입어 절 뒤쪽 바위에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을 새겼으며
1875년에 벽운화상(碧雲和尙)이 절을 중창했다. 1878년에는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
음보살을 보수했고, 1885년 벽운화상이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출신 화승(畵僧)인 경선(慶船)
에게 부탁하여 불상 1구를 개금(改金)하고 불화 6점을 봉안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922년 성담(聖曇)이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소유로 넘어갔던 절 소유의 산림 10여 정보를 매
입하여 절의 경계를 넓혔으며, 1966년에 주지 김명호가 법당을 중건했다. 1970년 영산회상도
를 봉안하고 1972년에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2000년에는 마애불 옆에 있는
조그만 자연동굴을 넓혀 석조약사3존불을 안치해 약사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2005년에 승려 무이
(無二)가 법당 남쪽 공터를 닦아 석조지장보살상을 봉안했고, 2014
년에 다용도로 쓰이던 법당을 밀고 새로 대웅전과 요사, 종무소를 짓고 대웅전 밑에 공양간을
지어 2016년에 완성을 보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약사전,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마애사리탑을 간직하고 있다.

개발의 칼질이 절 밑 500m 아래까지 밀고 들어와 옛날과 달리 속세와 많이 가까워졌지만 짙은
숲이 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어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분위기를 잘 간직하
고 있으며, 절의 규모도 아담하여 두 눈으로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3 (종계로14다길 89 ☎ 02-930-6555)

▲  바위 위에 자리를 닦은 지장보살좌상
(2005년에 조성됨)

▲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그를 품은 거대한 바위


 

♠  학도암 둘러보기

▲  초파일 특수를 위해 고생하는 아기부처의 관불의식 현장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년 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왔
다. 그 적지 않은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낸 터라 간만에 외출에 신이 난 표정
인데, 절을 찾은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관정)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아기부처 바로 옆에는 옥의 티처럼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
다본다. 마치 오늘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  대웅전, 종무소 앞에서 바라본 경내 뒷쪽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삼성각(三聖閣)
마애관음보살 우측 구석에 삼성각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972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진 칠성탱

▲  산신 식구들의 단란함이 느껴지는 산신탱


▲  석굴 형식으로 이루어진 약사전(藥師殿)

마애관음보살과 삼성각 사이에 동굴을 품은 장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도리에 약사전
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원래는 1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동굴로 그 내부에 기
도처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으나 2000년에 동굴 내부를 넓히고 다져서 약사여래좌상과 일광보
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고 약사전으로 삼았다.
약사전은 석굴 불전(佛殿)으로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는 따스해 경내의 조촐한 피서지
역할도 도맡고 있다.


▲  약사전 석굴에 자리를 닦은 석조약사3존불
연꽃 무늬가 새겨진 대좌에 앉아 왼손에 약합(藥盒)을 쥐어든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보관(寶冠)을 눌러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를 지킨다.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경내 뒷쪽이자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학도암의 자랑이자 꿀단지인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있
다. 약사전을 품은 바위보다 2배 이상이나 커다란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는데 자신이 의
지한 바위만큼이나 장대한 규모로 마애불의 높이가 무려 13.4m에 이른다. 허나 허공을 가득
메운 알록달록 연등이 그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는 것을 허용치 않아 사진에 담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1870년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조성되었다. 보통 고려
시대 마애불은 각기 개성이 넘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반해 조선시대 마애불은 스케일
이 무척이나 좁아터졌던 조선을 닮아서 덩치가 대체로 작았다. (건물이나 성문도 이전 시대보
다 많이 작아짐) 허나 이 불상은 고려 마애불의 화신(化身) 마냥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명
성황후의 커다란 야망이 마애불에 고스란히 깃들여진 듯하다.
1870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마애불을 보수했으며, 불상 왼쪽에 그와 관련된 50여 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조성시기와 제작자, 시주자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서울 지역에서는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에 깃든 고려시대 마애여래좌상(☞ 관련글 보
러가기
)에 버금가는 규모로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된 선각 마애불이다. 이제 150년 정도
묵은 한참 때라 선의 아름다운 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특이하게도 관음보살을 그 대
상으로 하여 조성했는데, 이 땅에서 오래된 마애불이 수천 개가 있지만 정작 관세음보살이 주
인공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  온전하게 담은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위엄
(2010년 4월)

▲  연등의 눈치를 피하며 옆에서 담아본
마애관음보살좌상


▲  마애관음보살의 얼굴

마애관음보살의 얼굴은 가늘면서도 볼에 살이 좀 있어 보인다. 좌우로 길쭉한 눈은 지그시 감
겨져 있고 그 위에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이 떠 있다. 그 눈썹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두텁
게 박혀있고, 코는 크고 두툼하여 복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선각으로 얕게 조성되었지만 코만
큼은 돋음새김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약간 비뚤어져 보이는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전
체적인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얼굴 주변을 밝히는 동그란 두광(頭光) 안에 보관을 표현했는데, 하얀 피부의 돌에 조각을 해
서 그렇지 정말로 호화로운 보관이다. 이마 위쪽에는 연화대좌를 갖춘 조그만 석가불의 모습
이 보이는데, 보관에 따로 불상까지 갖춘 관음보살은 처음이라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보
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冠帶) 양쪽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보관에 대한 군침을 진하게 자극시키는데, 그가 잠시 보관을
내려놓는 사이에 살짝 가져가 머리에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마애관음보살의 밑도리

마애불은 활짝 핀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는데, 그 대좌 위로 오른쪽 발이 발가락, 발바닥과 함
께 보인다. 왼발은 옷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마애불로 조각 솜씨는 섬세하고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마애
불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마애불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려준다.
마애불 앞에는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석등(石燈) 2기가 마애불 주변의 어둠을 몰아낸다.


▲  마애관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천하 (중계동과 노원구, 성북구 지역)
마애관세음보살 누님의 가피가 있기에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들은
오늘도 평안하다.

▲  학도암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 절 투어 재미의 하나이자 백미(白眉)는 바로 공양밥 섭취이다. 지금까지 두 눈과 사진
기를 흥분이 넘치도록 호강을 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마애관음보살좌상이고 뭐고 바로 공양밥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접고
경내를 우선 둘러보았다. 경내가 조촐하고 마애관음보살과 마애사리탑을 빼면 고색의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답사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가 없다.

공양간 주변은 이미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학도암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
한 공양밥은 실외에서 나눠주고 있었는데, 그 주변과 공양간 실내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이다. 다행히 밥을 받는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아서 금방 밥을 받았다.
이곳 공양밥은 밥이 담긴 그릇에 호박과 콩나물, 시금치 등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이른 더위와 비빔밥의 매운 맛을 잠재우고자 시원한
미역냉국이 딸려 나왔고, 후식용으로 수박 1조각과 절편이 담긴 떡 1봉지도 같이 제공되어 아
주 넉넉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었다. (밥과 나물은 리필 가능함)

팔이 부러질 정도로 나온 공양밥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어던지고
공양간 내부로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공양밥 섭취에 임한다. 양이 많아 보이던 공양밥이
지만 시장기가 상당해 숟가락 몇 번 만에 이내 빈 그릇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수박과 절편까
지 섭취하니 그야말로 점심 1끼 배부르게 잘먹었다.
그렇게 공양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후식거리로 믹스 커피도 준비되어 있어 커피까지 1잔 챙
겨먹으며 식곤증을 단죄했다. 그 시간에도 학도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고
자 꾸역꾸역 들어왔고, 공양간 역시 계속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공양을 끝으로 오랜만에 찾은 학도암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나에게는 그
날 학도암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학도암을 뒤로하며 ~~~ (불암산 숲길)

▲  중계본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12호

중계본동 시내로 나오니 중계로 길가에 오래된 느티나무 하나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길을 붙
잡는다. 뭔가 싶어서 호기심에 살펴보니 110년 정도 묵은 보호수 느티나무였다.
그는 높이 17m, 둘레 3.4m로 2005년에 서울시 보호수의 등급을 받았다. (그 당시 추정 나이는
약 100년) 예전에는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고 아파
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이제는 가로수의 역할로 바뀌었다. 길 건너편에도 오래된 보호수가 있
으나 모두 쿨하게 무시하고 다음 미답지 사찰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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