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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개나리의 성지, 응봉산 봄나들이 (살곶이다리) '


▲  봄티가 물씬 풍기는 응봉산

▲  응봉산 꼭대기 응봉산정

▲  살곶이다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성동구 한복판에
자리한 응봉산(鷹峯山)을 찾았다.
서울숲을 먼저 둘러보고 중랑천에 걸린 용비교를 통해 그날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응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는데, 응봉산은 응봉역(경의중앙선)이나 금호동 독서당로, 용비교
에서 접근하면 편하다.


▲  용비교 동측에서 바라본 응봉산의 위엄
(그 밑에 경의중앙선과 중랑천이 있음)


 

♠  응봉산 둘러보기

▲  용비교에서 바라본 중랑천(中浪川)과 응봉교

용비교 밑을 흐르는 중랑천은 경기도 동두천과 양주, 의정부, 서울 동북부 지역의 물을 모두
모아 한강으로 보내는 긴 하천이다. 우리 동네 도봉동(道峰洞)을 지나는 하천이기도 한데 이
곳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폭이 왠만한 강 못지 않게 넓다.

중랑천 좌/우 옆구리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닦여져 있는데, 그의 우측(서쪽)에는 경의중앙
선 복선 철로가 있어 경의중앙선 전철(문산~용산~청량리~용문,지평)과 경춘선 ITX-청춘열차(
용산~춘천), 강릉선 고속전철(서울~강릉,동해)까지 수시로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종종 그들이
버벅대는 모습을 보인다. 선로는 겨우 2개인데 지나는 열차 종류는 허벌나게 많기 때문이다.
(관광열차와 화물열차도 적지 않게 지나다님)
그런 경의중앙선 바로 뒤에 펼쳐진 뫼가 바로 응봉산으로 한강을 향해 우람하고 잘생긴 암벽
을 아낌없이 내밀고 있다.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벼랑을 빼고 거의 노란 천하가 되지만 개나
리의 기운이 70% 이상 빠진 때에 왔기 때문에 녹색 비율이 더 높다.


▲  응봉산과 그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바위들이 우럭우럭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어 산의 경치를 크게 돋군다. 바위가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한강, 중랑천과 맞닿은 산 남쪽을
입석포(立石浦)라 불렀다.

▲  응봉산과 경의중앙선, 중랑천 3박자가 어우러진 현장
오직 용비교에서만 그 매력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전철이나 각종 열차가
때맞추어 지나가면 더욱 금상첨화가 된다. 하여 이곳은 그런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출사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  용비교 서쪽에서 응봉산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응봉산의 각박한 남쪽 벼랑을 극복하며 닦여진 길로 이쪽은 약간의 개나리와
하얀 벚꽃, 연분홍 진달래들이 봄의 향연을 이어가고 있다.

▲  응봉산 능선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지그재그로 이어진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서쪽 능선이다.

▲  남쪽 계단길에서 바라본 용비교(왼쪽 다리)와 서울숲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①
능선길 주변의 수풀은 거의 개나리이다. 개나리가 적지 않게 주저앉은 시기에
와서 실감은 덜하지만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완전 노란 개나리길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②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③ 정상 직전

밑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던 개나리들이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상 주변
은 개나리들이 아직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래봐야 김옥균(金玉均)의 3일천
하처럼 고작 며칠 연장에 불과하다. 이래서 인생이나 세상만사가 참 부질없는 모양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④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①
서울숲과 용비교(바로 밑의 다리), 중랑천, 한강, 성수대교,
청담동과 압구정동 지역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②
한강과 중랑천 하류, 동호대교, 옥수동, 한남동, 압구정동, 신사동 지역

▲  응봉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응봉산정(鷹峯山亭)

응봉산의 나지막한 꼭대기에는 단아하게 생긴 2층짜리 응봉산정이 자리해 있다. 근래에 응봉
산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것으로 그 주위로 너른 공터가 있는데 바로 여기가 응봉산 개나리축
제의 중심지로 공연과 먹거리 장터, 전시회 등이 열린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밑에 서울숲과 한강, 중랑천을 비롯하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
기, 옥수동, 한남동, 한강 너머로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봄
마다 찾아오는 중공산 미세먼지의 역한 내습으로 시야가 적지 않게 꺾여 보이는 것은 평소에
2/3 이하에 불과하다.


▲  옆에서 바라본 응봉산정

응봉산(응봉)은 성동구(城東區)의 한복판이자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급하게 솟은 해발
94m(95m)의 조촐한 뫼이다.
산의 이름인 응봉(鷹峯)은 매봉우리란 뜻으로 조선 때 제왕과 왕족들이 매사냥을 즐겼던 곳이
다. 1395년에 응봉 기슭에 매를 기르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해 필요한 매를 충당했으며,
태조와 태종, 세종, 성종까지 여기서 자주 매사냥을 즐겨 꿩과 토끼 등을 사냥했다.
매사냥을 벌였던 곳이라 자연히 응봉, 응봉산, 매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산의 모양새가 마
치 매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응봉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중랑천과 한강과 맞닿은 산 남쪽은 각박한 벼랑으로 우럭우럭하게 생긴 암벽들이 많으며 그들
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처럼 보여 산 밑의 포구(浦口)를 입석포(선돌개)라 불렀다. 뒤에
는 응봉이, 앞에는 강이 흐르는 빼어난 경치로 많은 시인묵객들을 홀렸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물고기도 잘 잡혀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의 형)과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등 조선 초에 이름있는 문인들
들이 서울(한양)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을 선정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를 남기며 격하게 찬양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의 낚
시)'이다.

응봉산은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막혀 경사가 급하고 서쪽은 옥수역 동쪽 달맞이봉
과 이어져 있으며, 북쪽은 대현산, 금호산, 남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
로 중간중간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가가 마구 들어서 서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엄연히 이어져
있으며, 서울숲에서 응봉산을 거쳐 남산까지 이들을 모두 엮은 도보길이 닦이면서 도시와 산,
숲을 아우른 서울 도심 속의 환상적인 지붕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단 대현산공원~응봉공원
구간은 부득이 번잡한 도로와 시내를 지나가야 됨)

응봉산에 안겨있던 옛 명소로는 관리들의 학습 장려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동호독서당(東湖讀
書堂)이 서쪽 자락에 있었고, 양반사대부들이 지은 황화정, 유하정 등의 정자가 있었으며, 옥
수역 부근에는 얼음을 보관하던 국립 얼음창고인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또한 산 남쪽에는
앞서 언급했던 입석포가 있었다. (입석포를 제외하고 모두 세월이 잡아가고 없음)

허나 개발이 요란하게 칼춤을 추던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렇게나 잘생기고 착했던 응봉산은 영
좋지 못한 모습으로 강제 성형수술을 강요 받게 된다. 응봉동(鷹峯洞)과 금호동 지역에 격하
게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산의 북쪽과 동쪽, 서쪽이 난도질을 당했고, 대현산과 이어지던 북쪽
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완전 절벽 수준으로 칼질을 당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1990년대 초반), 여기서 가까운 금호1가에서 여러 해를 살았었다. 그때 응
봉산은 동네 우범지대로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했지. 하여 가까이 살았음에도 그곳은 쳐다보
지도 않았다. 그만큼 20세기 말, 응봉산의 이미지는 참으로 우울했던 것이다.
게다가 산이 나날이 허약해지면서 모래흙이 자꾸 흘러내리자 그 대책으로 20만 그루의 개나리
를 심었는데 그 개나리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발의 칼질에 녹초가 다 된 응봉산을 되살려주었
고 그것이 글쎄 전화위복이 되어 도심 속 개나리동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동구는 1997년부터 응봉산 개나리축제를 벌여 이제는 서울의 주요 봄꽃 축제로 자리
를 잡게 되었으며, 금호동에 살 적에 단 1번도 오지 않았던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였다. 사람
은 옷이 날개이듯, 산은 꽃이 날개인 모양이다.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성수동과 화양동, 송정동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차량들로 늘 버벅거리는 용비교와 서울숲, 성수대교 주변


응봉산은 매년 1월 1일 성동구청 주최로 해돋이행사가 열린다. 동쪽과 서쪽이 뻥 뚫려있어 일
출과 일몰을 모두 지켜볼 수 있으며, 개나리가 크게 위엄을 부리는 3월 말~4월 초에는 '응봉
산 개나리축제'가 열려 상춘객들로 완전 시장통을 이룬다. (축제가 열리는 토,일요일에는 개
나리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임)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옛 저자도를 추억하다

윗 사진의 가운데 부분 한강(서울숲과 동호대교 사이)에는 저자도(楮子島)란 섬이 있었다. 그
는 한강의 주요 경승지의 일원으로 종이 제작에 쓰이는 닥나무가 많이 자랐던 곳이다. (섬의
이름인 저자는 닥나무를 뜻함)
그렇게 착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압구정동 아파트 조성에 필요한 흙을 충당하고
자 무식하게 폭파되어 인간의 시야와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렇게 영원히 없어진 듯 보
였던 저자도는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조금씩 살아나 아주 작지만 섬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여 몇십 년 또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 지도에 다시 그를 표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 응봉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금호4가동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굉음을 울리며 응봉산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  응봉산 마무리

▲  개나리와 벚꽃이 아른거리는 응봉산 동쪽 능선길 ▼



▲  응봉산 출렁다리 (동쪽)

동쪽 능선길을 내려가면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은 응봉산의 북쪽 자락을 돌아
응봉산정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출렁다리가 있다. (길 옆에 있음)
출렁다리는 응봉산정, 인공암벽공원과 함께 응봉산을 수식하는 조촐한 눈요깃감으로 벼랑 사
이에 짧은 허공을 이용해 다리를 놓았다. 천하 출렁다리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청양 천장
호 출렁다리, 파주 감악산(紺岳山) 출렁다리,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만은 못해도 복잡하기 그
지 없는 서울 도심에 거창할 것도 없이 저 정도의 흔들다리만 있어도 충분하다. 다리를 건널
때 조금씩 흔들거려 염통을 은근히 건드리니 다리의 이름값은 그런데로 하고 있다.


▲  응봉산 출렁다리를 건너다. (출렁다리 서쪽)

▲  개발의 칼질에 고통받는 응봉산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곳
절벽처럼 잘려나간 응봉산 북쪽 부분 (독서당로)


응봉산 서쪽과 북쪽은 개발의 칼질로 그의 살이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특히 대현산과 이어지
는 북쪽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아예 산줄기를 절단을 내버려 강제로 절벽이 되어버렸다. 흉
하게 깎인 동쪽과 북쪽에 인공암벽공원(동쪽 자락)을 설치하고 풀과 나무로 덮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과 너무 어색하다.

독서당로로 산줄기가 끊긴 북쪽 벼랑에는 나무데크길을 마치 고산지대의 잔도(棧道)처럼 아슬
아슬하게 걸쳐놓아 보기만 해도 참 아찔하다. 길 북쪽의 신동아아파트를 이어주는 육교가 설
치되어 응봉산 북쪽 산줄기(대현산)와 연결은 시켜놓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통행로이지 산줄
기는 아니다.
이 땅의 개발이 일찍 철이 들었다면 생태다리 터널 방식으로 도로를 뚫어 산의 피해를 최소화
시켰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하긴 이 땅의 개발지상주의는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


▲  응봉산 북쪽에 자리한 독서당공원

응봉산에서 독서당로 육교를 건너 신동아아파트 서쪽 길로 가면 독서당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겉으로 보면 응봉산과 별개처럼 보이지만 이곳 역시 응봉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신동아아파트
와 벽산아파트 사이에 남북으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공원 북쪽은 바로 대현산(대현산공원)
과 맞닿아있다. 또한 서울숲~남산을 잇는 둘레길이 이 공원의 신세를 지며 대현산, 금호산으
로 흘러간다.

공원 이름은 응봉산 자락에 있었다는 독서당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산뜻한 모습들을 드러
내고 있지만 196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금호동과 옥수동, 응봉동에 달동
네 스타일의 집들이 마구 들어서 꽤 우울하고 어지러운 모습을 간직했던 곳이다.
1973년 12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으며, 무허가 건물과 위험 건물이
마구 들어서 말썽이 자꾸만 늘자 2007년 10월 '공원화사업지구'로 지정하여 주변을 모두 갈아
엎고 2009년 12월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달동네 시절보다 다소 정비되고 안정적인 모습이긴 하나 공원도 좀 단조롭고 주변이 온통 성
냥갑 아파트 일색이라 지금의 풍경이 참 낯설고 재미가 없다. 기존 시내와 주택가를 싹 밀어
버리고 재개발이 된 곳들은 마치 같은 도장을 찍어낸 듯 다들 비슷한 모습 같다. 나도 서울이
고향이고 약수동과 금호동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강제 성형을 당한 곳이 적지 않
아 어린 시절을 추억할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이 역시 모든 것을
지우기 좋아하는 심술쟁이 세월의 장난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1가 37-7일대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①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②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③

▲  북쪽(대현산)으로 넘어가는 독서당공원 산책로

▲  독서당공원 북쪽에서 만난 푸른 나무

▲  독서당공원 북쪽 입구 (금봉어린이집 옆)
공원 바로 북쪽에는 대현산을 등에 업은 대현산공원이 있다. 같은 지붕이지만
길(독서당로63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름만 다른 것이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돌다리, 살곶이다리<전곶교(箭串橋)>
- 보물 1,738호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한양대 남쪽 중랑천에 있는 살곶이다리를 찾았
다. (앞의 응봉산과 찾아간 시기는 틀리나 그곳과 가깝고 중랑천 라인이므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살곶이다리는 한자로 전곶교(箭串橋)라 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자 조선시대에
지어진 돌다리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다리 길이가 수백m씩이나 되는 것은 아니
다. 길이 78m(256척), 너비 6m(20척) 정도로 기둥을 4줄로 하여 모두 64개를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려 대청마루를 올리듯 3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2줄 교각을 낮게하
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마름모형으로 다듬고, 다리
기둥에 무수하게 흠집을 내어 물살의 흐름을 배려했다. 단순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꽤 들어간 것이다.

이 다리의 탄생 배경은 대략 이렇다.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太宗)과 정종(定宗)은 서울 동부
지역으로 종종 외출을 나갔다. 하여 세종(世宗)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위해 1420년 5월, 그
길목인 살곶이에 다리를 지었다. 허나 중랑천 너비가 넓고 여름마다 찾아오는 홍수를 이겨내
기 어려웠으며 때마침 태종도 승하하여 기초 공사 정도에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그렇게 50년 이상 방치되어 오다가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다리 가설의 필요성이 계속 제
기되면서 1475년 잠자고 있던 다리에 다시 손질을 가해 1483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뚝섬과 광진구, 송파, 경기도 동부와 동남부, 멀리로는 충청도 동부와
강원도, 경상도를 잇는 중요한 다리로 백성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게다가 제왕과 왕족들이 화
양정(華陽亭)과 성덕정(聖德亭, 성수동)으로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보러 가거나 여주 영녕릉(
英寧陵), 헌인릉(獻仁陵)에 참배하러 갈 때도 꼭 이곳을 거쳐갔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의 이
용이 높다보니 다리 폭을 넓게 잡았으며,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
불리기도 했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무리하게 경복궁(景福宮)을 재건할 때, 애궂은 살곶이다
리까지 손을 대어 다리 석재를 절반씩이나 뜯어갔으나 대부분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
다.
1920년대 대홍수로 다리가 크게 손실되었고 그런 상태로 방치되는 고통을 겪다가 1972년에 서
울시에서 복원을 했다. 허나 중랑천 폭이 그 사이 많이 넓어져 현재 다리로는 감당이 되지 않
자 북쪽 구석으로 옮겼으나 너무 대충 복원하여 원래 모습으로 하지는 못했다. 또한 다리 남
쪽에는 중랑천 물줄기 위에 시멘트로 연결다리를 엮으면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이게
모두 살곶이다리로 오해하기가 쉽다.
허나 북쪽의 돌로 된 다리가 진짜이며, 중간에 돌로 두텁게 다져진 돌축대와 그 남쪽 다리는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들이니 착오가 없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살곶이다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찾은 살곶이다리는 보수공사로 다리 북쪽이 다소 어수선했다.
1972년에 서울시 철밥통들이 너무 날림으로 복원을 해서 손댈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통행은 가능하며, 갈대와 온갖 수풀이 출렁이는 다리 밑도리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다리
높이가 낮고 물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들어가서 살피면 된다. 


▲  평지처럼 넓어 보이는 살곶이다리

돌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의 피부가 조금 거칠기는 하나 거닐기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이래뵈
도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크고 단단하며 제왕(帝王)들도 이용했던 비싼 다리이다. 다만 수
표교(水標橋)처럼 다리 양 모서리에 난간 같은 시설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
다.


▲  남쪽 돌축대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와 한양대
돌다리와 시멘트 다리 사이에는 돌축대를 쌓았다. 그곳을 경계로 진짜 살곶이다리와
그를 접선하는 시멘트다리가 갈라진다. 돌축대 역시 1972년에 다져진 것이므로
원래 살곶이다리와는 관련이 없다.

▲  동쪽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
다리 주변에는 갈대와 온갖 수풀들이 늦가을의 막바지 향연을 즐기고 있다.


다리의 이름이 되고 있는 살곶이는 이곳의 지명이다. 살곶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 그의 5번째 아들인 정안대군(
靖安大君)은 2차례(1398, 1400년)의 왕자의 난을 통해 이복동생(이방석, 이방번)을 때려죽이
고 친형인 이방간(李芳幹)까지 때려잡으면서 결국 1400년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그 유명
한 태종이다.
자식들의 권력 싸움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이성계는 그의 본거지인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가 태종의 계속되는 설득에 못이겨 결국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부왕(父王)의 컴백
소식에 기뻐한 태종은 살곶이 부근에서 부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렸는데 하륜(河崙)이
혹시 모르니 연회장소에 큰 나무 기둥을 세우라고 했다. 즉 태조의 화가 아직 가라앉지 못해
그의 주특기인 화살을 갑자기 날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여 큰 기둥을 여러 개 세웠다.

태조 일행이 이곳에 이르자 태종은 너무 반가워 그에게 달려갔는데 태조는 그를 보자 다시금
뚜껑이 뒤집혀 귀신같이 화살을 매겨 쏘았다. 태종 또한 무예를 조금 하는지라 잽싸게 큰 기
둥 뒤로 숨어 화살을 피했다. 이를 지켜본 태조는 껄껄 웃으며 그에게 옥새를 내주었다고 하
며 태조가 화살을 쏜 곳이라 하여 이곳 지명이 살곶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1가지 이상
한 점이 있다.
함흥에서 서울로 오려면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과 평강(平康), 철원(鐵原), 연천(漣川),
양주(楊州), 도봉구를 거쳐 동소문(혜화문)이나 동대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그런데 살곶이를
경유하는 것은 동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좁은 중랑천을 배를 타고 이동
했을 리는 없다. 다만 다리 남쪽인 성수동 성덕정은 군사 훈련을 했던 곳이라 다리 부근에서
제왕이나 귀족들,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살곶이의 유래가 되
지 않았을까 싶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성수동1가


▲  살곶이다리의 옛 모습 (다리 남쪽 둑방길 터널에 있음)
저때 중랑천은 딱 살곶이다리 길이에 맞게 흘러갔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내부순환로
중랑천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서식하는 도봉동이 나온다.
그래서 무척 반가운 하천이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성동교와 2호선 철교

▲  늦가을에 물씬 잠긴 중랑천 둑방길

살곶이다리를 건너 중랑천 남쪽에 길게 둘러진 둑방길로 들어섰다. 이 둑방은 성동교에서 송
정동주민센터 부근까지 이어져 있는데, 둑방 위에 산책로를 닦고 긴 생머리의 버드나무와 여
러 나무를 심었다.
늦가을이라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둑방 주변을 마치 네온사인마냥 화사하게
물들였다.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①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②

▲  둑방길 옆에 짧게 펼쳐진 은행나무 숲길
황금색 은행잎이 우수수 내려앉아 우울한 2글자 '낙엽'이란 이름으로
귀를 접고 누워있다.

▲  중랑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동부간선도로
중랑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너머가 송정동(松亭洞) 북부이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긴 산줄기는 고구려 유적의 성지인 아차산~용마산 산줄기이다.

둑방길을 끝으로 봄의 응봉산+늦가을 살곶이다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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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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