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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웃대) 나들이 ~~~ 필운대(백사 이항복집터), 배화여고 본관과 생활관, 홍건익가옥, 월암동



' 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를 찾아서 ~~~ (필운대, 월암동) '

필운동 홍건익가옥
▲  필운동 홍건익가옥

배화여고 본관 필운대 바위글씨

▲  배화여고 본관

▲  필운대 바위글씨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인 서촌(西村, 웃대)은 인왕산(仁王山) 그늘인 경복궁 서쪽과
경희궁(慶熙宮) 주변 지역을 일컫는다. 원래 서촌은 서대문과 경희궁 주변, 웃대는 경복
궁 서쪽 지역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거의 합쳐졌고, 요즘은 경복궁 서쪽 지역
을 주로 일컫는다.
북촌(북촌한옥마을)과 부암동,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각산), 호암산 등에 분산된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으로 지겹도록 발걸음을 했으나 그 넓지 않은 동네에 미답처
(未踏處)가 일부 고개를 들고 있다. 하여 그 미답지를 지우고자 여름의 뜨거운 한복판인
7월의 끝 무렵, 오랜만에 서촌(웃대)에 발을 들였다.

서촌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사직단(社稷壇) 뒤쪽에 위치한 배화여고(배화여자대학)를 찾
았다. 그곳에는 필운대 바위글씨와 근대 건축물이 여럿 있는데 근대 건축물은 예전에 싹
인연을 지었으나 필운대는 아직 인연이 닿지 못했다.



 

♠  필운대와 배화여고의 옛 건물들

▲  필운대(弼雲臺) 바위글씨 주변

배화여고 별관 뒤쪽 바위에 '필운대' 바위글씨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이곳은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집이 있던 곳으로 원래는 행주대첩의 영웅인 권율(
權慄)장군의 별서(別墅, 별장)였으나 이항복이 그의 딸에게 장가를 든 인연으로 상속을 받았
다. <권율의 집은 근처 행촌동(杏村洞)에 있었음>

이항복은 이곳을 '필운대'라 이름 짓고 지인들과 팔자 좋게 시회(詩會)를 즐겼다. 여기서 필
운(弼雲)은 그의 호(백사, 필운, 오성) 중 하나이자 인왕산(仁王山)의 별칭이다.
1616년 광해군(光海君)은 배화여고 일대를 중심으로 크게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는데 필운대
는 그 후원으로 편입되었으며, 궁궐의 규모는 창덕궁과 예전 경복궁보다 훨씬 컸다고 전한다.
광해군의 야망이 듬뿍 담겼던 인경궁은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이후 팔자가 180도 바뀌
어 창덕궁 건물 복원에 적지 않게 동원되었으며, 이후로도 궁궐이나 관청 건물을 중수, 복원
하거나 신축할 때마다 이곳 건물을 뜯어가면서 17세기 중반에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1813년(또는 1873년)에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외 9명이 필운대 바위에 이름을 남겼는데
이는 옛날에 사라진(인경궁 건설 때 철거된 것으로 보임) 이항복의 옛집 건립과 관련된 것으
로 여겨지며, 1889년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 이유원(月城 李裕元)이 이곳을 찾아와 느낀 바를
시로 남겼다. (바위에 새겨져 있음)
필운대 주변은 살구나무가 많고 풍경이 고와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았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도 이곳 경치에 퐁당 빠져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君歌我嘯上雲臺 - 그대는 노랫가락 읊조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필운대에 오르니
李白桃紅萬樹開 - 오얏꽃 복사꽃 울긋불긋 나무 가득 피었구나
如此風光如此樂 - 이런 좋은 경치에 이 즐거움 또한 멋지니
年年長醉太平盃 - 세세년년 태평 술잔 가득 마시고 취하리라


▲  지금도 또렷한 필운대 바위글씨의 위엄

바위에 진하게 서린 '필운대' 바위글씨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항복이 썼다고 전하
나 실은 이유원이 쓴 것으로 여겨지며 필체가 선명하여 이곳의 옛 이름과 이항복의 유적임을
아련히 알려준다.
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으나 이미 죽은 상태이며. 바위 윗쪽에는 배화여고에서 씌워놓은 테니
스장 석축으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그리고 글씨 옆에는 이유원과 박효관이 남긴 바위글
씨가 덤으로 달려있어 필운대의 옛 명성을 살짝 속삭여준다.

필운대 바위글씨는 '필운대'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백사 이항복 집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9호)'로 이름이 갈렸다. 허나 바위글씨와 글씨가 안긴 바위만 있을 뿐,
집터 흔적은 완전히 말라버려 주춧돌 조차 찾아볼 수 없다.


▲  이유원이 남긴 글씨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은 1889년 이곳을 찾아 그 소감을 시로 지어 바위에 남겼다. 시를 통
해 그 시절에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지금은 바위 앞에 학
교 건물이 있고 주변도 매우 어수선하다. 게다가 바위 또한 세월에 많이도 지쳤을까? 가끔씩
돌이 떨어지는지 '낙석주의' 푯말까지 달려있어 세월의 부질없는 흐름을 느끼게 한다.

我祖舊居後裔尋 - 내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蒼松石壁白雲深 - 푸른 소나무와 바위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겼다
遺風不盡百年久 -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해오니
父老衣冠古亦今 -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

癸酉月城李裕元題 - 계유년 월성 이유원 지음
白沙先生弼雲臺 - 백사 이항복 선생 필운대


▲  박효관 등이 남긴 글씨

이곳을 거쳐갔던 동추(同樞) 박효관 등 9명의 이름이 하얗게 쓰여져 있다. 1813년(또는 1873
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항복 옛집 건립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은행나무 그늘에 닦여진 배화학당(培花學堂)의 역사들
배화학당의 창시자 '조세핀 필 캠벨'의 흉상(가운데)과 리드(Dr. C.F. Reid)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비(왼쪽), 그리고 2007년에 세워진 배화학당 창립 110주년 및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비(오른쪽)


필운대와 인경궁 옛터에는 배화학당의 역사를 이어받은 배화여고와 배화여중, 배화여자대학이
한 덩어리가 되어 들어앉아있다. 대학과 여중, 여고, 거기에 유치원까지 한 울타리 안에 담긴
흔치 않은 현장으로 여중은 교내 북쪽, 여고는 교내 한복판, 그리고 나머지는 대학이 채우고
있는데, 이화학당(梨花學堂)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제일 오래된 신식학교이자 여학교로 그 내력
의 실타리를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배화학당을 세운 사람은 미국 텍사스에서 건너온 남감리교 소속 여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밸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이다. 그는 이 땅을 찾은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
1897년에 입국, 그들의 목적인 기독교 영업을 위해 조선 여인들의 교육 계몽을 벌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몸을 담았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학생들에게 선교 기금을 받아 경복궁 인근
내자동(內資洞)에 땅을 구입해 '캐롤라이나 학당'을 세우니 그것이 배화학당의 시작이다.

학교를 열자 청나라 여선교사 도라유의 도움으로 2명의 여자 아이와 3명의 남자 아이를 간신
히 모집해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여자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기
숙사를 두어 먹이고 재웠으며 국어와 한문, 성경 등을 가르쳤다.
1902년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늘어났으며,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
부에서 경비를 지원해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증축했고,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했다. 1909년 고
등과를 설치했으며, 1910년 4월 배화학당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때 초대 교장대리로 니콜스
(Nicolls) 여사가 취임했으며 4년제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했다.
1910년 5월 16일 고등과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친히 축사
를 내려 그들의 졸업을 치하했으며, 그 축사는 윤치호(尹致昊)가 대독했다.

1914년 왜인 교사의 왜어(倭語) 수업을 거부했으며, 1916년 1월에 지금의 자리로 학교를 옮겨
1915년에 미리 지은 과학관 건물에 보통과/고등과/유치원을 넣었다. 이때 3년제 고등과를 4년
제로 개편하였으며, 강원도 홍천(洪川)에서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던 남궁억(南宮檍)이
1910년 10월부터 8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는 교가를 작사하고 학생들에게 무궁화 13송이로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하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학생들은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했는데, 이
는 남궁억 선생의 영향이 컸던 탓이다. 그리고 1920년에 기숙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여 많은 교
사와 학생이 왜정(倭政)에 잡혀갔다.

1922년 4년제 보통과를 6년제로 바꾸고 대학 예과를 설치했으나 이듬해 폐지했으며, 1924년에
새로 교가를 지었는데 친일파로 더러운 뒷끝을 보였던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노래 가사
를 쓰고, 교사인 루비 리가 작곡을 했다.
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으며, 1926년 캠벨기념관을 신축해 고등과가 이전
했다. 1929년 11월 광주(光州) 학생운동이 터지자 격문(檄文)을 붙이는 등, 만세운동에 동참
하여 왜정의 염통을 잠시 쫄깃하게 만들었으며, 1938년 3월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소학
교로 명칭을 갈았다.
1940년 왜정의 신사(神社) 참배 강요에 선교사들이 반발하여 모두 그들 나라로 돌아가자 경영
난으로 크게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교사 이덕봉과 이만규가 학교를 구할 사람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독지가인 이민천(李閔天)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춘천과 이천, 연기(세종)
, 익산 등지의 전답과 대지 32만평을 쿨하게 기부했던 것이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변경했으며, 1944년 7월 왜군 통신부대가 캠벨
기념관을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학생을 종로국민학교로 보냈으며, 1946년 4월, 6
년제로 개편하고 배화여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허나 1950년 6.25가 터지면서 학교는 부
산(釜山) 초량동으로 내려가 임시 교사를 마련해 운영했으며, 서울 학교는 폭격으로 상당수가
손상되고 말았다.
1951년 5월, 교육법 개정으로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개편했으며, 1977년 배화여자대학을 설
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배화학당 초창기 시절, 이화학당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워낙 남녀유별이 심하다보니 여학생
교육을 모두 여선교사들이 맡아서 했다. 단 한문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는 선생이 여학생을 마주 보며 가르치지 않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거나 선생과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을 했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되는
일이다.


▲  배화여고 캠벨기념관(본관) - 국가 등록문화재 673호

배화여고에는 오랜 내력에 걸맞게 붉은 피부를 지닌 근대 건축물이 3동이 전하고 있다. 그들
은 본관과 생활관, 과학관으로 이중 생활관이 제일 먼저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었고 나
머지 2동은 뒤늦게 2017년 1월에 그 지위를 받았다.

본관(本館)으로 쓰이는 캠벨기념관은 1926년 12월 7일, 캠벨을 기리고자 세운 지상 4층(지붕
층 포함) 건물이다. 1944년 왜군 통신부대가 점거해 사용하기도 했으며 6.25 때 반파된 것을
보수했다.
1977년 대규모의 보수를 벌였으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실내공간을 밝게하고자 창
호를 넓게 구성하고 철근콘크리트 상인방(上引枋)을 사용하는 등, 건립 당시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과학관과 더불어 이 땅의 20세기 초반 근대교육 관련 유적으로 가
치가 높다. 현재는 학교 도서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  캠벨기념관(본관)의 육중한 뒷모습

▲  배화여고 생활관 - 국가 등록문화재 93호

본관 동쪽 경사진 곳에는 생활관이 있다. 그는 20세기 초반(1916년 정도로 여겨짐)에 선교사
숙소로 지어진 것으로 선교사 대부분이 미대륙 출신이라 그럴까? 건물도 그들의 고향인 미대
륙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윌슨 선교사가 집으로 사용했다가 1971년 배화여고에 기증하면서 배화여고 생
활관 및 동창회관으로 쓰이고 있다. (주로 생활관으로 쓰임)

반지하+2층 규모의 건물로 반지하는 완전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거의 3층이나 다름 없다. 건
물 현관은 1층에 있으며 반지하는 비록 노출되어 있긴 하나 현관을 거쳐 내려가야 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덮었으며, 건물 내부에는 홀과 계단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건물의 겉모습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붉은 벽돌을 사용했는데 지붕은 흥미롭게도 한옥의 기
와지붕을 취했다. 그래서 서양식과 우리식이 조화를 이룬 건물로 지붕에는 2개의 붉은 굴뚝을
세워 연기로 하늘을 찌른다. 허나 난방 방식도 이미 바뀐 상태라 이제는 무늬만 굴뚝이 되어
모락모락 연기를 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생활관의 뒷모습

▲  생활관의 옆모습


▲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배화여고 과학관) - 국가 등록문화재 672호

생활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북악산 방향) 다소 빛이 바랜 붉은 피부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그가 교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라는 과학관이다.
 
배화학당이 이곳에 안착했던 1915년에 2층 규모로 지어진 것으로 1922년 3층과 지붕층(4층)까
지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초반에 보통과와 고등과, 유치원이 같이 사용하다
가 1926년 본관이 지어지면서 고등과가 빠졌으며, 현재는 과학관으로 쓰이고 있다.
앞과 뒤쪽에 출입구와 계단을 두고 그 양쪽에 교실을 배치했으며, 건물 이름은 과학관이나 배
화학당 초창기 이름인 '캐롤라이나'를 따서 '배화학원 캐롤라이나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유치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는 남쪽 회화나무

과학관 동쪽에는 배화여자대학에 딸린 유치원이 있는데 그 북쪽과 남쪽에 훤칠한 외모를 지닌
회화나무 2그루가 사이 좋게 유치원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남쪽 나무는 200년 정도 되었다
고 하며 북쪽 나무는 3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21m, 둘레 4.3m이다.
이들 회화나무 형제는 적당한 연륜을 지니고 있어 서울시 보호수의 자격이 충분하나 어찌된
일인지 북쪽 것만 그보다 말단인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들에
게 인간이 달아주는 한낱 훈장이나 지위 따위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매일 유치원 어린이들이
그의 그늘에서 재롱을 피우며 커가는 모습을 보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것만큼 재
미있고 행복한 볼거리가 또 어디있겠는가.

* 필운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 배화여고 생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12 (배화여고 ☎ 02-724-0300)


▲  유치원 북쪽 회화나무 -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2013-60호



 

♠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를 꿈꾸는 필운동 홍건익(洪建翊) 가옥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3호

▲  후원에서 바라본 홍건익가옥

배화여고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경복궁역 쪽으로 내려가니 왼쪽(북쪽)에 커다란 한옥 대문이
손짓을 한다. 현대식 주택 사이에서 고풍스런 모습을 드러낸 그곳은 서촌의 새로운 꿀단지로
떠오르고 있는 개량 한옥, 홍건익가옥이다.

이 한옥은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홍건익이 1936년에 지은 것으로 대
지 740.5㎡에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등 5동의 집을 낮은 구릉을 따라 자연스럽
게 배치했다. 서울에 오래된 한옥이 즐비하나 후원에 무려 일각문(一角門)과 우물, 빙고(氷庫
)까지 갖춘 곳은 이곳이 유일해 홍건익 일가의 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역시 세상은 돈이
많고 봐야됨)

전통 한옥의 구성과 근대 개량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안채 대청마루 풍혈판에 새
겨진 팔괘 문양, 별채 화초벽에 태극 문양, 이화꽃 문양, 연꽃 문양 등의 장식용 문양도 곳곳
에 남아있다.
허나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그로 인한 관리소홀로 그 아름답던 집은 거의 폐가 수준으로 쇠
퇴했으며, 증축되거나 변형된 부분도 조금 있었다. 허나 전체적으로 건축 당시의 기본 구조
및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며 서울시가 매입해 지방문화재로 삼으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꼴
은 면하게 되었다.
이후 복원공사를 벌여 2015년에 마무리가 되었으나 내부 손질로 2017년 7월에 임시 개방되었
으며 그해 9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너무 새집처럼 변해버린 면도 있으나 인근에 있는 이상
범(李象範) 가옥(☞ 관련글 보기)과 더불어 마음 놓고 두 발을 들일 수 있는 서촌(웃대)의 몇
없는 옛 한옥이며 서촌 관광 안내 및 사랑방,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점차 그 역할과 기
능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  활짝 열린 홍건익가옥 솟을대문
대문 동남쪽에 빌라가 바짝 붙어있어 대문 앞 시야가 좀 답답해 보인다. 게다가
주택들에게 꽁꽁 감싸여있어 담장은 전통식으로 재현하지 못했다.

▲  솟을대문과 대문채 (안쪽 모습)

▲  안채와 안채 대문

안채는 방과 누마루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종종 특별전 같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
으며 내부 관람도 가능하다.
안채 동남쪽에는 행랑채가 있는데 이곳은 관리
사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그 옆에 작게 화장실
이 닦여져 있다.

◀  안채 안쪽

▲  열린 공간으로 거듭난 사랑채

▲  새집처럼 손질된 사랑채 내부 ①


▲  새집처럼 정비된 사랑채 내부 ②

사랑채와 안채 내부에 진열된 가구와 서적들은 홍건익 일가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 둔 장식용으로 안채와 사랑채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관람하면 되며 나의 꼬질꼬질한 두 발을 들이기가 너무 미안할 정도로 방과 마루
가 산뜻하게 손질되어 있다.


▲  쉼터와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는 사랑채 마루
이런 곳에서 낮잠 한숨 청하거나 곡차 1잔 들이키면 정말 예술일 것 같다.

           ◀  무늬만 남은 우물
옛날에는 인왕산이 베푼 물로 넘쳐났겠지만 이
제는 그 명이 끊겨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그
러니 우물 뚜껑도 더 이상 열릴 일이 없다.

       ◀  홍건익가옥의 특별함, 별채
사랑채 뒤쪽에 자리한 별채는 여기서 나름 별
장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별채까지 둔 한옥은
별로 없는 편으로 집주인은 여기서 속세살이에
지친 심신을 다독거리거나 독서 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렸을 것이다.

▲  후원으로 인도하는 기와문(일각문)

▲  현대식으로 손질된 후원

가옥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조촐하게 후원이 닦여져 있다. 지금의 후원은 2015년
이후에 손질된 것이라 옛 모습은 거의 잃은 상태로 나무와 화초, 의자 등이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에 올라서면 가옥 경내가 훤히 두 눈에 들어오는데 집 주위로 키다리 빌라가 잔뜩 들어서
있어 은근히 좁아 보인다. 그래도 이 정도의 한옥을 건진 것이 어디랴.

          ◀  후원 뒷쪽 문 (후문)
후원 동쪽(뒷쪽)에 기와문이 있는데 그 문을
나가면 바로 환경운동연합 뜨락이다. 그 뜨락
을 통해 서촌의 주요 간선길인 필운대로와 연
결되며, 이 문을 통해 홍건익가옥으로 들어서
도 된다.


▲  필운동 회화나무 -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2013-92호

환경운동연합 뜨락에 4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가 두텁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홍건익가옥
돌담 바로 옆에 있어 가옥에도 아낌없이 그늘을 베풀고 있는데 높이 13m, 둘레 420cm로 그의
덩치와 연륜으로 보아 서울시 보호수로 삼아도 충분해 보인다. 허나 배화여자대학 유치원 주
변에 있는 회화나무처럼 말단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 등급 선정 기준에 그저 고개만 갸우뚱거
린다.


▲  대문을 걸어잠구며 휴식에 들어간 홍건익가옥 (18시 폐장시간)

* 홍건익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88-1 (필운대로1길 14-4, ☎ 02-735-1374)



 

♠  서촌 끝자락에 숨겨진 늙은 바위글씨, 월암동(月巖洞)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  월암동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

홍건익가옥을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미답처 하나를 더 지우기로 했다. 그렇
게 욕심을 부려 찾아간 곳은 송월동(松月洞)에 있는 월암동 바위글씨로 홍건익가옥에서 도보
20분 거리이다. (사직터널 고개를 넘어가야 됨)

월암동 바위글씨는 재개발로 회색빛 아파트 세상으로 강제 개조된 돈의문뉴타운 동쪽 길(송월
길) 바위에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서대문(돈의문) 바로 서쪽이자 한양도성 서쪽 바깥으로 바
위글씨가 깃든 바위는 딱 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하여 도성 밖 경승지로 바쁜 세월을 살
았던 듯 싶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바위 위쪽에 바람직하지 않게 석축을 씌워 길(송월
1길)을 냈으며, 바위 주변으로 집들이 빽빽히 들어서고 심지어 바위글씨 앞까지 집이 들어차
그를 만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다가 재개발로 도성 밖 송월동 지역을 밀어버리면서 그를 덮던 모든 것들이 싹 걷어졌다.
바위 역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목이 떨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험한
꼴은 면했으며, 바위 앞 아파트가 완성되고 주변이 정비되면서 마음 편히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  월암동 바위글씨의 위엄

이 바위글씨는 누가 썼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허나 그 필치(筆致)로 보아 명/청나라의 장필과
미불의 글씨가 유행했던 조선 중/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결구가 치밀하고 품격이 고고한 글씨
로 1656년에 작성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도 이곳 지명이 확인되고 있어 서울 장안의 옛
지명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재개발 덕에 바위 앞은 확 트였으나 바위 위쪽에 석축과 도로가 족쇄처럼 자리하여 보기에도
참 딱하다. 서울에는 개발의 칼질로 고통받는 옛 경승지와 문화유산이 너무나 많은데 이는 오
로지 개발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개발이 그들에게 씌운 굴레를 싹 제
거해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허나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참고로 이곳 주변에는 친일 음악가로 더러운 뒷끝을 보인 홍난파(洪蘭坡)가옥을 비롯해 권율
장군 집터를 지키는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딜쿠샤, 한양도성,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국립기상박물관 등의 명소들이 깃들여져 있으니 그들도 적당히 후식거리로 둘러보면 정말 배
부른 나들이, 답사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서촌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막을 내린다.

* 월암동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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