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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덕수궁돌담길 역사 산책



' 서울 도심의 한복판, 정동~덕수궁돌담길
늦가을 산책 '
덕수궁돌담길
▲  덕수궁돌담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칭송을 받는 곳으로 덕수궁돌담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정동의 대표 명소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德壽宮, 경운궁)을 핵심으로 구 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 대법
원 청사(서울시립미술관), 구 신아일보 별관, 성공회 서울성당, 구세군중앙회관, 배재학
당 동관, 구 미국공사관 등의 근대문화유산이 풍부히 깃들여져 있으며, 국립 정동극장과
서울시립미술관, 이화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등의 문화, 전시 공간도 듬뿍 담겨져
있다. (국립정동극장을 제외하고 모두 기존의 근대 건축물을 활용하고 있음)
그 외에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유관순 우물 등의 문화유산이 있어 정동이 오
랜 시대를 풍미했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영국, 러시아, 미국, 캐나다, 뉴질랜
드 대사관 등 외국 공관도 많이 산재해 있어 외교 1번지로도 통한다.

비록 도심의 한복판이나 회색빛 가득한 시청과 광화문, 종로 주변과 달리 번잡함이 조금
덜하며 나무를 머금은 공간이 많아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현대와 근
대,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600년에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그윽하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오랫동안 서울 사람들의 산책, 나들이 명소로 격한 사
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한 이곳을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종종 재활용을 하고 있다.

정동은 조선 개국(開國) 시절부터 요란하게 꿈틀거렸던 현장이다. 조선 최초의 릉(陵)인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그 정릉을 지키
고자 조선 최초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가 그 곁에 지어졌다. 정동이란 이름은 바
로 정릉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나 권력 다툼으로 정릉은 도성 밖 정릉동(貞陵洞)으로 추
방되어 잊혀진 능이 되었고, 흥천사 또한 유생들에게 아작이 나면서 알짜배기 땅에서 방
을 빼야 했다. (지금은 성북구 돈암동에 있음)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동에 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임진왜
란 이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行宮)>이 되었으며, 조금씩 별궁(別宮)으로 몸집을 불려
가다가 1897년 대한제국의 중심 황궁(皇宮)으로 크게 거듭나게 된다. 그 궁궐이 바로 덕
수궁<경운궁(慶運宮)>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3배 이상의 크기로 정동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동은 조선(대한제국)의 정치, 행정의 1번지이자 제왕이 사는 곳으로 매우 중
요시되었다. <'정동은 황궁과 가까이 있어 만백성이 우러러 보는 지역'이라며 강조했음>

또한 정동은 19세기 후반, 많은 양이(洋夷)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그들은 서울에 들어와
주로 정동에 서식했는데, 외교관과 군인, 그 가족들, 종교인, 사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
으며, 집과 학교, 성당, 교회, 호텔, 공사관 등을 지었다. 바로 여기서 이 땅의 근대 교
육이 시작되었고, 천주교와 기독교 등 여러 서양 종교들이 정동에 본거지를 세워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 인연으로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어 정동길과 덕수궁돌담길만 어슬렁 거려도 근
대사의 주요 부분과 구한말(舊韓末) 건축 양식을 거의 다 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늦가을을 맞이하여 간만에 정동을 찾았는데, 이번에 찾은 정동의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
씩 복습을 했던 곳이다. 허나 복습이란 예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 많이 할수록 좋다.



 

1.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구 신아일보 별관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정동 나들이는 시청역(1,2호선)이나 정동사거리(5호선 서대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번에는 정동사거리에서 첫 발을 떼어 정동길로 들어섰는데 그 길을 3~
4분 정도 가면 야무지게 자라난 회화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
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4대문 안)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500년 이상 제
자리를 지키며 정동의 숱한 변화를 지켜본 유일한 산증인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
무로 성장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
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樹勢)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
축했는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어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릉과 흥천사부터 600년 동안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켜왔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매일 먹고 자라는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늙은 건물인 심슨기념관
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으며, 그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일요일과 공휴일은 문을 닫아걸고 쉬므로 토요일과 평
일에 찾아야 됨)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재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
평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당시 장안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다. 허나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의 흉상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하였다. 허나 그 건물은 6.25 때 파괴되었으며, 1970년에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이 세워졌다. 옛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이 자리를 지킨다.

1899년 5월에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여학생의 꽃구경은 500년에 처음이
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그들의 소풍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말았다.
그의 묘는 이태원(梨泰院)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그 묘지가 망우리 공동묘지(현재 망우리공원)
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왜정(倭政)이 고의적으로 그의 시신과 무덤을
없앴을 것이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봉한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하나 있다. 서울에 몇 남지 않
은 조선시대 우물로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나 빨래를 했다고 하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
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그리고 우수수
은행잎을 털어내는 노란 은행나무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이후 지금
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어느 졸업생의 흔쾌한 후원금으
로 팔작지붕 기와문으로 교체했으며,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
용하여 초기 모습으로 복원했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
다 작은 비석이 우두커니 서있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
고종)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특별한 학교였던 것이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32-1 (정동길26, ☎ 02-21
  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하마비 사진을 클릭한다.

◀  이화학당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사주문 옆 하마비의 위엄


▲  구 신아일보 별관(新亞日報 別館) - 국가 등록문화재 402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시청 방향으로 1분 정도 가면 왼쪽(북쪽)에 붉은 피부의 큰 건물이 마중
을 한다.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건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쉽지만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
역시 고색이 깃든 건물임을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옛 신아일보의 별관으로 1930년대에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지금과 달리 지하 1
층, 지상 2층, 연면적 2,000.53㎡ 규모로 미국 업체인 싱거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로 쓰였다가 1969년 신아일보가 매입했다.

신아일보는 1965년 5월 장기봉(張基鳳)이 창간한 신문으로 처음부터 '상업신문'임을 내세웠다.
다른 수익사업을 병행하지 않고 오직 신문 수입으로 경영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신문사를 꾸렸
는데, 매일 8면의 지면을 제작해 신문계에서 '기적의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창간호(創刊
號)부터 다색도인쇄(多色度印刷)로 발행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다색도인쇄 신문으로 명성이 높
다.
독자투고란인 '세론(世論)'을 만들어 독자참여제도의 문을 열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종교란'
을 만들어 종교계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또한 '수도권백과','재계화제' 난을 신설하고 '농수
산소식','소비자 페이지','부부교실','부동산' 난을 만들어 생활경제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1975년 기존 건물에 크게 반하지 않는 선에서 4층까지 올리는 등,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으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강제로 경향신문에 통합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이후
2003년 같은 이름의 신아일보가 여의도에 문을 열었으나 예전 신아일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한때는 옛 신아일보의 뒤를 이었다고 내세웠으나 옛 신아일보를 세웠던 장기봉의 반발로 그
부분은 쏙 사라짐>

민간 건물 건축기법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일방향 장선 슬라브(One-
way Joist 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왜정 시절 건축구법과 구조 등이 잘 남아있어 근
대 건축기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1980년 신군부의 어거지성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언
론수난사의 현장으로 나름 가치가 있어서 국가등록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는 옛 신아일보를 추억하는 신아기념관으로 일부 쓰이고 있으며, 많은 회사들이 입주하여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 구 신아일보 별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8 (정동길 33, ☎ 02-777-9875)


▲  구 신아일보 별관의 정면 모습
정면에 보이는 붉은색 아치형 문은 지하로 이어지며, 그 위의 문은
건물의 현관이다.



 

2. 구 러시아공사관과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사주문 맞은편(북쪽)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로 하얀 피부의 날씬
한 건물이 두 망막에 들어올 것이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인 러시아
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豆滿江)과 간도를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흥
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
시아를 막아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에 이르러 러시아와 수교를
맺게 되는데, 그때 조선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내렸다. 러시
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그 땅에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
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 면에 출입문을 내고,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이는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불
렀기 때문이다.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라사'라고 했음> 전망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
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6.25시절에 탑을 제외한 나머
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탑 역시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주변에 자리한 여러
나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이후 모두 사라졌다가 2019년에 정동
공원에서 덕수궁돌담길(덕수궁길)을 잇는 통로가 일부 재현, 복원되어 '고종의길'이란 이름으
로 속세에 개방되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의 우
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국(倭國)이 저지른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고종은 왜를 불신하며 경복궁에
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
윤용(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는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尹致昊)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
과 을미개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그동안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
시로 폐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금했다.

▲  윤곽만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  러시아공사관 남쪽 정동공원에 있는
하얀 피부의 8각형 정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
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
들이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
여 아주 불편하게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갖은 편의를 제공했는데, 명성황후의 제단(
祭壇)까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내리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은 커지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끊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
면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모두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
대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년에
독특한 모습의 하얀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쓸데없이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전망탑 남쪽으로 약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다.

7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정동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덕수궁(경운궁) 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고색이 창연한 붉
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로
120년이 넘은 노구에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현재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공부방에서 비롯
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기
에 이른다.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이에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작업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어 다시 복원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 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
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롭게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내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도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양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
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린다.
(교회 사정과 행사에 따라 관람이 어려울 수도 있음)

* 정동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3. 정동의 백미, 덕수궁돌담길을 거닐다.

▲  덕수궁 서쪽 돌담길

덕수궁(경운궁) 대한문에서 정동교회까지 이어지는 덕수궁 남쪽 돌담길은 길을 거니는 사람들
로 늘 만원이다. 하지만 정동교회에서 미국대사관저 옆구리를 거쳐 덕수초교로 넘어가는 서쪽
돌담길은 전,의경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발길을 주저하게 된다. '이 무
거운 분위기는 뭘까?' 하고 말이다. 허나 그 길은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자유로운 길이니 안심
하고 거닐도록 하자~! 그곳이 돌담길의 백미와 같은 곳이다.

서쪽 돌담길 중간에는 야트막한 고개가 솟아있는데 이를 영성문(永成門) 고개라고 한다. 영성
문은 덕수궁 북쪽 구역 문으로 새문안길(서대문~광화문을 잇는 도로) 부근에 있었다. 대한문
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운 문이었는데 덕수궁에서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 영국공사관과
이어져 '외교의 문'으로 통하기도 했다.
허나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이 왜정과 짜고 영성문 안쪽의 부지를 왜인(倭人)에게 팔아 막
대한 이득을 취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 사건에 크게 뚜껑이 열려 1919년 11월 22일에 적은
그의 일기(윤치호일기)에서
'이 비열한 매국노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
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나중에 윤치호도 친일파 떨거지로 변함)

고종이 세상을 뜨기가 무섭게 왜정은 1920년 2월 영성문과 선원전 일대를 철거했다. 이때 영
성문에서 정동교회로 이어지는 언덕을 깎으면서 서쪽 돌담길이 뚫렸는데, 이를 영성문고개라
불렀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잊혀진 상태라 그저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로 묻혀져 있다.

▲  호젓하게 펼쳐진 덕수궁 서쪽 돌담길

▲  덕수궁 서쪽 돌담길 (영성문고개)

동쪽의 덕수궁 돌담과 서쪽의 미국대사관저의 높다란 담장 사이로 놓여진 서쪽 돌담길, 좌우
담장 안에는 나무들이 서로 경쟁에 들어간 듯, 앞다투어 담장 밖으로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도심 한복판임에도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차분하며 고즈넉한 궁궐
돌담길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정말 100점짜리 산책로이다.

고갯길이 뚫린 1920년대 이후 이곳은 젊은 남녀들이 남의 이목을 피해 데이트를 즐기던 곳으
로 '사랑의 언덕길'로 통했다. 허나 1950년대 이후 그 명칭도 슬쩍 사라졌으나 여전히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항간에서는 돌담길을 거닐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1973년
가수 진송남이 부른 '덕수궁 돌담길'이란 노래<한산도 작곡, 정두수 작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로는 작사자인 정두수가 실연을 당하고 비오는 날, 홀로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고 집에 돌아와 자기 심정을 노래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법원이 돌담길 남쪽인 현재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 있어서 부부가 이혼하러 오는 길
이라 하여 연인들이 발길을 꺼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세상풍파를 타면서 헤어지는 길로 오
해를 받게된 것이다. 그러니 돌담길이 섭하지 않도록 그런 속설은 신뢰하지 말자~~!

이렇게 호젓하고 아름다운 돌담길이건만 길 곳곳에 전/의경들이 배치되어 지나가는 사람과 차
량을 지켜보고 있으며, 미국대사관저의 건방지게 높은 담장은 이곳의 옥의 티로 이 땅의 우울
한 현실이 여실히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위엄을 날렸던 덕수궁(경운궁)의 일부였건만 지금은 왕년의 1/3 이
하로 줄어들었으며, 반면 미국의 관할인 미국대사관저는 덕수궁 담장보다 더 높아 망국의 황
궁을 짓누른다. 게다가 그것들이 들어앉은 곳도 덕수궁의 잃어버린 옛 땅이다. 반드시 되찾아
복원시켜야 될 땅인 것이다. 하지만 그 옥의 티는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아마도 지우기 힘들
것 같다.
돌담길을 사진에 담을 때는 미국대사관저 방향은 너무 대놓고 찍지 말기 바란다. (찍으면 제
지를 당할 수 있음) 단 덕수궁 쪽이나 돌담길의 한복판은 간섭을 받지 않는다.


▲  덕수궁의 서쪽 문인 평성문(平成門)

평성문은 덕수궁 중심지(중화전, 함녕전)에서 궁궐 외곽인 중명전 구역과 선원전(璿源殿) 구
역을 이어주던 문이다. 허나 그 구역이 대부분 아작나면서<중명전만 살아남았음> 이제는 덕수
궁의 서쪽 문이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뒷문 신세가 되었다. 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관
람객은 출입할 수 없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영성문고개
왼쪽이 옛 덕수궁 땅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대사관저이고, 오른쪽이 망국의 황궁인
덕수궁(경운궁)이다. 이곳은 서양 스타일로 지어진 2층짜리 돈덕전(惇德殿)
구역으로 지금은 고갯길로 변해버렸다.

▲  영성문고개 돌담길 (정동 방향)

▲  옛 선원전터를 홀로 지키고 선 200년 묵은 회화나무

영성문고개를 지나면 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세군 중앙회관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서쪽
담장 너머로 아주 너른 공터가 박혀 있는데, 공터 한복판에 그 허전함을 달래려는 듯, 2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가 홀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덕수궁의 옛 땅이자 옛 경기여고 자리로 미
국대사관이 점유하고 있다가 지금은 서울시가 소유하고 있다.
미국 양이들은 2004년 이곳에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를 짓겠다며 한바탕 난리를 부린 적이 있
었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덕수궁(경운궁) 훼손을 막고자 반대 시위를 벌여 숙소 건축은 보기
좋게 좌절시켰으며, 서울시가 이곳을 살펴본 결과 1897년에 지어진 선원전, 흥복전(興福殿)터
임이 밝혀졌다.
선원전은 고종이 역대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자 지은 것으로 왜정 때 파괴되었으며 그
어진들은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그리고 선원전 자리에는 경기여고
가 들어섰다. <현재 경기여고는 개포동에 가 있음>

서울시는 이곳을 해방시켜 덕수궁 복원에 쓸 계획인데, 발굴조사를 벌이는 등 진척이 조금 있
으나 계속 공터로 놀려두고 있다. 서울 도심에 이런 너른 공터가 놀고 있다니 그저 안따까울
따름인데, 예전에는 전/의경들이 공터로 넘어가는 문을 지키고 섰으나 요즘은 경계가 많이 풀
렸다.

이곳을 끝으로 늦가을에 깜짝 방문한 정동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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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4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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