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둘러보기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입구 (인물가벽 직전) |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인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맡고 있는 망우산은 서울 중랑구와
경기
도 구리시(九里市)에 걸쳐있는 뒷동산 같은 뫼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그의 품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는데, 그는 832,800㎡
에 덩치를 지닌 큰 공원이다. 지금이야 달달한 뒷동산공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그의
정체는
이름만 들어도 후덜덜한 망우리공동묘지(망우리묘지)였다.
망우리묘지는 서울의 유일한 공동
묘지로 망우리고개부터 망우산 남쪽 자락까지 7,400여 기의 무덤을 지니고 있는데, 망우리묘
지가
생겨난
사연과 내력은 대략 이렇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서울 주변에는 경성부(京城府, 서울시)가 관리하는 이태원(梨泰院
)과 미아동(彌阿洞,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다. 왜정은 미아리묘지 과부하에 대비하고 이태
원묘지 일대에 주택을 조성하고자 1933년 2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땅인 망우산 일대 임야
75만 평을 확보했는데, 그중 52만 평에 묘역을 닦기로 하고 그해 5월 27일 문을 여니 이것이
망우리묘지의 시작이다.
37,000여 기를 지닌 이태원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분산 이장되었는데, 연고자
가 있는 무덤은 망우리로, 연고자가 없는 28,000여 기는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으로 보내 화
장 처리하고 망우리묘지 북쪽에 합장하여 위령비를 세웠다. 그리고 1938년에는 신촌 노고산(
老姑山)에 있던 노고산공동묘지까지 이곳으로 옮기면서 망우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
었다.
왜정이 이렇게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닦은 것은 서울 시민들의 무덤 수요를 해결하고자 함이지
만 망우리고개 동북쪽에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인 동구릉(東九陵)의 기운을 유린하려는 사
악한 의도도 짙게 깔려있었다.
1971년 8월 7일 건설교통부고시 제465호로 공원 결정고시가 떨어졌으며, 1973년 3월 분묘 한
계치인 28,500여 기(봉분 47,754기)에 이르자 그해 5월부터 무덤 쓰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이
장과 납골을 적극 장려해 지금은 7,400여 기가 남았으며, 지금도 방을 빼는 무덤들이 꾸준하
여 계속 빈 자리가 늘고 있다.
1977년 4월 도시계획시설 공원으로 지정되어 망우묘지공원(망우공원)으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98년 8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그해 공원 산책로
인 사색의길(4.7km)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2005년 12월 27일 서울시고시
제2005-403호로 망우묘지공원 조성계획이 수립되었으며, 2013년
에 망우리묘지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망우리공원 인문학길을
조성했으며, 2020년 7월에는 공원 관리권이 서울시에서 중랑구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4
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새롭게 갈아 지금에 이른다.
비록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과 성격이 세탁되었으나 공동묘지의 기능과 성격은
여전히 녹
슬지 않았다. 하여 산 도처에서 무덤들이 너무나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
하여 무덤들을 포근히 감싸고 있으며, 사색의길 등 상큼한 숲길이 많고, 풍경도 예술이라 거
닐기에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무덤은 시각과 마음에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닌 대자연의 수
채화에
살짝 녹아든 존재처럼 다가와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두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명성이 높은 20세기 초/중기 애국지사와 문학가, 정
치인들의 무덤이 30여 기가 전하고 있고, 그중 9기가 국가 등록문화유산의 지위를 가지고 있
다.
그리고 너른 대륙을 경영했던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 4곳(시루봉 포함)이 전하고
있어
늙은 볼거리도 넉넉하다.
또한 서울둘레길4코스(화랑대역~깔딱고개 쉼터, 7.7km)가 사색의길 서쪽 길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가며, 중랑둘레길, 구리둘레길, 용마산자락길 등 다양한 숲길이 앞다투어 닦여져 있다.
산세도 거의 완만하고 조망도 일품이며, 볼거리도 풍부하여 걷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아니 지루할 틈도 주지 않는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 02-2094-
6800~6803)
* 망우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無緣墳墓合葬碑)와 합장분 |
망우역사문화공원 북쪽 시작점에는 이곳에 묻힌 유명 인사를 소개한
'인물가벽'이 있다. 여기
서 길은 동/서로 갈라지는데, 이들 모두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대표 숲길인
사색의길(망우순환
로, 4.7km)로 순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숲길도 거의 느긋하고 거닐기 좋게 포장길로
이루어
져 있어 이름 그대로 온갖 사색에 잠겨 거닐기에 아주 좋다.
사색의길 동쪽 길과 시루봉을 중심으로 일부 남아있는 미답처를 사냥하고자 동쪽 길로 들어섰
는데,
이때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간만에 들리라며 손짓을 한다. 하
여 그 손짓에 흔쾌히 응하니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가
마치 막 빚은 된장 같은 울퉁불퉁
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왜정 시절 경성부(서울)는 이태원공동묘지를 1935년부터 망우리와 미아리로 옮겨 1936년 4월
8일에 이장을 완료했는데, 그중 무연고 무덤으로 판명된 28,000여 기를 화장(火葬)하여 이곳
에 작은 봉분인 무연분묘(無緣墳墓)을 닦아 합장하고 세운 것이 이 합장비이다. |
▲ 이태원묘지 무연분묘와 유관순 분묘 합장표지비의 예전 모습 |
합장비
뒷쪽에는 무연고 28,000여 기를 압축하여 담은 아주 조그만 무덤이 있다. 이곳에 묻힌
무연고 망인(亡人) 중에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유관순(柳寬順) 누님도 있어 무덤 옆에 '유관
순열사 분묘 합장표지비'를
세워 그의 원통한 넋을 위로한다.
왜정의 가혹한 고문으로 숨진
유관순은 엄연히 가족이 있었으나 가족들까지 왜정의
감시를
받
다 보니 그의 장례에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무덤 관리는커녕 그
흔한 묘표도 두
지 못한 채, 방치되는 신세가 된다.
왜정은 이태원묘지를 정리하면서 눈에 가시와 같던 유관순
묘를 서둘러 파묘해 무연고 처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어서도 왜정의 뒷끝 작렬한 탄압으로 가족들의 손길 조차 받지 못했으
며, 심지어 유해까지 잃어버려 다른 이의 유골과 뒤섞여졌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
다. |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동쪽 구간 (노고산취장비 주변)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은
숲에 푹 묻힌 달달한 숲길로 길도 거의 느긋하고 걷기
좋게 포
장길로
이루어져 있어 이름 그대로 온갖 사색(思索)에 잠겨 거닐기에 딱 좋다. 게다가 20세기
초/중기 유명 인사의 무덤 대부분이 사색의길 주변에 포진해 있어 이 길을 중심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면 된다.
이들 무덤은 이정표가 닦여져 있고 무덤 주인에 대한 안내문도 대부분 갖추고 있으나 구석에
묻힌 몇몇 무덤은 가는 길이 복잡하거나 이정표가 부실하여 헤매기가 쉽다. 게다가 인지도가
낮은 인사의 몇몇 무덤은 안내문이 없는 등, 무덤 위치와 인물 인지도에 따라 엄연한 차등이
존재한다. |
▲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京西老姑山遷骨聚葬碑, 노고산취장비) |
이 비석은
1938년 9월, 경성(서울) 서쪽에 있던 신촌(新村) 노고산공동묘지(그때는 경기도 고
양군 땅이었음)를 망우리묘지로 모두 옮긴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
昌)
선생 등이 비문을 썼다. (비문 글씨는 모두 445자) |
▲ 늦가을에 깊이 잠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늦가을이 그린 상큼한 수채화 속에 나란 보잘것없는 존재를 넣어 그의 그림에
조그만 옥의 티가 되어본다.
▲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
바로 앞에 키다리 아파트가 즐비한 구리시 남부 지역이 펼쳐져 있고, 그 옆에 한강이
푸른 빛
깔을 도도히 비추며 흐르고 있다. 그 한강 너머로 강동구 강일지구와 하남 미사강변도시, 하
남 시내, 남양주 와부읍 지역이 서로 회색빛 아파트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그런 부질없는 현
장을 대자연이 빚은 검단산과 예봉산, 운길산(雲吉山) 등이 우려의 눈길로 지켜본다. |
▲ 월파 김상용(月坡 金尙鎔) 묘 |
월파 김상용(1902~1951)은
경기도 연천(漣川) 출신의 문인이다.
1917년 경성고보에 입학했으
나 3.1운동에 참여한 것 때문에 제적을 당했으며, 이후 보성고보에 들어가 1921년 졸업했다.
그리고 왜열도 릿쿄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1928년 이화여전 교수가 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 시절에는 강원도지사를 발령받기도 했으나 바로
그만두고 이화여대로 복귀
했으며, 1946년 미대륙으로 넘어가 보스턴대학에서
3년 동안 수학했다.
그리고 1949년 귀국하
여 이화여대 교수와 학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0년 서울 수복 이후 공보처 고문과 국영
코리
아타임스 사장을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며, 거기서 식중독으로 겨우 4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그는 우수와 동양적 체험이 깃든 관조적 경향의 서정시를 많이 썼는데 1939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망향(望鄕)'을 냈으며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대표작이다. 그리고 에드가알렌포의 '
애너벨리' 등의 영문시도 번역하여 이 땅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무덤은 작은 봉분과 검은
피부의 묘표가 전부인 소박한 모습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
▲ 망우산 중턱을 지나며 늦가을의 시정을 고루고루 뿌리는
사색의길 동쪽 구간
▲ 특이한 구조를 지닌 해관 오긍선 일가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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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묘 |
▲ 옆에서 바라본 오긍선 내외 묘 |
해관 오긍선(1878~1963)은 해주오씨 집안으로 충남 공주(公州)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와
내부주사를 지내다가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협성회와 독립협회, 만국공동회 간부로 활약
했다.
미국인 선교사의 제안으로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하고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
간 피부과를 전공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미국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의 자
격을 얻어 1908년에 귀국, 전북 군산(群山) 야소병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 봉사사업을
벌였다.
1909년 순종(純宗)은 그에게 전의(典醫)를 제안했으나 쿨하게 거절했으며, 군산에 영명중학교
를
설립해 교장직을 맡아 청소년 교육을 벌이는 한편 구암교회도 설립했다.
1910년 봄, 광주야소교병원장에 취임했고,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해 목포 정
명여학교 교장직도 겸임했으며, 1912년에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 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 전
문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취임했는데, 이는 한국인 교수로는 첫 등용이었다.
1916년 4월부터 1년 동안 왜열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교수로 피임되었으며, 1919년에는 경
성보육원을 설립해 고아양육사업까지 시작하니 그것이 이 땅에 첫 고아원이다.
1934년 2월에 에비슨교장 후임으로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는데,
이때 명
예이학박사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미국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 각각 받았다.
1942년 1월 왜정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임하고 보육사업에만 전념했으며, 광복 후에는 관계
진출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에 진력했다. 또한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
대한성서공회이사장, 기독청년회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내고, 구황실재산관
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서울특별시 시민보건위생공로감사장, 민간사회 분야 사회사업공
로표창, 대한의학협회 의학교육공로표창, 정부의 공익포장, 새싹회의 소파상 등을
수상했다.
1963년 사망 이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증되었으며, 그가 1919년에 세운 이 땅에 첫 고
아원인 경성보육원은 경기도 안양(安養)에
'좋은집'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오긍선과 그의 일가 묘는 흙으로 다진 이 땅의 흔한 동그란 봉분 대신 네모나게 다진 석축 위
에 검은 피부의 돌을 지붕처럼 낮게 얹힌 독특한 형태라 시선을 오래 붙잡게 한다. 그리 만든
사연은 잘 모르겠으나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소파 방정환 묘와 더불어 개성이 넘치는 이형(異
形) 무덤으로 무덤 앞에는 묘표(묘비)를 세워 무덤의 주인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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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묘 - 국가 등록문화유산 691-3호 |
어린이날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은 서울 당주동(唐珠洞)에서
태어났다. 1913년 선
린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 뒤에 중퇴했으며, 1917년에 비밀결사로서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했다.
천도교(天道敎)에 들어가 손병희(孫秉熙)의 3째 딸인 손용화와 혼인했으며, 1918년 보성전문
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신여자','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았다. 3.1운동 때는 손병희
밑에서 천도교
청년회의 회원으로 3.1운동 준비에 나섰고,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
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왜경에 붙잡혔으나 석방되었다.
3.1운동 이후 왜열도로 건너가 동양대학 문학과에 진학하여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으며,
1921년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존대말쓰기 운동
을 벌였다. 그리고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했다.
1923년에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그해 3월 20일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고
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만들어 5월 1일을 그날로 삼았다.
1924년 전국 소년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단체의 단합을 추진했으며, 잡지 '별건곤(別
乾坤)'과 '신여성'을 발간하고, 동화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회를 조
직했고, 1927년에 조선소년총연맹의 발족으로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일선에서 은퇴하여
강연회와 동화대회, 라디오 방송 등에서 주로 활동했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간 서울에서 세계아동 미술전람회를 개최했고, 1931년에 새로운 월간
잡지인 '혜성'을 발간했으나 지나친 과로로 그만 큰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만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벗들에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네' 유언을 남겼고,
'여보게 밖
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32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금 많이 사용하는 '어린이'란 이름은 소파가 만든 것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절까지 어린 아
이를 지칭하는 좋은 표현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날을 제정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으며, 그 짧은 인생을
어린이를 위해 쏟아부을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90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늦
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소파의 유골은 홍제동(弘濟洞)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그곳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 최신복(崔
信福, 1906~1945) 등이 모금 운동에 나서 현 자리에 무덤을 마련했다. 최신복은 소파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든 인물로 수원에 집안 묘역이 있음에도 자신의 부모 무덤을 소
파 묘 밑 왼쪽에 썼으며, 자신도 부인과 함께 그 밑에 묻혀 죽어서도 그와의 인연을
끈끈하게
이어가고
있다.
무덤은 흙 봉분 대신 특이하게 쑥돌을 다져 표석처럼 세웠는데, 앞서 해관 오긍선 묘처럼 망
우역사문화공원에서 꽤 개성파 무덤으로 꼽힌다. 비석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표석 앞
에는 견고한 돌덩어리의 묘비와 상석을 두었다. 또한 다른 무덤에 비해 헌화된 꽃들이 많아서
그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소파의 무덤은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방정환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음)
* 소파 방정환 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