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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왕산 선바위 (선바위의 뒷모습)

인왕산 남쪽 자락 150m 고지에 둥지를 튼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이다. 2개의 큰 돌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선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바위 뒷쪽이나 옆에

서 보면 비옷(우비)이나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

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상과학 만화나

오락실 오락을 많이 즐긴 사람이라면 이상한 형체의 괴물이나 새 대가리 괴물 등이 연상될 수도 있

을 것이며,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있다 보니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여 한밤중에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옛날에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인왕사가 밑에

들어온 이후에는 석불로 대우를 받으며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여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며, 마땅한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인왕사를

먹여살리는 든든한 후광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엄청나다.

 

이 바위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수록 온갖 감탄사가 나올 따름

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묘하게 생긴 바위가 많아 인왕산이 과연 바위의 산임

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선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머나먼 옛날부터 산악신앙 및 기자신앙의

성지이자 기복처(祈福處)로 바쁘게 살았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이 바위에 소원을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들 찾아와 기도를 했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다고 하여 돌을 문

질러서 붙인 자국이 꽤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이렇듯 바위 하나에 선바위,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무학대사의 상, 석불님, 관세음보살님, 양

주, 그리고 붙임바위까지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산악신앙과 기자신앙, 무속신앙, 거기에 불교

까지 다양한 성격을 지녀 그야말로 굶어죽을 일이 전혀 없는 팔방미인의 바위이다. 바위는 그 자리

에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를 피우며 이름과 성격을 붙이고 떠받드는 것이다. (그의 공

식 명칭은 '선바위'임)

 

2. 선바위의 깜찍한 뒷모습

판초의나 모자가 달린 옷을 입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것 같다.

 

3. 선바위의 앞모습

바위의 형상은 2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제단이 있으며 바위의 패인 부분에는 비둘기들이 머물고 있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쌀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있으니 비둘기에게 이만한 삶터가 없다. 늘 뷔페(?)를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곳에는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이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

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터를 부탁했다. 하여 무학은 천하를 뒤적거리다

가 지금의 서울 땅을 찾고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는 못

갈 팔자였다. 하여 선바위에게 나라의 수명 좀 연장시켜달라고 1,000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딱 망한 모양이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가 되

는 데에 무학대사와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

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정도전도 무학대사 못지 않게 신뢰하고 있

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침소로 들어와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었고 안쪽 부분에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이에 태조는 하늘의 뜻이라 여

기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

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징되는

불교 패거리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면서 유교가 그 위

를 점하게 되어 불교는 힘을 잃고 밀려나게 된다. 하여 억불숭유 정책으로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

하고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선바위는 민간신앙의 애뜻한 현장으로 백성

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들어와 불교까지 더해지면서 관세음보살, 석불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고, 국사당까지 밑에 들어와 무속신앙까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굿은 바위에서 하지 않고, 국사당이나 인근 골짜기에서 한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과 7월 칠석날, 그리고 영산재 때 바위에 제를 지내고 있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는 사람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는 조그만 건물이

있으며, 바위 주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렀다.

 

4. 선바위 입구에서 바라본 국사당

선바위 밑 인왕사 경내에 자리한 국사당은 조선 후기 건물이다.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기

부터 전해오던 신당(神堂)으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비롯해 여러 무속신(巫俗神)을 봉안하고 있

으며, 무학대사를 봉안한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이라 불리던 남

산 꼭대기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1396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여 서울을 지

키는 존재로 신성시 여겼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

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살아온 국사당은 왜정 시절 강제로 정든 곳을 떠나

야 했다. 1925년 왜정이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었는데,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

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라며 개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하여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

도를 하던 곳이며 명당 자리에 속하는 현 자리로 둥지를 옮겼다.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하 기초는 없다.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

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하러 온 이들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의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하여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 드

러나 있으며, 당시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국사당은 자주 굿이 열리는 편이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와 기도를 하는 사람도 많

으며,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

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며, 김명권이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하는 건물로 그가 당

주(堂主)라고 한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과 10월에 많이 열린

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

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는데, 이때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

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국가 민속문화유산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그림

에 담긴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부인, 호구아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신(軍雄大神), 금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

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무신도

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할 때 넘

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것을 받은 무

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시대 제천의식에 쓰인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기에, 나머지 16

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5. 동쪽 멀리서 바라본 선바위의 옆모습과 화사하게 피어난 개나리들

 

인왕산 선바위 서울 종로구 무악동 산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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