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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동 의릉


' 조선 왕릉 나들이, 석관동 의릉 '

▲  의릉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6월 한복판에 성북구 석관동(石串洞)에 자리한 의
릉을 찾았다.

의릉은 조선 왕릉의 하나로 서울에 있는 다른 조선 왕릉(헌릉과 인릉, 선릉과 정릉, 태
릉과 강릉, 연산군묘;)은 10번 이상 인연을 지었으나 의릉은 2~3번이 고작이다. 그러다
가 이른 무더위 탓인지, 하염없이 먹은 나이 탓인지 의릉에 갑자기 목마름이 생겨 토요
일 오후에 간만에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  의릉(懿陵) 입문

▲  활짝 열린 의릉 정문

의릉입구 정류장에서 서쪽으로 7~8분 정도 걸으면 의릉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정문 안에는
매표소가 자리해 나의 빈약한 호주머니를 노려보고 있는데, 그곳을 지나야만 의릉 경내로 들
어설 수가 있다. 정문 밖에서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陵寢) 공간이 상당수 시야에 들어오나
옛 중앙정보부 강당까지 싹 살펴볼 요량으로 왔기 때문에 기꺼이 입장료(1,000원)을 치루고
유료(有料)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의릉과 같은 구(성북구)에 사는 사람은 50%의 할인 혜택이 있어 성인은 500원에 들어
갈 수 있으며, (단 성북구에 주민등록이 되어있는 사람에 한함)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
막 주 수요일은 모두 무료이다.


▲  금천교(禁川橋)

정문을 들어서니 금천교란 돌다리가 바로 나타난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다리를 건
너면 홍살문과 정자각이 있는 능역(陵域)의 중심부로 이어지며, 다리를 외면하고 직진하면 산
책로이다.
다리 밑에는 천장산에서 발원한 조그만 계곡인 금천(禁川)이 동쪽을 향해 졸졸졸 흐르고 있다.
금천은 속세와 능역 중심부의 경계 역할을 하는 물줄기로 조선 왕릉은 능역 주위로 꼭 계곡을
끼게 하여 금천으로 삼는다. 이 계곡은 정문 직전에서 바로 생매장되어 어둠의 경로로 중랑천
으로 흘러간다.

능역의 관문인 금천교는 2003년 이후에 복원된 것으로 그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홍살문이 눈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모습을 비춘다. 정문에서 홍살문까지 겨우 100m 거리로 이는 금천교 동
쪽에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넓게 들어앉아 능역을 적지 않게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문이
금천교 코 앞에 들어서게 되었다. 게다가 중앙정보부까지 능역 남쪽을 크게 갉아먹으며 들어
앉아 의릉은 한때 속세에서 지워진 공간이 되기도 했다.

▲  쌀쌀맞게 생겨먹은 붉은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홍살문은 왕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귀족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과 관람 예의를 강조한다. (엄숙까지는 아니더
라도 관람 예의는 꼭 지켜야 됨) 의릉이 동쪽을 향해 있다 보니 정자각과 홍살문도 그를 따라
해가 뜨는 동쪽을 취하고 있다.
문 옆에는 벽돌 등으로 다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는데, 이곳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공간으로 보통 4번 절을 했다.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이제
는 의릉 제향일에만 반짝 사용될 뿐,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정자각에서 본 모습)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반듯하게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
>는 제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즉 능의 주인이 걷는 길이다.
그토록 사람을 대놓고 가리는 돌길이었건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제는 누구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가치가 저렴해진 것은 아니다. 참도를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넓어진
것 뿐이다.
 
이곳 참도는 정자각 전에서 북쪽으로 90도 꺾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90도 틀어 정자각 계단으
로 이어진다.


▲  의연하게 자리한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다듬은 돌로 석축을 높이 다지고 그 위
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단순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 때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으로 되어
있다. 이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고종이 1897년 황제를 칭한 이후 선왕들
을 모두 왕에서 황제로, 왕후는 황후로 추존했음)

의릉 제향<기신제(忌晨祭)>은 매년 10월 2째 일요일에 열리며, 그때는 정자각과 참도가 간만
에 밥값을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의릉 주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정자각 제상
의릉 기신제 때 제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  가마(들것) - 제물과 신위를 옮길 때
사용한다.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의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의릉은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景宗, 1688~1724)과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1705~1730)의 능
이다.
경종은 숙종(肅宗)의 아들로 그 유명한 장희빈(張禧嬪, 희빈장씨)의 소생이다. 이름은 이윤(
李昀), 자는 휘서(輝瑞)로 태어난지 2달만에 원자(元子)에 봉해졌으며, 1690년 6월, 겨우 2살
의 나이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서인(西人) 패거리들은 그의 세자
책봉을 쌍수들고 반대했으나 숙종은 이를 밀어부치고 서인을 크게 때려잡았다. (그 과정에서
송시열이 처단됨)

경종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3살에 천자문을 모두 익혔고, 7살에 성균관 입학례(入學禮)
를 치루었다. 그때 글을 읽은 음성이 크고 맑아서 대신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고 전한다. 흔히 경종하면 '병약했던 군주'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는데 어린 시절에는 그렇
게 허약 체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몸이 부실하면 공부도 하기 힘듬)

장희빈이 한참 위엄을 떨치던 시절에는 총명한 세자로 아비의 사랑이 대단했다. 허나 숙빈최
씨와 그녀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등장으로 아비의 사랑이 슬슬 떠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밖으로 떨려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궁궐로 복귀하면서 장희빈은
최대의 위기에 몰리게 되어 결국 궁 밖으로 떨려나는 수모를 겪게 된다. 허나 그 성질을 죽이
지 못하고 자신의 거처에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해하려는 음모를
벌였고, 그것이 발각되자 숙종은 크게 발끈해 장희빈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대신들은 세자를 위해 장희빈의 죄를 조금 용서해줄 것을 청했으나 숙종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쓰디쓴 사약을 보내 속히 저 세상으로 갈 것을 종용했다. 야사에 따르면 장희빈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청했으나 숙종은 이를 거절했다. 허나 태도를 바꾸어 세자를
보내 마지막 모자(母子) 상봉을 시켜주었는데, 갑자기 장희빈이 독기 품은 눈빛을 보이며 세
자의 하초(배꼽 밑부분)를 꽉 붙잡아 잡아당겼다는 것이다.
이에 환관들은 세자와 장희빈을 겨우 떼어냈으나 세자는 하초에 가해진 충격으로 기절했다고
한다. 허나 아무리 숙종과 인현왕후에 대한 원한이 크다고 하여도 자신이 생산한 아들에게 그
딴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이 잘되어야만 연산군(燕山君)처럼 어미의 복수를 보기 좋
게 해줄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이 이야기는 장희빈을 깎아내리고 인현왕후를 치켜세우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1701년 장희빈은 사약을 들이켜 죽었고, 그 충격으로 경종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
였다. 게다가 아비의 미움과 견제까지 받으면서 심한 우울증까지 두고두고 앓았으며, 이때부
터 경종은 병약 체질로 변해 온갖 병환에 시달린다.


▲  잔디에 완전히 묻힌 수복방(守僕房)터
수복방은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복의 거처이다. 다른 왕릉은 거의 수복방이
남아있으나 의릉은 어느 고약한 세월이 잡아갔는지 그 터도 희미하다.


1717년 숙종은 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켰다. 이는 세자를 믿어서가 아니라 세자의
실수를 트집잡아 연잉군으로 대놓고 세자를 갈고자 함이었다. 하여 노론(老論) 패거리인 이이
명(李頤命)에게 세자가 아들이 없고 병을 달고 사니 나중에 연잉군으로 세자를 바꾸라고 부탁
했다.
허나 경종은 눈치가 빨라 신중히 처신하여 위기를 넘겼고, 그런 아들을 잡으려고 했던 숙종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720년에 승하하면서 무탈하게 왕위에 오르게 된다.

허나 왕이 되면 무엇하랴. 왕권은 한없이 약했고, 노론 패거리들이 국정을 잡고 있어 뜻대로
하지를 못했다. 게다가 후사도 없어 1721년에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해 후계
자로 삼았다. 이에 노론이 왕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것을 청하자 이를
받아들였으나 소론(少論)이 반대하면서 여러 차례 번복하였고, 소론을 등에 업고 친정(親政)
을 선포했다.

이때 소론 패거리는 노론을 잡고자 이광좌(李光佐) 등이 왕을 들쑤셨고, 노론에게 영 좋지 않
은 감정이 있던 왕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한바탕 연극을 펼친다. 김일경(金一鏡)이 노론을 탄
핵하기가 무섭게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 등의 노론 4대신을 싹 잡아 유배를 보낸 것
이다.
또한 1722년에 소론의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자 노론 4대신에게 사
약 1사발씩을 돌려 처단했다. 세상은 이 사건을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부르며, 이때 20여
명이 처단되고, 114명이 유배형을 받았다.

그렇게 노론이 쑥대밭이 되자 경종은 희빈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했으며, 왕
후까지 올리려고 했으나 일찍 죽는 통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김일경을 중심으로 한 소
론 패거리의 노론 죽이기가 더욱 심해져 당쟁(黨爭)이 심해졌으며, 이에 대한 스트레스로 경
종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1724년 10월, 갑작스런 복통과 설사, 심각한 탈수증세로 왕은 쓰러졌고, 다음날 10월 11일 새
벽 축시(丑時, 1~3시)에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36세의 한참 나이로 급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는 딱히 특별한 병세가 없었으나 연잉군이 보낸 게장과 생감을 먹고 이틀 뒤에 복통이 생
겼다고 한다. 이를 두고 소론에서는 연잉군이 왕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연잉군은 병약한 왕의 식욕을 돋구려고 직접 게장과 생감을 챙겨 올렸는데, 한의학에서는 게
장과 생감이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계속
같이 올렸고, 왕이 복통을 호소하자 인삼을 올리려고 했다. 이에 의원들이 상태가 더 악화될
것이라 반대했지만 이것도 무시하며 인삼을 3번이나 올렸고, 그 다음날 급사했다는 것이다.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인정하지 않은 김일경과 이인좌(李麟佐)가 연잉군이 왕을
독살했다며 난을 일으켰다. 이후로도 독살설이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자 영조는 1754년 자신
이 독살한 것이 아니라며 해명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  의릉 비각(碑閣)
의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이 깃들여져 있다.


경종의 부인은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1786~1718)와 선의왕후 어씨가 있다. 자식은 얻지 못
했으며, 따로 후궁도 두지 않았다. 아마도 병약한 몸이라 그런 듯 싶다.

단의왕후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로 1696년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으
며, 1718년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왕이 되자 왕후로 추봉되었으며, 1726년 영조
가 공효정목(恭孝定穆)이란 휘호를 올렸다. 능은 동구릉(東九陵)에 있는 혜릉(惠陵)이다.

선의왕후는 심씨가 죽자 새로 맞이한 부인으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함원부원군(咸原府院
君) 어유구(魚有龜)의 딸이다. 1726년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가 되었으나 1730년에 불과 25
살에 나이로 경덕궁(敬德宮, 경희궁) 어조당(魚藻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심씨는 연잉군을 크게 경계하며 인조(仁祖)의 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나 인평대군(麟坪大
君)의 후손 중 적당한 사람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종은 딱히 업적도 없고 숙종과 영조에게 너무 밀려 존재감이 그리 없다. 비유하자면 두 고
래등(숙종, 영조) 사이에 새우등인 경종이 끼어있는 셈이다. 허나 품성만큼은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의 적이었던 인현왕후를 마음으로 섬겼으며, 자신에게 야박하게 굴었던
아버지가 병석에서 고생하자 약시중을 들었다. 실록에는 그를 두고
'받아들이는 아량이 넓어 대신들에게 가슴을 열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다. 식
자들은 휼륭한 보좌가 없어 이상적인 정치를 도와 이루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그를 평가했다.

이복형을 독살했다는 누명으로 늘 괴로워하던 영조는 도성 근교 명당으로 손꼽히던 천장산(天
藏山, 140m)에 경종 내외의 능을 썼다.
천장산(☞ 관련글 보기)은 석관동과 월곡동, 회기동(回基洞)에 걸쳐있는 뫼로 예로부터 좋은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절과 무덤 자리로 아주 좋은 곳이라 하늘이 숨겨놓은 곳이란
뜻에서 천장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청장산(淸藏山)이란 별칭도 있음> 지금은 의릉
만 천장산 품에 있으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묘(현재 서삼릉에 있음)도 산 남쪽 자락
에 있었고,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홍릉(洪陵)도 산 남쪽에 잠깐 신세를 졌다.
(현재는 남양주시에 있음) 또한 폐비윤씨의 원찰로 전해지는 연화사(蓮花寺, ☞ 관련글 보기)
란 오래된 절이 산 남쪽 끝, 경희대 옆에 자리잡고 있다.

천장산도 그렇고 의릉도 속세에 그리 알려진 이름들은 아닌데 이는 중앙정보부가 1960년대부
터 의릉에 둥지를 틀면서 산과 능 일대가 철저히 금지된 곳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하여 1990
년대까지 서울 지도에 의릉은 나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능역과 속세에 경계에는 군부대식 담
장과 철책이 둘러져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허나 세상이 바뀌면서 의릉을 깔고 앉던 중앙정보부(중정부)가 한강 남쪽 내곡동으로 이사를
갔고 1996년에 비로소 자유 공간으로 해방이 되었다.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능역
을 정비해 중정부가 심어놓은 외래수종을 제거하고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인공 연못을 밀어
버리고 금천교를 복원했다. 또한 의릉 뒤쪽 천장산 산길을 손질해 부분적으로 개방했다. 다만
의릉을 끼고 들어가고 나와야 되며 정상을 찍고 가볍게 1바퀴 도는데 50~60분 정도 걸린다.

* 의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409 (화랑로32길 146-20, ☎ 02-964-0579)


▲  능의 주인을 알려주는 의릉 비석
1724년에 세워진 것으로 1730년에 선의왕후가 이곳에 들어오자 비석 내용을
업데이트시켰다.


♠  의릉 둘러보기

▲  낮은 언덕에 자리한 의릉 능침

의릉은 다른 조선 왕릉에 비해 공간이 썩 넓지가 않다. 천장산이란 든든한 병풍이 있지만 그
산을 빼면 정릉(貞陵)보다 더 좁다. 능은 보통 산을 끼고 있어서 그 뒷산까지 능의 영역으로
삼아 백성들의 접근과 나무 벌채, 식물 채취를 엄격히 막는다.
능이 깃든 능침은 폭이 좁고 언덕 높이가 조금 낮다. 통제구역이라 마음대로 발을 들일 수는
없지만 밑에서 거의 70% 이상은 확인이 가능하다.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은 몇몇을 제외하고 보통 좌우로 나란히 있기 마련이다. 허나 이곳은
그 흔한 좌우가 아닌 앞뒤로 배치된 동원상하능(同原上下陵)의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런 구조는 효종(孝宗)의 능인 영릉(寧陵)과 이곳 의릉 뿐이다.
앞쪽에 나와있는 능이 선의왕후 것이며, 뒤에 있는 것이 경종 것으로 이런 괴상한 구조가 나
온 것은 능역의 폭이 좁아 산천의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맥을 벗어나지 않고자 함이다. 원래는
경종의 능만 있어서 그 기운을 다 누렸는데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별도의 능을 구축하거나 의
릉 주변에 따로 자리를 닦기가 여의치 못하여 최대한 명당의 기운을 유지하는 선에서 이렇게
조성한 것이다.

이들 능의 봉분은 병풍석(屛風石)을 빼고 난간석만 둘러져 있으며, 장명등과 혼유석(魂遊石),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石馬) 2쌍, 석호(石虎) 2쌍, 석양(石羊) 1쌍을 각
각 갖추었다. 그리고 경종 능 뒤에는 곡장이란 담장이 둘러져 있다.
지금은 능역에 대놓고 올라갈 수 없지만 능을 지키는 육중한 무인석 뒷쪽에 특이한 꼬리 문양
이 있다. 이는 다른 조선 왕릉과 왕족 묘역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또한 석호의 꼬랑
지가 머리 뒤쪽까지 말려져 있는데, 이 역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니 능침에 올라갈
기회가 생기면 꼭 살펴보기 바란다. (난 올라가지 못했음)


▲  북쪽에서 바라본 의릉 능침
저 푸른 언덕 위에 그림처럼 자리한 앞쪽 능이 선의왕후, 뒷쪽이
경종의 능이다.

▲  북쪽 밑에서 바라본 선의왕후의 능
동그랗게 솟은 봉분과 난간석을 비롯해 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호, 석양의
뒷모습이 바라보인다.

▲  북쪽 밑에서 우러러 바라본 경종의 능

▲  경종의 능을 가리고 선 곡장

▲  남쪽 밑에서 바라본 의릉 능침 (뒷쪽이 경종, 앞쪽이 선의왕후)
능침 남쪽은 조금 각이 진 북쪽보다 느긋한 경사를 지니고 있어 봉분 앞에
혼유석과 장명등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능침 곡장 뒷쪽에는 산책로가
고갯길처럼 놓여져 있으며, 천장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  여름 햇살이 내려앉은 의릉 산책로

의릉 능역 북쪽과 남쪽, 서쪽에는 숲길에 가까운 산책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 산책로는 왕릉
나들이의 백미라 할 수 존재로 소나무 등 여러 나무와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있어 산책의 재
미를 더해준다. 입장료 할인 혜택이 있는 동네 주민들이나 입장료 100% 할인 혜택을 받는 노
인들의 산책 수요가 많으며, 주말에는 가족 나들이객과 청춘들의 수요도 적지 않다.

능침 서쪽에는 야트막한 고갯길이 있는데 이곳에서 천장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손을 내민다.
허나 무더위에다가 폐장 시간도 임박하여 그를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솔내음이 달달한 의릉 남쪽 산책로


▲  의릉 구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 강당(講堂) - 국가 등록문화유산

의릉 남쪽에는 30년 이상 의릉의 목을 죄며 들어앉았던 옛 중앙정보부(중정부)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바로 강당과 회의실 건물이다.
강당(왼쪽 건물)은 1962년에, 회의실(오른쪽 건물)은 1972년에 지어진 것으로 1972년 7월 4일
그 유명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현장으로 유명하다. 남과 북이 그 성명을 발표하고 서
울의 3대 고급요정의 하나로 악명이 대단했던 성북동 삼청각(三淸閣)으로 넘어가 거하게 뒷풀
이를 했다.

이들 건물은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심미성 높은 건물을 짓던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설계
한 것으로 중정부가 이곳을 떠난 이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사용하다가 지금은 의릉에서
관리하고 있다. 딱히 용도가 없어 거의 빈집으로 있으며, 건물 내부는 거의 공개를 하지 않고
있어 그냥 외관만 보면 된다.
기껏해야 50~60년 넘은 집이라 의릉 정자각과 비각 같은 고색의 향기는 여물지도 못했다. 하
지만 저들도 이 땅을 거쳐간 20세기 한복판의 흔적이자 역사적인 현장으로 보존할 필요는 있
다. 이렇듯 의릉은 18세기 왕릉과 비록 의릉에게 고통을 주긴 했지만 20세기 한복판의 역사적
흔적이 공존하는 현장으로 의릉만이 가진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중정부 강당 남쪽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이 있는데 서로 길은 이어져 있으나 철책을 둘
러 통행을 금하고 있다.


▲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의 옆 모습

▲  의릉 마무리 (동북쪽에서 바라본 의릉 능역)
중정부 강당과 의릉 남쪽 산책로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의릉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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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 서울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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