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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창건된 도심 속의 고찰,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던 ~ 개운산 개운사(開運山 開運寺)

▲ 개운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개운사 외경 |
개운산<안암산(安岩山)> 남쪽 끝에는 서울 장안의 대표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고즈넉
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안암동로터리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길(개운사길)은 고려대를 낀 서
울의
주요
대학가로 학생과 청춘들로 마를 날이 없는 번잡한 곳이다. 예전에는 개운산에서 발
원하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가던 개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그 졸졸졸~♪ 소리도 듣지
못하게끔 완전히 봉인해버렸고, 고려대가 개운산과 개운사 사이를 끊고 건물을 지으면서 겨우
가늘게
개운산 자락을 붙잡고 있다.
고려대와 주택가의 무한 확장으로 절의 북쪽과 서쪽은 고려대에 꽁꽁 감싸여있고, 남쪽과 동
쪽은 주택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허나 그 동쪽도 얼마 가지 않은 보타사부터 고려대에
막히니 자연히 3면이 고려대에 포위된 꼴이다. 게다가 절 주변은 대학가에 걸맞게 빌라와 원
룸, 식당, 술집 등이 즐비하여 고요함을 추구하는 절과는 너무 맞지가 않다. 완전 절과 밖이
180도
딴 세상인 것이다.
허나 경내 외곽에 나무가 그런데로 무성하고
경내로 들어서면 여기가 대학가의 한복판이 맞는
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나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속세의 소음은 절을 둘러싼
나무들과 풍경물고기가 대부분 우걱우걱 씹어먹는다. 그러면 개운사는 언제부터 법등(法燈)을
켰을까?
개운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학과 대광아파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영도사(
永導寺)라 했다고 하는데, 창건 이후 400년 가까이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가
썩 개운치가 않다.
과연 무학이 세웠는지는 개운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인근에 쟁쟁한 절(보문사, 미타사, 청
룡사, 흥천사, 연화사 등)이 적지 않아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세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779년 절은 개운산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正祖)의 후궁인 원
빈(元嬪) 홍씨<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의 묘역인 명인원(明仁園>을 절 옆에 잡았기 때문이다.
하여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이 절을 옮겼다. (또는 1730년에 절을 이전했다고 함)
절 이름이 언제 개운사로 바뀌었는지는 역시나 개운치가 않다. 인파당이 절을 옮기면서 이름
을 갈았다는 설도 있고, 고종(高宗)이 어린 시절 영도사의 도문 처소에서 잠시 양육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863년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에서 개운사로 고쳤
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송담 수훈이 지장탱, 시왕탱, 사자탱 등을 봉안했고, 1873년에 명부전(冥府殿)을 중건
했다.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883년에 불상 2개를 개금하고 감로
탱,
팔상도, 신중탱, 산신탱 등을 봉안했다. 그리고 1885년 아산(牙山)에서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를 가져왔는데 1935년에 왜정(倭政)이 국방 헌납을 이유로 강탈했다.
1912년 왜정이 사찰령(寺刹令)을 시행하자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고 김
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했다. 1913년 조선 황실 소유의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 소
유로 등록했으며,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講院)을 개설하면서 불교 개혁 및 교육의 근
원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권범운(權梵雲) 등이 독성전을 중건했고,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지었으며
,
한때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1955년에 대처승(帶妻僧)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허나 이후 조계종으로 갈아탔고, 조계종 종정(宗正)의 정통성을 내세워 총무원(總務院)
간판
까지 달았으며, 1981년에 중앙승가대학을 경내로 이전하여 오랫동안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바
쁘게 살았다. (현재 중앙승가대학은 경기도 김포시에 가 있음)
넓은 경내에는 199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미타전, 종각, 선방, 중
앙승가대학 건물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다. 이중 선방은 수도권 선방 중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며, 선방과 종각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경내 속살이 보이지 않
는다.
허나 절 건물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이라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농도는 아주 얇은 실정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오래 숙성된 문화유산들이 즐비하여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비록 다른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인 감로도, 신중도, 팔상도, 지장시왕도
, 괘불도와 괘불함 등 보물 1점과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다.
부속 암자로는 동쪽에 대원암과 보타사가 있다. 대원암(大圓庵)은 대한제국과 왜정 때 활동했
던
고승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계 석학을 배출했던 현장이며, 보타사(
普陀寺, ☞
관련글
보기)는 옛 칠성암(七星庵)으로 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된 것을 절로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과 고운 자태의 금동보살좌상
이 깃들여져 있으니 기왕 개운사에 왔다면 그들까지 개운하게 둘러보아 여로(旅路)를 개운하
게 살찌우기 바란다. |

▲ 개운사 일주문(一柱門) |
개운사에 이르면 제일 먼저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문짝도 없는 열린 모습으로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문의 머리인 맞배지붕
이 너무 육중하여 문 기둥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이다.
지붕과 평방(平枋) 사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개운사 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문 좌우로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둘러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주차장(유료임;;)이 펼쳐지는데, 그 너머 북쪽 언덕에 선방과 종각, 나무
로 경내를 꽁꽁 가린 개운사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일주문 안쪽 동쪽에는 비석들이 옹기종
기 모여있으며, 주차장 서쪽에는 중앙승가대학으로 쓰였던 정진관이 있다. |

▲ 개운사의 20세기 역사를 머금고 있는 비석들
지붕돌을 지닌 비석부터 대머리 비석까지 10여 기의 비석이 2줄로 모여 있다.
이들은 왜정과 20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공덕비와 기념비로 가장
늙은 것은
1931년에 지어진 승려 경허의 공덕비이다.

▲ 개운사 석조관세음보살상 |
주차장을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날씬한 자태의 관세음보살상이 마중을 한다. 그는 20세
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주변과 윗도리에 검은 때가 조금 끼어있어 약간 고색이 느껴진
다.
두 손으로 정병(政柄)을 꼭 쥐어들고 있어 그가 관세음보살 누님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다. |
 |
◀ 개운사 3층석탑
관세음보살상 바로 옆에는 맵시가 좋은 3층석
탑 1기가 자리해 있다.
개운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20세기 후반에 마련
되었는데, 반듯한 바닥돌과 2중 기단(基壇),
3
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을 두루 갖추어 안정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탑은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
슨 사연이 있는지 경내 외곽 구석에 두었다. |

▲ 범종(梵鍾)을 품은 종각과 경내로 인도하는 선방 옆길
일주문과 주차장에서 개운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선방 옆구리를
지나가야 된다.

▲ 선방(禪房) |
선방 옆구리를 오르면 대웅전과 선방, 명부전, 미타전에 감싸인 대웅전 뜨락에 이른다. 뜨락
에는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추가되어 6색 연등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는데, 뜨
락을 기준으로 남쪽에 대방이라 불리는 선방이 장대한 덩치로 남쪽을 굽어본다.
선방은 1921년에 중창된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현재 모습으로 크게 지어졌다. 밑층에는 종무
소 등이 들어있으며 윗층은 선방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방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한참
개운사가 교육과 불교 개혁에 나섰을 때, 선방은 그 공간으로 분주한 세월을 보냈다. |

▲ 사해백련(四海白蓮) 현판의 위엄 |
선방에 큼지막하게 걸린 사해백련 현판은 교육사업가이자 서예가로 유명했던 이집천(李集仟,
1900~1959)이 쓴 것이다. 하얀 연꽃인 백련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뜻한다고 하니 법화
경(法華經)의 핵심 사상이 사해(온 세상)에 퍼지라는 의미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사진에는 빠졌지만 그 옆에는 분타리향(分陀利香) 현판이 있다. 이는 해사 김성근(海
士 金聲根, 1835~1919)이 남긴 것으로 분타리란 백련이 피는 곳을 뜻하는 범어(梵語)라고 한
다. |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彌陀殿, 현재 관음전(觀音殿)> |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있다. 미타전의 주인
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
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에 그의 뱃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근래 관음전으로 이름과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고, 그곳에 있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은 법당인 대웅전으로 넘어가 그곳의 중심 불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관음전 불단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롭게 자리를 폈다. |

▲ 미타전 시절의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국가 보물 |
서방정토의 주인장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금을 입힌 것으로 높
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된 나이가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뱃속에서
발원문을
비
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숨겨진 정체와 비밀이 개운하게 드러나
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상승했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얇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
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국가 보물, ☞
관련글
보기)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꺼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가 보물),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국가 보물, ☞
관련글
보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
치한다.
이 불상은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각, 긴
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뱃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분이다. |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으로 이를 통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기
초/중반임을 살짝 귀띔해 준다.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늙은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아
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이들 발원문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어려운
말로 복장유물(腹臟遺物)이라 하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
둑이 들어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털어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
제로 개방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점, 조선시
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이후로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려
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
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하여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
상 복장전적'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교중앙박
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유
형문화유산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떼어내 국가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했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