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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국사당, 선바위 둘러보기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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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남쪽 고개인 무악동입구(해발 130m)에 이르면 길은 크게 4갈래로 갈린다. 성곽길을 따
라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며, 동서로 펼쳐진 통일로18나길의 서쪽은 독립문역으로, 동쪽
은 인왕산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곽 서쪽으로 산길(인왕산둘레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있는
데, 그 길은 선바위와 인왕사를 빠르게 잇는 지름길이다. 그 길의 손을 잡아 숲길을 2~3분 정
도 가면 각박한
경사에 자리한 인왕사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일주문을 오르면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잔뜩 건물을 지어놓은 인왕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각 건물
마다 다른 종단과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며 따로 놀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인왕사가 지닌 개성이자 결점이
다.
인왕사는 5개 종단에 무려 11개의 절이 가람을 이룬 독특한 형태의 절이다. 그러니까 인왕사
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형성하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
이다. 그러다 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달라 따로 놀고 있는데, 다행히 4년에 1번씩 인왕
사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이곳의 전반적인 살림을 맡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한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
락전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와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외에는 지붕과 이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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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사 경내 (맞배지붕을 지닌 큰 건물은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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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경내 건물은 모두 근래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향기는 누리기
힘들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원래부터 인왕사와 관
련이 없는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조선 초기에 지어진 인왕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인왕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
는 존재이나 이름이 같다 보니 절과 관련된 몇몇 자료에는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
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에서 한양(서울)으로 국도(國都)를 옮겼는데, 이때 인왕산 동쪽 자
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있던 승려 조생(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다.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절의 규모
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불렀고, 산
의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이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태조가 세운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과 성종 때 기록에도 가끔씩 절
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은 인왕사를 비롯해 인왕산에 있던 복세암(福世庵)과 금강굴(金剛窟)이 경복궁
(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들과 함께
부
셔버렸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군주라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지금의 자리에 선암정사(禪巖精舍)를 세웠다, 아마도 선바위
의 덕을 보고자 그 자리를 택한 듯 싶은데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쓰지
않았다.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大願庵)을 지으니 그때부터 인왕사의 한 지붕 다
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 극락전(極樂殿)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인왕사 윗쪽으로 넘어와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 극락
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리고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
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었다. 하여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그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
터 산악신앙(山岳信仰)과 기자신앙(祈子信仰)이 어우러진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地)였
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무속의 중심지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에는 대자연이 빚은 개성파 바위들이 즐비하며, 선바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주변 바위와 골짜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좋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산악신앙이 거리낌없이
어우
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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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당(國師堂) - 국가 민속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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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바위를 향해 오르다 보면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늙은 티가 그렇게
와닿지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기부터
있던 신당
(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러 무속신(巫俗神)을 봉안하고 있
으며, 무학대사를 봉안한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 꼭대기의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1396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여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여겼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
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살아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때 강제로 정
든 곳을 떠나야 했다. 1925년 왜정이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었는데, 국
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하여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며 명당(明堂) 자리에 속하는 현 자리로
둥지를 옮겼다.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하 기초
는 없다.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치
큰
새
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하러 온 이들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의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하여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
드러나 있으며, 당시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
한
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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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바라본 국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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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은 자주 굿이 열리는 편이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와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며, 김명권이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라고 한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과 10
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
는데, 이때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국가 민속문화유산의
지위
를 누리고 있는데, 그림에 담긴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부인,
호구아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
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신(軍雄
大神), 금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
점의
무신도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무신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
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옛 조
선(고조선)이 천하에 크게 웅거했던 청동기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인 도구들의 원형으
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
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무신도 중 태조
이성계를 머금은 아태조(우리의 태조라는 뜻)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고 전한다.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란 설도 있다. 허
나 태조의 그림이 있고 그림의 주인공이 강씨이니 그 마누라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사당 안에서는 마침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문은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
지 못했으며, 기분 같아서는 흔쾌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무신도를 사진과 나의 망막에
싹 담고 싶었으나 외부인에게는 인색한 곳이라 그만두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200번이
넘게
왔음에도 내부 구경도 제대로 못했고, 무신도도 사진에 담지 못했다. (굳이 공개하지
않는 것
을 결례를 무릅쓰고까지 봐야 될 이유는 없음, 관람에는 예의가 필요함)
* 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12 (통일로18가길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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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자연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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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사 경내 윗쪽 해발
15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로 2개의 큰
돌이 마
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선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를 것이다.
바위 뒷쪽이나 옆에서 바라보면 비옷(우비)이나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
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
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상과학 만화나 오락실 오락을 많이 즐긴 사람이라면 이상한 형체의 괴
물이나 새 대가리 괴물 등이 연상될 수도 있을 것이며,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있다
보니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여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옛날에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인왕사가
밑에 들어온 이후에는 석불(石佛)로 대우를 받으며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며, 마땅한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인왕사를 먹여살리는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엄청나다.
이 바위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기묘한 작품으로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
바위 등 묘하게 생겨먹은 바위들이 많아 인왕산이 과연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선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머나먼 옛날부터 산악신앙 및 기자신앙의
성지(聖地)
이자 기복처(祈福處)로 바쁘게 살았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이 바위에 소원을
빌면 효험
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했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꽤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바위 하나에 선바위,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무학대사의 상, 석불님, 관세음
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까지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산악신앙과 기자신앙, 무속
신앙, 거기에 불교까지 다양한 성격을 지녀 그야말로 굶어죽을 일이 전혀 없는 팔방미인의
바
위이다. 바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를 피우며 이름과 성격을
붙
이고 떠받드는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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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바위의 깜찍한 뒷모습
판초의나 모자가 달린 옷을 입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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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형상은
2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 7∼8m, 가로 11m 내외, 앞뒤
의 폭이 3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제단이 있으며 바위의 패인 부분에는 비둘기들이
머물고
있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쌀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있어 비둘기에게 이만한
삶터가
없다. 늘 뷔페(?)를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곳에는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의 유교와
무학대사
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터를 부탁했다. 하여 무학은 전국을 뒤
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는 못 갈 팔자였다. 하여 선바위에서 나라의 수명 좀 연장시켜달라고
1,000
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딱 망
한
모양이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가 되는 데에 무학대사와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 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정도전도 무학대사
못
지 않게 신뢰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이에 태
조는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
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징되는 불교 패거리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
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면서 불교는 힘을 잃고 밀려나게 된다. 하여 억
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는 것
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선바위는
민간신앙의 애뜻한 현장으
로 백성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들어와 불교까지 더해지면서 관세음보살, 석
불이란 이름까지 가지게
되었고, 국사당까지 밑에 들어와 무속신앙까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굿은 바위에서 하지 않고, 국사당에서
한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과 7월 칠석날, 그리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는 사람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는
조그만 건물이 있으며, 바위 주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렀다.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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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바위 뒷쪽 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높은 서울 도심이 저 밑에 펼쳐져 있다.

▲ 선바위 뒷쪽 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독립문
주변과 서울 도심,
마포구와
서대문구 지역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까지 시야에 들어옴)

▲ 선바위 뒤쪽에서 만난 해골바위
바위의 모습이 해골이나 투구처럼 생겼다. 그의 피부에는 대자연이 심술궂게
파놓은 구멍들이 여럿 있으며, 바위 정상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해골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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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주능선에 걸쳐진 하얀 피부의 한양도성을 위시해 서울 도심과 시가지가 장대하게 펼쳐
져 있으며, 저 멀리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산줄기까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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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의 떡처럼 다가오는 모자바위
마치 사람이 모자나 고깔을 쓴 모습 같다. 저곳은 금지된 구역이라
이렇게
밑에서 그림의 바위처럼 바라봐야 된다.

▲ 인왕사 윗쪽 마애불(磨崖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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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바위 밑 막다른 바위에는 작은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선바위에서 6~8분
정도
올라가야 되는 곳으로 근래 인왕산 한양도성과 개나리동산, 무악재하늘다리를 이어주는 산길
이 닦이면서 접근성이 다소 좋아졌다.
인왕사에는 20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마애불이 2개 정도 파악이 되고 있는데, 이 석불이 그중
의 하나로 절 한참 윗쪽에 있어서 편의상 '인왕사 윗쪽 마애불'(이하 윗쪽 마애불)이라 칭하
도록 하겠다.
이 마애불은 석불이라기보다는 상투를 튼 어린이나 사람 같은 모습으로 거칠게 다듬어져 거의
만들다가 만 모습 같다. 또한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더 이상 윗쪽으로 올라갈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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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쪽 마애불 주변에서 바라본 모자바위의 위엄

▲ 인왕사 아랫 마애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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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바위에서 서쪽(국사당과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큰 바위에 아주 두텁게 새겨진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인왕사 경내의 서쪽 끝으로 석불 앞에는
건물이 여럿 있는데 그들에게
가려져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편의상 '인왕사 아랫 마애불'이라 칭했음)
이 석불은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의 무견정상
(無見頂相)부터 발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무릎에 대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명
상에 잠겨있는 편안한 모습이다. 특히 배 부분은 볼록 나와있는데, 불상이나 보살상
중 얼굴
살이 많은 것은 많이 봤지만 저렇게 똥배 불상은 처음 본다. 게다가 이 땅에 흔한 마애불 스
타일이 아닌 다소 이형적인 모습이라 마치 동남아나 중남미의 석조 조각 같은 모습이다.
지금
은 20세기 마애불로 속세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100년 이상 지나면 불교미술사에서 크
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아랫 마애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선바위와 국사당의 안부를 오랜만에
확인을 했고, 선바위 주변의 많은 바위와 마애불도 복습 차원에서 모두 확인을 했으니 나름
의미가 있고 배부른 나들이였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 6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