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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북한산 본원정사(本願精舍)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목 보살좌상)


매년 5월마다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
키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하늘 밑에서 안길만한 절집을 물색해 보았다. 나는 오래된 절과 문
화유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정문화유산을 품은 100년 이상 묵은 절집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
조건에 맞는 고찰 태반을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지배층이 서민을 쥐어짜듯 없는 거 열심히 쥐어짜고 흔들어보니 집에서 가까운 수유리
의 본원정사가 걸려든다. 이 절은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발걸음은 아직이다. 역사는 짧지
만 지방문화재인 지장보살상도 있고 집에서도 가깝고 해서 그곳을 찾기로 했지. 그래서 순례(
巡禮)를 가장한 이번 초파일 나들이는 본원정사를 시작으로 정릉에 있는 경국사(慶國寺)와 우
이동 도선사(道詵寺)를 돌기로 하고 12시 반에 집을 나섰다.

집에서 본원정사까지는 10리 미만의 거리이고 무척이나 가까워 보이지만 바로 가는 차편이 없
어 체감거리는 길다. 우리 동네에서 1139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동아아파트에서 1161번 버스로
환승하여 우이동에서 다시 151번 시내버스를 타고 국립재활원에서 내린다. 소요시간은 기다리
는 시간을 포함해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여기서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삼각산로를 따라 12분 정도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초파일 분위기로 한참 들떠있는 본원정사가 자리해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는 국립재활원
과 영어 사대주의의 아주 몹쓸 현장인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가 있으며 우리나라 도보 여행의
성지인 북한산둘레길과도 잠시 마주친다.


▲  본원정사로 가는 길 (자비정사 부근)
고운 빛깔의 연등이 물결을 이루며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러 온 중생들을 인도한다.

▲  삼각산로 끝에 자리한 본원정사
본원정사는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해 정문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지장보살상을 후광으로 삼아
열심히 절을 꾸리고 있는 북한산 본원정사(本願精舍)

▲  연등의 물결이 출렁이는 대적광전 뜨락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냉골에 둥지를 튼 본원정사는 화계사(華溪寺)와 4.19국립묘지 중간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저 조그만 절인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었다. 속인(俗人)들의 주거지와 북한산의 푸른 숲이 팽팽히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해 있
지만 숲이 절의 상당수를 둘러싸고 있어 산사(山寺)의 멋은 그런데로 우려내고 있다.

이 절은 왜정(倭政) 초기에 손덕선(孫德善)이 창건했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
청암(淸庵)을 스승으로 받들며 수행을 했다고 하며,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절을 지
었다. 처음 이름은 도성암(道成庵)이었는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조선 말부터 도성암이란 암
자가 있었다고 하며, 왕년에는 도선사보다 신도가 더 많았다고 전한다. 그 말이 맞다면 조선 후
기에 지어진 도성암을 손덕선이 중창을 한 셈이 되는데,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
어 확인은 어렵다. 아마도 100년도 안되는 짧은 법등(法燈)을 좀 만회하고자 지어낸 것이 아닐
까 싶다.

손덕선은 여기서 50여 년을 머물다가 1973년에 입적했다. 6.25전쟁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
에 있던 태고사(太古寺)가 잿더미가 되자 그곳의 지장보살상(목보살좌상)을 업어와 중심 불상으
로 삼고 열심히 절을 꾸렸다. 허나 인근의 도선사와 화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상황은 좋지
못했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거의 문닫기 직전까지 흐르다가 1980년대 초반 원성이 주지가 되면
서 절은 180도 달라진다.
그는 법당에 봉안된 지장보살의 본원(本願)을 따르고자 본원정사로 절의 이름을 갈아 이미지 변
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과 명부전, 나한전을 건립했는데, 그만
1996년 5월 22일 불의의 방화사건으로 애써 지은 대웅전과 나한전이 그만 전소되고 말았다. 이
때 가까운 삼성암(三聖庵)과 화계사에도 연쇄방화사건이 터져 나란히 피해를 입었는데, 이곳에
모두 불을 지른 한심한 자는 기독교 광신도였다.
이후 1999년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2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워 법당(法堂)으로 삼았고, 약사
전과 나한전, 삼성각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적당한 크기의 경내에는 대적광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삼성각, 약사전, 나한전 등 7~8동의 건물
이 있으며, 대적광전 1층은 종무소와 공양간으로 쓰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목보살좌상이 있
는데, 이곳에 유일한 보물이다. 비록 본원정사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든든한 후광(後
光)이자 밥줄로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본원정사도 없었을 것이요. 내가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
았을 것이다.
그런 목보살좌상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는 현대 사찰이지만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자
리한 산사로 시내와도 가까워 적은 발품으로도 언제든 편히 찾을 수 있다. 또한 북한산 둘레길
의 동쪽 구간이 부근을 지나므로 둘레길 탐방 때 잠시 다리를 쉬어갈 만 하다.

※ 본원정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수유역(3번 출구)에서 강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본원정사 종점 하차, 종점
  에서 2분만 걸으면 바로 본원정사이다.
* 지하철 4호선 미아역(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이나 미아3거리역(3/5번 출구)에서 151번 시
  내버스를 타고 국립재활원(서울영어마을수유캠프)입구에서 하차 삼각산로를 따라 도보 12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인수동) 산125 (☎ 02-902-7337)


▲  본원정사 삼성각(三聖閣)

본원정사에 들어서니 생각 밖으로 사람들이 무지 많아 내심 놀라고 말았다. 그에 비해 이곳 후
속으로 간 고려 후기 고찰, 경국사는 한산해 크게 대조를 보였지.
사람들은 대적광전과 명부전에 집중적으로 몰려있었는데, 그 혼잡함을 피하고자 제일 윗쪽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경내 변두리라
인적은 별로 없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9년 이후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토속신으
로 불교의 일원이 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예전에는 창건주인 손
덕선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에 가 있다.


▲  경내에서 삼성각으로 가는 길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이 요즘 장사가 안되서 며칠 밥을 안준 것일까? 호랑이의 인상이 꽤나 날카롭다.
너무 인상을 써서 주름선이 강하게 생겼을 정도. 그에 비해 산신의 표정은 여유롭다.
중생들이 초파일이라고 상다리 아작날 정도로 제물을 올렸으니 그 제물로
호랑이 좀 챙겨줬으면 좋겠다.

▲  독성(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  칠성이 그려진 칠성탱

   ◀  삼성각 우측에 자리한 조그만 공간
중생들이 놓고간 조그만 불상과 동자상, 나한상
등이 그들만의 조촐한 법당을 이루고 있다. 다
들 동전과 지폐를 하나씩 쥐어들며 초파일 고수
익의 기쁨을 누린다. 너무 재물을 밝히는 것도
절집의 도리가 아닌데.. 그 돈으로 가난한 중생
이나 도왔으면 좋으련만..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농작물이 무럭무럭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비닐하우스 너머로 연등으로 장식된
대적광전 주변과 나한전의 머리가 보이고 산 너머로 강북구 수유동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속세와 비슷한 높이라 조망은 그리 좋지 않다.

▲  약사전 앞에 놓인 5층석탑과 샘물을 제공하는 문수동자상

5층석탑은 1980년대에 만든 것으로 이곳의 유일한 석탑이다. 법당인 대적광전 앞이 아닌 약사전
앞에 바닥돌도 없이 둔 것이 이상한데, 아마도 기존의 대웅전과 나한전이 몰지각한 자에 의해
불에 타면서 임시로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석탑 옆에는 하얀 피부의 문수동자상이 물병을 쥐어들고 조그만 석조(石槽)에 물을 붓고 있는데,
물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그 작은 병에 도대체 얼마큼의 물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렇다
고 물을 더 나오게 하려고 물병을 쑤시거나 부시진 말자, 그러면 물은 안나온다. 마치 이 땅의
흔한 쌀바위의 전설처럼 말이다.


▲  거대한 유리온실 같은 약사전(藥師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기와를 얹힌 불전(佛殿)이 아닌 유리를 씌운 건물이다. 유리
온실 불전은 거의 처음 보는 터라 기와집 불전에 익숙해진 두 눈이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 건물은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
처이다. 원래는 건물도 없이 불상만 있던 야외 법당이었으나 날씨와 온갖 외부 위협으로부터 불
상을 보호하고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해 건물을 구상했는데, 기와집으로 짓기에는 불상이 허벌나
게 크고 소요 예산도 적지 않아 생각 끝에 유리 건물로 짓게 되었다.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의 위엄
서울에서 가장 큰 약사여래불로 지장보살상과 더불어 이 절을 먹여살리는 밥줄이다.
길고 가늘게 뜬 눈이 목조지장보살좌상의 눈초리와 좀 비슷해 보인다.


♠  본원정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주변

▲  오리무중(五里霧中)을 대신하는 오리연중(五里蓮中)의 현장인가?
연등 속에 몸을 가린 대적광전이 안개에 가려진 산봉우리 같다.

본원정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종무소(宗
務所)와 요사(寮舍), 공양간으로 쓰이고, 2층만 대적광전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자리에는 원래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허나 1996년 5월 22일 기독교 광신도의 불장난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주지 원성이 신도들의 시주에 힘입어 1999년 옛 대웅전과 나한전 일대를 한데 묶어 지금의
대적광전을 지었는데, 옛 대웅전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2층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삼았으며, 건물 북/서/동쪽 벽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팔상도(八相圖), 신선도(神仙圖) 등을 그려 벽의 공백을 메웠다.


▲  대적광전 앞에 준비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적광전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
灌頂臺)에 우뚝 서며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 바가지에 물을 담고 그에 머리
에 물을 껴얹는 관불의식<관정(灌頂)의식>을 행하는데, 때를 모르고 찾아온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이 무성한 날이라 그의 피서 현장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권하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번 해봐
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래서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그를 강제로 냉수마찰을 시켜준다. 물
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오늘이 지나면 그는 어두컴컴
한 창고에 들어가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
喜悅)이 대단할 수 밖에..


▲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적광전 내부

연병장처럼 넓은 대적광전 안에는 덩치가 큰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과 노사나불(盧舍那佛), 석
가불 등의 삼신불(三身佛)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을 입상(立像)으로 배치해 불단(佛壇)을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니까 3불과 4보살상이
불단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 대신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한가득 두어
중생의 시주로 안치한 작은 관음보살을 원불(願佛)로 봉안했는데, 죄다 금동불(金銅佛)이라 일
제히 금빛을 쏟아내니 가히 두 눈이 흔들릴 지경이다.


▲  마애3존상

대적광전과 약사전으로 오르는 계단 서쪽에는 마애3존상이 자리해 있다. 이 마애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磨崖佛)이자 마애불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충남 서산 마애3존불을 그대로 본
떠서 만든 것으로 '山'처럼 솟은 돌에 돋음새김으로 조성했다.
이들은 1999년 이후에 만든 것으로 그들의 안식처인 돌은 흐린 때가 많이 끼어있는데 반해 본존
불(本尊佛)은 얼굴을 제외하면 죄다 피부가 깨끗해 대조를 보인다. 아직은 파릇파릇한 새 불상
이지만 100년 정도 지나면 저들도 지정문화재의 명예직을 받을 것이다.


▲  연등 구름에 지붕이 가려진 나한전(羅漢殿)

대적광전 맞은편에 자리한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적광전
자리에 있었으나 1996년 5월 방화사건으로 대웅전과 함께 쓰러지는 비운을 겪는다.
1999년 옛 대웅전과 나한전 자리에 대적광전이 완성되자 그 맞은편에 지금의 나한전을 지어 옛
나한전의 뒤를 이었으며, 석가3존불을 중심에 두고, 제일 앞줄에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을
그 뒤로 500나한(羅漢)을 빼곡히 봉안했다.


▲  나한전 중앙에 봉안된 석가3존불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  나한전을 가득 메운 16나한과 500나한의 위엄
우리나라 4,800만 인구만큼이나 얼굴과 머리 스타일, 옷차림, 자세가 모두 제각각이다.
특히 다른 곳의 나한과 달리 조금씩 색을 달리하고 있어 색채가 매우 컬러풀
(colorful)한데 이들은 주지 원성이 직접 색을 입힌 것이다.

▲  16나한 할배들 - 그들의 조촐한 경로당 같다.

▲  대적광전 뜨락
흑백 연등과 칼라 연등이 거대한 구름으로 피어올라 파란 하늘을 지운다.
그들은 또다른 하늘과 땅을 이루며(연등 아래는 땅, 위는 하늘)
초파일의 분위기를 진하게 수식한다.


♠  본원정사의 보물이 봉안된 명부전

▲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 뜨락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다른 건물과
달리 특별하게 푸른 기와를 입혔으며,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지장보살은 6.25시절 산 너머 태고사에서 업어온 조선 후기 불상으로 그 덕분에 어
엿하게 지정문화재를 하나 보유하게 되어 전통사찰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품게 되었다.

1996년 5월 방화사건 때 명부전에도 화마(火魔)의 손길이 갔으나 다행히 큰 피해는 면했다. 그
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지장보살상까지 유린을 당할 뻔했던 아찔한 현장으로 건물 왼쪽 합각
부분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 조금 남아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
명부전 앞에는 넓게 마루를 두어 중생들에게 조촐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건물 옆에는 의자
와 음료수 자판기를 두었다.


▲  명부전 내부 (지장보살이 봉안된 불단과 닫집)

▲  본원정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목 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36호

명부전 불단에는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오래된 유물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이 앉아있다. 나
를 여기로 소환한 장본인으로 그가 없었다면 이곳에 굳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불상은 원래 북한산성 안에 있는 태고사(太古寺)에 있었다고 한다. 그 절은 고려 후기 고승
(高僧)인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세운 유서 깊은 곳으로 그의 승탑(僧塔)과 탑비가 굵직하
게 남아있는데, 그의 일대기가 적힌 원증국사탑비는 보물 611호, 그의 사리가 담긴 원증국사탑
보물 749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고사의 내력이나 관련 자료에는 본원정사로 넘어온 지장보살상에 대한 언
급이 전혀 없고 단지 그곳에서 가져왔다는 본원정사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정말 거기서 넘어
온 것인지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다른 절집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 북한산 태고사 글 보러가기)

▲  지장보살 좌우로 색채가 고운 저승의 10왕과 그들을 담은 시왕탱(十王幀)이
명부전 내부를 마치 저승의 심판 현장처럼 장엄하게 수식한다.


나무로 만들어 금빛 도금을 입힌 지장보살상은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 후기 불상
이다. 머리는 지장보살답게 푸른 색의 승려 머리를 취하고 있고 이마는 무척 넓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길고 가늘게 뜬 눈초리가 제법 매서워 보인다.
그의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이며, 코와 입 사이에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신체에 비해 얼굴이 좀 넓고 표정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극락에 못간 중생들의 민원에 귀를
기울인다. 몸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가슴 가운데 부분을 노출시켰으며, 옷주름은 자
연스러운 모습으로 온몸을 감싸 아래로 흐른다. 특히 오른쪽 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이 팔
에 걸쳐져 있다가 밑에 입은 옷 속으로 끼워져 있으며, 두 손은 불에 타서 망가진 것을 다시 만
든 것이다. 아마도 6.25때 상처를 입은 듯 하다.

불상의 형태와 옷자락의 표현, 양감표현, 목조 재질이나 다듬은 수법, 복장(腹臟)유물을 넣었던
구멍을 막은 기법에서 1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런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문
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본원정사 목보살좌상'임>

불상 좌우에는 조그만 모습의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서 있고, 그들 뒤에
는 지장시왕탱이 약간은 빛바랜 모습으로 있는데, 이들은 근래에 그려진 것으로 이곳에서는 목
보살좌상을 빼면 고색의 때는 전혀 없다.


▲  본원정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에 절에 왔으니 흔쾌히 절밥을 먹어야 되겠지. 그것이 바로 초파일 절 나들이의 주요 즐
거움이다. 공양은 대적광전 1층 공양간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방이 꽤 넓다. 그 방에는
공양에 임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본원정사에 있는 사람의 절반이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공양밥을 주는 장소로 가니 여러 나물이 담겨진 큰 그릇을 준다. 그 그릇에 자기가 먹을 분량의
밥과 고추장을 담고 미역냉국과 백설기라 불리는 두툼한 하얀 피부의 떡을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절 공양밥이 다 그렇듯이 여기도 비빔밥이다. 콩나물과 시금치, 무채 등의 나물과 밥, 고추장을
잘 비벼 먹으면 되는데, 시장기가 너무 강하다보니 밥을 다른 사람의 2배 이상 담아가지고 왔다.
허나 그에 비해 고추장을 적게 가져와 완벽한 비빔밥을 구가하지 못하고 대충 있는 데로 비벼
먹었다. 허나 밥을 많이 가져와서 그런지 아무리 숟가락질을 해도 밥이 줄지 않는다. 이거 무슨
마법의 밥그릇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 섭취를 하니 그릇은 이내 맨바닥을 드러낸다. 미역냉국은 맛이 시원하여 1그릇을
더 먹었고, 커 보이던 하얀 떡도 주섬주섬 먹고 보니 이내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외에 커
피나 음료수는 연등 접수 장소에서 따로 돈을 주고 마셔야 되는데 종이컵 커피를 무려 2,000원
씩이나 받는다. 차라리 길다방 커피나 마트/편의점의 캔커피를 사마시는 것이 속편하겠다.

작지만 그런데로 볼거리가 있는 본원정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절집이 조촐하고 역사도 짧
아서 10분이면 다 보고 나올 분량이지만 목보살좌상을 비롯해 경내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공양까
지 겸하니 많은 시간이 금세 흘러간 것이다.

이렇게 잠시나마 정들었던 본원정사를 뒤로하며, 도심 속의 조그만 산사, 본원정사 답사를 마무
리하고 정릉동에 있는 경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내용은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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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5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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