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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신의 대명사이자 최영과 더불어 고려의 마지막 보루이던 포은 정몽주 선생묘소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고려 충신의 상징인 3은의 하나로 경북 영천이 고향이다.
그는 성리학을 연구해 그 기초를 닦았고, 1360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이성계 패거리의 힘이 나날이 커져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며

고려 왕실을 붙들다가 1392년 개경 선죽교에서 태종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살해되었다.

그가 피살된 이후, 개경 인근 풍덕군에 임시로 묘를 썼다가 고향으로 이장할 때, 용인 풍덕천에

이르자 갑자기 명정이 바람에 날라갔다. 그를 추적하니 바로 지금 묘소에 떨어져 있어

하늘의 뜻으로 여겨 이곳에 묘를 썼다고 전한다.

이성계패거리에게 협조하지 않은 적이었지만 그의 나라를 위한 충성심은 본받을만하여

조선 왕조에서는 그를 두고두고 충신의 대명사로 우려먹었으며, 무덤도 거의 왕족의

묘역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 건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없앴지만 그의 일편단심 충성심 때문에 그를 충성의 화신으로 우상화한 것이다.

즉 조선왕조의 신하들도 그를 본받아 왕실에 영원히 충성을 바칠 것을 주문한 것이다.

 

* 백로가 - 정몽주의 생모가 지었다고 전한다.

* 단심가 - 고려를 위해 죽겠다는 충성의 일념

 

* 정몽주 묘역 연못

 

* 정몽주 일가 속의 조그만 연안이씨의 선산, 저헌 이석형 묘

저헌 이석형(1415~1477)은 연안이씨 집안으로 정몽주의 증손녀 사위이다.
이석형이 정몽주 집안 선산에 묻히게 된 것은 그의 처인 정씨(정몽주의 증손녀이자 정보의 딸) 덕이다.
이 자리는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가 봐둔 묘자리였는데, 이석형에게 시집간 딸이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두자 애석한 마음에 그 자리에 딸을 안장했고, 1477년 이석형이 죽자 부인묘에 합장했다.
속설로는 정씨부인이 정보의 묘자리가 대단한 명당 자리임을 알고 그 자리를 시댁에 주고자

야음을 틈타 묘자리에 연못물을 퍼날랐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물이 나오면 무덤을 쓰지 않는 바,

정보는 그 자리를 포기하고 다른 곳에 묘를 썼으며, 정씨부인이 기존 자리를 시댁에
달라고 문중에 청해 얻었다고 전한다. (어디까지나 속설임)
이석형 묘자리가 대단한 명당자리라 그의 후손에서 고위 관료가 수십명이나 배출되었다.
어찌보면 며느리 덕분에 딱히 별볼일이 없던 이석형 집안이 복을 받은 셈이다.

 

왜정까지만해도 정몽주묘역 주변은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묘역이 사이좋게 공존했으나

왜정 때 두 집안이 묘자리를 두고 재판을 벌여 영일정씨가 승소하면서

연안이씨 묘역은 이석형과 일부 묘소를 제외하고 대부분 문수산 남쪽(정몽주 묘역은 북쪽임)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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