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251BD41500E2BB703)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중성문(中城門), 노적사(露積寺)입구, 중흥사(重興寺)터 를 거쳐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를 찾았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후 400년 동안 마땅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에는 경 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 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렀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조촐해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던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 이 사찰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寮舍)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한참 후배인 인근의 노적사보다 상당히 빈약해 노적사의 부속암자로 착각하기 쉬울 정도이다. 하지만 오랜 사찰에 걸맞게 원증국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씩이나 간직하 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 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오래된 귀룽나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4발 수레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첩첩한 산중이라 비록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 한 곳이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 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깊은 산골이라 산새도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독종인 번뇌라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무거운 번뇌와 잠시 이별하고 싶을 때 며칠 조용히 묻히고 싶은 곳이다.
※ 북한산 태고사 찾아가기 (2015년 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 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산성 내부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또는 서암사터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 태고사(약 5km, 1시간 40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에 봉성암, 태고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음 * 매년 음력 9월 22일에 보우대사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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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193E34014B77E3F853) ▲ 겨울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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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에 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 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60년, 키 23m, 허리둘레 2.3m에 이르며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제국 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하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소쩍새가 울 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3398E3C500E2BB737)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비각(碑閣)
![](http://3.bp.blogspot.com/-LG3pIGYMq00/VLqxN0F-NEI/AAAAAAAAHXU/Ic4FDXVLIdw/s1600/Q5Qp8ZjQN_h2kzCb1LruMw.jpg)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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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 물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홍 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암사 (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문 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와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 았으며.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講說)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소환하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 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 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 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제하여 속리산(俗離山)의 어느 암자 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 문인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려 3은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 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 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봉안했다. <사나사 답사기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http://1.bp.blogspot.com/-62l-QHpUD-k/VLqxMdvAhqI/AAAAAAAAHXE/gWDHwt4rLQ0/s1600/61F1uznLJJG_6lONnXLsjw.jpg)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는 700년의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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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eyewon.co.kr/py/2010/SUC30144.JPG) |
◀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건했 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2009년에 입적했는데, 태고사 창건주의 비 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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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828673F500E2BB71C) ▲ 원증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태고사 산신각(山神閣)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특이하게도 돌과 바위로 건물을 지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3E34014B77E3F854)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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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내부는 현대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 들의 희생으로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흑백모드였으나 나중에 채색을 하여 칼라모드가 되었다. 색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童 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연세가 지긋하게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 행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었다. 그래서 먹 고 살고자 저 산신의 비서로 취업한 것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7284C34500E2BB815) ▲ 석종형(石鐘形)부도 3형제 산신각 뒤쪽 숲속에 숨어 있는 석종 모양의 부도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색의 무게를 간직하며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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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사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국 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사리가 담긴 부도로 그가 입적(入寂)하 자,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저 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http://www.yeyewon.co.kr/py/2008/500-1.jpg) ▲ 꽃무늬로 정신이 없는 원증국사탑 기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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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의 밑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대사에 대한 신뢰와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원증국사부도만이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의 탑을 그 밑 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고사 발전에 크게 기 여했던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원증국사탑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 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
![](http://www.yeyewon.co.kr/py/2010/SUC30164.JPG) ▲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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