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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인왕산 환희사 (인왕산 북쪽 능선) '

▲  환희사 경내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서
울 시내 절 투어에 나섰다. 이번에는 절을 좋아하는 후배 2명이 동참을 하였는데, 오전 11
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제일 먼저 정릉동(貞陵洞)에 자리한 오래된 절, 봉국
사(奉國寺)의 문을 두드렸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과 탱화를 중심으로 경내를 마음껏 누비며 온갖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과 떡, 전으로 이루어진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다듬었다. 그런 다음 인왕산 환
희사로 이동하고자 110번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홍제동(弘濟洞)으로 이동 중, 홍제천(弘濟
川) 변에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을 내민 옥천암(玉泉庵)이 진하게 손짓을 하자, 계획에
도 없던 그곳에 잠시 발을 들였다. 거기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느라 분주한 고려시대 백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친견하고 두툼한 떡(백설기)을 하나씩 쥐어들며 잠시 잊었던 환희
사로 이동을 재촉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참 애매한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도 참 어정쩡하여 때이른 무
더위를 무릅쓰고 인왕산을 더듬기로 했다. 옥천암 서남쪽 유원하나아파트에 인왕산으로 넘
어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타고 북쪽 능선(기차바위 북쪽)을 거쳐 서남쪽으로 내려가
면 1시간 이내에 환희사에 도착한다.
다만 그렇게 가려면 해발 280m까지 올라가야 된다. 절을 목적으로 왔는데, 뜻하지 않게 강
제 등산을 하게 되니 후배들은 버스를 타고 가자며 정색을 한다. 허나 내 마음은 석불처럼
굳어졌다. 산과 산사(山寺)는 물과 물고기와 같은 사이인데 산을 좀 타면 어떠하리~! 몸은
좀 힘들어도 보람은 그만큼 클 것이며 청정한 산내음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환희
사는 산속에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더라도 산을 좀 올라가야 된다.


 

♠  인왕산을 넘다 (개미마을, 홍심약수터, 옥동약수터)

▲  신록의 도화지를 이룬 인왕산 산길
(유원하나아파트에서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산길)


옥천암과 가까운 유원하나아파트는 인왕산 북쪽 끝 세검정로 길가에 자리한 아파트이다. 천박
한 개발의 칼질이 인왕산 북쪽과 서쪽, 남쪽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면서 성냥갑 아파트를 잔뜩
지어올려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인왕산의 시야를 가리며 농락한다. 특히 통일로로 이어지는 의
주로(義州路) 동쪽은 더욱 심각해 여유 공간도 없을 것 같은 가파른 산자락을 헤집고 온갖 아
파트를 지어놓아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 굳이 인왕산을 희롱하며 저렇게 잔뜩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이 땅의 개발은 언제나 개념을 탑재하고 바른 길을 갈지 정말로 답이
없다.

유원하나아파트 남쪽에 인왕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조촐한 운
동시설과 공원이 나온다. 여기서 용천약수터를 거쳐 기차바위 능선으로 가려고 했으니 길을 잘
못들어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그곳을 강제로 거치
게 되었다.
개미마을로 가는 길은 둘레길마냥 느긋하다. 게다가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를 보
듬으며,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아비규환 같은 속세에 우리를 보고
저리 웃어주는 존재는 거의 흔치 않은데 이렇게 대자연의 위로를 받으니 마음도 편해진다. 그
런 길을 10분 정도 가면 개미마을의 동쪽 부분에 이른다.


▲  벽화마을의 성지(聖地)로 거듭난 개미마을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과 더불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은 인왕산 북서쪽 자
락 100m 고지에 터를 닦은 산동네(달동네)이다. 허나 도시의 흔한 달동네와 달리 숲이 무성한
산자락에 감싸여 있어 완전 산골 벽지마을 같다. 거기에 뻐꾸기가 뻐꾹뻐꾹~♪ 노래하니 그런
기분은 더해져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내 자신도 햇갈려 순식간에 강원도 산골 마을로 순
간이동을 당한 줄 알았다.

이곳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지하철 3호선 홍제역과 가깝고, 서울 도심
이 바로 지척이다. 그런데도 이런 산골 마을이 도심 턱밑에 자리해 서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
고 있으니 이런 것을 보면 서울도 참 넓긴 넓은 모양이다. 서울하면 대부분 키다리 빌딩과 사
람, 수레로 뒤엉킨 복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으로 알지 이런 시골 분위기는 생각을 못한다. 그
게 바로 서울에 대해 가지는 흔한 오류이다.

개미마을은 약 15,000평 규모로 200여 가구에 4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
까지는 아니고 6.25 이후에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천막을 걸치고 살면서 자연
히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옹기종기 천막을 이룬 마을의 모습이 인디언마을과 비슷하다
고 하여 '인디언촌'이라 불렸는데,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리 불렸다
는 설도 있어 바깥에서 이곳을 썩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런 이름이 싫어서 적당한 이름을 물색하다가 1983년 개미마을을 이름으로 삼
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개미를 닮았다고 하여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며, 애당
초 마을의 이름은 없었다.

이곳은 가난하고 고된 동네로 서민의 애환과 나날이 격해지는 빈부격차의 현실에 한숨을 쉬게
만드는 곳이다. 독거노인을 비롯해 일용노동자와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주류를 이루며,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힌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마을 위쪽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으나 여느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경사가 각박해 눈이 쌓이면 통행에 꽤 애를 먹는다. 그리고
연탄을 연료로 많이 사용하여 색깔이 벗겨진 살색 연탄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문화촌에서 들어오는 북쪽 골목(세검정로4길)길이 전부
이다. 그 길로 마을버스와 차량들이 오간다. 마을버스는 산간 벽지처럼 서너 시간에 1대 정도
들어올 것 같지만 거의 10분 간격으로 들어와 접근성은 양호하며, 요즘은 좀 살만해졌는지 차
량을 가진 집도 좀 늘었다. 북쪽 외에는 3면이 죄다 산으로 막혀있으며, 인왕산 산길로는 인왕
산 정상이나 환희사, 홍은동 유원하나아파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 2자가 속세에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요즘 지나치게 유행을 타고 있는 벽화마
을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이곳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고자 서대문구청과 금호건
설이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에 성균관대와 건국대, 추계예술대, 상명대, 한성대의 미술 전공 학생들이 몰려와 각기 다른
5개의 주제로 51가지의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한 달동네가 화사한 그림 마을로 변신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던 마을 사람들도 그림판이 된 마을에 싱글벙글 웃었고, 벽화마을로 크게 언론
을 타자 마을 주민과 약간의 인왕산 등산꾼이 고작이던 이곳에 사진쟁이와 관광꾼들의 발길이
늘면서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성장했다. 또한 이곳과 동대문 이화(梨花)마을을 시작으로 많은
산동네와 시골 마을이 이를 따라하면서 전국적으로 너무 쓸데없이 벽화마을이 유행을 타게 된
것이다.
허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임에도 사진 본능에 충실해 갖은 민폐를 부리는 사진쟁이가 적지가 않
고, 어렵게 사는 그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며 무시하는 이들도 많아 마을 사람들과 적지 않은
충돌이 생긴다. 마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시도한 벽화마을의 폐해인 셈으로 단순히 외지인들
이 들어와 그림만 그렸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벽화만 두룬 산골 분위기 그
윽한 마을일 뿐이다. 하여 뭣도 모르는 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와 '이게 전부야?' 실망
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진쟁이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할만한 꺼리가 없으니 단
지 사진만 찍고 가거나 인왕산을 오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여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리 이익이 되
질 않는다.

이렇게 관광객과 마을 주민과의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줄이려면 마을을 개량하고 주민들도 이
득을 보도록 해줘야 된다. 예를 들면 도심과 가까운 잇점을 이용하여 1박 머물 수 있는 캠핑장
이나 산골, 농촌마을 체험 현장으로 활용하거나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처럼 농작
물과 원예물을 재배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인들을 초대하여 북촌(北村)처럼
갖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예술마을로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미마을은 아직 개발 계획은 없다. 허나 벽화마을로 뜬 적이 있으니 졸부들의 마수를 경계해
야될 것이며, 마을을 둘러볼 때 사진을 찍는다며 허락도 없이 집에 침투하거나 사생활을 침해
하는 등 호들갑을 떠는 행위는 삼가해야 된다. 그리고 개미마을 하나만으로는 50% 부족하니 인
왕산 등산이나 인근 부암동 답사를 겯드리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홍제동 개미마을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1,2번 출구 중간)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면 개미마을까지 들
  어간다.
* 서울시내버스 110, 153, 7018, 7730번을 타고 문화촌현대아파트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
  으로 환승 또는 도보 15분 (평창동이나 부암동 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길 건너 정류장에서 서
  대문 07번으로 환승)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일대


▲  개미마을 동쪽 부분

우리는 개미마을의 동쪽만 스치듯 지나갔다. 이런 인위적인 벽화마을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
문이다. 강원도 산골 같은 한적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히 벽화를 보
자고 또 오는 것은 싫다.

개미마을 동쪽 끝에는 홍심약수터가 있다. 처음에는 홍삼약수터로 알고 '이름이 참 건강하네~~
물에 홍삼의 기운이 있나?' 싶었는데, 이름을 다시 보니 홍심이었다. 받침 하나에 약수터의 이
름과 이미지가 싹 바뀌는 순간이다.
이 샘터에는 인왕산이 베푼 약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가뭄이라 그 양이 시원치 못하다. 수질은
다행히 적합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이 나오는 구멍이 위에 2~3개가 더 있는데, 윗쪽이 아래 보
다 물이 더 잘나온다.

우리는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갈증을 해소하며 두 다리를 잠시 쉬었다. 오후 한참 시간이라
날은 덥고 땀은 약수터를 이룰 정도라 미동도 하기 귀찮았다. 허나 환희사를 목적으로 왔으니
목적은 달성해야 뒷탈이 없다. 그래서 나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홍심약수터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능선에 이른다. 이 능선은 장차 기차
바위 능선으로 변신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고, 그 직전 280m 고지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사방이 뻥 뚫린 능선길로 서쪽으로 개미마을과 서대문구, 은평구가, 동쪽은 부
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자하문고개가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제법 일품이며, 소나무가 매우 삼
삼하여 솔내음이 진동을 한다.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1)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2)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밑에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제동과 홍은동을 비롯하여
백련산(白蓮山) 산줄기와 은평구 일부가 바라보인다.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은동과 홍제동 일대를 비롯하여 산골고개 너머로 은평구와 서울~고양
경계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비슷한 높이로 북악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부암동이 보인다.

▲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서쪽인 홍제동으로 좀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가늘고 가파르게 이어진 산
길로 접어들면 바위로 이루어진 옥동약수터가 나온다.
이곳은 한때 인왕산 서쪽을 대표했던 약수터로 물 뜨는 동네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서대문
구청의 관리 소홀과 약수터를 지키는 노공(老公) 회원들의 감소, 수질의 부적합 판정으로 이제
는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작년 초여름에 발자국을 그은 경험이 있어 길은 훤하다. 이곳에서 계곡을
하나 건너면 조그만 약수터와 큰 바위가 나오며, 그들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6~7분 정도 내려가
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연등을 두른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환희사이다.


▲  전원주택 같은 환희사 외경


 

♠  인왕산 서쪽 자락에 소리없이 안긴 조촐한 산사(山寺),
오래된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한 인왕산 환희사(歡喜寺)

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338m)은 바위로 이루어진 각박한 경사의 암산(巖山)이
다. 시내에서 보면 산이 대개 협소해 보이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가보면 생각 외로 넓어 놀라게
된다. 겉과 달리 속은 깊고 넓은 것이다.

인왕산에서 가장 경사가 각박하고 건물 지을 자리도 없을 것 같은 서쪽 자락에 조그만 비구니
절인 환희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너무 없는 듯 자리해 있어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도 그만큼 등잔 밑이 어두웠다.

이 절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보의 바다로 자부심이 대단한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곳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다. 하여 누가 언제 창건하고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는 절에 가서 묻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그만큼 법등(法燈)의 역사와 인지도의 끈이 매
우 낮은 것이다.
절이 있기 전에는 부근에 무당이 굿을 하거나 사람들이 수행을 하는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그
인근에 터를 닦고 환희사를 세워 지금은 인왕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했다.

나는 오래된 절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소장 문화유산이 있거나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같은 경
우를 제외한 80년도 안된 절에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환희사에 주목을 하고 초파
일에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 무려 2점이나 있기 때문으로 그들의 존재
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이나 인왕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
며, 20세기 중반 어느 때에 외지에서 모두 업어온 것이다. 역사가 짧고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환희사에서는 이들 불상을 후광(後光)으로 삼아야 장차 절을 꾸리기가 수월하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용화전, 요사로 쓰이는 건물 3동이 전부로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 일주문
(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 경내는 작은 편으로 건물 3동에 딱 걸맞는 크기라 두 눈에 쏙
넣고 봐도 부담이 없다.
경내 북쪽과 동쪽, 남쪽은 경사가 급하며, 서쪽으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닦여져 있다. 절 주변은 속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울창해 산사의 기운을 더해주
며 남쪽에 조촐하게 계곡이 흘러간다.
이곳은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아기자기하다. 여인들의 공간이다보니 이쁘게 꾸
며진 것이다. 경내 곳곳에는 그들의 손맛이 담긴 온갖 귀여운 인형과 장식물이 놓여 있고, 뜨
락은 산뜻하여 먼지 하나 앉을 틈이 없다. 게다가 찬불가나 불교 관련 음악이 아닌 클래식 같
은 잔잔한 음악을 주로 틀어놓아 색다른 기분을 건넨다.
또한 다른 현대 사찰과 달리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 평일이나 주말 낮에 오면 종종
차 1잔 얻어마실 수 있으며, 편안한 기분으로 절을 둘러보거나, 쉼터에서 쉬거나, 예불을 보거
나 사진 출사를 하게끔 배려해 주는 착한 절이다.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신경
이 다소 예민할텐데도 말이다. 허나 그렇게라도 해야 간접적으로나마 절의 존재를 조금씩 알릴
수 있다. 인지도가 누적이 되야 사람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수입도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18시 이후에는 초파일 등의 경우가 아니면 대문을 걸어잠구며, 18시까지는 밖으로 나가줘
야 된다. (비구니가 대문을 닫으니 나가라고 함) 연약한 비구니들의 공간이고 문화유산을 지키
그렇게 하는 모양이니 그거 외에는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절 밑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장에서 대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요사(寮舍)이다. 이 건
물은 경내를 가리며 자리해 있는데, 그 흔한 기와집이 아닌 일반 주택으로 되어있어 겉으로 보
면 절집이 아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이다. 경내를 두른 연등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곳을 절로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상식 밖에 요사를 지나면 뜨락이 나오면서 그보다 한층 높은
곳에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그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용화전이 나오니 이들은 다행히 기와
집이라 나름 절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절이 작고 조촐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머무는 시
간은 조금 길어진다. 작년에도 인왕산 정상을 찍고 홍제동으로 넘어오면서 이곳을 들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용화전에 담긴 석불입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갈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 초파일에 인연을 지은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왕
산을 넘어서 왔다. 그들 불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 절
의 존재를 길이길이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이렇게 정갈한 비구니 사찰을 알게 되니
나로써는 고마울 따름이다.

절에 들어서니 오후 행사가 막 끝난 터라 경내가 꽤 부산하다. 뜨락 서쪽과 정자에는 가족 단
위 신도와 산꾼, 노공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10~20대로 이루어진 행사 요원(학생 신도들)들은
행사 뒷처리와 먹거리를 파느라 바쁘다. 이곳 이전에 갔던 봉국사와 옥천암은 먹을거리를 무상
으로 제공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공양이나 떡은 꿈도 못꾼다. 게다
가 판매 가격도 속세만큼이나 야박하니 아무래도 초파일 특수를 노려 재정을 채우려는 모양이
다. 부처와 관음보살의 뜻에 따라 중생을 위해야 될 절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것도 썩 좋
은 것은 아니다.


▲  대문 주변에 자리한 5층석탑
이 석탑은 왜정 때(또는 1950~60년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2층 지붕돌과 3,4,5층 몸돌에는 고색의 때가 약간 피어있다.

▲  연등이 춤을 추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뜨락 북쪽에는 석불입상을 세우고 서쪽에는 7층석
탑을 세웠는데, 그 주위에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널려 있어 사진기를 흥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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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사 요사 -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다.

▲  인자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석불입상과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
대문 앞 5층석탑과 조금 비슷한 모습이다.

▲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상

▲  돌 위에 얹혀진 인형들

▲  이쁘게 치장된 뜨락 화단

▲  오리 솟대(왼쪽)와 인형의 만남


▲  환희사 대웅전(大雄殿)

▲  환희사 목불좌상(아미타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7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절 규모에 걸맞게 조촐한 모습이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아주 작은 관음보살과 법륜(法輪
)이란 동그란 바퀴를 두광(頭光)으로 두른 지장보살이 자리해 소위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고, 좌우 벽에는 신중탱(神衆幀), 산
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 등의 탱화가 빼곡히 자리하여 삼성각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불단에 앉아 넉넉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목불좌상, 그는 원래 연천(漣川)에 있던 심
원사(心源寺)에서 넘어온 것이다. 심원사는 연천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던 절로 6.25 때 파
괴되자 그곳에 있던 숱한 불상들이 고향을 잃고 외지로 흩어졌다. 이 목불좌상도 그중 하나로
환희사에서 어떻게 수습하여 이곳의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
이 불상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로 17세기 중반 전후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며, 덩치는 작은 편이나 그를 협시(夾侍)하는 좌우 불상이 그보다 훨씬 작아 여기
서만큼은 제법 커보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로 그 사이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두 눈
은 명상에 잠긴 듯 포근히 감겨 있다. 눈썹 사이에 푸른 백호가 찍혀있고. 작은 코는 오똑 솟
아있으며, 조그만 입술에는 미소가 넉넉히 드리워져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수염이 나있고,
볼살은 별로 없는 작고 갸름한 얼굴로 작은 얼굴을 선호하는 젊은 현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다. 볼살이 절제되어 있으니 볼살이 많은 불상이나 포대화상(布袋和尙)보다는 더 미남으로 보
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복잡하다는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
나를 취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는 중부지방 목불상(木佛像)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6년 9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의 지위를 얻었다.

▲  대웅전 우측의 불화들
(영산회상도, 신중탱, 독성탱 등)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용화전


▲  환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8호

대웅전 좌측에는 용화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안에는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예전 명칭은 판석부조불입상(板石浮彫佛立
像)으로 발음하기도 참 어렵다.

이 석불은 두꺼운 판석(板石)에 새긴 입상(立像)으로 마애불(磨崖佛)과도 다소 비슷하다. 고려
석불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앞서 목
불좌상과는 달리 신체 비례와 조형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 역시 다른 곳에서 가져왔으며, 고향
이 어디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여기서는 막연히 미륵불(彌勒佛)로 심
심치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판석 위에 새겨진 석불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고색의 기운도 별로 느껴지지 않아 근래 것으로 착
각하기도 쉽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다 씻겨가거나 눈과 코, 입의 위치만 확
인할 수 있는 정도이며,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머리 뒤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동그란 두광이 그를 밝혀주며, 몸에는 양 어깨를 가린 법의(法衣
)가 입혀져 있다. 가슴 밑은 얼굴처럼 닳은 부분이 많고, 몸 뒤에는 신광(身光)이 묘사되어 있
다. 석불입상 옆에는 조그만 귀여운 석상이 있는데, 서로 피부가 비슷해 같은 셋트임을 느끼게
한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이 아닐까 살짝 점쳐본다.


▲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지나치게 큰 정병(政柄)을 두 손에 쥐어들며 명상에 잠겨있다. 저 병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를 졸라서 1잔 받아보고 싶다.

▲  환희사의 조그만 극락, 대웅전 우측 정자 쉼터
누구든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수 있는 쉼터로 간식도 먹을 수 있게끔
조그만 탁자도 닦여져 있다.

▲  정자에 걸린 현판과 음악을 흘려보내는 조그만 스피커의 위엄~~

▲  정자 뒷쪽 풍경
그림 같은 산책로가 수풀 사이로 나 있으나 그 길이는 인생처럼 짧다.

▲  정자에서 바라본 경내 뜨락

▲  환희사를 뒤로하고 다시 속세로 컴백하다

초파일 특수로 간만에 북새통을 이룬 환희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 공간이 늘어간다. 음료
수도 거진 팔았는지 이내 장사도 접고 행사를 돕고 정리하던 앳된 여인네들도 일부만 남았다.
손바닥만한 이곳에서 목적한 2개의 불상을 질리도록 보고 정자 쉼터에서 지친 두 다리를 쉬고
16시에 그곳을 뒤로하며 속세로 길을 향했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길 옆에는 인왕산에 몇 안되는 조그만 계곡이 온
전한 모습을 보이며 흘러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풍부해 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던 곳으로 이 골짜기를 '큰절골', 남쪽 청련사 부근 계곡을 '작은절골'
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계곡은 큰절골이라 부르면 되나 요즘에는 '환희사계곡'으로도 불린다.
절까지 길을 닦느라 계곡 북쪽이 좀 깎이거나 콘크리트에 묻힌 옥의 티가 상당하지만 계곡이
맑은지 동네 아이들이 냇물을 뒤집으며 수중 동물을 탄압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환희사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인왕산현대아파트와 홍제원현대
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길은 진정을 되찾으며, 5분 정도 더 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
온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의주로와 홍제역으로 바로 이어지는데, 마을버스를 탈 것도 없
이 5분 더 발품을 팔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가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을 겯드린 환희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
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하얀 암반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환희사계곡(큰절골)

※ 인왕산 환희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
  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3번을 타고 인왕산현대아파트117동 종점에서 내려 도보 10분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1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인왕아파트교차로에서 우회전)
* 환희사는 보통 18시까지 개방한다. 그 이후는 들어가지 못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2동 산1-1 (☎ 02-735-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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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로 나오
   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5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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